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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것과 받는 것(로마서 8:31~32)
신앙 생활은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감사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평소에 감사할 줄 아는 신앙인은 높은 신앙의 수준을 가진 사람입니다. 추수감사절과 같은 특별한 절기에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1년 12달, 삶의 매순간 감사생활을 하는 사람이 바로 성숙한 신앙인입니다.
호텔에 가면 모든 방문을 열 수 있는 ‘마스터 키’라는 것이 있습니다. 감사는 삶의 ‘마스터 키’와 같습니다. 우리가 삶에서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께 감사하면 그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감사는 이처럼 인생에서 좋은 길로 가는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건강이 악화된 사람에게 감사가 회복되면 건강도 회복될 것입니다. 사업이 잘 되지 않는 사람도 감사하기 시작하면 사업이 번창할 것입니다. 가정불화를 겪고 있는 분들이 감사하면 다시 가정의 행복이 회복될 것입니다. 감사는 이처럼 한 사람의 신앙의 수준을 결정할 뿐 아니라 인생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열쇠입니다.
감사가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인생이 ‘주는 것과 받는 것’이 오고 가는 호혜적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늘 항상 내 자신이 남에게 많이 주는 사람인지 받는 사람인지 자문해야합니다. 세상에는 타인에게 많이 주는 사람이 있기도 하고 타인에게 많이 받는 사람이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은 이 ‘주고받는 것’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성공과 실패가 달려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는 것과 받는 것’에 대해 성숙하게 처신해야만 성공적인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주는 것과 받는 것이 중요한 걸까요?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주는 것과 받는 것’이라는 호혜적 관계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적 시스템이 주고 받는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는 것과 받는 것’의 오고 가는 관계를 몇 가지로 유형화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유형은 주는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타인에게 적게 받는 대신에 주는 것을 즐깁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6:38에서 ‘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예수님께서는 평소에게 남에게 주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준만큼 하나님께서 풍성히 갚아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라는 표현이 참 재미있습니다. 이 표현이 묘사하는 것을 자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꾹꾹 눌러 담은 후에, 더 담을 자리가 없으니깐 그릇을 흔듭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한 번 꾹꾹 눌러 담습니다. 그리고 다시 채운 다음에 비로소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평소에 남에게 많이 주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꾹꾹 눌러 담고, 흔들어서 더 채워 담아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 유형은 절대 남에게 주지 않는 사람입니다. 스크루지 영감처럼 남에게 받을 줄은 알면서도 베풀 줄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이 유형에 속합니다. 대게 이런 사람들은 함께 식사를 하러 가면 식대를 내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나면 먼저 신발장 앞에 가서 운동화 끈을 30분 동안 매면서 교묘하게 다른 사람이 계산할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들이 바로 이 유형에 속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따라서 ‘평생 받기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물질적인 측면에서 뿐 아니라 정신적 측면에서도 받기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에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종은 주인에게 만달란트를 빚졌습니다. 만달란트는 어림잡아 2000억쯤 되는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입니다. 그런데 종은 이 돈을 갚을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종은 주인에게 달려가 자신의 빚을 탕감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주인은 관대하게도 종의 빚을 모두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종이 집으로 돌아와 보니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지금 돈으로는 넉넉잡아 천만원 정도를 빚진 사람이 찾아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빚진 사람은 종에게 자신이 백 데나리온의 돈을 갚은 능력이 없으니 빚을 탕감해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런데 종은 ‘이 돈을 어떻게 탕감해 주냐. 관공서에 당신을 고발할 테니 빨리 내일까지 모든 빚을 갚으라’면서 빚진 사람을 나무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는 바로 ‘용서’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힘으로는 갚을 수 없는 큰 죄를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음에도 비유 속 빚을 탕감 받은 종처럼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에는 인색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위의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께 용서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용서 받을 줄만 아는’사람을 꼬집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타인에게 죄를 지을 때 용서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면서도 자기에게 피해를 준 사람은 용서하려 하지 않습니다. 용서만 받고 용서는 주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어렸을 때부터 부모로부터 사랑을 너무 과도하게 받은 사람은 자라나면 이기적이 되기 쉽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너무 이기적이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사랑을 주지 않습니다. 남에게 사랑을 받지만 남에게 사랑을 주지는 않습니다. 받기만 하고 주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은 어디에서든 사랑을 받기 원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사랑을 주지 않는 이기적인 사람들도 바로 예수님의 비유에서 빚을 탕감 받은 종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사도행전 20:35에서 바울 사도는 예수님께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셨다고 전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비유 속 인색한 종과 같이 되지 아니하고 남에게 후히 ‘주는 자’가 되어서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복을 충만히 받아야 할 것입니다.
셋째 유형은 받기 위해서 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타인에게 주긴 하지만 나중에 더 많이 받으려고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경우에 ‘주는 것’은 일종의 쇼맨쉽입니다. 이러한 유형의 ‘주는 것’을 우리는 정치인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정치인들은 선거철만 되면 고아원과 양로원에 찾아갑니다. 그렇게 고아원과 양로원에 가서 정치인들은 꼭 금일봉을 전달하고 그 곳에 있는 분들과 사진을 찍습니다. 정치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유권자들의 마음을 얻고 그들의 표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정치인들의 ‘주는 것’에는 더 많이 받기 위한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34은 이와 같이 ‘받기 위해서 주는 것’에 대해 이렇게 평가합니다.
누가복음 6: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만약 우리가 받기 위해서 준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숨겨진 의도를 아실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을 받을 수 없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더 많이 받기 위하여 준다는 것은 그 의도성 때문에 하나님께 축복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주는 자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말씀은 미래의 보상을 생각하지 않고 그대로 주는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넷째 유형은 주는 것인지 받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입니다. 자신이 남에게 받으면서도 주는 것처럼 위장하는 사람들이 이 유형에 속합니다. 전에 제가 캐나다에서 목회하던 교회에 있을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캐나다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환경보호입니다. 제가 담임하던 교회의 성도 수가 늘어가서 교회를 건축하게 되었는데, 시청에서 공무원들이 아주 심하게 관리감독을 했습니다. 시청에서 나온 공무원들은 가장 먼저 교회를 지을 부지에 생태학적으로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총 40번이 넘게 땅을 팠습니다. 그리고 나서 공사를 담당하는 사람에게 공사장에서 쓰는 기기의 소음을 완충하는 장치를 설치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교회 근처에 연어가 산란을 하기 위해서 거슬러 오르는 시냇가가 있었는데, 너무 큰 소음을 들으면 연어가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에 꼭 방음장치를 설치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대체 인간이 연어를 위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연어가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인가?”
또 캐나다에서는 컴퓨터를 오래 쓰면 컴퓨터를 분해하고 친환경적으로 처리하는데 필요한 비용을 추가적으로 내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은 한 교인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자신의 집에 컴퓨터가 세대정도 있는데, 교회에서 필요하면 가져다가 쓰라고 이 교인은 말했습니다. 저는 제안을 수락하고 흔쾌히 컴퓨터를 가져왔는데, 알고 보니 컴퓨터가 10년은 넘은 아주 오래된 것들이었습니다. 도저히 컴퓨터가 낡아서 쓸 수가 없어서 결국 모두 폐기처분해야 했습니다. 저에게 컴퓨터를 ‘주신 분’은 사실 저에게 컴퓨터를 주면서 컴퓨터 처리 비용을 저에게 ‘받아 간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교인은 생색을 내고 명분을 갖춰 컴퓨터를 주었지만 그 내용을 보니 오히려 그 교인이 받고, 저희는 주는 꼴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깝게도 이런 일이 우리의 삶에는 참 많이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이 일어날 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누가 진짜 혜택을 보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어떤 일을 함으로써 내가 타인에게 혜택을 주는 것인지 타인이 나에게 혜택을 주는 것인지 잘 판단해 보아야 합니다. 만약 이 판단이 정확하지 못하다면 우리는 받았지만 사실상 주는 결과를 맞이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다섯째 유형은 주면서 감사하고, 받으면서 불평하는 유형입니다. 어떤 분은 자신이 주면서 오히려 받는 사람에게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많은 분들이 저에게 식사를 대접하면서 이렇게 말하십니다. ‘목사님 저에게 이 식사를 대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감사해야 할 사람은 식사를 대접받는 제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분들은 대접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사하십니다. 이런 분들은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잘 알고 있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오히려 받으면서도 불평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생활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물과 만나, 메추라기까지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끊임없이 불평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받으면 받을수록 불평이 심해져 갔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을 보는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삶의 모든 필요를 해결해주심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원망하고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인해서 하나님은 마음아파 하셨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포도원 품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포도원 주인이 마을에 나갔는데, 일련의 실직자 무리를 발견했습니다. 주인은 이들을 불쌍히 여겨서 품꾼으로 삼고 포도원에서 일하게 한 뒤 일당을 주었습니다. 주인은 9시, 12시, 3시, 5시, 총 네 번씩이나 품꾼들을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 주인은 아침 9시에 온 사람이나 오후 5시에 온 사람이나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일당으로 주었습니다. 일견 불공평해 보이지만 사실 품삯을 얼마로 할지는 주인 마음에 달린 것입니다. 실직자였던 품꾼들은 오히려 자신들을 불러다가 일하도록 해준 주인에게 감사해야할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늦게 온 일꾼이나 일찍 온 일꾼이나 똑같이 돈을 준다는 소식을 듣고 일찍 온 품꾼들은 불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들은 불평하기 시작한 것일까요? 그들이 자신이 받은 것에 대해 만족할 줄 모르고, 남의 것과 자신이 받은 것을 비교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받은 것에 대해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받은 것 자체 대해서 감사하면 만족할 수 있는 데, 자꾸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면 만족감은 줄고 불평만이 늘게 됩니다. 결국 비유 속에 등장한 받았음에도 불평하는 품꾼들에게 주인으로서 해야 할 일은 그들이 받은 것을 빼앗는 일일 것입니다.
여섯째 유형은 주는 것과 받는 것이 똑같은 유형입니다. 대게 일본인들이 이러한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일본인들은 누군가에게 은덕을 입었는데 자신의 대에서 그 은덕을 갚지 못하면 아들에게 유언을 남겨 그 은덕을 갚을 것을 당부합니다. 이러한 유언은 3세대까지 전해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은덕을 반드시 갚고자하는 가치관을 가진 일본인들은 공짜를 싫어합니다. 그렇기에 일본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모두 ‘공짜’이기 때문입니다. ‘공짜’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일본인들에게 공짜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또 일본인들은 남에게 폐를 끼치기 싫어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가치관의 바탕에 깔린 기본정신은 ‘나도 안주고 너도 주지 않아도 된다’라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정서입니다. 서로 불필요하게 폐를 끼치지 않고 심지어는 은혜도 끼치지 않고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 일본인들의 가치관입니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일본인들이 그렇다고 해서 은혜를 갚을 때 상대방에게 자신이 받은 것 보다 더 주지 않는 다는 사실입니다. 일본인들은 딱 받은 만큼만 상대방에게 다시 되돌려줍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이렇게 일본인처럼 받은 만큼 갚아주는 사람이 종종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기독교 신앙은 일본인들의 ‘받은 만큼 주는’ 가치관과 아주 대조적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받지 않으시고 아무런 대가없이 은혜를 주셨습니다. 사람은 항상 주면 준만큼 상대방이 갚기를 기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기대를 가지지 않고 아낌없이 우리에게 주시는 분입니다.
일곱째 유형은 자기가 준 것만 기억하고 자기가 받은 것을 잊어버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받은 것은 쉽게 잊는 반면 자신이 준 것은 반드시 기억합니다. 결국 이러한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유형에 속한 사람들의 좌우명은 ‘준 것은 돌에 새기고 받은 것은 물에 새긴다’입니다. 예를 들면 어린 조카가 어렸을 적에 학비로 어려움을 겪자 금전적으로 조금 도와줘 놓고 그 조카가 성인이 된 후에도, 심지어는 그 조카가 장년이 된 후에도 ‘내가 너를 도왔어’라고 생색을 내는 사람이 이 유형에 속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이 타인을 도와준 것을 그 사람을 만날 때마다 애써 상기시켜 주고는 합니다. 반대로 이 유형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이 받은 것을 아주 쉽게 잊고 ‘오리발’을 내 밉니다.
이 유형에 속한 사람들은 인간관계의 개선을 위해서 자신이 받은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신이 받은 것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할 수 있는 법입니다. 시편 49:20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시편 49:20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이 말씀이 전하는 바와 같이 자신이 받은 것의 ‘존귀함’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사실 짐승도 자신을 길러준 주인의 은혜를 기억합니다. 대표적으로 인간과 아주 친한 동물인 개는 주인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기도 합니다. 일본에는 자신을 사랑해준 주인이 죽자 그가 역무원으로 일하던 기차역에 매일 같이 찾아오는 개가 있습니다. 이 개는 자신의 주인이 언젠가는 올 것이라고 생각해서 평생을 그 기차역에서 기다리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게도 이 유형, 즉 받았으나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가 우리 인간의 보편적인 현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후히 베풀어 주셨으나 우리는 그 은혜와 사랑을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고, 우리가 평안히 살아가도록 건강을 주셨으며,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빚으셨습니다. 우리가 살아갈 수 있도록 필요한 자원을 자연환경 속에 내어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께 받은 것을 깨닫지 못하고, 만족할 줄 모르며, 원망과 불평으로 그 삶을 허비합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부자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부자는 아주 큰 부자였습니다. 너무 쌓아놓은 곡식이 많아서 곳간에 둘 곳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이 부자는 자신의 곳간을 확장해서 그 모든 곡식을 저장했습니다. 그렇게 모든 곡식을 저장하고 나서 부자는 만족했습니다. 자신이 여생동안 먹을 것을 걱정할 것 없이 먹고 마시며 살면 된다는 생각에 부자는 뿌듯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날 밤에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거둬가 버리셨습니다. 부자는 자신의 곳간을 채우는 방법은 잘 알았지만 곳간을 채우는 곡식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부자의 곳간을 채우고 있는 곡식 한 톨 한 톨을 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곡식 위에 비를 내리시고, 햇빛을 비추시고 생육에 적절한 환경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부자는 자신의 곳간을 채운 곡식이 저절로 자란 것이라고 착각했습니다. 교만하게도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일군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하나님께서는 감사할 줄 모르는 괘씸한 부자의 생명을 거둬가셨습니다. 시편 103:2은 이 부자와 같은 실수를 짓지 말 것을 경고합니다.
시편 103:2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사실 저는 이러한 말씀을 묵상할 때, 저의 삶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아주 극적으로 어려운 순간이 많았지만 하나님께서 인도하심으로 모두 그 어려운 순간들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추수감사절이 될 때마다 저를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저도 그래서 시편 103:2에 쓰인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은택’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유형은 전혀 받지 않고 온전히 주기만 하는 유형입니다. 이 유형에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과 은혜가 포함됩니다. 첫째 유형에 속하는 사람, 자신이 주는 것을 즐기는 사람도 남에게 무엇인가를 받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내어주심에는 이러한 받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전히 우리에게 사랑과 은혜를 주길 원하십니다.
로마서 8:32에는 하나님의 온전히 내어주시는 은혜가 아주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이 구절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내어주셨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장 감사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구원에 대한 감사의 기쁨이 우리의 삶에 충만해야 할 것입니다.
예배 때마다 우리에게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에 대한 감사의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그 감사의 기쁨으로 찬양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부족한 나 자신을 용서해주시고, 천국 백성이 되도록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기쁨이 충만한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아들을 아끼지 않고 주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에게 세상의 모든 것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체험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넘치도록 풍성하게 주시길 원하십니다. 그 하나님께 우리에게 드려야 할 것은 감사뿐입니다. 올 한 해 동안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하나하나 세어보면서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나오는 진정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버드대학교 심리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세계적인 조직심리학 교수인 아담그랜트의 이론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의 저서 ‘기브 앤 테이크’는 출간 전부터 <뉴욕타임스>에 커버스토리로 다뤄지면서 폭발적인 화제였습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탁월한 성공을 거둔 사람에게는 세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타고난 재능과 피나는 노력, 결정적인 타이밍입니다. 그러나 아담 그랜트는 재능, 노력, 타이밍 뒤에 숨은 승리의 동력은 ‘기버(giver)’즉 ‘주는 자’가 되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주는 것보다 더 많은 이익을 챙기려는 ‘테이커(taker)’보다, 받는 만큼만 준다는 ‘매처(matcher)’보다, 자신의 이익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기버’가, 더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겸손한 세일즈맨, 말더듬이 변호사, 학생들보다 어린 교수 등 수많은 사례를 찾아서 ‘주는 자’가 결국 승리한다는 것을 논증적으로 보여줍니다. ‘주는 사람’이 되어 “저 사람은 남을 먼저 배려하는 사람” 이라는 명성을 얻으면, 마법같이 끌어 당기는 힘이 생겨서, 그 혜택이 결국은 자신에게 돌아온다고 합니다. 세계적인 천재 학자가 깊은 연구를 통해 발견한 것이 바로 “사심 없이 주는 사람”이 승리자가 된다는 평범한 진리입니다. 이 진리는 이미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20장 35절의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20:35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주님의 말씀에 따라서 남에게 받는 것을 바라기 보다는 먼저 주고, 그로 인한 복을 충만히 누리는 성도가 되어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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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올 한해를 돌아보며, 주님께 감사하고 주신 것에 기뻐하는 시간을 가져야겠습니다.
아멘
아멘
주님의 은혜로 항상 주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해봅니다.
누군가에게 무엇인가 베풀었다면 즉시 잊어야 할것같습니다 준것을 기억하고 있으면 그 반대급부를 기대하다가 기대에 못미치면 불평과 원망이 터져나오더라구요 베풀고 원망하면 베풀지 않음보다 못한것 같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