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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견회 영월 탐방기 2012.10.4
보견회 10월 유적지 탐방은 강원도 영월로 택했다. 작년 가을 문경 예천에 이어 금년 6월에는 전남 구례지역의 사성암과 화엄사를 찾았으니 이번엔 방향을 강원도로 잡았다. 영월은 단종의 한 어린 유배지(청령포)이자 그가 묻혀 있는 곳(장릉)이다. 또 방랑시인 김삿갓 (김병연)의 고향이자 무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김삿갓 시비와 생가터 그리고 무덤이 있는 김삿갓 유적지와 김삿갓 문학관을 찾는다. 방향을 서북쪽으로 틀어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의 하나인 법흥사를 마지막 코스로 잡았다. 가는 길목에 있는 한반도지형이 요즘 매스콤에 많이 소개되어 여기도 시간이 되면 들르기로 했다. 당일코스로선 너무 무리한 것 같지만 욕심을 내 어본다.
추석연휴가 끝나고 첫 출근하는 날이다. 아침 8시정각에 교대앞에서 출발하려던 계획이 교통사 정으로 30분 늦게 출발했다고 연락이 왔다. 죽전 임시정류장에서 5명의 회원이 마저 타니 모두 19명이다. 시간을 단축하려고 김밥을 준비하고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우동을 시켜 아침 요기를 하였다. 김민효 사무총장이 김밥,주류,음료 간식거리, 안주 일체를 준비하여 여행에 조금도 불 편함이 없도록 만반의 준비를 했다. 첫번째로 찾은 곳은 김삿갓 문학관이었다.
김삿갓 유적지와 문학관 우리와 시간약속을 한 현대판 김삿갓 선생이 유적지 계곡에서 기다린다며 연락이 왔다. 버스가 도착한 곳이 문학관이라 이곳부터 보고 그 다음에 유적지로 가겠다며 순서를 바꾸었다. 문학관 앞마당에는 김삿갓 시비와 조각작품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장세원회원이 사진을 열심히 찍고 있다. 전에는 혼자 찍고 설명듣고 하자니 놓치는 게 많았는데 친구덕분에 많은 도움이 된다. 먼저 영상실로 안내되어 방랑시인 김삿갓에 대한 영상물을 예전 유행하던 유행가 '방랑시인 김삿갓'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흰구름 뜬 고개넘어 가는 객이 누구냐~" 노래 2절까지 들으며 감회에 젖었다. 문학관에도 해설하는 분이 있어 작품 하나 하나~ 출생에서 죽을 때 까지의 일생, 그의 가계도 등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이러한 작품들은 1939년 이응수 作의 김림시집(金笠詩集 유고작 456시)에서 나왔다고 한다. 문학관 정문에서 삿갓선생의 묘소가 보인다. 바로 보이는 산은 소백산이고 우측 산이 태백산 이다. 아울러 충북,경북,강원 3도의 접경지이기도 하다.
버스로 1,2분 거리 다리 건너에 있는 김삿갓 유적지로 향했다. 입구에는 큰 돌에 "난고 김삿갓 유적지"라는 표지석이 일행을 반긴다. 향토사학가로 김삿갓의 생애와 발자취를 쫓아 일생을 바친 박영국 선생의 공적비도 보인다. 김삿갓 묘소 앞에 있는 시비동산이다. 작고한 서예대가 여초 김응현 선생과 일봉 서경보 스님이 세운 석비도 시선을 끈다. 길 좌우에 그의 시를 새긴 시 조각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모두 다 읽고 감상하고픈 마음이지만 시간이 없어 몇몇 작품만 카메라에 담고 자칭 "돌아온 김삿 갓"이라는 해설사를 만나러 오른다. 묘소로 가는 길목에 나무로 만든 단칸집이 있어 들여다 보니 삿갓 쓴 노인이 우리를 보고 반긴다. 그는 김삿갓에 빠진 도인으로 자칭 120세라고 소개하며 "돌 아온 삿갓선생"이란다. 옛 삿갓선생의 생가터에 움막을 짓고 살고 있는데 457고지이다. 여기서도 1.8km 산 중턱으로 올라가야 한다. 그는 매일 해설팀이 있으면 이곳으로 내려온다고 하는데 오는 동안 11번이나 도경계를 드나든 다고 한다. 무슨 소린인지 금방 이해가 되지 않는다. 경상북도 충청북도 강원도 세도의 경계가 꼬불꼬불 길을 따라 왔다갔다 하기 때문이다.
김삿갓은 본명이 김병연(金炳淵)으로 안동김씨이며 5세때 홍경래난이 있었고 그의 조부가 당시 선천부사였는데 홍경래에게 투항하는 바람에 역적이 되어 참수 당하고 부친은 남해로 귀양, 그는 노복김성수에 의해 피해다니다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시문학에 뛰어난 그가 20세 때 영월 관풍헌 백일장에서 장원하여 그의 명성을 날렸다. 그러나 모친으로부터 전해들은 조부의 역적행위로 처형된 사실과 장원한 詩作의 내용이 그의 친조부를 탄핵하는 내용이었다는 사실에 조상을 욕보이고 어떻게 하늘을 볼 수 있느냐며 삿갓을 쓰고 22살부터 처자식을 이곳 어둔에 남긴채 방랑생활을 시작하였다. 당시의 썩은 정치,사회상을 해학과 파격적인 詩作으로 어두웠던 백성들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59세에 전남 화순에서 마지막 죽음을 맞았으나 아들 익균이 이곳 노루목으로 이장하여 묘역을 갖추었다고 한다. 현대 김삿갓 선생이 생가가 있는 산위를 보며 다같이 힘찬 함성을 지르며 기를 받자고 했다. 태백과 소백의 양백의 기(氣)를 받으면 한가지 소원은 무조건 이루어 진다고 한다. 지금 살아있는 자손은 72세된 김석동이란 분이 유일하게 제사에 참가한다고 한다. 현대판 김삿갓 선생과 기념촬영을 마치고 다음 일정을 위해 버스에 올랐다.
김삿갓 문확관
김삿갓 문학관 영상실
입구
조각물
김삿갓 시비
자기를 돌아보며~
앞마당에서
난고 김삿갓 유적지 입구에 서 있는 유적비
현대판 김삿갓-난고정에서
현대판 김삿갓 선생과 함께
김병연이 장원급제한 답안지 글/조부 김익순을 탄핵하는 내용
난고선생 주거 유적
점심은 영월 장릉 보리밥집에서 약속시간보다 많이 늦었지만 자주 연락을 취하며 왔기에 우리가 들어갈 큰 방이 준비되어 있었다. 동동주와 손두부가 동이 난다. 배도 고프지만 직접 제조하는 손두부 맛은 일품이다. 예전에 이집에서 먹은 경험 때문에 미리 예약을 할 수 있었고 연휴 다음날이라 다행히 손님이 적었다. 배부를 정도로 마시고 먹고 난 후라 밥을 먹겠나 싶었는데 나물을 넣어 비빈 보리밥은 또 그대로 한그릇을 뚝딱한다. 이날 점심은 오상평 회원이 미리 신고하여 풀 스폰서 하였다. 고맙기 그지없다. 모두 고맙다는 박수를 보냈다.
단종이 묻혀있는 장릉(莊陵) 청령포를 답사한 후에 장릉을 보는 게 일반적인 순서인데 시간이 늦어졌고 식당 바로 옆이 장릉 이라 순서를 바꾸었다. 미리 해설사와 약속되어 있어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어찌나 말을 잘 하는지 그저 탄성이 나올 뿐이다. 세조가 내린 사약을 받고 돌아가신 단종의 능은 1516년 중종 때에야 비로소 왕릉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고 1698년 숙종 24년에 묘호를 단종,능호를 장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당시 영월부사 박충헌이 몰래 단종묘역을 참배하였다는 사연이 적힌 비문, 그리고 호장 엄홍도 의 충절이 정려각에 새겨져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약을 들고 온 왕방연의 시조도 다같이 읊었다. 조선왕릉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는데 영월의 장릉은 다른 왕릉과는 달리 멀리 단종이 죽음을 맞은 이곳에 있고 묘역이 왕릉답지 않게 작다. 망주석에 세호(細虎)가 없는 것도 유일하다. 문인석만 있고 무인석도 안보인는 것도 특이했다. 위에서 내려다 보니 재실로 가는 참도가 ㄱ자로 꺾여있어 독특한 모습이었다. 왕릉의 석물은 호랑이와 양이 있었는데 선조 때 조성한 것이라 한다. 단종부인 왕비 송씨의 묘는 남양주에 있는데 묘호가 사능(思陵)인다. 단종을 그리워 한다는 의미 이다. 그래서 영월과 남양주는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
단종을 따르던 엄홍도와 267명의 신하가 있었고 궁녀들도 단종이 유배된지 또한 1주일뒤 영월로 향했다.단종이 승하한 후 궁녀들은 낙화암에서 투신했다고 하니--애절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왕릉에서 내려와 제사를 모시는 정자각을 비롯하여 장판옥(藏版屋:충신위 32인,조사위 186인, 환관군노위 44인,여인위 6인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엄홍도정려각,박충원 낙촌비각 등을 돌아 보고 단종의 장릉 탐방의 시간을 마쳤다.
단종의 무덤 장릉
정자각
엄홍도 정려각
장릉 앞에서
육지속의 작은 섬 단종 유배지 청령포 8살때 왕세손으로 책봉되었으나 1450년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즉위하여 10살의 나이로 왕세자 로 책봉되었으며 문종이 승하한 후 단종은 12세의 어린 나이로 제6대 왕위에 올랐다. 계유정난 이후 세조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상왕이 되었으나 성삼문,박팽년 등의 단종 복위사건의 발각과 금성대군의 복위사건으로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 멀리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었다. 청령포는 동,남,북 삼면이 물로 둘러싸이고 서쪽 육육봉의 암벽으로 나룻배 없이는출입이 안되 었다. 호장 엄홍도는 남몰래 드나들며 문안을 드렸다고 한다. 6월부터 8월까지 2개월을 거처하다 8월 대홍수로 관풍헌으로 이사한 후 2개월이 지난 뒤 사약이 내려와 결국 죽임을 당했다.
해설사를 보면서 사과했다. 약속시간이 무려 두시간차. 순서를 바꾸었으니 더욱 그렇다. 그래도 자주 연락을 해주어 고맙단다. 예전의 나룻배는 아니고 관광객을 태운 자그만 배는 배가 떠난지 몇분이 안걸려 청령포에 닿는 다. 늘 경로우대로 공짜로 입장이 되어 미안한 마음이 많았었는데 도선료로 할인된 200원이라도 받으니 다소 미안한 감이 적어진다. 우거진 소나무들이 울창하게 서 있고 기와지붕의 건물이 일 행을 맞는다. 입구에는 여인들의 초가 처소인 행랑채가 있고 그 안에 밀납인형으로 당시의 모습 을 재현해 주고 있다. 단종을 시중하는 궁녀와 관노들이다. 몰래 단종을 따라온 시녀들인데 과연 세조가 몰랐을까? 알았어도 묵인했을 게다.
100년에서 400년 수령의 소나무들이 울창하다. 700그루나 된다고 한다. 이상하게도 모든 소나무 가 단종이 거처하던 방 쪽으로 향해 있다. 담장 밖의 소나무 한그루는 담을 넘어 몸을 구부려 낮 게 엎드리며 절하는 모습이다. 충절의 소나무이다. 일부러 작품을 만든 것은 분명 아닐텐데-- 이 소나무 중 가장 키가 크고 오래된 소나무가 있다며 안내했다. 바로 관음송(觀音松)이다. 600년의 수령을 가진 이 관음송은 금강송,미인송으로 불리는데 천연기념물 349호로 지정되어 있다. 관음(觀音)이란 단종의 슬픈 역사를 모두 보고,오열의 소리를 들었다는 의미로 볼觀,소리 音으로 표현된 이름이다. 두가닥 가지가 벌어졌는데 단종이 이 소나무 가지에 앉아 쉬었다고 전 한다. 키가 하도 커서 카메라에 다 잡기가 어렵다. 그 옆에 있는 금표비 앞면에는 "청령포 금표" 라고 한자로 쓰여 있다.
관음송를 보며 설명을 듣고 바로 망향탑이 있는 육육봉(六六峰)으로 올랐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된 육육봉과 노산대 사이 층암절벽 위에 있는 망향탑은 단종이 유배생 활을 할 때 자신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근심속에서도 한양에 두고 온 왕비 송씨를 생각하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돌을 주워 쌓아 올렸다는 탑으로 단종이 남긴 유일한 유적이다. 유유히 흐르는 서강의 물을 바라보며 550년이 지난 슬픈 역사의 뒤안길을 강물도,소나무도 모두 알고도 입을 다물고 있는지--당시 사약을 대령했던 왕방연의 시조를 낭송해 본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 놋다.
청령포로 건너 가는 배
배를 타고~
청령포 안내도
청령포 단종 어소 마루에 앉아 해설사 설명을 듣고 있다.
행랑채에는 시녀들 방이 별도로~
단종 어소를 향해 업드려 절하는 충절의 소나무
단종이 걸터앉아 쉬었던 소나무- 슬픈 역사를 직접보고 오열하는 소리도 들은 600년 수령의 觀音松
청령포 금표비
단종이 한양의 왕비를 그리며 막돌을 주어 쌓았다는 망향탑
아픈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서강은 예나 지금이나 무심히 흘러만 간다.
한반도지형 찾아서 법흥사는 영월군 중에서도 서북쪽에 있다. 거리가 상당하다. 시간도 길이 꼬불꼬불 시골길이라 예상외로 많이 걸린다. 법흥사로 가는 지도를 보니 꼭가고 싶었던 한반도지형이 가는 길 도중 에 있었다. 물론 시간이 예정보다 늦어졌지만 이곳을 안본 친구들이 많다는 걸 아니 안갈 수가 없다. 한반도지형은 요즘 TV에 많이 나오고 특히 1박2일팀이 다녀간 후로 명승지로 부각되었다 고 한다. 그래서 예전의 주차장이 아닌 새주차장이 굉장히 넓게 자리잡고 있었다. 몇번 가본 경험이 있는데 이상할 정도로 멀었다. 아마도 새주차장에서 오르니 거리가 배도 넘게 걸리는 것 같다. 힘들고 거리가 너무 멀어 괜히 왔구나 하는 후회의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결과 적으로는 모두들 좋아했다. 내려다 보는 한반도지형의 아름다운 모습이 모든 답답함을~ 그리고 후회하는 마음을 말끔히 씻어준다. 한반도지형을 배경으로 단체사진도 남겼다.
한반도지형 전망대에서
아~ 대한민국- 우리의 조국
천년고찰 5대 적멸보궁 법흥사 마지막 코스인 법흥사 길은 꽤나 멀었다. 그러나 요즘은 길이 좋아 불교신도 뿐만 아니라 많은 관광객 들이 찾는 곳이다.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의 하나이다. 불교신자들과 유적지 탐방을 많 이 하는 여행객들은 잘 알겠지만 간단히 소개한다. 적멸보궁(寂滅寶宮)이란 세속의 인간이 번뇌와 잡상으로부터 벗어나는 보배로운 전각이란 한자 풀이이지만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이다. 신라 선덕여왕 시 자장율사가 당나라 에서 부처님 진신사리(정골)를 가져와 모신 다섯 곳으로 5대적멸보궁이라 한다. 오대산 상원사,설악산 봉정암,태백산 정암사,양산 통도사,그리고 이곳 사자산 법흥사이다. 외에도 석가모니의 치아사리를 모신 고성의 금강산 건봉사,모악산 금산사에도 적멸보궁이 있 으며 진위가 어려운 개인 스님들이 가져 와서 모신 적멸보궁도 있다. 화성의 구봉산 신흥사에는 전 종정이 모셔온 진신사리라 신빙성이 높다고 한다.
사자산 법흥사는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643년 신라 선덕여왕 12년에 사자산 연화봉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흥녕사(興寧寺)로 창건했다. 1163년 고려 의종 때 다시 중창하였으며,그 후 폐사지에 가까웠던 흥녕사가 1902년 대원각 스님에 의해 법흥사로 개칭되고 재건되었다. 1912년 또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1933년 지금의 터로 적멸보궁을 이전 중수하였다. 예전에는 구자선문중 사자선문으로 이름이 나 신도가 천명이 넘는 대찰이었다고 한다. 부도탑과 비문이 있는 징효대사와 함께 자장율사의 영정을 모신 조사전이 있다. 1991년 삼보스님이 적멸보궁을 다시 증축하였고 1999년 도완스님때에 이르러 법흥사 전모를 혁신하는 불사를 진행하고 있다.10월20일에 15년 회향 대법화와 조사전 낙성식이 있다고 한다.
시간이 없어 바로 적멸보궁으로 올랐다. 마침 보살님이 우리 일행을 기다린지 오래란다. 도중에 해설부탁을 취소했는데도~ 고마웠다. 우리가 시간이 없다고 하니 잠시만 설명을 주겠단 다.불신도 몇몇이 법당 안에서 절을 마치고 나오니 법흥사에 관해 간략히 설명해 준다. 사자산이란 산 형상이 마치 사자가 엎드려 있는 모양이라서 붙은 이름인데 산 뒷쪽에서 보면 연꽃 모양의 봉우리라 연화봉이라고도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지혜의 성지이다. 사자산은 형태만이 아니라 자장율사가 창건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셔 오면서 사자를 타고 오셨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전한다. 한편 사자산을 사재산(四財山)이라고도 부르는데 네가지 보물을 지녔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산삼,석청(꿀),참옻(칠기),백토(白土;식토라고도 하는데 흉년시 먹을 수 있는 흙)를 말한다고 하는데 정확한 위치는 아무도 모른다는데 부락 이름 도 사재리가 있다. 행정상으로는 강원도 영월군이나 지리적으로는 경상도에 인접해 있고 5대 적멸보궁 중에서도 가장 교통이 좋아 요즘은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다고 한다.
적멸보궁 뒤쪽에는 축대가 쌓여 있고 축대에는 부처님의 일대기가 새겨져 있다. 이 축대는 불과 20년전에 쌓은 것으로 그 전에는 돌담이었다고 한다. 축대 위로 봉우리가 있고 이 곳에 진신사리 가 모셔져 있는 것처럼 보이나 진신사리는 연화봉 암벽에 모셔져 있다고 한다. 법흥사는 몇차례 화재로 불타고 현 지주스님이 15년간 10만 등밝히기 행사를 지속하여 이제 15년 회향 대법회와 조사전 낙성식을 갖는다고 한다. 적멸보궁 가는 길 3분 거리에 산신각이 있는데 여기에는 구봉대사 그리고 백덕대사가 사자를 데리고 있는 모습의 탱화가 그려져 있다.
친절한 보살의 해설을 듣고 몇몇 불자들은 곧 있을 낙성식 불사를 위해 시주를 하고 적멸보궁을 하직했다. 하산하면서 법운당,제2약사전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벌써 예정시간보다 많이 지나 고속도로에서 먹기로 한 저녁식사를 주천면에서 하기로 했다. 날은 어두워지고 적당한 식당을 못찾고 헤매던 중 파출소에서 물어보기로 했다. 사무총장이 물으러 갔는데 도무지 오지 않아 모두들 궁금해 하며 아무래도 붙잡힌 것 같으니 회장이 가보란다. 주민증을 내면 나도 분명 신문지상에 이름이 오르내린 이름이라 갈 수 없다고 했다. 드디어 과연 매스콤에 많이 오른 제대로의 맛집식당을 안내해 주었다.
적멸보궁 안 적멸보궁 뒤 축대와 토굴/ 석가부처님 진신사리는 여기가 아니라 연화봉 암벽에 있다고~ 보살님의 조용하면서도 해박한 법흥사 안내 산신각
영월 주천의 맛집 신일식당 버스도 못 들어가는 좁은 골목에 오두막집 '신일식당'이 있었다. 종업원도 없고 노인 부부가 운영 하는 국수집이다. 방으로 들어가니 온 벽과 천정까지 다녀간 사람들의 글이 적혀 있다. 네개의 지상방송국에서 모두 방영되었고 뭐가 그리 유명한지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 비록 시간이 늦었지만 우리는 그 유명한 꼴두국수를 시켜놓고 메밀묵과 메밀부침개를 시켰다. 이집의 동동주를 시켰으나 술은 별로인 거 같아 가져간 소주에 묵과 부침개를 안주로 삼아 정신 없이 먹어댄다. 배도 고프지만 맛 때문이리라. 보통 묵과는 다르다. 마친 꼴두국수가 나왔다. 이름부터가 특이하다. 하도 많이 먹어 꼴두 보기싫다라는 데서 꼴두국수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는데 구수한 그 맛은 정말 별미였다.과연 매스콤과 이곳을 찾은 식객들의 찬사가 결코 헛이 아 니라는 생각이 든다. 주인 임덕자 할머니는 개그우먼 김신영을 많이 닮았다고 인터넷에서는-- 회원들이 우리도 글을 남기라고 해서 겨우 빈 고을 찾아 "步見會 20명 맛찾아 여기 왔도다" 라는 글을 날짜와 함께 남겼다. 하도 좋아들 해서 소개해준 파출소 순경에게 답례로 박카스 두박스를 사다 전했다. 이제 배도 부르고 집으로 가는 일만 남았다.
종업원도 없이 할매 할배 두분이 운영하는 신일식당의 벽과 천정은 온통 다녀간매스콤과 식객들의 흔적이~ 역시 먹어봐야 할말이 있다. 꼴두국수와 메밀부침개 신문에 이름이 난 임덕자 할머니/우리도 흔적을 남기라는 회원들 성화에 못이겨~ 오늘 스케줄을 회상해보면 정말 하루만에 이렇게 많은 코스를 마칠 수 있을까 싶게 빡빡한 일정 으로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등산도 제법 많아서 힘은 많이 들었지만 추억거리로 남을만큼 명승 지를 많이 보았다. 단합된 보견회 회원들이 열심히 협조해주신 덕분으로 알고 고마움을 전한다. 사무총장의 봉사정신에 다같이 감사하고 오늘 중식을 제공한 오상평회원께 거듭 감사의 뜻을 전한다. 여행후기를 쓰는데는 꼭 필요한 사진이 필수이다. 이번 여행에도 장세원 동문이 진사 어른(사진사의 높임말) 역할을 충실히 해주었다. 김문헌 회원도 좋은 사진을 보내주어 감사를 드린다. -e-
<참가회원>강순중,고초근,김능태,김문헌,김민효,김수철,김원주,박정륭,박준천,박 호,서강조, 오상평,이이춘,장극두,장세언,최문택,최상탁,허 현,문의용 (19명)
<비용정산>전월이월 1,927,628원 10월2일 결산이자 3,376원 10월4일 회비입금(19명) 380,000원 당 일 비용 버스대여료 500,000원 음료,주류,간식,안주 148,000원 김밥,돈가스,고속도로 국수 98,500원 저녁식대(신일식당) 165,000원 여행 보험료 95,000원 기타(배도선료,가이드답례) 14,800원 비 용 소 계 1,021,300원 *중식대 200,000원 오상평회원 협찬은 별도 금 월 잔 고 <1,289,704> *회원가입비 950,000원(19명)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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