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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행복한 사람 1 (마 5:1-5)
이 시간에 “행복한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혹시 행복하지 않으시다면 이 시간 하나님의 은혜로 꼭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나라마다 인사법이 다릅니다. 유대인들은 샬롬! 즉 평안하세요. 이런 인사입니다. 신앙에서 비롯된 축복의 인사입니다. 우리 인사법은 대개 “안녕하셨습니까?” 라고 인사합니다. 밤새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았느냐는 뜻으로 우리 민족이 얼마나 외세의 침략 속에 있었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식사하셨나요?" 중국 사람들도 “식사하셨어요?”로 인사를 한다고 합니다. 제가 아는 집사님도 만나면 어느 때나 식사하셨어요가 인사입니다. 그만큼 먹지 못하고 살았던 데서 생겨난 인사법입니다. 그런데 폴란드 사람들의 인사가 있습니다. 폴란드 사람들은 “당신은 행복하십니까?”라고 인사를 한다고 합니다. 참으로 좋은 인사법 같습니다. 우리들은 복의 하나님을 섬기니 “평안하세요. 행복하세요.” 라는 인사가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 옆사람과 "행복하세요."로 인사해 봅시다.
세상 사람들은 행복은 팔자소관[八字所關]이라고 생각합니다. 팔자소관이란 타고난 운수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당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흔히 아무리 어렵고 고생스럽더라도 팔자소관이려니 생각하고 살아라고 말합니다. 이 얼마나 불합리하고 억울한 일입니까?
그러나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변화하기만 하면 복을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여기 복은 “마카리오스” 특히 신령한 복을 가리킵니다. 영어로는 행복이라고 번역이 되었습니다. 신앙 안에서 행복할 수 있다는 말씀합니다. 이 시간에 저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가장 행복할 수 있는 법 8가지 중에서 몇 가지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럼 어떤 사람에게 행복이 올까요?
1. 심령이 가난해야 행복이 옵니다.
3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예수님은 천국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못하리니 천국은 너희 마음에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인생을 조금 살다보니 마음의 평안과 행복이 더 귀중한 것 같아요. 마음의 행복이 없으면 천하가 다 있다 해도 나와 상관이 없어요. 그런데 가장 큰 행복은 마음의 천국입니다. 마음에 천국이 있다면 그는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주님은 마음의 천국을 위해서 심령이 가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심령의 가난이란 무엇일까요? 원문에는 절대적 빈곤 상태의 거지인 “프토코스”로 나와 있습니다. 상대적인 빈곤인 “페네스”가 아닙니다. 상대적 가난이란 가난하지는 않지만 나보다 부한 사람들을 바라보다 가난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적 가난이란 실재로 소유가 존재하지 않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말씀을 볼 때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자 청년입니다. 그는 물질 때문에 주님을 따를 수 없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19:23-24) 하셨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26절)하신 것입니다.
그럼 심령의 절대적 가난이 무엇일까요? 예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마음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살기가 나아지니까 주님을 찾는 사람들이 적습니다. 전도하기도 어렵고요. 믿는 사람들도 주님을 가까이하려 하지 않습니다. 심령이 다들 부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매달리고 사모하지 않아도 살만하다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 없이 살 수 없다는 간절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하나님을 사모하며 경외해야 합니다. 이것이 심령의 가난입니다.
그래서 야게의 아들 아굴은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30:7-9) 기도했습니다.
요즘 금융위기로 경제가 어려워지자 미국에서도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늘었다고 합니다. 이런 걸 생각하면 물질적 부요가 꼭 복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물질적으로 가난해도 하나님을 멀리 하는 사람이 있지만 대체로 어려우면 하나님을 더 갈망합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이 믿음의 부자가 더 많습니다.
심령이 가난해야 천국이 저희의 것입니다. 그래서 문답하고 서약할 때 “그대들은 하나님 앞에 죄인인 줄 알며 당연히 그의 진노를 받을 만하고 그이 크신 자비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밖에 소망이 없는 자인 줄 아느뇨?”라고 묻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다른 길이 없고 오직 예수만이 나의 생명의 구주라는 고백이 없으면 구원 받지 못합니다. 또 하나님을 멀리하고서는 생존할 수 없음에 절실하지 않고는 천국 백성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심령이 가난한 사람 되어 천국의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2. 애통해야 행복이 옵니다.
4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여기서 '위로'(파라칼레오)라는 말은 '곁으로'와 '부른다'의 합성어입니다. 하나님께서 곁으로 부르셔서 즉 다가오셔서 위로해 주심입니다. 이 때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심령으로는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낍니다. 그러므로 문제를 혼자 안고 있지 말고 다 하나님 앞에 쏟아 놓으세요. 애통해야 위로가 옵니다.
세상에서는 우는 것보다 “웃으면 복이 와요.”라는 말이 유행입니다. 이상구박사라는 분이 웃을 때 엔돌핀이라는 호르몬이 나와 건강해진다는 말을 유행시켰습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웃으면 복이 옵니다. 웃는 얼굴에 침 뱉지 않습니다. 웃으면 원수도 생기지 않아요. 웃으면 대인관계도 잘 되고 사업도 잘 됩니다. 웃으면 건강해집니다. 부디 건강하고 성공하려면 웃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주님은 애통하는 자가 복 있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웃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웃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바로 애통입니다.
일본의 류마티즘 권위자 요시노 신이치 교수는 울음을 치료에 적용해 본 결과 류마티즘의 원인인 ‘인터로킹 식스’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감소함을 발견했습니다. 일본 토호대 아리타 히데오 교수는 눈물을 흘리면 속이 후련해지고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사람이 눈물을 흘리는 순간 인간의 스트레스가 극도에 달하다가 눈물을 흘린 직후 정상인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밝혀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울어본 사람만이 웃을 수 있습니다.
웃어라 웃어라 해도 웃지 못할 사람이 많습니다. 그렇게 권하기보다 같이 우시기 바랍니다. 눈물은 단순한 감정표시가 아니라 인간 생존의 중요한 방식 중 하나입니다. 울어야 몸이 살고 영혼이 삽니다. 울어야 할 때 울지 않으면 몸이 대신 운다고 합니다. 즉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몸이 대신 아프다는 것입니다.
어느 치료사가 쓴 “웃음보다 큰 눈물치료, 울어야 삽니다.”라는 글을 보았습니다. 그 글을 일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만난 수많은 암 환자들 중에서 가장 낫기 힘든 환자는 바로 마음이 완전히 돌처럼 굳어진 사람입니다. 고치기 어려운 환자는 말기 암 환자가 아닙니다. 마음과 영혼이 굳을 대로 굳어져 감정이 완전히 말라 버린 사람입니다. 항암치료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마음의 치료입니다. 눈물은 하나님이 주신 천연항암제입니다. 저는 오랜 전부터 웃음치료와 함께 울음 치료를 해오고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이 치료들은 육신의 면역력을 높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들에게 주신 아름다운 선물중의 하나가 웃음과 울음입니다. 웃음도 건강에 효과가 있지만 우는 것 역시 너무나 건강에 효과적입니다. 울고 눈물을 흘리며 통곡할 때 정화되어 갑니다. 울어야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울어야 병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울어야 살 수 있습니다.” 라는 글이었습니다.
그것이 성경 말씀입니다. 전7:3에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됨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웃어도 고쳐지지 않는 병도 울면 고쳐집니다. 태산 같은 문제가 앞을 막아도 울면 하나님께서 그 눈물을 보시고 해결해 주십니다. 죽을 병에 걸린 히스기야도 눈물의 기도를 드려 고침 받았습니다. 울며 기도하면 나도 모르게 잠이 들면서 치료해 주십니다. 애통하면 성령께서 위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울음도 분별해야 합니다. 이해하실지 모르지만 사단이 주는 눈물도 있습니다. 자신을 끝없는 슬픔 혹은 공포 혹은 스트레스 가운데로 끌고 가기도 합니다. 이것은 절제해야 할 눈물입니다. 그리고 울음에도 부작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 앞에서 울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울어야 합니다. 시51:7에 "하나님의 구하는 제사는 상한심령이라" 하셨습니다. 약4:9에는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찌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애통하면 행복이 옵니다.
애통이 안 된다고요? 성경은 가슴을 치며 애통하라고 했습니다. 다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어요. 그러므로 가슴을 치면서 애통함에 애써 보세요. 대체의학에도 오목 가슴을 적당히 쳐주면 심장이 건강해진다고 했어요. 너무 치면 병들지만 적당히 치면 건강합니다. 가슴을 치면 심장이 열리고 육체의 심장이 열리면 마음도 열리기 시작합니다. 몸이 차갑고 감정이 부족한 사람들은 대개 심장이 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가슴을 쳐보세요. 심장도 강해질 뿐 아니라 울지 못할 것만 같던 마음이 열리고 눈물이 나옵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애통하길 사모하라는 말입니다.
3. 온유할 때 행복이 옵니다.
5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는 헬라어로 “프라우테스”인데 이 용어는 잘 훈련되고 잘 길들여진 가축에 사용되었습니다. 자기 고집을 죽이고 주인의 뜻대로 움직이는 훈련된 가축처럼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을 기리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네 마음에 쉼을 얻으리니” 하셨습니다. 온전히 자기를 낮추시고 순종하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여기 멍에란 가축을 암시하는 용어입니다. 이런 온유한 마음으로 말씀을 배우고 행할 때 마음의 쉼과 행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어로는 온유가 “아나우”인데 이 용어는 비천한 억압된 노예 상태를 말하며 자기를 하나님의 낮은 종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며 그러므로 이웃에 대하여 노하지 않고 교만한 생각을 품지 않는 것을 가리킵니다. 모세는 자기를 대항하는 자들에게 악감을 품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입니다. 민12:3에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온유는 나를 내려놓고 하나님 말씀에 기쁨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냥 행하는 것은 온유가 아닙니다. 말씀에 기쁨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웃으면서 순종하세요. 좋아하며 순종하세요. 주님의 온유에 대해서 시40:8에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뜻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음을 기억하세요. 지금 이 시간도 하나님께서는 온유한 자에게 성령으로 천국의 행복을 기업으로 주십니다. 온유한 자에게는 하늘의 기업은 물론 땅의 기업도 주십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기 때문에 그 말씀의 열매를 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복과 땅의 모든 복은 바로 온유한 자의 것입니다.
이명박 대통령 여동생 이윤준 선교사의 간증이 있습니다. 이 선교사가 믿지 않는 남편과 결혼하여 남편이 도박에 빠져서 집에 들어오지 않아 금식기도를 밥 먹듯 했고, 본인은 자궁암과 세 번의 교통사고와 류마치스와 대상포진으로 연탄불을 지피고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고난이 극심했다고 합니다. 이 때 이선교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불순종한 자신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46세에 총신을 졸업하고 14년간 선교사로서 사역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사명에 순종하였을 때에 간암에 걸린 남편을 치유시켜 주셨고, 그가 예수 믿고 섬김을 기뻐하는 훌륭한 장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내가 변하니 다 변했습니다. 순종의 온유함으로 회개하니 만사형통케 해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의 뜻에 온유함으로 순종하면 하늘의 복과 땅의 복을 아울러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행복하라고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교통하심에 진정한 행복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음은 행복의 자리에 발을 디딘 것입니다. 이왕 믿은 것 넘치는 행복을 누리십시다. 신앙생활 잘하면 행복이 옵니다. 우리 모두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한 가장 복된 자가 되어 하나님의 위로와 천국으로 가득한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