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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은 좋은데 상황은 안 좋을 때>의 줄거리:
겟세마네 동산과 변화산은 너무 다른 상황임에도 동시에 하나님의 최 극강의 좋으심을 드러내는 계시 사건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다만 전자는 부정적인 방식을 후자는 긍정적인 방식을 취한다는 것이 다릅니다. 여기서 우리의 고민은 이것입니다. 이토록 좋으신 하나님이 내 삶을 주관하실 때 상황이 너무 안 좋을 때가 많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좋은데 상황은 안 좋을 때
(누가복음 22장 47절~53절)
47.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을 앞장서 와서
48.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49. 그의 주위 사람들이 그 된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하고
50. 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51.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은 좋은데 상황은 안 좋을 때>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나님은 좋은데 상황은 안 좋을 때’
본문은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시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땀에서 피가 나올 정도로 가장 고통스러운 기도를 하신 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당국자들의 손아귀에 체포되어서 본격적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향한 여정이 시작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일들은 십자가 수난 직전에 일어난 예수님의 마지막 활동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겟세마네 동산과는 분위기가 전혀 다른 변화산 사건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건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변화산에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하늘에서의 모습으로 변화하신 예수님을 보고 황홀경에 빠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성령님과 더불어 일체 되심을 벗어나신 적이 없으셨기에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은 일체 되심을 바깥에서 확인할 수 있도록 드러나신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용모가 변화되고 옷이 희어져 마치 빛의 발광체처럼 묘사되었습니다. 예수님 안에 계시던 하나님의 빛이 드러난 것입니다.
누가복음 9장 33절을 보면 이 광경을 본 베드로의 반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황홀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초막을 짓고 머물러 살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이는 곧 산 아래에 존재하는 삶 자체가 베드로의 마음에서 지워졌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빛을 느끼게 되자 세상에서 느끼던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마음에서 지워지게 되었습니다. 그 정도로 하나님의 좋음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변화산에서 하나님의 좋으심이 긍정적인 방식으로 계시되었다면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정반대의 부정적인 방식으로 계시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불과 사흘 동안 하나님과 분리되어 저주 상태에 던져지실 상황을 앞두고 계셨습니다. 사흘 동안은 영원에 비하자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땀에서 피가 나올 정도로 고통스러워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찰나에 불과할지라도 하나님과의 분리가 이토록 큰 고통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이신가를 느끼게 해주는 사건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좋으심을 계시하셨다는 점에서 변화산 사건과 겟세마네 동산의 사건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체포사건에서는 또 다른 계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최극강으로 좋으신 하나님께서 주권자로서 내 삶을 이끌어 가십니다. 그런데 왜 안 좋게 여겨지는 상황들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지속되는 것일까요? 그리고 이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요?
지금도 여러분에게 주어진 삶의 상황은 마냥 좋지만은 않을 수 있습니다. 별볼일 없을 수도 있으며, 안 좋을 수도 있으며, 너무나 싫어서 짜증과 분노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최극강으로 좋으신 분이라는 사실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느냐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최극강으로 좋으신 분이라면 왜 나를 이렇게 힘들고 싫은 상황에 처하게 하시는 것일까요? 이와 관련하여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본문의 구절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하여 병사들을 이끌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왔습니다. 이때 한 제자가 칼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베어버립니다. 본문에서는 이 제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지만 요한복음에서는 베드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잠깐 말씀을 드리자면 누가복음이 요한복음보다 이른 시기에 기록되었습니다. 즉 누가복음이 기록될 당시에만 해도 제자들의 안전은 크게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의 이름을 명시하지 않았다고 여겨집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가지고 있던 검으로 산헤드린공회에서 파견된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렸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 사람의 이름이 ‘말고’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머리를 내리친 것이 빗나가서 귀를 자른 것인지 겨냥해서 자른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결과적으로 말고의 귀는 완전히 잘라져 땅에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 귀를 다시 붙여주십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이것까지 참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께서는 저주에 빠지시기 직전에 극도로 괴로워하시며 기도하심을 통해 역설적으로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가를 계시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도중에 체포를 당하시게 됩니다. 예수님이 하실 일에 대해서 몰랐던 베드로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이것까지 참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부분을 헬라어로 직역해보면 “여기까지 버려두라”는 뜻입니다. ‘여기까지’라는 것은 쭉 진행되어오다가 도달한 상황을 의미합니다. 즉 상황이 진행되는 것을 막지 말고 가게 두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무력 사용에 대한 철학을 드러내신 것이라 오해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코 무저항주의를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철로처럼 깔려있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계셨습니다. ‘이것까지 참으라’는 말씀을 본래의 의미를 살려서 풀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진행되고 있으니 그대로 두라”고 하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도 적용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삶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부감이나 저항의식이나 불만이나 불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여기까지 진행되어 왔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지만 마음에 걸리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의 고통스러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좋으심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거부감과 저항의식과 불만과 짜증과 분노를 일으키는 일들을 허락하십니다. 이것이 모순적으로 느껴지기에 말씀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체포사건에 대한 계시의 반응이 우리의 삶에서 어느 정도로 평강과 기쁨과 만족을 누리며 살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단서를 제공해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최극강의 좋으심을 놓아야만 하는 것을 그토록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좋으신 하나님이 예수님의 일생을 인도하시는 모습을 보면 상당히 의아해집니다. 예수님은 말구유에서 태어나셨고 머리 둘 곳도 없이 지내셨으며 이제는 범법자로 몰려서 체포되십니다. 이러한 생애를 사시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서는 온갖 기적을 행하셨고 모든 진리와 지혜의 말씀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기적을 예수님의 삶을 개선시키거나 변화시키는 용도로 사용되는 것을 한 번도 허락하시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라는 대로만 하시며 사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5장 30절에서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존하고 하나님의 좋으심을 느끼며 하나님만을 바라보신 예수님이신데 정작 하나님께서는 편안한 삶을 허락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입장이었다면 예수님의 마음이 예뻐서라도 좋은 삶을 주시고자 했을 것입니다. 단 사흘 동안도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을 너무나도 싫어하여 땀에서 피가 나올 정도로 고통스러워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대체 왜 예수님의 삶을 거지 나사로와 같은 상태로 만드셔야만 했고, 남들을 위해서는 온갖 기적을 베푸셔야만 하는 역설적 상황이 공존하게 하셨던 것일까요?
예수님께 일어난 일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몸으로 살아가는 삶이 무엇인지를 알아야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쳐 주시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이 세상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하는 곳입니다. 즉 삶이란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좋든 나쁘든 있음의 느낌을 위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좋음과 채움과 기쁨을 느끼라고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래 세상은 기뻐할 일이나 슬퍼할 일이 존재하지 않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슬퍼하신 모습을 보이신 모든 상황을 잘 들여다보면 전부 하늘과 연관성이 있었습니다. 이 땅은 그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는 좋고 나쁨의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않은 상태에서 판단을 할 수 없는 중립적인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와 관련한 내용으로 십자가온라인교회에서 함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것이지 이루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일들은 본래 기쁨과 슬픔의 재료가 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마음에서 있음의 대상으로 느낄 것도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 크기의 접촉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있다고 느끼는 것을 마음의 공백에 채워서 만족을 얻고자 하는 것이 마음의 구조입니다. 마음은 하나님으로 채워져야 되기에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마음으로 접촉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 일들로는 만족을 느끼거나 불만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처럼 살아가지 못합니다. 배우자는 기쁨이나 슬픔의 재료가 될 수 없는데 배우자로 기뻐하거나 슬퍼합니다. 말씀드렸듯이 본래 사람의 기쁨과 슬픔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님과 접촉하여 하나님을 가지게 되면 기쁠 수 있고, 하나님과 접촉할 수 없고 하나님을 가질 수 없다면 슬플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본래 인간은 마음에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로 기쁨과 슬픔이 결정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타락하여 마음에 담아서는 안 되는 세상에 있는 대상을 마음에 담게 되었고 그것들을 기쁨과 슬픔의 재료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돈이 많이 벌리거나 안 벌리는 것은 기쁨과 슬픔의 재료가 될 수 없습니다. 돈이 많다고 안심하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마음이 하나님과 접촉을 이루었을 때 안심하고, 하나님과 접촉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불안해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에 하나님이 들어오시면 만족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들어오시지 않는다면 불만을 갖는 것이야말로 정상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드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상의 대상들을 만족과 불만족의 재료로 삼아 살아갑니다.
본문을 보면 베드로는 주어진 상황을 저항하고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것까지 참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체포되는 상황으로 진행되고 있으니 그대로 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에서 어떤 문제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문제를 문제로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여기까지 진행하셨으니 그대로 두어야겠다.”라고 받아들일 것입니다.
‘까지’라는 말은 과정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주권자로서 여기까지 상황이 진행되도록 이끄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상황 자체는 좋음이나 나쁨의 재료가 될 수 없습니다. 거부하거나 환영할 일도 아닙니다. 내게 이루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끌어 가시고 이루어 가시는 것뿐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주셨다는 내용들이 존재합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삭을 주셨고 다윗에게는 나라를 주셨습니다. 겉으로는 무엇인가를 이루어주셨다고 볼 수 있는 상황들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루어주신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셨지만 마음에 담으라고 주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 중에 필요해서 아브라함의 몸을 통해서 태어나게 하신 것이지, 아브라함의 마음에 담으라고 주신 대상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아까워하지 않고 죽이려고 하였을 때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십니다.
있음을 느끼고 채움으로써 만족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을 기준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저주와 죄 속에 갇힌 상태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이루어 가실 일들을 이루어 주시는 것으로 착각해서 받아들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일 수 있었던 이유는 이것을 착각하지 않고 제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뜻이 이삭을 바치는 것으로 나타났을 때 기꺼이 그 뜻에 올라탈 수 있었습니다. ‘이것까지 참으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아들을 바치라고 하시는 이 상황까지 하나님의 뜻이 진행되었으므로 그 뜻이 그대로 가도록 두겠다.”라는 마음을 먹고 이삭을 죽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다윗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나라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마음에 담으라고 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나라의 있음을 느끼고 만족해서 왕 됨을 만끽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됩니다. 다윗에게 나라를 주셨지만 마음을 채울 재료로 주신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다윗에게 나라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가는 과정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것까지 참으라’고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뜻이 여기까지 진행되었으니 앞으로도 이루어져 나가도록 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사건이나 로마의 박해 속에서 초대교회 성도들의 순교현장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죽었고 초대교회 성도들은 사자 밥이 되고 화형을 당했습니다. 그 고통과 공포란 상상하기조차 어렵습니다. 지난 말씀에서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에서 육체가 당할 고통으로 괴로워하셨던 것이 아니었음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하나님 아버지와 분리되는 저주를 고통스럽게 여기셨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순교의 현장에서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최극강으로 좋으신 하나님을 보면서 마음에 만족과 기쁨과 평강이 임합니다. 그런데 최극강의 좋으신 하나님이 스데반 집사님께 허락하신 것은 돌에 맞아 죽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잘 믿었고 그렇게 신실하였고 충만했다면 그에 대한 보상을 주시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삶이 아주 형통하고 풍요롭고 번영하도록 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무의식중에도 들어있는 바람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십자가 생활화를 잘하고 하나님의 있음을 충만히 느끼면 결과적으로 이 세상의 삶도 안정적이고 형통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존재합니다. 차마 노골적으로는 드러낼 수 없을지라도 은연중에 그러한 기대는 존재하기 마련합니다. 그런데 스데반 집사님의 상황을 보면 그러한 기대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스데반 집사님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하나님으로 충만했고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몸은 돌에 맞아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스데반 집사님이 그토록 신실했다면 왜 죽어야만 했는가?”라고 생각한다면 잘못된 이해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 분이시기에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평강과 기쁨과 만족이 깨어지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변화산 사건, 겟세마네 동산의 사건,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사건, 예수님께서 광풍노도 속에서 잠을 주무신 사건, 베드로가 참수 당하기 직전에 깊은 잠에 빠진 사건 등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난 계시는 하나님이 최극강으로 좋으심에 대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마음의 기쁨과 평강이 깨어지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은 최극강으로 좋으신 분이시라는 것을 성경은 반복하여 계시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나 스데반 집사님처럼 하나님과 접촉하고 하나님을 모셔 들임이 충만하지 못해도 성경이 제시하는 계시들을 이론적으로나마 믿음을 보일 수 있습니다. ‘이것까지 참으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새겨듣고 “내가 이러한 상황에 이른 것은 하나님의 뜻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어진 상황에 거부감이 생기고 분노가 생기고 저항의식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대로 삶이 이어져가는 중에 여기까지 도달한 것이라고 믿는다면 앞으로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어진 상황을 저항과 거부와 분노와 불만으로 느낀다면 하나님의 주권은 인정될 수 없으며 마음은 하나님으로 채워질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몸과 연관하여 주어진 어떠한 상황도 마음의 기쁨과 슬픔과 만족과 불만과 원망의 재료가 될 수 없습니다. 마음의 느낌에 대해서는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유일한 재료가 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밀착하거나 충만하다면 기쁨과 만족과 같은 긍정적 감정이 느껴질 것이고,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다면 슬픔과 원망 같은 부정적 감정이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론으로 제시된 하나님의 최극강의 좋으심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예수님과 같은 일이 우리의 삶에서도 이루어지게 됩니다.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단지 사흘 동안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을 그토록 괴로워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최극강으로 좋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좋으심을 염두에 두자면 우리가 몸으로 살아가는 삶의 영역에서 아무리 안 좋은 일이 일어날지라도 그것은 안 좋은 축에 낄 수조차 없습니다. 반대로 솔로몬처럼 부귀영화가 가득하더라도 하나님의 최극강의 좋으심에는 비할 수가 없기에 좋은 축에 낄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좋으심이 최극강이기 때문에 어떤 일이 벌어져도 좋을 수도 없고 안 좋을 수도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가는 것을 그대로 놔두면 될 뿐입니다. 거부반응을 일으키고 저항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가 주어지고 상황이 안 좋아서 마음이 빨려 들어갈 때 우리가 할 일은 안 좋은 상황을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의 기준을 따라 개선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까지 진행된 것을 아버지의 주권과 사랑에 맡겨서 앞으로도 계속 진행되게 내버려두면 됩니다. 최극강으로 좋으신 하나님께 가기 위하여 안 좋은 상황으로 빨려 들어가는 마음을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하고 아버지를 향해 달려나가면 됩니다.
우리는 그러기 위하여 부르짖는 것입니다. “주여! 이 안 좋은 상황으로 빨려 들어가는 마음이 십자가에서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을 따라서 아버지께로 가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좋은 상황이라고 여겨지는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론적으로 계시되어진 하나님의 최극강의 좋으심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다면 “세상의 좋음이 전혀 좋음으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아버지의 좋음을 느끼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극강으로 좋으신 분이시기에 주어진 상황이 어떠하든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상황을 내버려두면 됩니다. 문제는 상황이 좋고 나쁨이 아닙니다. 주어진 상황은 좋아 보여도 좋은 것이 아니고 나빠 보여도 나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에서 하나님을 느끼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님과 분리되었다면 그것을 문제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주어진 상황을 좋거나 나쁘게 느낀다는 것은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하지 못한 증거입니다. 오직 하나님과 밀착하기 위하여 오늘도 예수님의 십자가 생활화에 전념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가 아직은 주님처럼 스데반 집사님처럼 오순절 이후의 베드로 사도나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을 전면적으로 접촉하여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으로 채워지는 평강 속에 거하지 못할지라도 이렇게 다양하게 계시된 하나님의 최극강의 좋으심을 믿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이 세상 어떤 상황에서도 좋아도 좋은 것이 아니며, 안 좋아도 안 좋은 것이 아님을 느낄 정도로 우리의 믿음을 일으켜 세워주시옵소서. 최극강의 좋으신 하나님을 실제로 접촉하고 느끼기 위하여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를 잊지 않고 주님과 함께 죽은 자의 자아의식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