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은 숫자 아니다, 의지다” 60만 대군 중 3600명의 거사 (9)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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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기록되는 게 아니다. 기록하는 것이다. 미래는 그냥 오는 게 아니다. 인간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박정희 소장을 지도자로 옹립한 5·16 핵심세력들은 운명의 순간들을 헤쳐나가고 있었다. 거사 날짜를 두 번이나 바꿔야 했다.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간이다. 그들은 하늘의 도움을 구했다.
그 무렵 나는 기도를 했다. 혁명의 성공을 간절히 구했다. 신이 계시다면 도와 달라고 했다. 영어로 ‘메이 가드 블레스 어스(May God bless us·신이여 축복하소서)’를 되뇌었다.
그때 한국군이 60만 명, 미군이 5만6000명인데 3600명의 병력으로 세상을 뒤집었으니 누구는 기적이 아니냐고 묻기도 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 적은 병력이 서울로 진입하는 데 별로 저항이 없었다. 석 달간 거사 준비 과정에선 비밀 누설이 여러 번 있었다.
그래도 군 사령탑은 이렇다 할 진압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어 그래’ ‘그게 사실이야?’ 하는 반응 정도였다. 일이 되려면 그렇게 되는 것 같다.
“임자, 나 말고 장도영 모시게” JP 펄쩍 뛰게 한 박정희 고집 (10)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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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JP)은 5·16을 기획하고 설계했다. 하지만 JP가 그린 거사 밑그림은 지도자인 박정희 소장의 수정을 거쳤다. JP는 “내가 부족하고 모자란 부분을 박정희 대통령이 메워줘서 거사의 큰 그림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1961년 6월 12일 서울운동장(옛 동대문구장, 2007년 헐림)에서 열린 ‘국가재건 범(汎)국민운동’ 촉진대회.시민·학생 7만여 명이 참석한 대회에서는 5·16 군사혁명을 국민 혁명으로 이끌기 위해 용공사상 배격 등을 결의했다. 윤보선 대통령(오른쪽)의 치사, 국가재건최고회의 장도영 의장(중장, 왼쪽)의 격려사에 이어 박정희 부의장(소장, 가운데)이 선창하면 참석자 모두가 뒤따라 만세를 외쳤다.
장·박 두 사람이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지 않고 대중 집회에 참석한 것은 처음이다. 박정희는 어깨띠에 묶은 리볼버 권총을 왼쪽 허리에 찼다. 권총은 통상 오른쪽 허리춤에 찬다는 점에서 이런 모습은 특이하다. 사진 국가기록원
1961년 5월 15일, 구름이 잔뜩 낀 날이었다. 그날 아침 나는 군복을 꺼내 입었다. 석 달 전 강제 예편으로 옷장에 넣어뒀던 군복이다. 허리엔 권총을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