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四門의 料簡
세 번째는 四門을 料簡하는 것이다.
(가) 삼장교
대저 見惑과 思惑의 두 미혹은 통교와 별교의 두 이법을 장애하니 만일에 그 장애를 파하면 이법이 나타나지만 門이 아니면 통하지 않는다. 「아비담론」에서 밝혔다.
“我相이나 人相, 衆生相은 거북의 털이나 토끼의 뿔과 같은 것으로서 구한다 하여도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다만 진실의 법만 있는 것으로서, 이 진실의 법을 미혹하면 가로로 견혹이나 사혹을 일으킨다. 견혹, 사혹은 無常한 것으로서 순간순간도 머물지 않으며, 참으로 법은 옮겨지고 움직여서 부분부분이 생멸한다.”
이와 같이 관한다면 능히 단, 복, 구족[單複具足]의 모든 견혹을 파하고 또한 三界 八十一品[삼계는 九地로 나뉘고, 각각 九品이 있음]의 사혹을 파하여, 인과나 미혹, 지혜 등의 不生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이 “삼장교의 有門破法의 뜻”이라고 이름 한다.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열어서 拘隣[구린이라는 음사어는 녹야원에서의 다섯 비구 중의 처음 인물인 아냑교진여를 말하는 경우와, 석가세존께서 열반에 드신 그 해에 華子城으로부터 나오셔서 들르신 마을의 이름이기도 함. 여기에서는 최초의 깨달은 제자인 교진여를 이름] 등의 다섯 사람이 먼저 淸淨함을 얻고 또한 「악비」가 三諦[四聖諦중 삼제. 고제, 집제, 멸제]를 설한 것으로, 「사리불」이 견혹을 파하였고 七일이 경과한 후에 아라한과를 얻은 것이며, 천 이백 명[1,250명]은 대개 有門에 의하여 第一義를 얻었던 것이다. 「대론」에서 말하였다.
“만일 반야의 방편을 얻었다면 「아비담」[아비달마. 부처님의 법에 대한 논서라는 뜻이지만 초기에는 「논장」을 뜻하였고 나중에는 소승의 論部를 말하였음]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有門 속에는 타락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반야의 방편이라고 하는 것은 有에 집착하지 않는 일을 말함]”
「大集經」에서 말하였다.
“常見의 사람은 異念[異는 달라지는 것, 변화하는 것을 말하고, 그런 것을 상념하는 생각이 이념임]을 단멸할 것을 설한다.”
바로 이것이 溝港[預流果의 옛 역어임. 溝는 “시내 구”로 작은 냇물이고, 港은 “분류 항”, 즉 물줄기이므로 預流의 뜻과 통함]의 斷結[번뇌의 단멸]의 뜻이니, 어찌 有門에서 假를 파하는 뜻이 아닌가? 「성실론」의 사람들은 어찌 이것을 물리치고서, 이것이 調心의 방편인 것이지 道를 얻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인가? 만약 「성실론」에서 밝히는 바가 我相, 人相은 원래부터 없는 것이라면 實法[현실의 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浮虛[뜨고 허망한 것]인 것이며 有가 아니다. 만일 이 浮虛를 미혹하여 가로로 견혹, 사혹을 일으킨다면 생사의 세계에 윤회유전하니, 이 견혹, 사혹은 모두 三假인 것이며 부허인 것이다. 假와 實이 모두 無라고 관한다면 平等空이라 이름 하고, 이와 같은 관을 수행하면 單, 複, 具足의 무량한 모든 견혹을 파한다. 또한 八十一品의 모든 사혹을 파하여 미혹, 지혜, 인과 등의 不生을 이룬다. 이것을 삼장교의 空門의 破法의 뜻이라고 이름 한다. 따라서 그 「논」에서 이르기를
“나는 지금 바로 삼장교 속의 實의 뜻을 밝히려고 한다. 實의 뜻이란 空이다.”
고 하였으며, 「아함경」에서도 말하였다.
“이것이 늙어서 죽었다. 누가 늙어 죽었다. 두 가지 모두 다 그릇된 見이다.”
“이것이 老死다”라는 것이 바로 “法空”인 것이며, “누가 늙어 죽었다”라는 것이 바로 “衆生空”이다. 또한 말하였다.
“부처님의 法身이란, 바로 空이다.”
「수보리」[解空第一의 십대제자]는 공의 지혜가 한결같이 밝아서 능히 石室에서도 부처님의 법신을 보았다. 따라서 「대품경」속에서는 가피력을 받아 공을 설하고 있으며 「사리불」은 가피력으로 반야를 설하였다. 부처님께서는 大空[대승의 공]과 小空[소승의 공]을 나란히 하고, 大智[대승의 지혜]와 小智[소승의 지혜]를 나란히 하시려고 하셨기 때문에 두 사람으로 하여금 轉敎[[천태학의 개념인 轉敎付財. 반야경을 설하신 시기에 몇몇 제자들로 하여금 부처님을 대신하여 대승보살들에게 설법시켜서 二乘들이 대승의 오묘한 이법을 획득하게 하였다는 것을 가리킴]하게 하였다. 「대론」에서 말하기를
“만일 반야의 방편교를 획득하지 않고 空에 들어간다면 無[허무주의] 속으로 타락한다.”
고 하였으며, 「대집경」에서도 설하기를
“斷見의 사람은 一念[상주하는 유일한 것의 존재를 생각하는 일]을 끊음을 설한다.”
고 하였으니 어찌 平等空의 뜻이 아니겠는가? 마땅히 알아야 한다. 삼장교에서도 또한 공을 설한다는 것을. 「아비담론」의 사람이 어떻게 방종스럽게 이것은 대승의 공의 뜻이라고 말한다는 것인가?
「가전연迦旃延」[마두라왕에게 四姓이 평등한 뜻을 설한 것으로 유명함]과 같은 이는 그가 들어간 바 門을 말하는 것으로 「곤륵론昆勒論」[가전연의 저서. 昆勒은 삼장교를 신봉하는 자를 말한다고 함. 소승四門의 하나]을 만들어서 남인도에 전하였는데, 假가 無인 것은 앞에서와 같고 현실의 법은 亦有亦無[있으면서도 또 동시에 없음]인데, 만일 定相[상주불변이라는 相]을 일으킨다면, 가로로 견혹, 사혹을 일으킨다고 했지만, 이 현실법을 관하건대 유와 무가 從容[따르고 받아들임]하고, 또한 單, 複 등의 견혹과 八十一品의 사혹을 파하며 미혹, 지혜, 원인, 결과 등의 不生을 성취한다. 이것을 삼장교의 亦空亦有門[공하면서 동시에 또한 유인 문]의 破法의 뜻이라고 이름 한다. 따라서 「대론」에서 말하였다.
“만일 반야의 방편을 얻어서 곤륵문에 들어간다면 유나 무의 속으로는 타락하지 않는다.”
非空非有門[공도 아니면서도 또 동시에 유도 아닌 문]이라는 것은 「석론」에서
“「차익車匿」은 마음을 고르게 하여 유순하고 부드러웠기에 마땅히 「나가다전연경」을 설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유를 떠나고 무를 떠나면 바로 도를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라고 밝힌 것과도 같이, 이 관도 또한 單, 複의 모든 견혹과 八十一品의 사혹을 파하여 從假入空觀에서 미혹, 지혜, 인과 등의 無生忍을 성취한다. 바로 이것이 삼장교의 비유비무문의 破假의 뜻이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차익」이 소승의 길을 획득하고서 함부로 대승중도의 문이라고 할 수가 없었던 것을. 이와 같은 四門을 모두 다 칭하여 “예류과의 득도”라고 한다면 이것은 예류과가 初果이기 때문이다. 더 수승한 것은 더욱 별도로 그 이름을 받지만 三門의 차별이 있다고 하더라도 역시 통털어서 이것이 예류과를 얻은 것이다. 다시 말하여 有의 문은 “無常의 예류과”, 無의 문은 “空이 평등한 예류과”고, 亦有亦無의 문은 “從容의 예류과”이며, 非有非無의 문은 “雙非의 예류과”다. 예류과는 모두 四門의 初果다. 사문은 그 관이 다르지만 眞諦를 보는 것은 같다. 城에 네 문이 있어도 회통하는 것은 다르지 않는 것과도 같다. 따라서 「대집경」에서 말하였다.
“常見의 사람은 異念斷을 설하여도 斷見의 사람은 一念斷을 설한다.”
두 사람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 얻는 도를 논한다면 또한 차별이 없는 것이다. 「대경」에서 말하였다.
“오백명의 비구는 각각 그 身因을 설하였는데 바른 설이 아닌 것이 없었다.”
「발마跋摩」[「成實論」의 저자]가 이르기를
“모든 논전들이 각각 그 근원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수행의 이법은 두 가지가 아니다. 한편에 집착하면 시비가 있게 되고 체달하면 違爭[서로 엇갈려 다투는 일]이 없다.”
고 하였는데, 당시에 宋家는 「成實論」을 넓히니, 다른 집착들이 다투어 일어나서 게송을 만들어 이것을 비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眞諦는 고요하여, 참으로 하나나 넷이 아닌 것이다. 「사리불」이 말하였다.
“나는 들었다. 해탈 속에는 언설이 없는 것이라고.”
어찌 四門을 표방할 수가 있겠는가? 만일 定執[선정에 대한 집착]을 일으키면 모두 다 도를 얻지 못하는 것이니 어찌 유독 有의 문뿐이랴. 만일 견혹, 사혹을 여의면 四門을 다 얻게 되니 어찌 유독 空의 문뿐이랴. 응당 홀로 자기만이 論主 「발마」의 뜻을 이루었으며, 여러 사람의 뜻을 무너뜨렸다고 말하여서는 안 된다. 만일에 四悉壇의 뜻을 회득한다면 論數[논주 「발마」의 뜻과 여러 사람의 뜻]를 모두 이루며 만일 사실단의 뜻을 회득 못한다면 논수 모두를 무너뜨린다. ‘나아가서는’ 非有非無의 문도 역시 이와 같다. [‘나아가서는’이라는 것은 앞에서 有라는 하나의 문도 아니고 四門도 아니라 하고, 다음에 空의 문 하나뿐일까 하였으니, 다음에는 亦有亦無의 문 하나만도 아니라는 것이 나와야 할 것이지만 같은 논법으로, 그것만으로도 성취되지 않는다는 것을 생략하였음을 말하는 것임. 그리고 끝에서 비유비무의 문도 역시 같은 것이라고 한 것임] 만일에 유의 문으로 法相을 밝히는 것이 거친 것이고 공의 문으로 법을 밝히는 것이 미세한 것이니, 그 교묘함과 졸렬함이 서로 견주어 바라보면서 成壞[생멸과 같음. 이루고 무너뜨리는 일]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세 문도 함께 졸렬하여지는 것으로 유독 하나의 문만은 아닌 것이다. 무슨 까닭으로 四門이 즐겨 서로 그 形을 물리치는 것인가? 참으로 二乘은 스스로 제도하니[또는 스스로만을 제도하니] 다만 하나의 길을 직접 들어갈 뿐이고, 하나에 기울여서 依據하고 융합하지 않음에 말미암는 것이기 때문에, 後人이나 晩學들이 이것에 말미암아 과오를 일으키는 것이다.
삼장의 보살들은 바로 이것을 모르고 있다. 析空으로 미혹을 항복시키고 한결같이 四門을 배우고, 化他를 위한 까닭에 널리 法相을 알아서[분별하고서] 성불할 때의 이름을 正遍知[똑바로 두루 다 안다고 하는 부처님의 十號 중의 하나인데, 그 십호 중 왜 이 명호를 택하여 성불의 대명사로 하였을까가 여기에서의 문제임]라 한다. 따라서 「석론」에서, 가전연자가 보살의 뜻을 밝힌 것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석가보살이 처음에 석가불을 만나서 발심하시고 계나시기불罽那尸棄佛에 이르기까지가 첫 아승지겁인데, 마음에서 성불하심을 몰랐고 입도 역시 설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연등불燃燈佛에 이르기까지가 第二아승지겁이고, 비바시불毘婆尸佛까지가 第三이다. 육바라밀을 수행하여 원만히 되는 데는 각각 시절이 있다. 시비尸毘[석가세존이 전생담에서 석존이 시비왕으로 계셨을 때, 이 왕이 비둘기로 몸을 바꾸어 자기의 한 몸을 보시하였다는 설화에 나오는 왕의 이름]가 비둘기로 바뀌었다는 것과 같은 것은, 보시바라밀의 완성이고, 나아가서는 구빈劬嬪[석존의 전생이었던 大臣. 땅을 七分한 지혜의 사람이라 함]大臣이 「염부제」[사바세계를 이름]를 분할한 것이 반야바라밀의 완성이고, 百劫으로 三十二相號를 심으신 것이다. 因을 논함에는 바로 「석가」를 지칭하고, 果를 논함에는 바로 「미륵」을 지칭한다. 널리 두루 다 四門의 道法을 수행하고, 薄地의 번뇌를 항복시킨다.”
라 하였는데, 「용수」는 논란하여 말하였다.
“薄地는 바로 斷道[無間道]다. 만일 사다함이 六品의 사혹을 침범하였다면 이름 하여 박지라고 하는 것으로서, 그대가 이미 단멸하지도 않았다면 어찌 박지의 위계라고 칭할 수가 있겠는가?”
따라서 알아야 한다. 다만 이것이 伏道[加行道]에서 薄地를 논하는 것일 따름이다. 三十四心을 바야흐로 곧 단도라고 칭하는 것이지만 능히 이와 같이 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또한 이것은 初敎의 방편의 설법인 것이니, 「열반경」은 이것을 부르되 “半字”[滿字의 반대말로서 완전한 것이 아니라는 뜻임. 소승을 이르는 말]라 하고, 「법화경」에서는
“이십년 동안 항상 똥을 치게 하였다.”
고 이름 하고, 「석론」에서는 이름 하여
“졸렬한 의사[醫]”
라 하였으며, 「유마경」에서는 칭하되
“가난한 이가 원하는 바 법”
이라 하였다. 「天親」[무착無著의 實弟. 처음은 설일체유부로 출가하고서 대승배척에 전력을 다하다가, 나중에 무착에게 인도되어 대승으로 전향. 이른바 유식사상을 대성시킨 사람]은 부르길
“낮고 저열한 乘이다.”
고 하였다. 모두가 다 이 四門을 가리킨 것인데 지금은 소용되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