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님의 발자취
며칠 전에 모교의 동창회 지부 결성에 관한 안내장을 받았다. 나도 모르게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이름이 올라 있는 것이다. 꼭 참석하라는 다짐의 뜻으로 아마 누군가가 적당하게 집어 넣은 것 같다. 오늘 C역전의 경양식집에서 첫 모임을 가졌었는데 70이 넘은 선배동문에서부터 40대의 후배까지 낀 말하자면 노장동락(老壯同樂)의 자리가 된 셈이었다.
잠시 간단한 협의가 끝나기가 바쁘게 다들 지난날의 학창시절을 회상하면서 감회에 젖었다. 주로 은사님들에 얽힌 회고담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성품이 급해서 야무지게 매를 드셨던 수학선생님 한 분과 독립투사이신 김도태(金道泰)선생님의 두 분이 대조적으로 부각되었다. 김 선생님 말씀이 나왔을 때 나는 '창씨개명'에 얽힌 씁쓸한 기억이 되살아나서 잠시나마 면구스런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미 오래 전에 고인이 되셔서 이제는 존안을 대할 일도 없는분이기는 하지만.
내가 다닌 중학교는 서울의 사립학교였다. 입학 당시는 학교 명칭이 고등보통학교라고 불리우던 때였는데, 보통학교에서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것을 흔히 '높은 학교에 간다'고 말한 것도 아마 '고등' 이라는 명칭에서 연유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진학을 하고 보니 보통학교와는 너무도 분위기가 달랐다. 지금까지는 수업은 말할 것도 없고, 학교 안에서는 일상의 용어나 이름까지도 일본어 일색이었는데 '높은 학교'는 그것이 아니었다. 시종일관 우리말로 수업을 하시는 분이 계신가 하면 쌀, 보리 혼식처럼 우리말과 일본말과 '반섞이' 수업을 하시는 선생님도 없지 않았다. 이름도 대개 우리말로 불러 주셨는데 사립학교에서나 있을 수 있던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김 선생님은 내가 2학년 때 학급 담임을 맡으신 분이었는데 학생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있고 존경받던 선생님 중의 한 분이었다. 3·1운동 당시 20대의 젊은 나이에 민족대표 48인 안에 들었다가 2년 가까운 옥고를 치른 분이다. 이런 것을 자세히 안 것은 해방 후의 일이지만 독립투사라는 것은 그때도 선배들의 입을 통해서 은밀하게 전해 오고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 사이에서는 널리 알려진 일이었다. 그렇다고 시대가 시대인 만치 우리들 앞에서까지 표나게 사상을 들어 내시는 일은 없었다.
일본은 그때 중국을 같잖게 보고서 지나사변(支那事變)이라는 이름으로 전쟁을 도발했었다. 그리고 국민 총동원법이니 뭐니 하는 법령을 발동시켜서 우리나라 사람들을 억누르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라는 해괴한 글을 지어서 어떤 모임에서나 복창시키고 있었는데, 우리는 어린 호기심에서 가끔 김 선생님을 지켜 보았다.
선생님은 거의 입을 다물고 계셨지만, 설령 입을 벌리셨다 해도 그것은 건성 움직이시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어떤 노래의 구절처럼 정말 어둡고 괴로웠던 나날이었다. 그런 와중에서 이제 표나게 드러나지 않으면 안 되는 난처한 일이 일어나고 말았으니 그것이 바로 '창씨개명(創氏改名)'이다. 막다른 다짐을 할 때 우리는 가끔 '성(姓)을 갈 놈' 이라는 말을 쓴다. 이것은 성을 간다는 쪽보다는 어떤 상황에서도 성은 갈 수 없다는 우리의 통념을 강하게 뒤집어 말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창씨개명은 잘 알려진 것처럼 일본식으로 성과 이름을 갈라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들은 자발적인 것처럼 나팔을 불어 댔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간교한 상투수단이었고, 사실은 더할 나위 없는 강권을 발동했던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성을 간 놈들'이 된 셈인데, 그 과정에서 적극적
으로 성을 간 사람도 없지는 않았지만, 대개는 에멜무지로 시늉만 낸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따지는 것은 50보 100보의 빈축을 면하지 못할는지 모르는데 성의 뿌리를 지키려고 애를 쓴 꼴불견인 '창씨' 들이 많았다.
어쩔 수 없이 합뼈(일본 등거리)는 걸치지만 갓을 벗을 수는 없다는 오기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어떤 만담가는 에하라 노하라(江原野原)라는 야유의 작명을 해서 화제가 되었었고, 어떤 이는 '國本世'라고 지었다가 사상이 나쁜 불온분자(不穩分子)라고 호된 제재를 받았다는 풍문이 나돌 았다. '國本世' 는 일본음으로는 '구니모도세' 즉 '나라를 돌려 달라'는 뜻이다. 저들의 애국은 약이 되고 우리네의 애국은 독이 된다는 투의 억지였지만 그런 풍문을 듣기만 해도 우리는 피가 끓었다.
해방이 되기 4~5년 전의 일이었으니 앞을 내다보는 사람이면 일본 패망의 조짐을 희미하게나마 엿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되는데 별로 그렇지도 못한 모양이었다. 그동안 의연하게 지조를 지켜 오던 일부 민족주의자들이 저들의 침략정책에 동조해서 유감 없이 전향한 것은 두고두고 애석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저명한 작가는 솔선해서 모범적인 일본 이름으로 고쳐서 일본의 위정자들로부터 크게 찬양을 받았었다. 해방이 되자 재빨리 속죄하는 내용의 작품을 써서 한마당의 악몽으로 둘러댔지만, 다된 죽에 코빠친 꼴이 되고 말았다. 똑똑한 민족주의자로 알려져 있었는데, 그가 전향한 것을 보면 당시의 일제 억압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만하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역사의식의 빈곤을 드는 사람도 없지는 않다. 사람이 한평생 지조 있게 처신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입증하는 좋은 예라 하겠다.
이제 와서 굳이 지난날의 어두웠던 시절의 민족의 상처를 들먹이는 것은 누워서 침 뱉는 격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다만, 이름만은 기를 쓰고 우리말로 불러 주시던 모교의 스승님들까지도 어쩔수 없이 역성(易姓)의 대열에 끼고 말았으니 얄궂기 이를데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김 선생님은 끝내 창씨를 거부하셨다. 선생님은 체구도 부대하셨지만, 의연한 자세는 마치 외롭게 버티는 거목(巨木)처럼 대인(大人)의 풍도(風度)가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그 무렵 학생들의 출석부는 하루하루 창씨명이 붙어 나갔다. 한동안 나는 학교에 창씨한 사연을 신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의 이름에는 아무런 변동이 없었다.
김 선생님은 이것을 눈여겨 두셨던 것 같다. 어느 날 운동장에서 나와 마주치자 '성을 지키는 것을 보니 자네 집안도 지조가 대단하시군....' 하시며 은근한 눈길을 보내 주시는 것이 아닌가? '때로는 눈이 입보다 말을 더 잘한다'는 속언이 있지만, 선생님의 시선 속에는 의미심장한 격려가 들어 있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에게는 그 시선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나는 그때 낮이 뜨거워서 아무 말씀도 못드린 채 돌아서고 말았다. 그 뒤 얼마 안 있다가 출석부의 이름을 고쳤기 때문에 그것으로 본색(本色)이 드러난 셈이지만 선생님께는 두고두고 마음이 개운치를 않았다. 뒷날 학도병 사건으로 치른 옥고가 선생님의 격려에 대한 보답이 되었으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최근의 외신 보도에 따르면 앞으로는 일본에서도 우리 이름을 한국음으로 적기로 했다고 한다. 그들의 부실한 음절문자(音節文字)로 얼마나 흡사하게 표기할는지 의심스럽지만, '창씨개명'의 악몽을 되새길 때 그들의 발상도 많이 달라졌다는 느낌이 든다.
'황국신민서사'나 '창씨개명'은 주로 당시의 총독인 '남(南)'인가 '미나미' 인가의 망상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어서 공출, 징병, 징용, 학도병, 정신대 등 우리의 수난이 더욱 가중되는데 한 사람의 악랄한 발상이 우리 온겨레를 그토록 괴롭혔던 것이다.
해방 뒤에 우연히 나는 이곳 공주에서 김 선생님을 만나 뵐 기회가 생겼었다. '서울여상'의 교장으로 재직하실 때였었는데 초청 정구대회에 학생들과 동행하신 길이었다. 나는 선생님과 나란히 중동(中洞) 거리를 걸었다. 만년에 더욱 부대해지신 선생님은 좁은 거리가 꽉 차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너그러우신 인품 때문에 더욱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길 옆의 가게에서는 낯선 손님을 놓칠세라 기웃거렸지만, 나는 지난날의 면구스런 기분도 깨끗하게 잊고 자랑스런 우리 선생님을 곁부축하며 걸었다. 글자 그대로 사제동행(師弟同行)의 흐뭇하던 장면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오른다.
김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신 지도 어언 30년이 지났다. 오늘 자리를 함께 한 우리 동문들은 다같이 선생님의 유덕을 기리며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어떤 사람은 선생님의 뛰어난 기억력을 들어서 말했고, 어떤 이는 폭넓은 인품을 회고했다. 또는 젊은 가슴을 뿌듯하게 해 주시던 매혹적인 수업이며, 은근한 화술을 화제에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들의 마음을 가장 강하게 움직인 것은 역시 지조(志操)로 일관(一貫)하신 스승님의 뚜렷한 발자취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녁도 접장의 길에 몸 담은 지 그럭저럭 40년에 접어든다. 스승님의 뚜렷한 발자취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럴듯한 조그마한 발자취 하나쯤은 남겨 놓아야 할 터인데........
(한국수필, 1985,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