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면 지역은 어쩌면 부산의 중심지라 할 수 있다.
로터리를 중심으로 오거리가 펼쳐져 방향마다 중요 도로로 연결된다.
먼저 동구 방향을 등지고 좌로 9시 방향은 구포 방면으로 연결되며, 우측 3시 방향은 전포동으로 정면에서 2시 방향은 부전시장을 지나, 양정, 부산시청, 동래 방향으로 연결된다.
또한 10시 방향은 연지 초읍 방향으로 연결되는 이른바 서면은 부산의 주요 지역으로 나가는 통로가 되며 반대로 얘기하자면 부산 전역에서 모이는 곳이 서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기에 부산하면 서면 지역을 가장 중심지라 할 수 있다.
이번 9호부터는 서면을 중심으로 각 방향마다 설명을 하기로 하고, 우선 필자가 다니던 고등학교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이유는 필자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부산상업고등학교로 현재 서면 로터리에서 9시 방향으로 들어서면 자리하는 현 롯데백화점이 있는 곳이다.
당시 부산상고는 부산은 물론 전국 고교 중 최고를 자랑하는 명문고로써 필자가 69회 졸업생이었으니 100여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며, 야구, 축구는 물론, 학업 수준도 전국제일을 자랑한다.
이는 당시 문교부 주최 전국 고교 학업능력 평가시험에서도 필자의 모교가 전국 1등을 수 차례한 결과로 잘 나타나 있으며, 당시 고교진학제도는 1순위 지망이 실업계였으며, 인문계는 1순위 지망자 중 불합격자 중에서 성적순으로 선별했기에 실업계가 최고의 전성기와 공부 잘하는 학생들은 전부 실업계로 진학했던 시절이었다.
모교가 최고의 수재들로 가득 찼기에 중학교 진학 담당 선생님들은 반에서 1~2등에 못 들면 부산상고에는 원서를 서주지 않았다.
혹자는 필자가 머리 좋았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어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밝히고자 한다.
필자는 중학교를 제대로 나오지 못해 검정고시를 거쳤고, 당시 어려운 형편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좋은 직장(당시 1순위가 은행 계통)에 취직을 위해 상고를 원했다.
서면 근처에서 아르바이트(구두닦기, 신문팔이, 비닐우산 장수 등)를 하다보니 고등학교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어 상고는 부산상고만 있는줄 알았기에 당당히 부산상고에 접수(접수번호 38번)했다.
접수 후 부산상고가 대단한 학교라는 사실을 알고 학력고사 전까지 하루하루가 악몽 속에 지냈던 시절이 있었다.
더구나 1차 부산상고에 떨어지면, 당연히 인문계로 가야 하기에 반드시 1차 합격을 해야만 했으며, 더구나 검정고시를 위해 1년 재수를 한 마당에 상고 진학을 위해 또 재수를 할 수는 없었기에 더욱 가슴은 타 들어갔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의 은혜일까?
접수 마감 후 뉴스에서 부산상고는 약 0.9:1로 미달이라는 발표가 터져 나왔다.
즉 그만큼 센 학교이기에 응시자들은 안전 합격을 위해 한 단계 낮은 학교로 몰렸고, 그들 학교는 반대로 15~18:1 이상의 경쟁률을 나타냈다.
뒤에 부산상고는 추가 접수를 받아 약 1.7:1 정도의 경쟁 속에서 시험을 치뤘으며, 필자는 운이 좋아 합격한 것으로(머리 좋아 공부 잘 한 것이 아님) 알아주기 바란다.
어찌 되었던, 그렇게 부산상고에 입학했으며, 그 이후에도 대통령(노무현)을 배출한 명문고교로 더욱 유명세를 탔다.
학교 자랑은 이 정도로 하고, 당시 부산상고는 4평이 모자라는 만평의 부지로 공립학교지만, 부산, 아니 전국 최고의 땅값을 자랑하는 지역에 위치하여 부지를 매각하면 전국최고의 시설고교를 5개 짓고도 돈이 남을 정도라고들 말이 많았었다.
그런 학교를 동창회에서 극구 만류 해도 공립인 까닭에, 롯데그룹에 매각되어 현재는 롯데 백화점과 부속건물들이 그 자리에서 명성과 부를 떨치고 있다.
부산의 최고요지에 자리한 부산상고는 100여 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당감동으로 이전하여 교명을 개성고등학교로 변경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필자는 학창시절도 서면에서 보냈으며, 직장 또한 서면(제일제당) 인접 지역에 있어, 서면은 필자와 인연이 더욱 깊은 곳이다.
당시 서면 하면 빼놓을 수 없던 곳이 천우장과 태화극장으로, 천우장은 냉면으로, 태화극장은 요지에 위치하여 늘 사람들이 붐비고 약속장소로 많이 선정되던 곳이다.
현재는 태화백화점으로, 또 다른 건물로 변모 했지만...
필자는 고학할 당시 늘 태화 극장과 천우장을 오가며 우산과 신문을 팔고, 때로는 구두닦이도 했었다.
그렇게 고교를 졸업하고 취업한 곳이 삼성그룹이다.
[은행은 특채로 갈 수 있는 자격이 충분했으나, 부모가 안 계신다는 이유로 면접에[서 떨어진다며, 당시 직업보도실 선생님께서 응시를 못하게 하여 은행원의 꿈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
사성그룹은 서울지역과 부산지역 두 곳에서 공채를 했지만, 필자는 무슨 생각인지(아마도 서울을 동경했으리라)서울지역에 응시를 했고, 전국 상고 졸업예정자들은 다 몰렸으니, 300:1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시험을 두 개 학교로 나뉘어 치뤘으니, 가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우리학교는 15명이 응시하여 13명이 합격했으며, 관계사로 발령받기까지 서울을 6번이나 올라가야 했다.
필기시험, 면접, 적성검사, 신체검사, 그룹 연수, 발령회사 면접 등
그렇게 하여 어렵게 발령받은 회사는 제일제당이었으며, 당시 필자는 제당 본사(명동에 위치 삼성본관 23층)인사과로 발령을 받았으며, 고교졸업생으로는 인사과 발령은 유일하게 전무후무였다는 소문도 있었다.
대기업체 인사과 근무는 진급과 직결되는 요직이었지만, 필자는 관심이 없었다.
이유는 서울에서 생활이 녹록치 않았다.
친척집에서 기거 문제와 쥐 꼬리 만한 월급에, 높은 물가와 교통지옥 등, 저축은 꿈도 꿀 수 없었다.
하여 부산으로 발령을 내어달라고 수차례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6번만의 요구 끝에 드디어 발령장을 받는 순간, 당시 대표인 이수빈 사장이 직접 사령장을 주면서 아까운 인재를 지방으로 보내게 되었다며,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당부했다.
우여곡절 끝에 부산으로 발령받은 필자는 고난의 행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후일 안 이야기지만, 담당과장은 고교 선배였으며, 상부에서 혹독한 트레이닝을 시키라는 주문도 있었다는 사실은 몇 년이 지나고 알았다.
어느 정도 만족할 업무성적을 내자 그때서야 담당과장이 술 한잔 하자며, 지난 일을 말해주었다.
서러울 정도로 고되게 생활(고참들의 괴롭힘과 힘든 업무는 물론 야간근무, 숙직 등은 도맡아 해야만 했다)한 직장생활이 봄눈 녹듯 사라지며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죄송합니다.
또 필자의 얘기만 나열했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다음호에선 필자 얘기는 빼고 설명 드리겠습니다.
첫댓글
부산갈매기가 다시 날아왔습니다.
그동안 궁금했습니다.
심심했습니다.
글을 쓰다보면 자신을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나목이 되어야 하지요.
좋은 길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