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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인생 시리즈 3 B회장님의 첫 사랑
예절의 고장이라는 충남 예산,
그중에서도 예당 저수지가 있는 대흥 고장의 실화입니다.
이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55년 전 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B소년은 어린 유년시절에
예산 대흥면 봉수산 줄기이면서
부여 임존산성 자락인 대흥면에서 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마을 앞에는 공사중인 예당저수지를 가슴에 품고 살았지요.
예당저수지는 오늘날에는 전국 최고 넓은 저수지이지만,
당시 1956년에는 그저 공사를 하다말다 또 공사를 해 나가는
그런 계곡속의 약간은 넓은 것 같은 논들로 형성되어 있던
그런 곳이었지요.
그래도 그 유년시절은 B회장님에게는
잊을 수 없는 환상속의 고향이면서도,
지질이도 가난하게 지낸.....
그런 이중적 구조와 사고를 갖게 하는 곳입니다.
가정 형편이야 당시 여늬 집 처럼
그저 쪼들리며 살던 전형적인시골 살림이었으니
그리 풍족한 생활이 아니고,
그러다 보니 어려서부터 웬만한 농사는
부모님과 같이 지어야 하는 그런 생활이었지요.
어떻게 생각해 보면,
앞뒤가 다 산으로 꽉 막혀 있는데다가 가정 형편도 어려웠으니,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암담한 생활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어느 봄날, 그
러니까 쌍팔년도(단기**88년)도 저물어 가고,
겨울이 지나 봄이 왔을 때에
B소년에게도 설레임이 다가온 사건이 있었습니다.
10살 소년의 암담한 마음에
어느 한 소녀가 가슴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었지요.
그녀는 당시 대흥면장님의 고명 딸이었는데,
3학년이 되자,
같은 반 옆자리에 앉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항상 말쑥하게 차려 입은 옷 매무새를 비롯하여
풋풋한 풀냄새를 닮은 비누향도 한 몫을 하였지만,
갸름하게 생긴 예쁜 얼굴은
늘 B소년의 눈가에 아른 거리게 만들었습니다.
집에 와서도, 잠을 잘 때도, 밭에서 일을 할 때도,
뒷산에 가서 땔나무를 할 때도
신기루처럼 늘 가슴속에 눈가에 어른거리며,
한 평생을 설레임에 가슴조리며,
어려울 때마다 희망의 지표가 되어주었고,
길잡이(?) 역할을 해주었던
유년시절부터 환갑이 넘을 때 까지의 마음속의 연인이었고,
이상향이었고, 어려움을 극복하게 한...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스스로 결정한
짝사랑 애인이 되었던 것이지요.
한 마디로 그녀는 B군 인생의 전부였고,
인생의 길고 긴 여정의 저 멀리 아스라이 보일듯 말듯
늘 일정한 거리를 두고 앞서가며 B군을 이끌고 가는
마음 속의 나침반이었던 것입니다.
초등학교 3학년이 지나고, 4학년이 되고, 5,6학년을 거치면서도
그녀에 대한 연민인지, 그리움인지, 부러움인지 알 수 없는
안개 속에 환상 속에 서 있으며,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듯한 그녀 !
그래서 다음에 열심히 공부해서 내가 잘 되면 그
녀와 결혼하고 싶다고 속으로 수없이 되뇌이고 다짐하고,
설렘 속에 살아간 ....그런 그녀 였던 것입니다.
그래도 한번도 좋아한다 사랑한다 말 한 마디 할수 없었던 그녀..
그런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결심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이런 지긋지긋한 깡촌에서 앞날이 보이지 않던 그 시절에
더 열심히 공부에 열중하게 했던 그녀 였던 것입니다
.
겨울이 되면 땔감을 덜 쓰면서 살기 위해
B군을 포함한 7남매, 그리고 부모님 등
9식구가 한 방에서 잠자며 살던 시절에도
학교에 갔다오면, 아버지가 시키는 일들을 하고,
저녁이 되면 등불을 켜 놓고 밤 늦게 까지 공부하는
그런 생활의 연속이었지만,
그런 와중에도 그녀 C양은 B군에게는 천상의 선녀로,
환상 속의 그녀로 자리잡고 있으며,
끊임없이 B군에게
희망의 그루터기가 되어 주었던 것이지요.
그러던 1959년, B군은 큰 결심을 하게 됩니다.
일전에 고모가 집에 오셨다가 조카가 공부를 잘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언제 서울에 오면 한번 들리라고 적어준 주소가 있었는데....
장날 아버지는
그동안 B군이 열심히 꼴을 베어다 주고,
어머니는 열심히 설거지한 후 음식 찌거기를 거두어 먹였던
돼지 2마리를 팔았던 것입니다.
당시 돈으로 50만환이면
그 쪼글쪼글 시골 살림에 거금이었는데,
B군의 아버지는 기분이 좋아져서 막걸리 한잔 걸치시고는
그 거금인 현금을 들고 집에 돌아 오셨던 것이지요.
초등학교를 막 졸업한 상태에서
그 돈을 본 B군은 일생일대의 대단한 결심을 하게 되고,
일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
50만환 중 일부를 들고 서울로 무작정 상경을 하게 된 것입니다.
예산역까지 걸어와서 기차를 기다리는데,
혹시나 해서 역사 뒷 편에 숨어 있었는데,
B군의 아버지는 아들이 돼지 판돈 일부를 들고 가출한 것을 알고는
급히 뒤쫒아 예산 역으로 왔다가,
아들이 없는 것을 알고는 포기하고 되돌아 간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B군이 아버지에게 붙잡혔더라면...
오늘날 B회장님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하여튼 우여곡절 끝에 서울 역에 도착해서는
그 고무네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보니,
오늘날 남산 필동에 있는 남산 한옥마을에 판잣집을 짓고 살고 있는
고모네를 찾아가 묵으면서
며칠 남지 않은 경기 중학교 시험 준비를 하게 됩니다.
고모부는 당시 목수로서 집을 지어주거나,
수리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었는데,
그 집에 며칠 머무르면서 입시를 준비했고....
그결과 당시로서는 우리나라 최고 중학교인
“경기 중학교”에 당당히 올 백(ALL 100점)으로 합격을 하게 됩니다.
그후 학교에 다니는데 고모부 집은 작고 눈치가 보였기에
다시 그 집을 나와 노량진 언덕배기로 거쳐를 옮기게 됩니다.
오늘날은 그 노량진이 학원가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지만,
당시에는 한적한 시골이라
돈이 없어도 같이 지내는 사람이 있어
그럭저럭 살아가갈수 있었지요.
당시 노량진에서 경기중학교 까지 걸어 다니며,
공부를 시작 했습니다.
당시에는 분기별로 학비를 냈는데,
다음 학기 등록을 못하자
선생님은 학교에 나오지 말라고 했지요.
할 수 없이 교실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밖에서 눈치 공부를 하기도 하고,
친구가 노트 정리한 것을 빌려보기도 했지요.
경기중학교에 다니는데 당시 용산고 국어 선생님을 알게 되었고,
그분이 중학교 전과를 빌려 주어
공부를 독습으로 하게 됩니다.
그렇게 한 분기가 지나면서 분기말 시험이 다가오자,
학교로 갔는데 마침 선생님은 그 정성에 감복했음인지
시험을 보게 해 주었습니다.
물론 모두 100점을 받는 기염을 토하게 되지요.
그러나 분기별로 내는 수험료를 내지 못하고
계속 전전긍긍하며 어려운 학창 시절을 보내다가
이를 딱하게 여긴 선생님이 중졸 검정고시를 보도록 권유했고,
준비후에 검정고시에 합격하였고,
또 고등학교 검정고시도 패스하게 됩니다.
단신으로 서울로 올라와 낮에는 돈을 벌면서
밤에 공부하며
아주 험난하면서도 앞이 잘 보이지 않던 그 시절을 보내면서 이룩한 쾌거였지요.
그런 생활 속에서도 계속 마음 속에는
그 초등학교 동창인 C 양이 늘 마음 속에 머물러 있어
힘이 돼 주었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릅니다.
그후 18세가 되어 보통 사람들 보다 먼저
서울대 상대로 진학을 하였지요.
그 해인 1964년은 고향인 예산 대흥에 있는
예당 저수지가 완공되는 해이기도 했습니다.
대학에 다니면서도 돈이 아쉬웠던 B군은
돈이 되는 직업은 무엇이든 해 가면서
다양한 돈이 되는 직업을 전전하며,
이 세상에서는 꼭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일념으로
공부하며 돈을 벌면서 학업을 마칠수 있었지요.
그렇게 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B군은
더 멀리 내다보게 됩니다.
서울 상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것도 부족하여
미국 유학을 꿈꾸게 됩니다.
그런데 유학 자금은 없고....고심 끝에 묘안을 생각해 냅니다.
당시 부산으로 가면 화물선이 여러 개가 있는데...
그 중에서 마도로스나, 화물선원에게 잘만 보이면
미국행 배에 탈 수도 있다는 말을
언뜻 들은 기억이 나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르바이트로 번 돈 중에서 일부 모은 돈을 가지고,
이윽고 부산으로 간 B군은 계획에 착수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계획대로 선원에게 잘 보여,
드디어 그 배를 타게 됩니다.
오늘날에는 화물선도 속도가 빨라 2~3주면 미국으로 갈수가 있는데,
당시 1968년도 즈음에는 3개월 정도를 운항해야 파나마 운하를 돌아
뉴욕으로 갈수가 있었지요.
하여튼 그렇게 배에서 장거리 여행을 하면서도
그 배 선원들의 온갖 잡역, 온갖 비서, 온갖 전속부관 역할을 하며,
시중을 들어가며
미국 뉴욕으로 가서 콜롬비아 대학교에 입학을 하게 됩니다.
미국 콜롬비아 대학교는 전 세계에서 5위 이내의 명문 사립이었는데,
드디어 그 학교에 입학을 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마땅히 거쳐할 숙소가 없다보니, 또 다시 묘안을 내게 됩니다. 그
것은 뉴욕은 현재 우리나라 서울처럼 지하철이 있는데,
그 지하철의 입구 깊숙한 곳에 있는
선반 모양의 장소로 올라가
그 곳에서 침낭을 덮고 자면서
지하철 전기 불빛으로 공부를 하고,
아침이면 햄버거를 먹고 학교에 가고,
아르바이트 후에는 다시 그 지하철 선반위로 올라가
공부하고 잠자는 과정의 연속을 .....고난의 학업 행군을 ....
그 것도 장기간 장거리 고난을 감수하면서
드디어 콜롬비아 대학교도 수석으로 졸업하게 되지요.
그 과정에서도 고향의 그 C양은 B군에게는 마음 속의 태양으로,
인생의 목적으로, 버팀목으로 작용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장사를 시작하게 되면서
실패와 성공을 해 나가면서 한 많은 우여 곡절의 인생살이가 시작됩니다.
..............................................................후략하고...................
세월이 50년도 더 흘러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성공한 B회장님은
보통사람들이 가질 수 없는 엄청난 부와 명성을 얻게 되지요.
그리고는 생각을 하고, 고뇌를 하고, 결론을 얻게 됩니다.
무엇을 하여야 할까하고. 고민을 하게 되지요.
결론적으로 자비로 사회복지 사업을 하기로 합니다.
대상은 자식은 있으되,
그 자식이 지질이도 못나서 부모를 떠나
한 번도 그 부모를 찾지 못하는 자식을 둔
고령의 노인들을 무료로 숙식하도록 하는
양로원을 만들고, 그
들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나이는 들었으되 자식이 없는 사람은
아예 국가에서 지원을 합니다.
제도적으로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지요.
{실 예}를 들면 서울 서초구에 사는 무연고 노인은
월 120만원과 12평 짜리 임대 아파트도 줍니다.
아파트 관리비는 10만원 안팍 으로 내게 되지요.
그러니 웬만큼 절약하면 사는데 큰 문제는 없지요.
그런데 호적에 자식이 생존해 있으면...
그 노인은 지원 대상에서 제외되다보니,
사실 이 세상에서 그들이 제일 불쌍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노인들을 대상으로 자선 사업을 하는 B회장님은
그 지원 규모를 자꾸 늘려가며,
사업규모도 계속 확장하고 있지요.
그러던 어느날.......그러니까.....
이제 등 따시고, 배도 부르다 보니..
문득 자신의 젊은 날의 지탱점이 되었던
B회장님의 꿈에도 못 잊었던 C양의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불현듯 보고싶고,
미칠것 같이 떠오르는 얼굴....그
상큼한 소녀의 얼굴이 떠오르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그녀에 대해서 물어보게 됩니다.
초등학교 동창생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왜냐면 그 당시 그 면장 집 딸래미는 사실
주변 다른 동무들 한테도 인기가 있었으니까
모른척 하면서 별 관심은 없으나,
그래도 걔는 어떻게 사냐고
지나가는 말투로.
그러자 B회장님의 기대대로 누군가 얘기 해 줍니다.
“어! 계, 지금 좀 안됐지!”.
“어떻게 안됐는데?” 역시 별 관심은 없으나,
그냥 지나가는 말투로 물어 본다.
본심을, 속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B회장님의 기대대로 아주 자세히 얘기해 준다.
“응 걔는 시집간지 1년만에 남편이 죽고,
이제까지 그냥 혼자 살아!
거기다가 유복자 딸이 있는데..
그거 하나 키우면서. 안됐어. 그
래도 동창회는 잘나오는 편이야!.
그리고 걔는 지금 인천 연안부두에서
홍성집이라는 간이 횟집을 하고 있어.
밤새 일하고 그러나봐!”
들을것은 다 들었다.
즉 알 은 이제 다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몇 십년간 간직해온 첫 사랑의 마음속의 여인 C!
그 다음 날, 저녁에 인천 부두로 향한다.
밤 11시 쯤, 인천 연안부두에서 말로만 듣던
그 간이 식당 홍성집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는 거기서 혼자 일하는 어떤 할머니를 보게 된다.
C양의 모습은 전혀 없다.
저 여자는 설마 아니겠지?
그리고 이리저리 헤집어 보다가,
조금더 가까이 다가간다.
그래도 C양은 그곳에 없다.
아무리 둘러 보아도 C양과 닮은 점이 없어 보인다.
긴 의자에 걸터 앉자, 반가이 인사한다.
어서 오세요.
이집에서 자연산으로 제일 좋은 것이 뭐요?
광어 좋은 것이 있는데,10만원이라 혼자 드시기에는 너무 비싸요.
그래도 그거 하나 해 주슈!
그러면서 천천히 할머니 주인을 표 안나게 힐끔 힐끔 처다본다.
군대 용어로 수색하듯 훔쳐 본다.
이윽고 50여년전의 C양의 모습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 것을 찾게 된다.
그리고는 마음 속에 그려왔던, 아니 간직해 왔던 C양의 원본
환상속의 사진과 너무나도 차이가 많이 나는 것에
실망을 금할 수가 없다.
후회가 막급하다.
그냥 만나보지 말것을.....
아!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산산히 깨져버린 환상이여!
그러다가 다시 말을 건넨다
사장님! 손님도 없는데, 이리와서 같이 한잔 하십시다.
그러자 그녀는 다가와 앉는다.
마주보며 소주 잔을 기울인다.
그녀도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나도 많이 변했고,
그녀 보기에 나도 나이가 많이 들었음에,
많은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있음일 것이다.
피장 파장이다.
말을 걸어 본다.
사장님도 이런 장사를 이 나이토록 하고 있는 것을 보니
사연이 많이 있나 봅니다.
그렇지요. 제 인생도 험난한 길을 걸어 왔지요.
하면서 그년 인생의 여정을 한순간에 주르륵 털어 놓는다.
아마도 다른 손님들한테도 그런 질문을 받았을 것이고,
또 그에 대한 답변도 수없이 했을 테니까.
그러니까 그 C할멈도 나를 그의 옆자리 짝꿍으로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면서 또 푸념한다.
이런 생활을 오래 하다보니 별사람 다 봤습니다.
젊은 처자 시절부터 어떻게 한번 안될까!라는 기대로
치근덕 대는 사람도 많았고, 은근히 응하지 않으면 안 좋을
것이라는 겁도 주는 사람도 있었고...그렇게 치근대는
벼리 별 사람 다 있었지요.
이런저런 인생사 얘기를 하다가 그 할멈이 묻는다.
저야 그렇다 치고, 사장님은 보통 사람 같지는 않은데...
무슨 사연이 있어 이 늦은 밤에 홀로 이곳에서
술잔을 기울이시나요?
그 말에 갑자기 당황해 지는 자신을 느끼며,
황급히 말을 받는다.
아! 예? 저는 오래전에 이곳에서 헤어진 애인이 그리워
가끔 이곳에 들립니다.
예! 그랬군요!
그런데 사장님은 가만히 보니 어디서 많이 뵌 분 같네요!
그러자 속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얼른 말을 되 받는다.
저야 한국 표준 얼굴이다보니 그런 말을 자주 듣지요.
아! 예! 그렇군요!
그리고는 서로 침묵에 잠긴다.
더 앉아 있다가는 속 마음을 들킬것 같아
자리를 털며 일어난다.
오늘 자알 먹었습니다.
그러면서 지갑을 열어보니,
현금으로 50만원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는 다 내어 놓으면서,
횟값하고, 나머지는 울적한 저랑 술 한잔 같이 해줘서 고마움에
팁으로 놓고 갑니다.
장사 잘해서 부자 되세요!
그리고는 천천히 일어나 되돌아 나온다.
아유! 이렇게 안해도 되는데....
하여튼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그런 말을 들으며, 손을 흔들고 돌아 나온다.
또 돌아보면 눈물이 날것 같아 되돌아 볼 수가 없다.
그리고는 서울로 되돌아 오는 자가용 속에서
앞에 앉은 운전기사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옆 창을 바라보며
가느다란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는 혼잣말로 나직히 되뇌인다.
그냥 찾지 말것을!
내마음 속의 천상공주 C양 모습 그대로 간직하는게
더 나을것인데!
그래서 사람들은 첫 사랑은 만나지 말라고 했던가?
이 이야기도 애틋하게 한 갑자를 넘게 살아간
우리네 이웃의 이야기요.
우리들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한번 쯤 곰곰이 생각해 보고,
타산지석으로 삼자고 이글을 씁니다.
2011. 3.3. 밤 12시에. 청산 드림
첫댓글 혹??? 본인 이야기를 각색해서 쓴것은 아니겠지????
내 고향은 당진 면천이야!
그리고 여기에 각색은 없어
과거는 항상 아름다울 뿐이여~ 옛날 소중했던 추억은 그대로 간직만 해야제.......좋은 글임네다(A플러스)
회원들을 위하여 많은 시간과 노력, 수고를 아끼지 않으시는 정公께 항상 존경을 표합니다! 감사!
참으로 그런가 보네,디프의 아 옛날이여!도 있는데!
조금씩은 고향생각도 나고, 추억을 의미있게 곱씹을 나이도 되었나 봅니다.
건강하고, 건강하게 지내길 바라면서!
잘 읽었습니다.
글쎄! 우리들 나이가 거기까지 간것은 사실이죠! 그래도 아스라한 옛 생각은 하면서도 사는 나이이기도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