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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고난은 무엇인가? 고난은 인간을 성장시키기도 하고 파멸에 이르게도 한다. 회복 불가능한 질병에 사로잡힌 환자는 일생을 작고 폐쇄된 병실에서 질병과 사투하다가 끝을 맺기도 하고, 의식은 있으나 거동이 어려운 사람들은 시험에 들어 하나님과 담을 쌓고 지내기도 한다. 시험에 든 사람들의 말은, 하나님이 왜 나에게 이런 시험을 주셨느냐는 거다. 그래서 하나님께 든 서운한 마음은 미움과 원망으로 발전하여 불신자로 전락해버리게도 한다.
실로 인간은 ‘고난의 종’이라 할 만하다. 욥은 그 중에서도 가장 정점에 있었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욥기는 개인의 이야기를 빌어 신앙 공동체로서 이스라엘 민족이 떠안았던 고난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과 고민이 담겨 있다. 스티븐 뎀프스터는 간략하지만 유용한 지식들로 그의 책 『구약신학』에서 고난에 대한 명쾌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
욥기: 우주의 도덕적 통치
지혜 문학의 첫 번째 책인 욥기는 증거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며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사람들의 기대와는 다른 질서를 가지고 있음을 분명하게 말한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적인 사탄(슥 3장)은 의로운 이방인인 욥의 원수로 나타나는데, 이 욥은 앞서 그의 덕에도 불구하고 죄 많은 이스라엘을 위해 성공적으로 중보할 수 없었던 의로운 사람으로 언급되었다(겔 14:14, 20).
욥은 경건한 자의 예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부유한 사람으로 소개된다. 욥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전형적인 사람이었고, 이 때문에 사탄의 공격 대상자가 된다. 사탄이 욥에 대해 하나님께 비방하는 내용은 에덴동산에서의 하와를 향한 뱀의 경멸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Kline 1962: 462). 하나님은 욥이 아브라함처럼 깊은 고통 가운데서도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길 것인지를 시험하신다. 한편 욥기의 메시지의 일부분은 의로운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이다. 이야기는 욥이 친구의 방문을 받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 친구들은 신과 고통과 우주의 운행에 대해 인간 최고의 지혜를 가진 자들을 대표한다. 이어지는 논쟁은 친구들의 모든 생각이 불완전한 것임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 있지 않는 친구들의 결론은 신 혹은 인간의 완전함을 공격하는 결론에 이른다. 시도는 할 수 있었지만, 친구들의 제한된 인간적 생각은 큰 그림을 그려낼 수는 없었다. 하나님의 계시가 필요하다.
욥은 하나님과 친구들과의 논쟁을 통해 자신의 상황을 깊게 생각할 뿐 아니라 인간의 상태를 깊이 고려하게 된다. 첫 번째 애가에서 욥은 세상의 창조라는 정황 속에 자기 자신의 창조를 놓고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명령하실 때(창 1:3, '여히오르'), 욥은 "어둠이 있으라."고 외친다(욥 3:4, '여히 호세크').1) 하지만 욥은 자신의 고통 때문에 인간 존재의 고통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어찌하여 고난당하는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아픈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20절). 이 구절은 초반의 자신의 고통뿐 아니라 욥이 말하는 모든 것에 적용되는 것이었다. 다윗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의 대리인으로 세우신 것에 놀라지만(시 84), 욥은 하나님이 시간을 내어 인간에게 고통을 주신다는 사실에 놀란다(7.17~18). 욥은 단지 하나님이 인간에게 얼마의 안식을 허락하길 바랄 뿐이다. 인간의 창조는 난해하게 묘사되지만 악한 의도가 있을 뿐이라는 결론만 남는다(욥 10:8~14). 분명 욥은 인간 창조의 온전성에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참조, 14:1~12).
논쟁이 이어지면서 욥은 초월적 신 앞에서 발언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자신 편에서의 원인을 대변할 수 있는 신과 그 사이의 어떤 법적 중재인이나 중개인 혹은 구속자가 있어야 함을 더 깊이 인식하게 된다. 욥은 만약 자신이 죽으면(욥 16:18), 첫 번째 뿌려진 무고한 피와는 달리(창 4:10) 자신의 피가 땅에 덮혀 버릴 것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욥에게는 구원자가 필요하다. 사실 이것이 논쟁에서 욥의 유일한 희망이 된다. 절망의 순간에 욥은 그에게 이루어진 불의에 대한 증인으로 자신의 말이 철필로 돌에 새겨지기를 소망했다(욥 19:23~24). 이어서 욥은 놀랄 만한 믿음의 도약을 보이며, 자신이 죽더라도 자신을 위해 간청해 줄 구원자에 대한 소망을 표현한다(25~27절). 욥은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주고, 처한 상황에서 자신을 구할 하나님의 환상을 볼 것이라고 믿었다. '구원자'라는 단어는 이방인 룻과 보아스의 관계를 묘사할 때 사용된 단어다. 룻 이야기에는 가족원이 죽은 친척의 자식을 양육하여 그 가계의 이름이 이어지도록 할 책임이 묘사되어 있다. 욥기에서 '가족원'은 욥의 피가 구속받지 않고 흘려지도록 내버려 둘 자들이 아니다.
논쟁은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더니 유일하게 히브리 이름과 족보를 가진 사람 엘리후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 방향으로 진전된다(욥 32:2). 이에 대해 한 학자는 이렇게 묻는다. “논쟁에 늦게 끼어든 사람으로서 유일하게 히브리 이름을 가진 자가 이방인의 이름을 가진 자들의 쟁점에 반박하는 것이 과연 우연일까"(참조, Habel 1985: 448; Brown 1996: 84)? 정경의 정황과 욥의 메시지에서(욥 38~41장) 드러나는 아브라함(창 22:20~21)과 다윗(룻 4:19)과 연결된 엘리후의 족보는 하나님 말씀으로의 전환점 역할을 한다(욥 38~41장). 엘리후는 순전한 사람 역시 하나님의 징계와 시험이 필요할 수 있다는 관점을 제공한다. 하나님의 징계와 시험은 신적 총애의 표시이기도 하다(욥 33:16~17, 36:10). 그런 다음 엘리후의 말은 여호와의 등장 때문에 중단된다(37:1~24). 결론적으로 엘리후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이해하도록 돕는 인간의 지혜가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이런 인간적 관점은 이스라엘과 연결되어 있다.2)
하나님의 등장으로 어떤 새로운 정보들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하나님은 세상에 대한 이전의 이해를 바꾸어 주신다. 하나님의 첫 번째 변론은 세상을 공포의 집이 아닌 놀랍고 경이로운 곳으로 그려 준다(욥 38~39장). 미세한 것에서 장대한 것에 이르는 모든 창조물이 욥에게 제시된다. 엄청나고 다양한 피조물들이 욥에게 충분한 경이로움을 선사하지 않자, 하나님은 인간이 그 앞에서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두개의 거대한 피조물 "베헤못"(40:15~24)과 "리워야단"(40:25~41:26)을 보이신다. '베헤못'과 '리워야단'은 혼돈의 상징으로 인간으로서는 전혀 통제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베헤못'과 '리워야단'의 초인적 능력 외에도, 그들의 주된 특성 중의 하나는 오만이다. 실제 '리워야단'에 대한 묘사는 다음과 같이 마무리된다. “세상에는 그것과 비할 것이 없으니 그것은 두려움이 없는 것으로 지음 받았구나 그것은 모든 높은 자를 내려다보며 모든 교만한 자들에게 군림하는 왕이니라" (41:33~34). 욥은 마침내 놀라움과 경배함으로 말을 잃고,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창조물로서의 인간에 대한 질문에 대해 회개한다. 욥은 티끌과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를 했다기보다 인간의 상태와도 같은 티끌과 재에 대해 회개했다(J. G. Janzen 1985: 251~259).3) 인간 존재는 신의 희생물이 아니라 그 미약함에도 불구하고 신의 기쁨의 절정이 된다.
쟁점은 통제의 정당성 여부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의 위치에 있었다면 이 놀라운 피조물들의 통제를 시작조차 못했을 것임을 깨닫기 시작한다. 따라서 욥은 '하나님을 너무 몰아세울 수는 없다.' 이는 악이 하나님의 통제를 넘어선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방법은 욥의 것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욥은 문제들이 즉각적으로 완벽하게 해결되기를 바랄 수 있으나 하나님의 방식은 다르다. 세상은 하나님 중심이며, 하나님의 방식은 반역과 불의에 있어서도 포학이 아닌 인내와 온유함으로 해결해 나가는 것이다(Brown 1996: 100). 마침내 책 서두의 고발자가 잠잠해지게 된 것은 바로 '티끌과 먼지'를 통해서다.
욥은 겉으로는 시험 전과 동일한 인물이었지만 그 내면은 변화되었다. 욥은 새롭게 하나님 경외함을 배우게 된 것이다(참조, 욥 1:1, 28:28, 42:5). 욥의 땅, 가족, 소유들 역시 다시 회복되었다(42:7~17). 이들은 드라마의 단순한 도구들이라기보다 땅과 가족에 대한 '타나크'의 관심을 보여준다. 앞에서도 표현했지만 사탄의 목소리가 잠잠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탄이 책의 목적을 위해 자신의 역할을 다한, 단순한 문학적 도구인 것은 아니다. 사탄의 부재의 문학적 영향은 강력한 것이다. 사탄은 더 이상 할 수 있는 말이 없었고 욥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베헤못'과 '리워야단'으로 상징적으로 묘사된 악에도 사탄에 대한 어떤 암시들이 있다. 사탄은 하나님의 날선 검으로 결국에는 통제되고 무너뜨려질 것이며(참조, 사 27:1), 그 일은 오직 하나님의 방식과 하나님의 시간에 이루어질 것이다.
문학적 배경 속에서 욥기는 시편과 마찬가지로 비탄에서 찬양으로 바뀌어져 포로된 이스라엘 공동체와 이방 세계에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지혜는 불의의 시기로 보이는 현재의 세상을 이해하기에 충분한 관점을 제공한다(엘리후). 이방인이 이스라엘의 구속사를 이해한 것처럼(룻), 구속자를 기다리는 욥과 그와 같은 이들은 이스라엘인, 즉 여호와에 저항해서 자신의 입을 열지 않고 무고한 곤욕을 스스로 감당할 이스라엘인에 의해 소망이 성취될 것이며(사 53:7), 여호와의 강하신 팔이 연약함 가운데서 드러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참조, 사 53:1~2).4) 마침내 인류가 '리워야단'과 '베헤못' 같은 피조물들을 다스리는 그들의 통치를 실현하는 것은 이런 방식에 의해서다.5) 여호와의 방식이 세상에서 실현되는 것도 그러한 방법에 의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심판은 바벨론 포로 생활과 관련된 결론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고난은 불가사의를 담고 있으나 굴복되지 않을 것 같은 힘(예, 바벨론)조차도 완전히 제어될 것이며, 인류의 발아래 밟히게 될 것이다.6) 이스라엘의 생각에는 자신의 길이 여호와에게서 감춰진 것으로 보이지만, 그 메시지는 분별력 있는 독자에게는 드러나 있다.
1) 창조와 관련된 자세한 분석은 Habel 1985: 104와 함께 제시된 인용들을 보라.
2) 참조, Childs 1979: 541. "엘리후의 변론은 하나님에 의해 제한된 인간의 이해 능력을 인식하고 있는 전승된 지혜의 관점에서 욥에게 대답하려는 것이다."
3) 전치사구인 '알 아파르 바에페르'를 처격으로 이해하기란 매우 어렵다. 동사 '회개하다' 뒤에 전치사 '알'이 나오면 그 뜻은 '경의'를 담은 회개를 의미한다(출 32:12, 14; 시 90:3을 보라), '티끌과 재'는 인간의 상태에 대한 언급으로 볼 수 있다(참조, 창 18:27; 욥 30:19). 이 본문은(욥 42:6) 난해함으로 가득 차 있다. 여기에 대한 복잡하고 다양한 해석의 문제는 Morrow 1986을 참조할 수 있다. 욥기를 문학적 통합성의 관점에서 읽는다면 어떤 해석들, 특히 욥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참조, Curtis 1979)은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4) 잰즌(G. Janzen 1985: 247) 역시 하나님의 팔이 고통당하는 의로운 자를 통해 드러난다고 말했다.
5) 제이콥(Jacob 1958: 166~172)의 동물(창 1~2장)에 대한 통치 및 뱀(3장)에게 통치받는 것과 '리워야단'과 '베헤못'을 다스릴 인간(욥 40~41장)의 필요 사이의 연관성을 주목하라.
6) 수많은 학자들이 문학적 표준과 다른 표준에 근거하여 욥기가 바벨론 포로 생활의 배경으로 쓰인 것으로 주장한다. 이와 관련된 논쟁과 근거가 되는 인용들을 위해서는 Ackroyd 1968을 보라.
[본문 속의 참고문헌 표기]
Brown, W. P. (1996), Character in Crisis: A Fresh Approach to the Wisdom Literature of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Habel, N. C. (1985), The Book of Job, Philadelphia, PA: Westminster.
Janzen, J. G. (1985), Job, Interpretation, Louisville, KT: Westminster John Knox.
Kline, M. (1962), 'Job', in C. F. Pfeiffer & E. F. Harrison (eds.), Wycliffe Bible Commentary: 459-490, Chicago, IL: Moody.
스티븐 뎀프스터, 박성창 역, 『하나님 나라 관점으로 읽는 구약신학』(서울: 부흥과개혁사, 2012), pp. 262~267.
첫댓글 역시 부개사가 좋은 책을 많이 출판하는군요. 욥과 욥기에 대해서 너무나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공감합니다.
공감합니다22
"사탄이 욥에 대해 하나님께 비방하는 내용은 에덴동산에서의 하와를 향한 뱀의 경멸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 매우 뛰어난 설명입니다. 요즘 말하는 평행 이론 비숫하게 설명을 하고 있네요.
네, 좋은 참신한 설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논쟁은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더니 유일하게 히브리 이름과 족보를 가진 사람 엘리후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 방향으로 진전된다(욥 32:2). 이에 대해 한 학자는 이렇게 묻는다. “논쟁에 늦게 끼어든 사람으로서 유일하게 히브리 이름을 가진 자가 이방인의 이름을 가진 자들의 쟁점에 반박하는 것이 과연 우연일까"(참조, Habel 1985: 448; Brown 1996: 84)? 정경의 정황과 욥의 메시지에서(욥 38~41장) 드러나는 아브라함(창 22:20~21)과 다윗(룻 4:19)과 연결된 엘리후의 족보는 하나님 말씀으로의 전환점 역할을 한다(욥 38~41장)." -->
이런 부분은 설교 청취나 주석 읽기 정도에서 해결되지 않고 책을 읽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지식 같습니다. 위에 언급된 책처럼이여.
맞아요. 책이 주는 지식이 제일 효과적이고 안전합니다.
@노베 공감합니다.
엘리후(<영> Elihu,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다”)
1. 도후의 아들이며, 사무엘의 증조부 이다(삼상 1:1).
대상 6:34에서는 엘리엘로, 대상 6:27에서는 엘리압으로 불리웠다. 엘리후는 에브라임의 고을에 살던 레위인이었다(수 21:20, 21).
2.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시글락으로 되돌아 갈 때, 사울 진영에서 다윗에게로 귀순한 므낫세 지파의 천부장 (대상 12:20).
3. 오델에돔 가문의 성전 문지기 가운데 한 사람(대상 26:7).
4. 다윗의 형이며, 다윗 시대에 유다 지파를 관할하던 행정관(대상 27:18).
삼상 16:6, 7에 나타난 엘리압과 동일인인 것 같다.
5.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이며, 욥의 친구(욥 32:2).
부스족은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아들인 부스의 후손들인 것 같다(창 22:20, 21).
엘리후의 변론은 욥과 그의 세 친구들의 변론을 반복, 확대시켰다(욥 32-37장).
그는 욥의 죄악(34:7, 8), 패역함(34: 37), 신학적인 천박성 (35:16) 등을 책망하였다. 반면에 그는 하나님의 전능성과(36:27-37:22) 절대적인 공의(34: 10; 37:23,24),
온전하신 지혜(36:5-15)를 선포하였다. 어떤 학자들은 욥기가 기록된 수세기 후에 어떤 편집인이 엘리후의 변론을 덧붙여 편집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타당성이 별로 없다. 엘리후는 독특한 인물이었으며, 보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던 자였다는 것은 들림 없는 사실이다. (→욥기)
출처: <GODpia 성경사전: 아가페출판사>
@장코뱅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다? 이름 자체가 믿음과 복음 같네요^^
“욥은 겉으로는 시험 전과 동일한 인물이었지만 그 내면은 변화되었다. 욥은 새롭게 하나님 경외함을 배우게 된 것이다” --> 아래 말씀도 떠오릅니다.
잠17:3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그래서 잠언도 욥기와 함께 지혜서로 분류되는 것 같습니다.
네, 지혜서는 머리 좋게 사는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지혜를 전하는 책 같습니다.
오늘 포스팅을 통해서 주관적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개똥신학이나 유투브 등 저급한 소스를 멀리하고, 좋은 책을 읽는 것이 어려운 내용의 욥기를 이해하는 지름길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매우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