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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일본, 그리고 노평구 선생님
세키네 요시오(전 도쿄대 의대 교수/ 정신과)
처음에
오늘은 제가 경애하여 마지않는 고 노평구 선생님 3주년 기념집회에 출석할 수 있어서,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의 땅을 방문하여 주 안에서 여러분과 만나는 것이 허락되어서 하나님과 여러분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제가 평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고 지금까지 노선생님을 통해 또 한국의 여러분들을 통해 받았던 말로써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감사를 전하고 함께 하나님의 이름과 그리스도의 사역을 찬미할 수 있다면 그 이상의 기쁨이 없겠습니다.
저는 1940년 10월생입니다. 그래서 1945년 8월 15일은 제가 4살 10개월 되던 때였습니다. 물론 그 날이 일본에 있어서 그리고 한국의 여러분들에게 어떤 날이었던가 하는 것은 알 여지도 없었습니다.
제가 처음 한국 여러분의 나라 한국과 저의 나라 일본의 역사에 대해 눈을 뜨게 된 것은 대학생 때였습니다. 당시 저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정신적인 고뇌 가운데 어두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저는 한번은 나 같은 사람은 없는 낫다고 생각하여 신세를 지고 있던 친척집 목욕탕에서 가스밸브를 열어 인생을 마치고자 한 인간이었습니다.
주님은 이와 같이 없어져도 아무 관계가 없는 무명의 한 청년에게 눈을 두시고 결국 저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속죄를 중심으로 하는 무교회 신앙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제가 가장 먼저 알게 된 무교회 선생님은 야나이하라 다다오(1883-1961)이었습니다. 제가 그 이름을 알게 된 때에는 이미 선생은 이 세상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저는 야나이하라 선생님을 직접 뵙진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선생님의 존재를 알게 되고 나서 당시 출판되었던 선생의 성서강의를 대학 도서관에서 계속해서 빌려서, 마치 모래땅에 물이 흡수되듯이 고갈되어 있던 저의 영혼의 갈증을 해소하고자 열심히 대학 노트에 필사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저는 우치무라간조 선생님을 알게 되고 무교회를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무렵 드디어 이와나미서점에서 발간이 시작된 선생님의 전집을 그 한권 한권이 나올 때 마다 빈궁한 학생에게는 새 책을 구입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시간을 내서는 간다(神田)의 헌책방 거리에 가서는 새 책을 할인하는 서점을 찾아내기도 하고 조금 더렵혀졌거나 하여 싸게 된 책을 차례로 구입하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야나이하라 선생님이 전시 중에 서울에서 로마서 연속강연을 하신 것을 시작으로 한국의 여러분들과의 영적인 연계가 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그것이 중심 테마는 아니기 때문에 이 이상 말씀은 드리지 않고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마사이케 선생님과의 만남
야나이하라 다다오 제2주년을 기념하는 강연회가 1963년 12월 동경 아자부의 도요에와(東洋英和)단기대학 대강당에서 열려, 거기서 저는 '신앙문제와 평화문제'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신 마사이케 진 선생님을 만나게 되고 그 이듬해부터 선생님의 성서강연회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1964년 3월이었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사회의 일, 역사의 일에 대해서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고 물론 일본이 지금까지 걸어온 발걸음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사이케 선생님의 집회에 나가면서 선생님의 매주 일요일의 성서강의를 들으면서 당당하게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통해 자기 나라의 지금까지 역사, 특히 한국 그리고 중국에 대해서 행하여 왔던 행위에 급격하게 눈이 떠지게 되었습니다. 그 즈음 마사이케 선생님은 오야마 레이진, 사카에다 요시다카, 다카하시 사부로, 츠츠미 미치오와 같은 여러 선생님과 함께 저의 나라가 무력을 가지고 여러분의 나라를 침범하고 그 가운데서도 수원 제암리교회의 지역주민 30명을 가두고 밖에서 불을 질러 그 생명을 빼앗았던 사건에 대한 사죄와 그 표현으로써 교회 재건을 목적으로 하는 '제암리교회재건모금운동'을 펼치던 때였습니다. 저도 그 때 잘 모르긴 했지만 무언가에 끌리듯이 가까운 친구, 선배들과 함께 이 운동의 대열에 동참하여 동경의 우에노 공원에서 모금활동도 하곤 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서 조금씩 저는 겨우 우리나라가 예전 36년간에 걸쳐 여러분들의 나라를 빼앗고, 왕을 빼앗고, 이름을 빼앗고 쌀을 빼앗고 토지를 빼앗고 사람을 빼앗고 여러분 나라의 많은 생명을 빼앗고 결국에는 그 영혼도 빼앗고자 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1950년,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에 한국에서는 여러분들이 저희들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혼란과 고난 그리고 비통 가운데 있었습니다. 저는 그 때의 일들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말씀드리기도 부끄러운 일이지만 매일 아침 신문에 한반도의 전쟁 상황이 지도로 표현되어 보도되고 있었습니다. 학교에 가면 교실에서는 그 이야기로 화재를 삼아 전황이 표시된 신문의 지도를 보면서 오늘은 어디까지 전선이 이동했다, 상당한 반격이다 라던가 하며 마치 장기나 체스 게임을 보고 즐기는 것처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제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하는 것은 마사이케 선생님의 집회에 출석하면서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이며 그와 같은 선생님을 만나게 하신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마사이케 선생님의 방한사죄여행
마사이케 선생님은 그 후 1964년 9월 7일부터 27일의 3주간, 한국에 사죄를 위해 여행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나는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걱정은 전혀 기우로 끝나고 생각지도 못한 여러분들의 실로 따뜻한 넘치는 환영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일본은 불의하니까 이 전쟁은 진다"고 예언하신 선생님도 이러한 것은 전혀 예상도 못하였던 커다란 오산이었습니다.
선생께서는 '성서의 일본'지에 ‘나는 왜 한국에 가는가’ 라는 문장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셨습니다.
"그것은 물론 양국민의 화해를 위해서이다. 그러나 나는 한국국민과 일본국민이 대등한 입장에서는 화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일본국민은 한국 민중에 대해 커다란 죄를 범했다. 우선 우리가 먼저 머리를 숙여 사죄하고 그들이 우리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대등한 교제는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선 내가 제일 먼저 사죄하고자 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다음으로 한 가지 더 하고 싶은 것은 한민족에 대한 감사이다. 일본의 문화는 중국에서 조선반도를 통해서 들어 왔다. 나라조(奈良朝) 문화는 실로 조선 문화의 연장이다. 그리고 이후의 일본문화는 이것을 기초로 전개된 것이다."
그리고 선생님은 한국방문에서 돌아오셔서 다시 '성서의 일본' (1964년 11월)에 다음과 같은 문장을 남기셨습니다.
"나는 왜 한국에 갔는가. 그것은 내가 그 땅에 가서 그 땅의 여러분들에게 용서를 받지 않고서는 나의 신앙이 막다른 길에 부딪혀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태 5:23-24)고 말씀하셨다. 우리들을 미워하는 한국의 형제의 용서를 받지 않고서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이다. 아무리 자세하게 성서 문자를 조사하여도 그것으로 우리들의 신앙에 진전은 없다. 성서에 쓰여 있는 것을 실행하지 않고서는 문자의 연구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하는 요한복음 4장 24절의 구절이 무교회의 정신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성실'한 생활을 보내지 않고서는 무교회신자라 할 수 없다.
그리고 지금 우리들이 한국국민에게 사죄하는 일 없이는 '성실'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에 대해 사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자기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에게 사죄한 후에 하나님께 사죄함으로써 비로소 용서되는 것이다. 일본전체의 기독교가 답보상태에 있는 것도 한국에 대해 사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일 국교회복 교섭의 한가운데서
그 당시 양국의 국교정상화가 옳은가 그런가 하는 문제로 일본 전체가 들끓고 있었습니다. 분명 한국에서도 그러했겠지요. 일본의 혁신세력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은 모두 이것에 반대했습니다. 찬성했던 것은 일본정부뿐이었습니다. 한국에서도 국교를 회복하고자 하는 정부에 대해 일본 이상으로 학생과 시민이 격렬하게 반대했다고 듣고 있습니다.
그해 여름 하치오지의 대학세미나 하우스에서 열린 일본우화회전국대회(Japan Fellowship of Reconciliation ; 화해를 위해서 적도 사랑하는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비폭력에 의해 평화를 만들어 가고자 하는 기독교 단체입니다)가 열렸습니다. 거기서도 이 문제가 토론되었습니다.
우리들 젊은 사람들은 모두 현시점에서의 국교회복은 반대한다는 데 의견이 일치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일본이 한국을 이번에는 경제적으로 침략하는 것이 된다고 하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이 경애하여 마지않던 마사이케 선생님은 단지 혼자서 가능한 빨리 국교를 회복해서 서로 자유롭게 왕래하는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야말로 중요하다고 하시며 도무지 양보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선생님의 국교 회복론은 표면적으로 정부의 그것과 궤를 같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서로 자유롭게 왕래함으로써 일본이 한국에 조금이라도 구체적으로 사죄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선생님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지금 이 국교회복은 한편으로는 저의 나라가 한국의 여러분들의 많은 슬픔과 아픔, 고통, 고뇌를 엄격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한 채, 일본의 죄를 깊이 회개하는 일도 없이 진행되어 왔다고 하는 부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 자유롭게 왕래가 이루어져 주안에서의 교제가 가능하게 되어 한국으로부터 송두용 선생님, 노평구 선생님, 유희세 선생님, 이진구 선생님 등 많은 선생님을 맞아들일 수 있었고 또 저희들도 한국을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보면 마사이케 선생님의 예견이 옳았다고 지금 새삼 생각하게 됩니다.
송두용 선생님 일본방문
이런 가운데 제가 처음 뵌 한국의 무교회 선생님은 송두용 선생님이었습니다. 그것은 1965년 5월이었습니다. 저는 선생님이 하네다에 도착하신 날에 마사이케 선생님의 뒤를 따라 선생님을 맞았던 사람들 중 한명이었는데 선생님은 저와 같은 나이 어린 사람에게도 지극히 부드럽고 따뜻한 손을 내밀어 뜨거운 악수를 해 주셨습니다.
마사이케 선생님은 송선생님을 모시고 나고야를 시작으로 일본 각지를 방문하셨습니다. 돌아오셔서 어느 주일 집회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송선생님과 함께 있으면 나는 부끄러워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선생님이 너무 겸손하고 자신을 낮추시기 때문이다."
송선생님은 나고야에서 '복음에 의한 양 민족의 융화'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활자로 남아 있습니다. 선생님은 그 가운데서 일본에 오신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작년 마사이케 선생님은 마테복음 5장 23절 이하의 말씀을 가지고 한국각지를 방문해 주셨습니다.... 이번에 저는 에베소서 2장 13절 이하의 말씀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에베소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글이며 이스라엘인과 이방인인 에베소인들과의 관계를 적고 있습니다. 마침 저는 일본과 한국의 관계를 이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제가 한국을 출발할 때 가까운 신앙동료가 마침 이 구절을 보내주면서 일본에 가거든 가능한 많은 사람들의 손을 잡고 오라는 말을 해 주었습니다. 또 제가 오게 되었을 때 저희 집회원들이 감화를 얘기했는데 어떤 분이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실은 작년 마사이케 선생님이 일부러 멀리 오셔서 한국 사람들에게 사죄를 하셨습니다만, 한국인으로서 또 크리스챤으로서 미안한 일이다. 미안할 뿐 아니라 실로 죄송하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이미 사랑하고 있다. 그리고 마사이케 선생님뿐 아니라 일본사람에게 한국인은 이미 옛날 것은 완전히 잊고, 특히 크리스챤은 그리스도로 인한 사랑으로 마음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있기 때문에 안심해도 좋다고 생각하시게끔 해 드렸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는 우리들에게 신앙이 없고 사랑이 부족하였기 때문이므로 이번에 당신이 가면 그것을 사과하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실로 맞는 말씀이고 저도 여기에 어떤 말을 하고자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만나 뵌 것만으로 좋고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나 인간이기 때문에 어떤 말을 하고자 한다면 그렇습니다. 저희들의 사랑이 부족한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라는 것입니다. 마사이케 선생님이 저희들이 잘못했습니다, 고 말하면 그래, 용서해 드리지, 라고 하기 위해 왔는가 하면, 천부당만부당한 말, 꿈에도 그런 것은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송선생님의 이 강연을 되풀이해서 읽고 몇 번이나 눈물을 흘렸습니다. 지금부터 40년도 전에 하신 선생님의 말씀이지만 얼마나 깊은 사랑이 담긴 말씀인가요. 얼마나 겸손한 말씀인가요. 여기에서 한국 무교회 신앙의 한 단면을 보게 됩니다.
처음 한국방문, 그리고 노선생님
제가 처음 한국을 방문하게 된 것은 마사이케 선생님과 선생님 집회의 젊은이 그룹인 알파회의 멤버가 방한했던 그 다음해인 1968년이었습니다. 그 직전 방한하신 오사카의 마츠이 요시코씨와 독립학원의 스즈키 교장선생님과 교대를 하듯이 방문하였습니다.
후쿠오카에서 부산으로 와서 FOR주최의 국제평화세미나에 참가하였습니다. 복음병원의 장기려 선생님과 함석헌 선생님도 보이셨습니다. 거기서 이틀 정도 머문 후 밤 비행기로 서울로 갔습니다. 그 때 저는 밤늦게 김포공항으로 마중을 나오신 분이 노평구 선생님이었습니다.
처음 하는 해외여행이라 이것저것 집어넣어 터무니없이 무거운 여행 가방을 선생님은 이정도야 쯤 하듯 제 손에서 빼앗듯이 하여 운반해 주셨습니다. 처음 만난 일본의 이름도 없는 청년을 선생님은 진정 따뜻하게 맞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선생님 댁에서 3일간을 머물렀습니다. 9월이었지만 밤은 추울 정도였는데 온돌이 참 따뜻해서 그날 밤은 정말 푹 잠들었습니다. 선생님의 방은 책꽂이에 책이 가득 꽂혀 있었습니다. 그 책꽂이 가운데쯤에 작은 액자가 놓여져 있고 거기에는 안경을 쓴 백발노인 한분의 사진이 있었습니다. '츠카모토 선생이에요'하고 선생님은 웃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선생님이 츠카모토 선생님을 존경하셨던가 하는 것을 그 때 알았습니다. 그날 밤 선생님은 저를 가까운 공중목욕탕에 데리고 가 주셨습니다.
다음날 밥상에 식사가 준비되었을 때 저는 놀랐습니다. 쌀밥과 국 그리고 날계란 하나가 쟁반에 담겨 제게만 놓여져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아무런 것도 느끼지 못했습니다만, 나중에서야 선생님 가족이 준비하신 최대의 식사가 그것이었으며, 자녀들을 포함해 자신들은 먹지 못해도 이름도 없는 청년이지만 일본에서 온 손님에게 정성껏 마음을 다해 주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날 아침식사를 마치고 선생님은 저를 데리고 택시와 버스를 갈아타면서 수원의 제암리 교회까지 데리고 가 주셨습니다. 이미 자세한 것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가운데 단지 하나 기억에 남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돌아오는 버스에서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복음은 사회과학이 아니다"고 그 때 선생님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떤 문맥에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지금 알 수 없지만 이 말씀은 제 마음 가운데 살아 있습니다. 복음은 사회과학은 물론 자연과학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만 복음 그 자체는 결코 사회과학도 자연과학도 아니다. 결론적으로 복음 신앙은 과학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저는 그 때 노선생님의 말씀으로 마음에 새긴 것입니다. 물론 그 역은 성립되지 않아 복음은 과학을 발전시키고 학문을 진전시킨 큰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진리를 한없이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해 구원받고 다시 새사람이 된 자가 배우는 것을 얼마나 기쁘게 여기고, 진리를 존중하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하는 것은 여러분들도 분명 스스로 경험하셨을 줄로 압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학문, 과학기술은 그 가장 깊은 곳에서 바르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그 근저에 성서가 전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이 불가결한 것입니다.
그 다음날 저는 노선생님 자제분, 지금의 노박사께서 한 손에 영어사전을 가지고서 저를 영락교회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자제분과는 40년만의 재회입니다.
무교회 독립전도자 노평구선생님
노선생님은 문자 그대로 이 세상의 이득을 모두 버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전도에 전력투구하셨습니다. 후에 어느 분에겐가 들은 얘기가 있습니다.
독립전도자의 생활은 평범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지만 선생님의 경우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고. 어느 날 사모님이 선생님에게, 돈이 필요하셔서 돈이 부족하다는 것을 말씀드렸을 때, 선생님은 어디선가 지폐를 꺼내셔서 사모님께 건네듯 하시더니 사모님을 향해서 “그렇게 돈을 갖고 싶은가 그러면 이것을 가져라”고 하시며 손에 가지고 있던 지폐를 사모님 앞에서 조각조각 찢어서 공중에 뿌리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의 감정은 어떠하였으며 또 그 때의 사모님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도무지 저로서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엄숙한 것입니다. 선생님 그리고 사모님의 아픔과 슬픔은 하나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도자가 어떤 마음으로 복음을 전해 왔던가 그 전도자의 아내가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남편의 버팀목이 되어왔던가 도저히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강하게 느끼게 됩니다. 만년 사모님이 병환으로 돌아가시기 수일전의 일인가요. 선생님이 병실을 찾았을 때 사모님은 침대 위에 상반신을 일으켜 세우시고 선생님의 얼굴을 계속 응시하며 한 마디도 하시지 않은 채 한쪽 손 검지로 하늘을 가리키셨다고, 나중에 선생님은 일본 이마이캉(今井館)에서 저희들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선생님은 그 때 어떤 생각으로 사모님을 보셨을까요. 사모님은 어떤 것을 전하고자 하셨을까요. 사모님은 자신이 이제 가려고 하는 곳이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과 구주 예수가 계시는 천국이라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신 것일까요. 아니면 자신이 죽고 난후 남겨지는 남편에게 닥칠 지금보다 더 큰 고난을 생각하고 찢어지는 만큼 아픈 가슴으로, 저는 천국에서 당신을 내려다보고 기도로 지원하겠습니다. 그러니 당신도 하늘을 향해 지금까지와 같이 변함없이 걸어가 주십시오, 라는 것을 전하고자 하셨던 것일까요.
2003년 7월에 이진구선 생님 편집으로 ‘무교회란 무엇인가’라고 하는 논집이 간행되었습니다. 거기에 실린 ‘무교회의 신앙’이라고 하는 선생님의 문장을 읽었습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습니다.
“무교회 신앙이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있는 그대로 거짓 없이 마음과 힘과 진실과 열심을 다하여 직접 믿고 그것을 어디까지나 살아내고자 하는 것이다.”
노선생님은 자신이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진실, 순진, 루터에 의한 ‘신앙만의 신앙’을 문자 그대로 자신의 모든 것을 기울여 살아오셨습니다. 선생님은 오직 한길이셨으며 정의감이 강하고 또 뜨겁게 하나님의 진실을 사랑하신 분입니다.
이 ‘무교회의 신앙’이라는 문장에는 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있는 그대로’라는 말 뒤에 ‘일개의 한국인으로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한국민족이 구원되기 위해서는 이 신앙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한국뿐 만아니라 진정 일본에도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하나의 민족이 하나의 국가가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가장 깊은 의미에서 구원되기 위해서는 이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그대로’ 거짓 없이 마음과 힘을 다하여 진실과 열심을 다하여 직접 믿고 그것을 어디까지나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들어낸다‘ 이 신앙 이외 다른 것은 없다는 것을 생애를 바쳐 외치셨습니다.
성 무너진 곳에 선 자
우라와 집회에서는 지금 에스겔서를 매주 예배 때 배우고 있습니다.
에스겔은 거의 예레미야와 동시대의 예언자입니다. 기원전 597년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1차로 남유다 왕국을 침범 했을 때 예레미야는 포로에서 벗어나 예루살렘에 머물러 예언한 데 반해, 에스겔은 바벨론에 붙들려가서 포로의 백성 가운데 있었고 그 이후 바벨론에서 멀리 있는 조국으로 돌아갈 마음에 아픈 가슴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였던 것입니다.
에스겔서는 실로 강렬한 예언서입니다. 읽는 자의 마음을 빼놓듯이 격렬하고 엄격한 그리고 적나라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22장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예루살렘에게 이르기를 정결함을 얻지 못한 땅이요 진노의 날에 비를 얻지 못한 땅이로다 하라. 그 가운데에서 선지자들의 반역함이 우는 사자가 음식물을 움킴 같았도다. 그들이 사람의 영혼을 삼켰으며 재산과 보물을 탈취하며 과부를 그 가운데에 많게 하였으며 그 제사장들은 내 율법을 범하였으며 나의 성물을 더럽혔으며 거룩함과 속된 것을 구별하지 아니하였으며 부정함과 정한 것을 사람이 구별하게 하지 아니하였으며 그의 눈을 가리어 나의 안식일을 보지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힘을 받았느니라. 그 선지자들이 그들을 위하여 회를 칠하고 스스로 허탄한 이상을 보며 거짓 복술을 행하며 여호와가 말하지 아니하였어도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하였으며...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내가 내 분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들 행위대로 그들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국가의 최상위 계층이 모두 포로백성으로 바벨론에 끌려간 후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들이 처한 심각한 위기상황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에스겔은 그러나 곧 예루살렘에 내릴 하나님의 격렬한 심판의 날의 참상을 눈으로 보는 것처럼 확실하게 보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남은 백성을 인도해야 할 제사와 예언자는 율법을 마음대로 범하고 안식일에도 적당히 하여 백성들의 깊은 슬픔과 절망을 멸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에스겔이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은 “이 땅을 멸망케 하지 않기 위하여 나는 (즉 하나님은) 내 앞에 성을 쌓고 성의 무너진 곳에 막아 선 자를 그들 가운데서 찾아 다녔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이스라엘 민족은 자기 나라가 지금 바로 멸망해 가고 있는 위기의 날들 가운데서도 우상숭배를 하고 민족의 생명의 원천이 되시는 진정한 하나님, 애굽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신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서 살고자 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을 아무래도 벌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바벨론에 의한 제1차 포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진정한 하나님께로 돌아가고자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더욱 철저하게 이 민족을 심판하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실로 이스라엘의 백성을 깊이 사랑하시고 계셨다. 그러므로 심판하고자 함과 동시에 자신 스스로 또 이 백성을 구원하고자 성을 백성들 앞에 열심히 쌓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깊은 고뇌가 찬 배려를 전혀 알지 못하고 안에서 그 성벽이 무너지는 대로 맡기고 알지도 못합니다. 그것을 보신 하나님은 그 성이 무너진 곳, 즉 성벽이 허물어진 곳 그 허문 곳을 하나님 자신과 함께 목숨을 걸고 막아주는 자는 없는지 열심히 찾으셨습니다. 그러나 어찌된 것인지 그러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찾아내고자 하는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는 듯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나는 분노를 그들 위에 내리고 화의 날에 그들을 멸망시켜 그들이 행한 보복을 머리위에 되돌린다”고 하는 말씀, 그것이 곧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 함락이라는 사실로써 실현되고 말았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성벽이 허물어진 곳에 서있는 자는 있었습니다. 에스겔 자신이 그러했으며 또 예레미야가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50년 후에 이스라엘 민족을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는 길을 여신 것입니다. 바벨론에 의해 포수가 된 백성은 그 밖에도 꽤 있었습니다만 그 후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뿐이라고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노선생님은 진정 성벽이 허물어진 곳에 서서 한국의 구원을 위해 생애를 바쳐 사신 분이었다고. 물론 김교신도 송두용도 그리고 제가 이름을 알지 못하는 많은 무교호의 선배들 여러분들이 각자의 장소에서 이 나라의 성벽이 허물어진 곳에 서서 하나님과 함께 힘을 다하셨습니다. 그와 같이 하여 현재의 한국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비로소 노선생님의 격렬한 싸움의 생애가 가지는 의미가 분명하게 이해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격렬한 신앙의 생애를 보내신 선생님은 다른 한편 실로 세심하고 깊은 자비와 너그러움을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서울을 떠나는 날 제가 탄 대구로 향하는 열차가 출발할 때까지 계속 홈에 서셔서 저와 동행해 주셨습니다. 전혀 처음 만난 것인데도 이름도 없는 일본의 한 젊은 청년에게 선생님이 보여주신 깊은 자비로운 마음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한국과 일본의 장래
일본의 무교회 형제들은 고 츠츠미 미치오 선생, 다카하시 사부로 선생님의 제안에 따라 1987년부터 전국집회를 열어 왔습니다. 금년은 삿포로에서 마침 어제부터 오늘까지 열리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유희세 선생님과 이진구 선생님 외에 많은 분들이 한국에서 참여해 주셔서 저희들을 격려해 주셨습니다.
‘무교회전국집회 2001’은 야마가타에 있는 독립학원에서 열렸습니다. 이때는 한국에서 배명수선생 내외, 송문호 선생님 그리고 임중기 선생님이 참가하셨습니다. 그 때 송선생님이 하신 강연은 매우 감동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선생님의 어머님 박정수님에 대한 얘기를 해 주셨는데 인용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942년 김교신 선생님의 무교회 신앙잡지 ‘성서조선’이 일본의 관헌에 의해 불온한 사상이라고 폐간되고 많은 독자가 검거되었습니다. 그 때 인천 경찰서에 구속되었던 어머니는 심한 모욕과 고문을 받았습니다. 45세의 나이에 원래 몸이 약하여 기절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육체의 고통보다도 여자로서 받은 치욕감은 죽는 것보다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감방에 돌아와서 어머니는 너무나 원통하고 비참하여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울면서 호소하였습니다. “어째서 입니까.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그 때 하나님의 속삭이는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너의 죄를 알게 하기 위해서다. 너는 지금까지 아무도 미워한 적이 없고 다른 사람과 싸운 적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러나 봐라 지금 너의 마음은 너를 고문한 그 형사들을 미워하는 마음으로 가득하지 않느냐 그 미움의 죄 때문에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다” 자기 가운데 있는 죄의 실태를 알고 아연실색한 어머니는 이번에는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하며 울면서 기도하였습니다. 밤이 지나고 아침을 맞았습니다. 마음가운데 있던 원망은 흔적도 없고 다만 평안과 감사가 넘쳐났습니다. 사람들은 그 일에 대해 어머니가 ‘너의 적을 사랑하라’고 하는 예수의 가르침을 지키고 자신을 고문한 형사들을 용서하였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가운데 있는 미움의 죄를 알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여 기도하는 마음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이 임하여 그 형사를 용서하고 사랑하게 된 것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어머니가 검거된 당시는 신사참배의 문제로 당국의 탄압이 심하여 많은 신자가 투옥되고 옥사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신사참배에 절대 반대하였던 어머니는 만약 그것이 문제가 되면 어떤 처벌도 받을 각오가 되어 있고 죽음까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머니를 용서하신 것은 하나님을 향한 충성과 그 신앙을 관철하기 위한 순교의 길이 아니라 자기 가운데 있는 죄의 실태를 알고 하나님 앞에서 부서지고 회개하여 용서를 받는 평안과 화해의 길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저는 매우 감동하는 마음으로 듣고 있었습니다만, 한편으로 우리들이 얼마나 회복할 수 없는 행위를 범해왔던가 하는 깊은 자괴감이 끓어오르는 것을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존엄을 모독한 비열한 자에 대해 미움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요. 그것을 스스로의 죄로 받아들이고 십자가 주님의 용서를 구하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시고, 예수님을 통해 이와 같은 해선 안 될 일을 저지른 우리들을 위해 용서해 주신 사랑은 얼마나 깊은 그리고 무거운 사랑인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송선생님은 이 강연을 끝낼 즈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제가 주 안에 형제로서 굳게 손을 서로 맞잡고 있는 일본의 여러분들이 마음으로부터 사랑하고 있는 그 일본을 그리고 그것은 우치무라 선생님이 ‘나는 일본을 위해 일본은 세계를 위해 세계는 그리스도를 위해’라고 말씀하신 일본, 후지이 선생님이 ‘일본이여 멸망하라’고 절규하기까지 사랑하신 일본 세계 유일의 평화헌법을 가지고 있고 그 헌법을 어디까지나 지키기 위해 마음을 다하는 사람들이 있는 일본, 그 일본을 저는 한국을 사랑하듯이 마음으로부터 사랑하고 싶습니다. 이것을 말하라고 하나님은 오늘 저를 여기에 세우셨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여러분들이 일본에 대해 부어주시는 얼마나 깊고 뜨거운 사랑인가요. 저희들 일본사람들은 이와 같은 깊고 뜨거운 사랑에 정말 보답할 만큼 분명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저희들은 한국의 여러분들을 통해 하나님의 이와 같은 깊고 뜨거운 사랑에 격려 받고 유지되고 살아갈 힘을 얻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과 한국의 주안에 있는 여러분에게 아무리 감사 드려도 모지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편 한국에서는 ‘성서조선’ 그리고 ‘성서연구’지 ‘성서신애’지에 이어 최근에는 성경연구, 십자가의 복음, 성서 말씀, 그리스도의 사람, 복음과 신앙 등 연속적으로 개인이 편집책임자로 있는 훌륭한 성서잡지가 발간되어 실로 장관이고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해서 계속 복음의 진리를 이 나라 영혼의 깊은 곳까지 부어주시고 이 나라의 진정한 신생을 위한 기초를 분명히 세우시고자 하시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와 같이 명맥이 유지되어 오는 이웃나라의 생기 넘치는 영적인 신앙적인 생명의 호흡을 목격하면서 저는 실로 눈이 아득해지는 느낌이 듭니다. 저희들 일본 무교회 신도도 한국의 진정한 그리스도의 복음 전진에 힘을 얻고 자극을 받아 고국 일본의 정신적 영적 부흥을 위해 여러분과 함께 손을 맞잡고, 하나님의 이름을 마음으로부터 찬미하고 서로 격려하며 기도해 나가고자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느리더라도 남은 날들을 소중히 하면서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구주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증거 해 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