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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황후.(奇皇后(1320~1370))(대만 타이페이 박물관소장)
위의 초상화는 중화민국 장제스 총통의 이름을 내세워 대만 학자들이 기황후라고 주장하여
기황후 초상화인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확인 결과 천순제 라기바흐의 황후 답기(答己 TaJi)이다.
기황후의 공식 초상화는 알려져 있지 않다.
경기 연천에 살았던 고려 여인 기황후를 상상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기황후는 1333년 14세에 공녀로 차출되어 원나라로 갔다.
그녀의 증조부는 기윤숙(奇允肅), 아버지는 기자오(奇子敖)이며, 기철(奇轍)의 누이였으며,
음서제도로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권문세족 가문의 막내 딸이었다.
환관 고용보가 기황후의 미색을 보고 그녀를 내세워 원 황제 혜종(북원 순제)의 차 시중을 드는 시녀로
발탁시켜 혜종의 눈에 들게 한다.
혜종의 사랑을 받자, 제1 황후인 타나시리로부터 질투를 받아 채찍으로 맞는 등
인두로 지짐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후 제1 황후 직위가 위태롭게 되자 타나시리 가문이 모반을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축출되면서
타나시리도 황후에서 폐위되고 말았다.
혜종은 그녀(기황후)를 제1 황후로 올리려 하였으나, 메리키트족 바얀(伯顔/백안)의 반대로
제1 황후가 되지 못하였다.
몽골족이 아닌 여자가 황후로 오를 수 없다고 반대하여 바얀 후트그(백안의 딸)를 제1 황후로 삼았다.
1338년에 아들 아유르시리다르 빌레그트를 출산하고 나서 바얀(伯顔)이 실각하게 된다.
바얀의 실각을 틈타서 그녀는 제2 황후로 올라섰고, 아들은 황자가 되었다.
제2 황후로 오르게 만들어 주었던 고려 출신 환관 고용보는 황실 재정을 총괄하는 자정원사가 되어
황실 재정을 주무르게 되었고, 아들을 제1 황자로 올리는데 협력한 고려 출신 환관 박불화에게
군사권을 장악하게 하여, 동지 추밀원사로 임명하였다.
바얀 후투그가 사망하자 제1 황후로 올라섰다. (정치적 정적을 제거한 것으로 판단된다.)
황실과 군권을 장악하자 권력에 줄을 대기 위해 고려인을 아내로 두는 고려양과
고려인 복장 고려풍이 유행하였다.
1351년 홍건적의 난이 발발하여 간신히 진압하였으나 정국이 어지러워졌다.
이 사이에 기황후는 혜종에게 양위하여 아유르 시리다르에게 황위를 넘겨주라고 요구하지만,
혜종이 양위를 거부하자, 혜종파와 기황후파가 서로 대립한다.
1364년에 혜종파에게 대도가 장악되면서 포로로 잡힌다.
1365년 기황후파의 코케 테무르가 대도(연경/북경)를 장악하면서 풀려난다.
1351년 홍건적의 난 때 주원장의 군대는 무사하였다.
1368년 주원장은 서달 등에게 대군을 주어 연경을 공격하게 하자, 순제와 기황후는 아들과 함께
만리장성을 넘어 상도(上都)로 달아났다가 원나라 초기 수도인 응창(應昌)으로 옮겨간다.
원나라 순제(1333~1368) -주원장의 명나라군에 쫓겨 만리장성을 넘어 상도(上都)로 달아난다.
원순제(토곤 테무르)는 응창(應昌)으로 옮겨갔다가 외몽골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북원이 시작된다.
원순제는 원나라 11대 황제 혜종이자 북원의 제1대 황제 순제이다.
쿠빌라이의 자손이다.
제2대 황제 소종(昭宗) 아유르 시리다르 빌레그트 칸은 기황후의 아들이다.
소종은 1372년 명 원정군을 대파하여 승리하였으나 정신적 지주였던 쿠쿠 테무르가 전사한다.
이 전투로 세력이 약해지자 나하추가 명군에 항복하였다.
나하추는 해서후(海西侯)에 봉해졌는데, 이 지역은 현재의 청해성 서부지역인 해서지방이다.
현재 해서 숙몽고 자치주, 해서 장족 자치주, 해북 숙몽고 자치주 ,해북 장족 자치주가 형성되어있다.
소종은 1388년 내몽고 자치구의 브이르 노르 동북 지역에서 명 원정군과 싸워 대패하였다.
소종의 이복 동생 토구스 테무르가 패전 책임을 물어 소종을 죽이고 3대 황제(평종)에 올랐다.
토구스 테무르(익왕(益王)는 카슈미르 도우라강 전투에서 다시 명군에 대패하였다.
(토구스 테무르를 익왕(益王)이라고 부른 것으로 보아 한때 익주(溺州/益州)의 왕으로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익주는 섬서성 한중시, 사천성 성도(청두), 자동, 영안, 강주의 촉나라 지방을 말한다.)
전투에 패하자 아릭부케 가문 출신의 엥흐 조리그 투 칸이 평종(토구스테무르)을
도우라강 기슭에서 살해하고 외몽골로 돌아가 4대 황제에 올랐다.
(도우라강=카라코룸의 투울강=신강성 위구르(유오이)자치구 서남부, 서장성 티벳 강족(창족)자치구
서부 사이의 카슈미르 카라코람 산맥 지방.)
이로써 쿠빌리아 가문은 몰락하고 말았다.
몽고 황제
-몽고 실위족을 통일하고 부족장 회의(쿠릴타이/kuriltai)를 거쳐 황제로 등극.
1대 테무친 징기즈칸(태조 1206~1227)- 성길사한(成吉思汗)..
2대 우구데이칸(오고타이 칸)-(태종 1229~1241)- 징기즈 칸의 3남.
3대 구육칸(정종 1246~1248)- 우구데이 칸의 장남.
4대 뭉케 테무르 칸(헌종 1251~1259-달연 칸/다얀 칸)-징기즈 칸의 4남인 툴루이의 장남).
5대 쿠빌라이(세조 1260~1294)-몽고 제5대 황제이자 원나라 초대 황제/툴루이의 차남 )
원나라
1대 세조 쿠빌라이(1215~1294)-홀필열한(忽必烈汗).
2대 성종 테무르(1294~1307)
3대 무종 해산(1307~1311)
4대 인종 아유르바르와다/(1311~1320)
5대 영종 시디발라(1320~1323)
6대 태영제 예순테무르(1323~1328)
7대 천순제 라기바흐(1328)
8대 문종 투그테무르(1328~1329/1332)
9대 명종 쿠살라(1329)
10대 영종 린친발(1332)
11대 혜종 토곤테무르/북원1대왕 순제(1333~1368)
북원.
1대 순제 토곤 테무르(원나라 마지막 황제 혜종 1333~1368)
2대 소종 아유르 시리다르 빌레그트 칸(기황후 아들)
내몽고 브이르 노르 전투에서 패한 책임을 물어 토구스 테무르에게 살해당함.
3대 평종 토구스 테무르(후비 바얀(백안)의딸 바야후트의 아들/우스칼 칸(Uskhaal Khan/익왕(益王)
도우라강 전투에 패한 책임을 물어 조리그 투 칸에 살해당함.
쿠빌라이 황제, 황후 가문 몰락.
4대 엥흐 조리그 투 칸-아릭부케 가문 출신[후비 바야후트 가문]
5대 엘베크 니굴세그츠 칸.
6대 군 트므르 칸
7대 을지 트므르 칸
8대 델베그 칸
9대 아자이 칸
10대 타이손 칸
11대 에센 칸
12대 메르코스 우헤그트 칸
13대 멀런 칸
14대 만둘 칸
15대 바트문크 다얀 칸
16대 바르스볼트 저넌 칸
17대 보디 알라크 칸
18대 다라이손 쿠덴 칸
19대 투멘 자사그트 칸
20대 보얀 체첸 칸
21대 리그 호타그트 칸.
이름으로만 보면 점점 중원 북방에서 후기로 갈수록 동유럽 쪽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을 알수가 있음.
중원에서 명나라에 황제, 왕의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입조하는 것도 거부당하자,
동유럽 초원의길 문명의 영향을 받으며 점점 중원에서 사라진다.
기황후의 아들인 아유르 시리다르 빌레그트 칸의 이름을 보면
ayurshirdar.bilegt khan이다.(愛猷識里達獵/애유식(치)리달렵)-꾀와 지식, 백성을 사랑하고 사냥에 통달한 자.
야율실달 비렠 칸으로 읽힌다.
이는 곧 야율실달 비려 한이라는 말이다.
쿠빌라이- 칸[Kublai Khan, 홀필열한/忽必烈汗/ Kublai는 Khubilai1215~1294]은
바타르 비려국 출신의 후예임을 금방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비려에서 실위족>몽올실위족으로 분화해간 몽골족과 거란족으로 분화해갔다는 사실이다.
실위족은 북실위, 남실위, 대실위, 단실위, 발실위, 심말항실위 등으로 분화한다.
거란의 간접지배를 받던 부리야트, 야쿠트 자치공화국의 대실위에서 투바 자치공화국으로
거란의 간접지배를 피해 달아났던 대실위족 일부가 투바인과 융합하여 몽올실위족이 탄생한다.
여기에서 징키스칸(성길사한)이 세력을 이끌고 외몽골 오논 강 일대로 내려와 발실위의 후예였던,
솔롱고스 메리키트국[대우순/다이르 우순칸]을 점령하고 후란(쿨란)공주를 얻으면서
후란의 미모에 반해 3년간을 허송세월로 보내다가, 후란의 뜻에 따라 과거 식민지배했던 거란을
동만주로 밀어낸 뒤,
거란을 이어 식민지배했던 여진의 금나라를 동만주로 밀어내며 비단길 초승달무역과
동유럽 반달무역을 장악했던 오토만제국(오스만 투르크/ 터키(튀르키예)중심)을 몰아내며
유라시아를 평정하고, 그의 아들들에게 5한국을 나눠주게 된다.
[대우순은 발해국[대조영]이 거란으로부터 멸망전후 후발해로 분열하기전 내몽골로 옮겨가서
솔롱고스[고려] 메리키트국을 세우며, 발실위의 후예와 섞이는 나라였다.]
>> 홀필열(忽必烈)은 훗날 고필열(忽必烈)이되어 한국식으로 읽힌다.
조선, 부여, 고구려에서 몽고로 분화해갔음을 증명해주는 말이다.
홀(忽/골)은 단군조선, 부여의 대표적인 글자이다.
중국은 구필열로 읽었다.
기황후가 순제 토곤 테무르와 함께, 응창에서 외몽골로 들어가 살면서,
그녀는 바야후트 가문과 함께 아들이 모두 죽는 고통을 당하고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기황후 오빠들인 기철, 기륜, 기삼만, 기주 등은 고려인의 토지를 빼앗고
갖은 횡포를 부리다가 최영 등에게 축출된다.
이들이 외몽골로 들어가자 카사르 후예들이 울란바토르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버린다.
이들의 후예와 징키스칸으로부터 외몽골을 물려받아 찬밥신세가 되었던,
징키스칸의 동생 카사르의 후예(호르친부)는 훗날 생여진족을 찾아가
황제자리를 제의하며 몽골 8기군, 여진 8기군을 결성하여 북경을 장악하고
청을 건국하였으나, 여진족으로부터 다시 숙청당하여 내몽골 중동부 지구로 달아나 살게 되었으며,
청나라가 멸망하자 기득권들이 내몽골 중서부 지역으로 달아나 현재에 이르른다.
기황후(奇皇后)는 사후에 자신의 유골을 경기 연천에 묻어달라고 했는지
연천에 그녀의 무덤이 존재한다고 동국여지지에 전하는데 진위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기황후가 바얀 후트그를 제거하였기 때문에 기황후는 분명 소종이 후비 바야후트의 아들
토구스 테무르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나서 이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거나, 몽골을 망하게한 책임을 물었고,
또한 이방인으로 몰려 제거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경기 연천에 있는 그녀의 무덤이 사실이라면,
1370년 50세에 죽은 것이 확실하면, 소종이 고려인을 시켜 연천에 묻어주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그러나 바야후트 가문과 토구스 테무르에 의해 몽골을 망하게한 원흉으로 몰려 죽으면서
마지막 유언을 남겨 황권을 차지한 토구스 테무르에 의해 은밀하게
경기 연천에 무덤을 만들어주었을 가능성도 높다.
1388년 내몽골 자치구의 브이르-노르전투에서 명 원정군에게 대패하자,
이 책임을 물어 소종은 이복동생이었던 토구스 테무르에의해 죽임을 당한다.
1388년 토구스 테무르가 황제에 오르고 나서 외몽골로 들어간 기황후파가 반발할 것을 염려하여
어머니 바야후트 일가를 시켜 제거했을 가능성이 높다.
1370년 50세에 죽지 않았을 경우에는 1368년에 순제가 죽자 경기 연천으로 피신해 왔을 가능성도 있다.
왜냐하면 순제 일행이 외몽골의 울란바토르로 들어가려 하자 카사르의 후예들이 외몽골 초원에서
군대를 이끌고 대치하며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버린다.
순제가 죽자 기황후는 살길을 찾아 고려로 조용히 들어와 연천에 웅거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을 수 없다.
1370년 기황후가 사라지자 죽은 것으로 기록되었을 수도 있다.
바야후트의 아들 평종 토구스 테무르도 도우라강 전투에서 명 원정군에 패해
아릭부케 가문의 엥흐 조리그 투 칸에 의해 도우라강 기슭에서 살해되어
쿠릴라이 직계 가문이 몰락하게 된다.
이후
쿠빌라이 가문의 후비 바야후트 가문의 엥흐 조리그 투 칸에 의해 순수 몽골인으로
북원 제국을 이어가게 되지만, 명나라로부터 황제나 왕의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기황후에 의해 공녀 차출이 금지되었던 것이 아니라,
충선왕(왕장)이 심양왕으로 제수되어 오래 재위하면서 이 문제를 풀어 공녀 차출이
현격하게 줄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재상을 제외한 모든 관료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공녀 차출하던 것을 단계적으로 단절시켰다.
심양왕 자리는 충선왕의 조카 왕고가 정치 공작을 벌여 차지하게 된다.
공녀 문제를 완전 차단시킨 것은 공민왕(1351~74)이다.(1351년은 홍건적의 난 발발)
이문제로 원과 대립하였고 공민왕은 자주성을 회복하기 위한 운동을 벌여 북벌까지 계획하게 되는 것이다.
기황후는 최유와 모의하여 충선왕의 셋째 아들 왕혜(몽골명은 타스티무르/塔思帖木兒/덕흥군)를
고려왕으로 임명하고 조양, 심양의 1만5천 동진 군사를 고려로 보내 압록강을 넘어 의주,
선천을 점령하고 정주로 남하하였으나, 달천에서 이성계에게 대패당하며 진압되고 말았다.
1356년 공민왕이 반원개혁(反元改革)을 하면서 기철(奇轍), 노책(盧頙), 권겸(權謙) 등 친원 세력을 죽이자,
기황후는 고려를 배신하고 몽골로와 있던 최유(崔濡/예천)를 내세워 공민왕을 몰아낼 궁리를 한다.
덕흥군(왕혜)을 고려왕으로 임명하고, 원에 있던 김첨수(金添壽), 유인우(柳仁雨), 강지연(康之衍)
황순(黃順), 안복종(安福從), 문익점(文益漸),기숙륜(奇叔倫)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1363년 12월 요양(遼陽/조양, 심양)의 군사 1만5천여 명을 동원하여 고려를 침공하였으나,
평북 정주의 달천에서 28세의 이성계(1335~1408)에게 대패당하였다.
최유는 도성으로 끌려와 국문을 연 뒤에 효수(목을 베어 매달아 놓음)되고 말았다.(최유의 난)
1365년 덕흥군(왕혜)은 군의 칭호를 상실하고 영평부(永平府)로 유배되었다.(충혜나 왕혜나...)
P/S
충선왕의 3년간 유배지. 서장성 티벳 자치구 라사>간체>샤카(sagya/사키아)지역(라사에서 450키로).
샤카 지역에서 백민국의 후예인 백정과 마야부인 사이에서 부처가 태어나는 곳이다.(bc565)
백민국의 후예가 숙신, 백족[백적/백신/백제], 부여족으로 분화한다.
충선왕(왕장)은 쿠빌라이의 증손녀(손녀) 계국대장공주와 1,277년에 결혼한다.
충선왕의 어머니는 충렬왕의 부인 제국대장공주이며 쿠빌라이의 손녀(딸)이다.
충선왕은 3대 황제 무종(카이산)과 그의 동생 아유르 바르와다를 지지하여,
아유르 바르와다를 4대 황제로 만든 주역이었다.
이일로 인해 심양왕으로 제수되어 심양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다.
또한 쿠빌라이 자손인 아유르 바르와다 다음으로 황족 서열이 높았기 때문에
심양왕으로 오래 재위하며 고려를 원격 통치하기도 하였으며,
고려 통치는 제안대군(왕숙)과 강릉대군(왕도)에게 통치하게 하였다.
1,320년 아유르 바르와다가 죽고 5대 시디발라(영종)가 즉위하자,
환관 임백암이 황위 계승에서 충선왕(왕장)을 밀어내기 위하여,
서장성 티벳 강족(창족)자치구의 샤카지방으로 3년간 유배를 가게 만든다.
3년만에 영종이 죽고 예순 테무르(태영제)가 즉위하자 이제현의 상소로 유배가 풀려
대도(연경/북경)로 돌아와 소일하다가 1,325년 5월 숨을 거두었다.
심양왕은 충선왕의 조카 왕고가 물려받았다.
(왕고가 심양왕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공작했을 가능성이 높음)
충선왕은 학문을 숭상하여 책벌레로 여겨질 만큼 학문의 조예가 깊었다.
그녀의 어머니 쿠빌라이의 딸(손녀)인 제국대장공주가 갑자기 죽자 고려로 돌아와 진상을 규명하였다.
충렬왕의 총애를 받던 후비인 무비(無比)일당의 소행인 것을 찾아낸 후,
무비와 관련자들을 처형시키거나 유배를 보냈다.
그러자 아버지 충렬왕은 정치에 뜻을 잃고 양위하자, 고려 왕위에 올랐으나,
심양으로 돌아가 고려를 원격 통치한 최초의 고려국왕이자 심양왕이었으며,
쿠빌라이 자손으로 몽골 황실 황위 계승 서열 8위 안에 들었던 인물이었다.
충선왕대에 이성계의 4대조 이안사(목조)가 영흥 쌍성총관부의 함흥 지역으로
전주에서 170여 가구를 이끌고 북상한다.
그 후 목축업을 통해 말과 소를 길러 전투마를 팔아 돈을 벌게 된다.
이후 조부 이춘이 쌍성 총관부 조휘의 손녀와 결혼하여 천호장이 된다.
이자춘이 물려 받아 이성계에 이르게 되고 조소생을 축출시키는데 공민왕에게 협력하여
조선 창업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충혜왕이 유배가다 죽게 되자 고려 백성들은 그의 죽음에 대해 그 어느 누구도 슬퍼해 하지 않았다.
아마 고려, 조선 역사상 그 어느 누구도 슬퍼해 하지 않은 최초의 왕이 충혜왕 일 것이다.
충혜왕 때문에 고려 여인은 집안에서 더욱더 움츠리고 살며 바깥 출입을 삼가케 하였으며,
조선으로 이어지면서 부터는 권력의 중앙집권화 성공으로 권력 지도부의 유학 강화무장이 이루어졌다.
조선 초기 양반 가문의 여인은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고 다녀야 했고,
평민 여인은 왕골포로 가리고 다니게 되었다.
"충혜왕 때문에 고려 말부터 부녀자와 여자들은 집안에서 가둬 놓고 밖을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조선에서는 중앙 권력 집권화로 권력 지도부의 유학 교육을 강화하였으며, 외출시 면사포와 왕골포를 쓰고
얼굴을 가리고 다니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부모끼리 딸아이의 짝을 지어주는 풍습이 유행하게 되었으며,
조선 여인들은 혼례 날에 남편의 얼굴을 처음으로 보게 되는 아이러니컬한 일이 벌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또 그런 현상이 자연스러운 관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일제시대를 거치며 더욱 안으로 움츠려 들었다.
딸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일본군/순사가 오면 벽장, 장롱, 산속에 숨어있어야할 정도였으며,
이런 풍습은 1950년 6.25 남북전쟁 때까지 이어졌다.
그래서 딸이 있는 왠만한 시골집에 가면 집안에 벽장과 다락방, 또는 지하로 연결되는 골방이 하나 씩은
모두 지어져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1910년 12월 회사령을 공포하여 조선인의 회사 설립 요건을 신고제에서
허가제로 바꾸는 바람에 회사를 마음대로 설립할 수가 없었으며,
경제발전과 산업화는 전적으로 일본에 의해 저지 당해 1970년대까지 초가집에서 살아야만 하였다.
(홍콩과 비교했을 때 거의 100여년의 차이가 있었다.홍콩 전주민은 전기불을 키고 살았다.
이런 사실을 감추려했는지 일제는 홍콩을 점령하고 다시 원시 상태로 만들어 놓는다^^
국채를 마구 발행하고 강제배급제를 실시하는 등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2~3차산업 경제체제를 붕괴시켜 놓고, 다시 1차 산업체제로 만들어 놓는다.
홍콩 인구160만 중에서 100만 명의 난민을 유발시켜
싱가포르, 필리핀, 말레이시아, 대만, 남태평양 등으로 이주해가 버리게 만들고,
홍콩 자리에는 1949년 중국 모택동군을 피해 피난 온 중국인들로 대체되어 버린다.)
첫댓글 열심히 공부해서 하겠습니다 기황후대해서 역사와 모든 일이 바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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