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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영 남석노공의 물음에 답하다 .
장달수
묘지의 명당을 칭하는 면우지지(眠牛之地)의 출처와 용례
소가 잠자는 자리(면우지지(眠牛之地)) : 좋은 묘지를 이른다. 중국 동진 때 명신 도간(陶侃)이 미천할 때 친상(親喪)을 당해 장사 지내려 할 적에 집에 있던 소가 없어졌다. 어떤 늙은이가 도간에게 “앞산 웅덩이 가에 소가 자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곳에 묘를 쓰면 신하로서 최고의 지위에 오를 것이다.”라고 한 고사에서 온 말이다.
도간[ 陶侃 ] 259년 ~ 334년
동진(東晉) 여강(廬江) 심양(潯陽) 사람. 자는 사행(士行)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가난하게 살았다. 현리(縣吏)가 되었다. 거듭 승진하여 남만장사(南蠻長史)에 올랐다. 장창(張昌)과 진민(陳敏), 두도(杜弢) 등을 격파하고 형주자사(荊州刺史)에 올라 무창(武昌)에 주둔했다. 왕돈(王敦)의 시기를 심하게 받아 광주자사(廣州刺史)로 좌천되었는데, 일이 없으면 아침저녁으로 벽돌을 들면서 운동을 했다. 왕돈이 패한 뒤 형주로 돌아왔다.
성제(成帝) 함화(咸和) 2년(327) 소준(蘇峻)이 반란을 일으키자 경도(京都)의 수비가 비게 되었다. 온교(溫嶠)와 유량(庾亮)이 그를 천거해 맹주로 삼고 소준에 저항해 목을 베고 건강(建康)을 수복했다. 형주와 강주(江州)의 자사를 지냈으며, 교주(交州)와 광주, 영주(寧州), 강주의 제군사(諸軍事)를 맡았다. 음양(陰陽)과 지리(地理)에 능통하고, 근면역행(勤勉力行)한 행실로 유명하며, 41년 동안 장상(將相)의 자리에 있으면서 임금의 자리를 엿볼 기회도 있었지만 젊었을 때 날개가 부러지는 꿈을 꾸었던 일을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억제했다. 동진의 주석(柱石)으로 지목되었다. 장사군공(長沙郡公)에 봉해졌다. 시호는 환(桓)이다.
출처:《晉書 卷五十八》 列傳第28 周處 周訪. 周光
初,陶侃微時,丁艱,將葬,家中忽失牛而不知所在。遇一老父,謂曰:「前崗見一牛眠山汙中,其地若葬,位極人臣矣。」又指一山雲:「此亦其次,當世出二千石。」言訖不見。侃尋牛得之,因葬其處,以所指別山與訪。訪父死,葬焉,果為刺史,著稱甯、益,自訪以下,三世為益州四十一年,如其所言雲。
죽은 자식을 제사하는 글[祭亡子文] 정유년 -순암 안정복
정유년(1777, 정조 1) 3월 27일 계사에 전 성균관 생원 안경증(安景曾)이 그 아비의 임지인 목천현(木川縣) 관사에서 죽어 5월 7일 신미에 광주(廣州) 덕곡(德谷)의 선영에 반장(返葬)하게 되었으므로 하루 전 경오일에 그 아비가 제수를 차려놓고 곡을 한다.
지극한 정은 간격이 없는 것이거늘 어찌 글로써 표현할 수 있겠는가. 부자의 친함은 한 기운이 서로 이어진 것이니, 비록 유명(幽明)의 길이 다르고 생사(生死)의 형체가 다르더라도 지닌 뜻이 있으면 저절로 서로 느껴 통하게 된다. 그러므로 아비가 자식을 제사하고 자식이 아버지를 제사하는 글이 옛날에도 많지 않았으니, 대개 그 지극한 정을 언어와 문자로써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네가 죽어 돌아가는데 내가 상여를 따라가지 못하여 너로 하여금 홀로 돌아가게 하니 어찌 한마디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
아, 애통하도다. 너의 아름다운 문학과 효순(孝順)한 성품은 이 아비만 인정한 것이 아니고 고을의 여러 벗들이 칭송하는 바였다. 너는 어려서부터 일찍이 자제(子弟)된 자로써의 허물됨이 없었고 아울러 단정하고 조신(操身)하는 행실과 겸손하고 삼가는 지조를 지녔으면서도 싸고 감추고 숨기고 요약해서 조금도 남 앞에서 우쭐대는 뜻이 없어, 있으면서도 없는 듯이 하고 가득차 있으면서도 비어 있는 것같이 하였다. 이는 내가 귀히 여기는 바로서 남들은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타고난 자품(姿禀)에 대해 말하면 인(仁)에 가깝고 그 성정(性情)에 대해 말하면 정(靜)에 가깝다. 인(仁)하고 정(靜)한 사람이 반드시 장수(長壽)하는 것은 천리가 본디 그러한 것이거늘, 이제 네가 이에 이르니 하늘의 뜻을 실로 헤아리기 어렵다. 이것이 다 네 아비의 업보에 관계된 것이 아니겠는가.
아, 애통하도다. 어찌한단 말인가. 어찌한단 말인가. 풍수의 말은 비록 믿을 수 없으나, 선산(先山)에는 더이상 자리가 없고 마침 내가 외지에 나와 벼슬할 때 네가 죽었으므로 처음에는 여기에다 자리를 잡을까 하여 면우지지(眠牛之地)를 구하려고 하였는데,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은 고금이 다 마찬가지이므로 너로 하여금 고향으로 돌아가 묻히게 하노니, 너의 혼령도 돌아가게 된 것을 반드시 기뻐할 것이다.
내가 관직에 몸담은 데다 또 질병이 있어서 너와 함께 돌아가지 못하고 곡을 하며 한잔 술을 올리니 이 슬픔이 어찌 한량이 있겠는가. 못다한 회포가 천 가지 만 가지이나 말로 이를 필요가 없을 것이다. 흠향할지어다.
祭亡子文 丁酉
維歲次丁酉三月二十七日癸巳。故成均生員安景曾觀化于木川縣衙。其父之任所。將以五月初七日辛未。返靷于廣州德谷之先塋。前一日庚午。其父奠而哭之曰。至情無間。何用文爲。父子之親。一氣相仍。雖幽明路殊。生死形異。旨意所存。自相感通。是以父祭子子祭父之文。古不多見。盖其至情所在。不可以言語文字而爲之也。然而今汝之死歸。我未隨喪而使汝獨歸。則烏可無一言乎。嗚呼痛哉。惟汝文學之懿。孝順之性。非惟其父許之。鄕黨諸友之所稱。自汝孩提以後。未嘗有子弟之過。兼以端飭之行謙謹之操。而鞱晦隱約。無一毫加人之意。以有爲無。以實爲虛。此余之所貴。而人所不知者也。語其姿禀則近乎仁。語其性情則近乎靜。仁靜之必壽。天理之固然。而今汝至此。天實難諶。莫非汝父業障之所關耶。嗚呼痛哉。奈何奈何。堪輿之說。雖不可信。先山更無餘穴。適余來守外邑。而汝又死焉。故初將卜兆於此土。欲求眠牛之地。而首丘之懷。古今同然。使汝歸葬。魂兮歸去。亦必有喜。余有官守而兼以疾病。不得與汝同歸。哭奠一觴。此慟曷已。餘懷千萬。不待言諭。尙饗。
갈암에 대한 제문 [성문하(成文夏)]
사문이 장차 망하려 하니 / 斯文將喪
하늘이시여 이 유림을 어찌하리까 / 天乎奈此儒林
군자가 돌아가시어 / 君子有終
지금은 진택으로 가 버리셨습니다 / 今也往卽眞宅
이에 장사 지내는 날에 이르러 / 肆趁眠牛之開域
제수에 의탁하여 제문을 바치게 했습니다 / 俾托曝鷄以陳辭
생각건대 우리 공께서는 기자(箕子)의 동방에서 태어나셨으니 / 念我公生晩箕東
대개 그 사람됨은 유하혜(柳下惠)의 풍도를 들었습니다 / 蓋其人聞風柳下
집을 벗어나지 않고도 가르침을 이루었으니 / 不出家而成敎
백씨는 훈을 불고 / 伯氏吹壎
중씨는 지를 불었습니다 / 仲氏吹篪
더불어 자리를 함께하면서 현자를 높이니 / 與共位而尊賢
곳간의 사람은 곡식을 대 주었고 / 廩人繼粟
푸줏간의 사람은 고기를 대 주었습니다 / 庖人繼肉
그러나 음양은 소장하는 운수가 있고 / 惟陰陽消長之有數
운우는 번복하는 무상함이 있었습니다 / 亦雲雨翻覆之無常
험난함을 두루 맛보고 / 險難備嘗
몸이 불측한 지경에 처하였으나 / 身在不測之地
수염과 모발이 그전보다 좋아지시니 / 髭髮勝昔
공이 능한 바는 하늘이었습니다 / 公之所能者天
나가서는 천하의 달존이 되었고 / 出而爲天下達尊
돌아와서는 관서의 부자가 되셨으니 / 歸歟則關西夫子
의심나는 것을 묻고 덕을 상고하매 / 稽疑考德
한마디로 그 시비를 정하여 주셨습니다 / 一言定其是非
빈 채로 왔다가 채워서 돌아가게 되어 / 虛往實歸
선비들이 존경하고 본받을 바가 있었는데 / 多士有所矜式
어찌 알았겠습니까 병이 깊어져 / 豈意二豎之爲祟
졸지에 한 노인이 돌아가실 줄을 / 竟至一老之不遺
오호라 슬프다 / 嗚呼哀哉
공이 금리로 이거한 뒤로 / 自公錦里移居
저는 오래도록 장빈에서 병치레를 하느라 / 久我漳濱臥病
스스로 노력하지 못하고 / 不克自致
십 년의 마음을 저버렸습니다 / 孤負十年之心
도모하던 바를 이루었으나 / 獲遂所圖
또 한마디 말도 없이 물러났는데 / 又無一語而退
개연히 당시를 한탄하노니 / 慨然當日爲恨
마침내 천고의 슬픔을 이루었습니다 / 遂成千古之悲
오호라 슬프도다 / 嗚呼哀哉
정의를 맺고 사귐을 논해 보자면 / 托契論交
양가의 우호는 / 兩家好也
삼대의 묘도 문자에 나타나 있습니다 / 三世揭阡
후세에 전하는 한 자 한 자가 / 照後一字
천금보다도 무거워 / 重於千金
네 마음을 은혜롭게 하여 자손들에게 미치라고 하셨으니 / 所謂恩爾心而在子孫
대개 사사로이 곡하나 나라를 위해 슬퍼하는 것입니다 / 蓋以哭吾私而慟邦國
말로는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으니 / 言不可盡
상심을 어찌할 것입니까 / 傷如之何
오호라 슬프도다 / 嗚呼哀哉
갈암에 대한 제문 [김성구(金聲久)]
순수한 기운이 하악에 모이니 / 粹氣鍾河嶽
오직 공께서 온전하게 받으셨네 / 惟公稟賦全
높은 문장은 대아를 따를 만했고 / 高文追大雅
깊은 학문은 전현을 부연할 만하였네 / 邃學啓前賢
바위 골짜기에서 진취를 탐구하면서 / 巖壑探眞趣
옥 거문고의 끊어진 줄을 정비하였네 / 瑤琴理絶絃
풍운이 천 년의 만남을 이루니 / 風雲千載會
우로가 일시에 치우치게 내렸도다 / 雨露一時偏
맑은 종묘에는 화려한 종이 울리고 / 淸廟華鐘韻
밝은 조정에는 상서로운 봉황이 춤을 추도다 / 明庭瑞鳳躚
군신이 날마다 세 번 경연에서 접하니 / 日三筵上接
한 해에 다섯 번 승진하여 태중으로 옮겨갔네 / 歲五太中遷
계옥하여 임금의 도를 도왔고 / 啓沃資皇道
논사하여 성상의 은혜에 보답하였네 / 論思荷聖憐
소미성이 북극성 주변을 도니 / 少微環北極
경월이 이조(吏曹)에서 빛났다네 / 卿月耀東銓
진퇴가 시운과 관계되어 / 進退關時命
상전이 벽해되듯 변화가 이어지니 / 滄桑互遞傳
붉은 충정은 한나라 왕실을 근심하였건만 / 丹忱憂漢室
흰머리 노인이 상천의 물에 조문하였네 / 白首弔湘川
천지에 새로운 은택이 넘치게 되어 / 天地流新渥
초야에서 노년을 보낼 수 있었네 / 田園送暮年
젊은 학자들이 빈번하게 와서 여쭈니 / 靑衿紛考問
몇 번이나 서책을 연마하였던가 / 黃卷幾磨硏
몸은 굴하여도 마음은 오히려 태평하였고 / 跡屈心逾泰
길은 궁해도 지조는 더욱 굳어졌네 / 途窮操益堅
사문은 안타깝게도 곤액에 처했고 / 斯文嗟蹇厄
우리 도는 험난한 길을 가게 되었네 / 吾道覺迍邅
목가의 재앙이 도리어 참혹하니 / 木稼災還慘
유림엔 애통함이 홀연히 찾아들었네 / 儒林痛忽纏
용렬한 이 몸이 일찍이 문하에 들어 / 疎蹤曾忝御
이끌어 주시는 은혜를 입었네 / 末眷賴推牽
담소는 봄기운이 자리에서 피어나는 듯했고 / 笑語春生座
흉금은 달이 연못에 비치는 듯했네 / 襟懷月照淵
이제는 모두 끝났음을 알겠거니 / 秪今知已矣
옛날을 추억하매 눈물이 배나 흐르네 / 追憶倍潸焉
쓸쓸히 장지(葬地)를 정하니 / 惆悵眠牛卜
처량하게 명정(銘旌)만 휘날렸다네 / 凄涼飛旐翩
야대는 길이 적막한데 / 夜臺長寂寞
황천길은 마치 닿아 있는 듯하네 / 泉路若因緣
늙은 몸이 또 병까지 걸려 / 衰老兼嬰疾
한 잔 술도 바치지 못했네 / 單杯阻漬綿
공사를 위한 끝없는 눈물 / 公私無限淚
멀리 금강 가에서 뿌릴 뿐이네 / 遙灑錦江邊
성 현감(成縣監) 진장(震長) 을 보내는 만사 -송준길
염락의 옛 학맥을 이었고 / 濂洛流派古
산하의 기운 받았지요 / 河山秀氣奇
규운이 지령과 합하여 / 奎運協地靈
정채가 남방에 내렸지요 / 精彩降南陲
충효는 선훈을 계승했고 / 忠孝承先訓
시례는 유경을 본받았으며 / 詩禮襲經遺
행실이 전일하고 독실했던 것은 / 踐履專而篤
경의가 양쪽서 잡아 주어서이지요 / 敬義夾相持
임천 편히 여겨 구하지 않으니 / 林泉安不求
사우들 더욱 높게 우러렀지요 / 士友仰之彌
공은 천민 중의 선각자이니 / 天民公先覺
뉘 그 흉중 엿볼 수 있었겠소 / 胸海孰能窺
사람을 알아보는 지혜는 거울처럼 밝았고 / 知人明寶鑑
사람을 대하는 마음은 저울처럼 공평했지요 / 接物平稱錘
경제의 솜씨 오래 놀렸으니 / 久閒經濟手
묘당의 자질 헛되이 늙었지요 / 虛老廟堂姿
소명을 받던 날 기뻐하면서 / 深喜奉檄日
솜씨 조금 시험해 보았지요 / 少試恢刃時
이치 틀려 하늘 믿기 어렵고 / 理舛天難諶
귀신 사나워 정신 지치었지요 / 鬼癘神自疲
증씨 갑자기 자리 바꾸었으니 / 曾氏奄易簀
노공이 혹시 비문을 쓸 수 있을까 / 潞公倘題碑
우정에 봄비 뿌리는데 / 郵亭春雨灑
새벽바람에 조마가 우네요 / 祖馬曉風嘶
늙은 부모님 집에서 서러워하고 / 鶴髮悲高堂
아들들 여이 따르며 통곡합니다 / 麟趾泣旅輀
길한 언덕에 잠자는 소 보았고 / 吉岡看眠牛
좋은 날짜 신령한 거북이 증명했지요 / 靈辰驗神龜
그 용모 다시 볼 수 없으니 / 儀容難復睹
근심과 기쁨을 알 수 없네요 / 憂樂兩不知
이 이별 개인의 애통만이 아니어서 / 此別非私慟
울면서 만사 지어 멀리 보냅니다 / 遙寄泣綴辭
윤휴에 대한 만사 [김빈(金)]
늦게서야 산림에서 일어나 큰 명망을 지녔건만 / 晩起山林負大名
누가 알랴 말세에 도가 행할 수 없는 것을 / 誰知叔世道難行
깊은 원한 맺혔어라 황천에 묻혔는데 / 幽寃鬱結黃泉閉
좋은 운이 돌아왔어라 태양이 밝았네 / 泰運回還白日明
부의를 내렸어라 새로운 은택을 다시 받았고 / 贈賻更霑新雨露
하얀 글씨의 옛 명정이 지금 또 빛나네 / 粉書追煥舊銘旌
여흥의 강가에 소가 누울 만한 자리여 / 驪興江上眠牛地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슬퍼하는 지나는 사람들의 심정이어라 / 指點空傷過客情
와계 김공 묘지명 병서〔臥溪金公墓誌銘 幷序〕 -향산 이만도 찬
성균관 진사인 와계(臥溪) 김공의 휘는 성흠(聖欽), 자는 경백(敬伯)으로 의성군(義城君) 용비(龍庇)의 후손이다. 중세(中世)에 청계(靑溪) 선생 휘 진(璡)이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가 퇴도 부자(退陶夫子)의 문하에 들어가 유림의 대족(大族)이 되었으니, 그 맏이인 약봉(藥峯) 휘 극일(克一)이 공의 6세조이다. 증조는 표은(瓢隱) 휘 시온(是榲)이니 숭정 처사(崇禎處士)이다. 조부의 휘는 방형(邦衡)이고, 부친은 휘 귀중(龜重)이니 숙부인 호군(護軍) 방조(邦照)에게 양자로 나가셨다. 모친 재령 이씨(載寧李氏)는 부제학(副提學) 맹현(孟賢)의 후손인 표(杓)의 따님이다. 숙종 임술년(1682, 숙종8)에 공은 임하현(臨河縣)의 사저(私邸)에서 태어났다.
나이 서른에 사마(司馬) 양시(兩試)에 합격하고, 일흔여섯 살에 와계정사(臥溪精舍)에서 돌아가시니 정축년(1757, 영조33) 7월 16일이었다. 임남(臨南)의 구수현(龜水峴) 신향(辛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완산 이씨(完山李氏)에게 장가들었는데 모산(茅山) 동완(棟完)의 따님이다. 재취(再娶)는 아주 신씨(鵝洲申氏)이니 분석(賁錫)의 따님이다. 아들 용한(龍漢), 봉한(鳳漢)을 낳았고 딸은 박성주(朴聖周), 이인온(李寅熅)에게 출가하였다. 삼취(三娶)는 고성 이씨(固城李氏)이니 만재(萬材)의 따님이다. 아들 좌한(佐漢), 명한(明漢)을 낳았고 딸은 권이정(權以楨)에게 출가하였다.
손자는 열 명이니 시집(始集), 시림(始臨), 시업(始業), 시적(始頔), 시권(始權), 시락(始樂), 시빈(始贇), 시규(始奎), 시구(始九), 시겸(始謙)이다. 증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공은 일찍이 〈기우가(騎牛歌)〉를 지어 종제인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 선생을 전송하였는데 그 노래에 이르기를,
자네는 말을 타고 나는 소를 탔는데 / 君騎馬我騎牛
소를 타고서 깊은 산에 들려네 / 騎牛將欲入山深
말을 타고 서쪽으로 장안까지 갈 터인데 / 騎馬西馳長安路
장안에 도착하면 그 즉시 돌아오게 / 願君西去卽歸來
시냇물 흘러가는 비 내리는 산속에서 나와 함께 말을 치고 소를 먹이세 / 共我牧馬放牛溪山雨
하였다. 그 노래에 숨은 덕이 들어 있어서 공의 평생을 다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내가 이제 그 노래에 화답하여 묘도(墓道)를 돕는다. 노래를 짓는다.
아아, 소를 타고 가나니 / 噫嘻騎牛兮
소를 타고서 어디로 가는가 / 騎牛何之
아침에 적암의 숙부 집을 떠나서 / 朝發適菴之叔庭
저녁에는 모산의 관사를 지나 / 暮過茅山之館
저 금수의 당우에 올라가네 / 而登錦水之堂
아름다운 무지개는 견우성과 북두성 사이에 뜨고 / 文虹射牛斗之墟
밤 기운은 우산의 나무에 맑았네 / 夜氣淸牛山之木
바람도 고르고 기운도 화평하니 / 風調氣槩
우저를 따라서 달을 띄우고 / 從牛渚而泛月
돈독한 의지로 힘써 배우니 / 篤志力學
구산에서 쇠뿔에 책을 건 이밀을 따르리라 / 追緱山之掛角
국학에 일찍 들어갔으니 / 膠庠早陞
제나라 환공을 보좌할 만하고 / 如可輔於齊桓
스승의 원통함을 밝혀내지 못했으니 / 師冤未暴
어찌 감히 진나라 목공에게 등용되기를 구하랴 / 豈敢干於秦穆
우승유와 이덕유의 당쟁이 심하니 / 牛李黨深
행인은 이득을 얻고 마을 사람들은 재앙을 입는 것을 생각하고 / 宜念行得而邑灾
우두산에서 적을 사로잡았으니 / 牛頭賊擒
나는 이제 의맹의 맹주를 그만두겠네 / 我罷義盟之執耳
애닯고 애닯도다, 부모님이시여 / 哀哀父母
세 가지 제물로 제사하지 못하여 한스럽네 / 恨未奉於三牲
다정한 형제들 / 戚戚兄弟
길가의 갈대를 조심하여 밟지 말게 / 式勿踐於行葦
제산 학사(霽山學士) 말을 타고 남쪽으로 떠나니 / 學士馬兮南流
나는 소〔八百〕를 타고 따라가서 위로하리 / 乘八百而往慰
닭을 잡는 집에 / 割鷄之室
공사를 물음이 어찌 그리 많으며 / 何多公事之問
청총마(靑驄馬)가 도착하니 / 驄馬之至
도리어 희귀한 물건 탐한다 혐의하네 / 還嫌物色之求
노자가 소를 타고 관동으로 멀리 가매 / 遠遊關東
허공에 서리는 붉은 기운을 보겠고 / 如可見於紫氣
와촌에 이주하여 농사를 짓지만 / 移耕臥村
상류에서 물 먹이는 것 배우지 아니했네 / 匪學飮於上流
노래도 끝났구나, 구수(龜水) 언덕 바라보니 / 歌罷兮望龜丘
가랑비는 언제나 봄풀 위에 내리는데 / 細雨百年春草上
소 탄 이는 어디 가고 소만 졸고 있구나 / 不見騎牛有眠牛
소를 탄 신선만 사라진 게 아니라 / 不惟騎牛仙不見
말을 타고 떠난 학사도 / 騎馬學士兮
상제 계신 하늘로 아득히 가버렸네 / 于何邈玉樓
[주]기우가(騎牛歌)를 …… 전송하였는데 :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 1684~1747)은 김성흠의 종숙인 김태중(金泰重)의 장자이다. 두 살 아래의 6촌 동생이었지만 이현일(李玄逸)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한 동문의 친우로서 친밀함이 더할 나위가 없었다. 김성탁이 영조 때 관직을 받고 숙배(肅拜)하러 갈 때에 김성흠은 강가까지 배웅을 나가서 전별하고, 자신이 타고 갔던 말을 김성탁에게 주고 자신은 황우(黃牛)를 타고 귀가하였다. 그러고는 〈기우가〉를 지어 석별의 정을 노래하였는데, 이것이 세상에 회자되었다. 《雨皐文集 卷7 再從叔臥溪公遺事》
첫댓글 학천선생 김와계집(성흠)묘갈명 읽다가 글내용으로는 면우가무덤은 짐작했으나 出處와用例를 진실하고 성의있게 알려주시니萬가지의심을풀었소 용례중안순암의祭亡子文은 코끝이찡하며손이눈가로가네요 효도는교육하면서 慈愛는안가르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