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굿바이 루돌프....

[손님]

가슴이 아리는 글... 추천합니다.

사커월드에서 퍼왔습니다.

굿바이 루돌프....
 조나단   2006·02·23 07:25 HIT : 847 VOTE : 20
 
   
제목 한줄 쓰고, 가슴이 먹먹하고...키보드판에서 냉기가 느껴지고 손끝도 얼얼합니다. 아니, 지금 제 심정이 그런 거겠죠. 어제는 유난히도 잔인했던 하루였습니다. 낮엔 이동국, 밤엔 김상록 얘기로 붉은 심장에 녹슨 대못을 박고...김상록 이적설은 일찌감치 듣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포항이 어떻게든 붙잡아주겠지, 그래도 스타를 아끼는 포항이니깐 어떻게든 붙잡아주겠지, 그래도 포항팬들이 눈에 넣어도 안아플 정도로 사랑하는 선수인데 어떻게든 붙잡아주겠지...사실은 빌어먹을 김사장이지만 쇼맨심이 남달라서 이래저래 팬들 눈치 보아가며 운영하니깐 당연히...하지만 하필 타이밍도 이렇게, 시한폭탄을 터뜨려주는군요. 사실 카운트다운 들어갔던 선수입니다만, 이렇게 터질 줄은 몰랐습니다.

어제는 지인에게서 채팅으로, 이동국이 수원에 거절의사를 표명했단 소식을 접하고 조금은 한숨을 돌리던 순간인데, 갑자기 또다른 지인한테 문자가 삐비빅 오더군요. 김상록이 SK로 이적했단 뉴스가 떴으니 사커월드를 확인해 보라고. 그리고 스틸레젼님의 글을 확인하며, 어이없어 웃음이 나오다간, 하루가 유난히도 길다는 생각이 들어, 컴퓨터 오른쪽 하단의 시계를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새 몇분쯤 흘러버리고 마취된 감각이 풀려나듯 그제서야 얼얼했던 영혼에서 아픔이 느껴졌습니다. 누르면 아프죠. 이대로 아침이 오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채팅마저 종료하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하루가 가기 전에 도망치듯 잠을 청한 만큼, 이렇게 아침도 새벽도 일찌감치 찾아오는군요. 저도 모르게 눈이 떠진 채로, 각막이 유난히도 따갑고 목뒤가 뻣뻣해져, 깨달았습니다. 눈을 붙여봐도 이젠 소용이 없겠구나. 그리고 일어나서 시계를 확인했죠. 새벽 5시 36분. 그리고 평소엔 온라인에 몇줄씩 뜨던 지인들도 잠든 시간 [온라인 대화상대 없음]. 아침잠이 많은 저에겐 천지개벽 같은 시간. 이렇게 일찍 잠이 달아나 버린, 잔인한 새벽입니다.

2002년 여름, 제가 사랑했던 포항에는 홍명보도, 윤보영도, 김상훈도, 그리고 김상록도 있었습니다. 최순호 감독이 하석주, 김기남, 고병운 등 30대 노장미들만 선발출전 시키면서, 이동국만 최전방에 박아두고 미들을 모조리 하프라인 아래로 철수해선, 미들이 하프라인을 넘지 않는 축구, 미들이 45분만 뛰면 지쳐떨어지는 축구, 낙하산을 떨구듯이 이동국의 발치만 겨냥한 축구를 고집할때...5백, 7백, 9백 수비로 인해 90분내내 수비만 해야했던 홍명보의 생고생과, 전방에서 90분내내 홀로 아리랑을 춤춰야 했던 이동국의 고립을 지켜보는 것도 고역이었지만...벤치에 있는 김상록을 지켜보는 일도 고역이었습니다. 김상록만 들어오면, 미들에 생기가 돌고, 중앙에 활기가 도는, 그런 변화를 두눈으로 똑똑히 지켜봤던 만큼, 90분내내 김상록의 출전을 애타게 기다리며, 그러다간 K-리그 연맹 홈페이지로 출전명단을 확인하며, 최순호 감독을 향해 속으로 '제발'을 외치던 심정.

2003년을 맞이해서 신년회를 개최할 때, 마린스 한두분께 거듭 당부했습니다. 신년회에 참석하면, 최순호 감독님께 김상록을 왜 기용하지 않는 건지 질의를 해달라고. 그래서 답변을 꼭 받아달라고. 그런데, 저만 의구심을 가졌던 게 아닌 모양입니다. 신년회에 다녀온 그분은, 자기 말고도 항의하는 팬들이 있었다며, 최순호 감독의 답변을 전했습니다. 자신이 추구하는 전술에 맞지 않아서 김상록을 기용하지 않는다. 어이없어 웃음만 나왔지요. 뻥축구 전술에??? 1분1초 조금만 투자했으면, 한경기 두경기 조금씩만 투자하다보면, 충분히 실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그런 선수인데, 최순호 감독이 이관우를 탐낼 동안, 완성품을 가로챌 생각만 하는 동안, 조금만 투자해주면 되는 건데...이동국의 날개인 김상록을 쳐내고선 도대체 뭘 추구하겠다고? 결국 최순호 감독의 스타일을 견디질 못해서 홍명보는 갤럭시로, 이동국은 상무로, 그리고 김상록도 1년후쯤 뒤따라서 상무행을 택했지요.

김상록의 상무입대 직전, 최순호 감독이 김상록을 윙으로 개조하던 웃지못할 촌극도 떠오릅니다. 푸릇푸릇한 재기발랄함을 지닌 플레이메이커인데, 어느순간 레프트윙 라이트윙으로 그라운드를 달려가는 모습에 뒷통수를 얻어맞은 느낌. 그래도 스피드가 빨라져서, 그래도 김상록이 그라운드에 모처럼 나왔다는 사실로 그저 반갑기만 했던...하지만 너무도 아까웠던 김상록의 365일. 결국 상무행을 택했을 땐, '그래, 가서 네 날개를 펼치고 와라.' 하고 행운을 빌었지요.

둔탁해진 게임감각. 그래도 광주상무에서 김상록과 이동국이 조우하는 순간이 좋았습니다. 윤보영도, 허제정도, 이정운도, 그렇게 하나둘씩 포항의 낀세대들이 도피하듯 상무에서 보금자리를 틀자, 안쓰럽고 짠한 마음도 들었지만, 제가 사랑했던 2002년의 선수들이 한데 모였다는 사실로도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저에겐 희망이 있었지요. 최순호 감독만 포항을 떠나면.

하지만, 김현식 사장의 부임으로, 이젠 쫑파티만 남았습니다. 이런저런 잡음이 계속해서 들려오고, 포항이 뿌리째로 흔들리는 얘기들만 들려오고...그래도 저에겐 김상록이 희망이었지요. 작년초반, 2월부터 8월까지 6개월동안 기관지염을 앓았습니다. 도저히 내과 처방약으로는 듣지 않아, 마지막 실끈처럼 한의원을 찾아 치료를 받고 있었고, 한약봉지를 들고 경기장을 찾았지요. 5.18 광주 5-3 GS의 결전의 순간에도, 저는 김상록을 지켜보러 상암 S석에 섰었지요. 심장과 폐가 찢어질까 겁날 정도로 심각하게 기침을 토하면서, 온몸이 자지러지도록 기침을 토하면서, 한손에는 한약봉지를 쥐고, 그렇게 광주의 7번을 향해 눈길을 고정한 채로. 당시 박주영의 빛바랜 해트트릭만 집중조명 했었지만, 김상록도 2골 1어시스트로 팀의 승리를 이끌어냈었습니다. 박주영 뒤엔 패배가, 김상록 앞엔 승리가 있었지요. 그날 집에 돌아오는 길, 사실은 술취한 사람들이 깨뜨려놓은 술병 조각들이 여기저기 지저분하게 널려 있었는데, 김상록의 세번째 그리고 다섯번째 골장면에 도취된 저에게는 오히려 금가루와 은가루를 흩뿌려 놓은듯이 보도블럭에 박혀 가로등 불빛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을 발하면서 그저 낭만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구름 위를 걷는 느낌으로, 눈길 위를 걷는 폭신폭신, 발밑이 빠질 듯한 아찔함...노래도 흥얼거렸지요. "루돌프 사슴 골은 매우 반짝이는 골~ 만일 네가 봤다면~ 불붙는가 했겠지~♬"

다음날 아침, "사슴의 7"이란 닉으로 여기 사커월드 게시판에 리뷰를 썼었지요. 개작해서 노래까지 흥얼대며, 글의 분위기가 엉망진창 들떠있는데도, 평소 제가 김상록을 "사슴"이라 불렀던 걸 아는 사람들은 사슴의 7의 정체가 저라는 걸 단번에 알아보더군요. 사슴의 7, 상록의 7. GS전에서, 심판이 지나치게 편파판정을 한다 싶으면 67kg의 연약한 체구로도 거침없이 육탄돌격으로 상대팀 선수를 한방에 나가떨어지게 하고선, 심판이 달려와서 꾸짖으면, 띠껍다는 식으로 고개만 뒤로 돌리고는 그냥 훽 가버리던 깡따구도, GS수비진을 요리조리 피하면서 마치 왈츠를 추듯 달려가던 모습도...눈앞에 아른아른...정말이지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천식환자처럼 요동치듯 기침하며 그렇게 아팠는데도, 하나도 아프지 않을 만큼.

어떤 K리그 기자가 김상록과 인터뷰를 했을 때도 기억납니다. 인터넷 상에서 루돌프, 꽃사슴 등으로 불리는 걸 알고 있냐는 질문에, 알고 있다면서 별명이 마음에 든다면서 미소했다던...제멋대로 지어붙인 별명인데, 장난처럼 뿌려댔던 별명인데, 그래도 마음에 든다고 말해주던 것이 기뻤지요. 그런데 이젠 우리 상록이, 우리 루돌프, 우리 꽃사슴...이렇게 부를 수가 없게 되었군요.

경남행 루머가 돌 때부터, 반쯤 각오하던 일이지만, SK라니...기어이 김사장이 제눈에서 피눈물을 뽑습니다. 상무행을 택할 때부터, 아니 그이전부터 포항에 맺힌 것이 많은 김상록이었지만, 그래서 포항을 떠나고도 싶어했던 김상록이었지만, 그레도 포항이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걸 알고 있는 김상록이었고 또한 친구 이동국이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것도 알고 있는 김상록이었습니다. 이동국의 싸이에다 남겼던 말을 저는 잊지 못합니다. 얼른 가서 호흡 맞추자고. 그한마디 믿고 또 믿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하지만 이렇게 심장에 대못이 박힙니다. 포항 떠나더라도 잘되기를, 행운을 빌어주고 싶은 선수였는데, 축구에 투자라곤 눈꼽만큼도 않던, 원정필패를 꿈꾸면서 "원정경기에서 져야 기업이미지에 손실이 가지 않는다"는 헛소리로 잿밥이나 뿌려대던 하필 그팀이란 사실이 못내 서럽습니다. 제가 패륜이라 부르는 또다른 팀이지만, 그팀으로 보내버린, 김사장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김상록의 행운을 빕니다. 좋아하는 축구...즐겁게, 행복하게, 구김없이, 마음껏 볼을 찰 수 있도록, 그라운드에서 왈츠를 춤추듯 마냥 즐겁게 요리조리 누빌 수 있도록. 물론 포항을 상대로는 빌어주질 못하겠지만, 그팀의 승리조차 빌어주질 못하겠지만, 빌어먹을 딜레마를 느끼지만, 그래도 제가 흘린 피눈물만큼 김상록의 행복을 빌며...그리고 2002년 전북전에서 이동국-윤보영-김상록 편대가 출격해선 3-3으로 엎치락뒤치락 추격의 고삐를 당기며 동점골을 꽂아넣던 순간의 기쁨을 되새기며, 마지막으로 불러봅니다. 굿바이 루돌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