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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창세기 제23강
꿈꾸는 요셉
말씀/창37,38장
요절/창37:9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전에 우리는 야곱을 연단하시고 빚으사 이스라엘로 키워 가시는 하나님에 대해 배웠습니다. 이제 37장부터 50장까지는 요셉에 대한 스토리를 기록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창세기 37장부터 50장까지를 요셉의 인생 이야기로만 국한시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부분을 자세히 읽다보면 하나님은 단지 요셉만을 인도하시고 축복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야곱과 그의 열두 아들 전체를 아우르며 섬세하게 인도하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근거로 창세기 37장 2절을 보면 “요셉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이렇게 하지 않고 “야곱의 족보(역사)는 이러하니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과 그 열두 아들을 장차 이스라엘 역사에 기초로 삼고자 계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았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요셉 한 사람을 택하시고 그들의 죄 문제를 드러내시고 그들의 병든 내면을 점차 치료해 가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뜻하신 원대한 인류구원역사를 친히 이루어 나가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부터 시작해서 앞으로 창세기 종반부를 공부하면서 하나님의 섬세하신 섭리의 손길을 깊이 영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꿈꾸는 요셉 (37장)
먼저 야곱의 자녀들의 모습이 어떠한지 떠올려 보겠습니다. 창세기 34장에서 야곱의 외동딸 디나는 세겜 땅의 길거리를 배회하다 좋지 않은 일을 당하게 됩니다. 이에 화가 난 야곱의 둘째 아들 시므온과 셋째 아들 레위가 세겜을 쳐들어가 약탈과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35장 22절에 보면 야곱의 첫째아들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 빌하를 강간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38장에 보면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는 아내가 죽은 뒤에 창녀를 찾아가 자신의 정욕을 채웁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대상은 다름 아닌 자신의 며느리 다말이었습니다. 야곱이 첩을 통해 낳은 아들들은 아버지 몰래 나쁜 짓들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37장 2절에 보면 요셉이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께 일러바쳤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야곱의 자식들 중에 제대로 된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다들 문제투성이입니다. 이렇게 해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의 꿈인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의 조상이 되겠습니까? 사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지만 우리 한 사람을 살펴보면 다 문제투성이요 허물덩어리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성장시켜가고 계십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문제 많은 야곱 가정에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상징)라 할 수 있는 요셉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요셉의 인생은 여러 면에서 예수님을 닮았습니다. 옷이 벗겨져 배척을 당하고, 은 몇 푼에 팔려가고, 형들의 미움을 받고, 보디발 여사의 모함을 받고 죄를 대신 담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그러다 결국엔 총리가 되어 흉년의 때에 자기 가족뿐만 아니라 온 천지 백성들을 구원하는 모습, 자신을 괴롭힌 형제들의 죄를 다 용서하고 포용하는 것 등등. 다시 말하면 대속적인 측면에서 예수님의 삶과 흡사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야곱같이 사기꾼 기질이 농후한 사람에게서 어떻게 요셉 같은 천사표 아들이 태어날 수 있는지 그 자체가 아이러니입니다. 이를 볼 때 요셉은 단순한 야곱의 육체적 아들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이 땅에 보내셔서 택하시고 그의 인생을 섭리하셨습니다.
그러면 야곱은 요셉을 어떻게 키웁니까? 야곱은 요셉이 노년에 얻은 늦둥이 아들이기 때문에 다른 아들보다 더욱 깊이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채색옷을 지어 입혔습니다. 여기서 채색옷은 소매가 긴 정장으로 주로 집안의 장자들이 입는 옷을 가리킵니다. 야곱은 다른 아들들은 주로 들에 나가 일하도록 소매가 짧은 작업복을 만들어 입혔습니다. 그러나 요셉만큼은 일을 안 해도 되는 채색옷을 입히고 자기 품에 안고 키우고자 했습니다. 특히 요셉은 야곱이 가장 사랑했던 라헬이 낳은 아들이요, 그 라헬이 죽었기 때문에 특별히 더 사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요셉을 곤란하게 만들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요셉에 대한 야곱의 편애는 형들로 하여금 미움의 감정을 깊이 심어 놓았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사랑은 아무리 그 사람에게 잘해주고 싶어도 한계가 있습니다. 오히려 역효과를 내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하심은 어떠합니까? 첫째, 하나님은 요셉에게 꿈을 주셨습니다. 6,7절을 보십시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하나님은 또 다른 꿈을 주셨습니다. 9절을 보겠습니다.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이 두 꿈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요셉이 장차 지도자가 되는 것을 상징합니다. 지금 요셉은 많은 형제들 틈 속에서 기죽어 지내기 쉬웠습니다. 누나 디나는 초미니 스커트에 매번 MP3나 귀에 꽂고 다니는 날라리였습니다. 큰형 르우벤은 틈만 나면 자매들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플레이보이입니다. 둘째, 셋째인 시므온, 레위 형은 항상 목검을 휘두르며 누구를 잡아 죽일 듯합니다. 그 밖에 다른 형들은 어떻게 하면 아버지 양들을 뒤로 빼돌려 차나 한 대 뽑아볼까 궁리합니다. 요셉이 만약 이런 형들 사이에 방치되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려서부터 불량한 형들 심부름이나 하면서 따라다니다 비행청소년이 되기 쉬웠을 것입니다. 엄마도 없기 때문에 연상의 여인을 짝사랑하다 그 마음이 병들기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요셉에게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꿈을 꾸게 하셨습니다. 형들을 포함해서 주변 사람들이 다 무릎을 꿇고 낙심해도 자신만은 꿋꿋하게 일어나 시대를 구원하는 지도자가 될 것이라는 원대한 꿈을 주셨습니다. 지금은 비록 형들에게 무시당하고 왕따 당하는 꼬라비이지만 장차 머리가 되어 시대를 이끌어 가리라는 꿈을 심어주셨습니다. 당시에 꾸는 꿈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시로 인식되었습니다. 또 두 번씩이나 비슷한 꿈을 꾸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꿈대로 이루신다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꿈을 꾸게 하시고 그 꿈대로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요셉에게는 세상 만민을 구원할 지도자로서의 뜻을 두시고 하나님께서 빚으시고 연단하사 이 뜻을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어 가십니다. 이는 우리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허물지고 부족한, 자격 없는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셔서 하나님의 뜻을 두시고 그 뜻대로 우리를 인도해 가시는 것입니다. 이곳에 계신 여러분은 다들 하나님께 택함 받고 부름 받아 나아온 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삶에 속 깊은 뜻을 두고 계시기에 여러분들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뜻을 따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길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어린 요셉의 가슴에 심어주신 꿈은 그가 앞으로 겪게 될 어떤 역경과 시련도 참고 견뎌낼 수 있는 힘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현실적인 것들을 많이 쥐어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 야곱이 요셉에게 입혀 주었던 채색옷과 같은 사랑을 기대합니다. 다른 형들처럼 일을 하지 않아도 되고 아버지 품에 안겨 재롱이나 피우는 달콤한 솜사탕 같은 사랑을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처럼 얕은 수준의 사랑을 베풀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현실적인 것보다도 미래적인 것, 유형의 것보다도 무형의 것, 물질적인 것보다도 영적인 것, 개인적인 것보다도 역사적인 꿈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아브라함도 보십시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빨리 아들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하늘의 뭇별을 보여주시며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는 소망을 먼저 심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꿈을 심어주시고 그대로 인도하셨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채색옷의 사랑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고 유약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품속에서 자족하고 마는 응석받이로 전락시킬 수 있습니다. 반면에 꿈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위대하게 만듭니다. 큰 스케일의 사람이 되게 하며 역사적인 안목을 가지고 인생을 살게 만듭니다. 인생에서 만나는 크고 작은 어려움과 시련도 능히 참고 견딜 힘을 줍니다. 이를 볼 때 요셉에게 꿈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채색옷을 지어 입혀 그 품 안에 두고자 하는 야곱의 사랑보다 훨씬 더 차원 높은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꾸게 하시는 꿈,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뜻 두신 바는 무엇입니까? 우리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요? 요셉 당시에는 꿈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많이 계시하셨지만 지금은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 두신 바들을 많이 알려주십니다. 물론 우리가 꾸는 꿈과 환상, 예언, 주위의 상황과 환경들을 통해, 또는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 목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을 말씀해 주시기도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공부하고 말씀을 듣다가 성령님께서 주시는 큰 감동이 오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굳게 붙잡고 나아가도록 감동을 주시는 말씀들이 우리 각자에게 있습니다. 저에게는 사도행전 20장 24절 말씀입니다. 평생의 요절 말씀이기도 합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하나님은 저를 통해 복음 전하는 목자의 뜻을 두시고 나의 생명보다도 복음 전하는 일을 더욱 귀히 여기도록 제 삶을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해 가십니다. 저는 제가 진주에 오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고 꾸는 꿈에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저에게 하나님은 스탭 목자로서 캠퍼스 영혼들을 구원하는 삶, 또 더 나아가 성서한국과 세계선교의 일부를 담당하는 개척목자의 꿈을 사도행전 20장 24절 말씀을 통해 꾸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꿈대로 제 인생길을 섬세하게 인도하고 계십니다. 저를 진주 캠퍼스로 보내시고 진주에서의 개척목자의 삶을 살게 하시고 장차는 진주센터를 통해 세계에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진주센터를 통해 창원과 마산 캠퍼스까지 개척되는 꿈을 주시고 그 꿈 가운데 살아가도록 인도하십니다 (저 개인에게 주신 꿈이지만 여러분과 공유하기를 원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나 한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 하나님께서 꾸게 하시는 꿈을 붙잡고 살아가며 그 꿈대로 섬세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반면 요셉의 형들은 요셉의 가슴속에 타오르는 그 꿈을 짓밟고 묻어버리고자 무던히 애를 썼습니다. “그의 꿈이 과연 어떻게 되나 보자” 비웃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요셉의 인생이 그의 꿈과 거리가 멀어지도록 요셉을 구덩이에 던지고 애굽에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이는 요셉에게 꿈꾸게 하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만홀히 여기는 행위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몸뚱이를 구덩이에 던질 수는 있었지만 그의 마음에 간직된 꿈을 묻을 수는 없었습니다. 요셉을 노예로 팔아넘길 수는 있었지만 그에게 주어진 꿈까지 팔아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요셉의 채색옷은 벗겨서 갈기갈기 찢어버릴 수 있었지만 요셉의 가슴속에 간직된 그 꿈을 찢을 수는 없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상황이 어렵고 힘들면 힘들수록 요셉의 꿈은 더욱더 찬란하게 빛났습니다. 형들은 요셉의 꿈을 지연시키고 막아보고자 애를 썼지만 결과적으로는 요셉의 꿈을 앞당기는 터널을 뚫어주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꿈은 귀한 것이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십니다. 우리도 인간적인 채색옷의 사랑에 연연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꿈을 주시는 사랑을 최고의 선물로 영접하고 이를 보석처럼 굳게 붙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하나님은 요셉에게 꿈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꿈을 주셨다고 해서 바로 그 꿈이 성취되도록 꿈같은 인생을 살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꿈을 주신 때는 17살 때였습니다. 그러나 그 꿈이 성취되는 때는 13년이 지난 30살 때였습니다. 그 13년의 세월은 요셉이 철저하게 무너지고 부서지고 인생 밑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는 과정이었습니다. 물론 요셉은 어려서부터 순수하고 정직하게 자랐습니다. 그래서 형들의 작은 과실도 용납하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일러바쳤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도 숨김없이 형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그런 순수하고 정직한 것만 가지고는 큰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요셉이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는 큰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인생의 쓴맛 단맛, 즉 산전수전을 다 겪어봐야 합니다. 19,20절을 보십시오. “서로 이르되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형들은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 넣고 굶겨 죽이고자 했습니다. 얼마나 무시무시한 시련입니까? 요셉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로 그 형들에게 버림을 받아 깊은 구덩이에 빠져 굶어 죽게 되었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형들은 요셉을 구덩이에 던지고 요셉이 가지고 온 도시락을 까 먹고 있습니다. 요셉은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구덩이가 깊어서도 무서웠겠지만 친형들이 자기를 깊은 구덩이에 쳐 박아 놓고 히히덕거리며 음식을 먹고 있는 그 모습이 더 끔찍했을 것입니다. “아, 인간이 이럴 수도 있는 존재로구나.” 인간실존의 비극과 인간본성의 야수성을 보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42장 21절에 보면 이때 요셉은 형들에게 애걸했다고 했습니다. “형님들, 제발 살려주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이제 채색옷 안 입고 다닐께요. 꿈 이야기 안할께요. 한번만 봐주세요.” 통사정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형들은 듣는 체도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는 아버지 심부름에 순종하기 위해 무려 100킬로미터를 걸어서 도시락을 형들에게 가져다주었건만 형들은 그 도시락을 다 까먹고 자신을 노예로 팔아먹고 은 20냥까지 챙기는 것이 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때 요셉은 인간 내면의 밑바닥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자기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채색옷을 입고 다닐 때 형들의 마음이 얼마나 불편했을까? 자기는 정직하게 형들의 잘못을 일러바친다고 했지만 그때 그 형들은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을까? 자기는 그저 순수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꿈 이야기를 하고 다녔지만 형들은 자기를 얼마나 아니꼽고 얄밉게 생각했을까? 비로소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시련과 아픔을 통해 요셉의 마음을 넓히시고 깊이 있는 사고를 하게 하신 것입니다.
꿈은 분명 아름답고 찬란합니다. 고상하고 멋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꿈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은 우리에게 있어 결코 만만치가 않습니다. 요셉도 그렇습니다. 요셉은 앞으로 주변에 수많은 국가들과 백성들을 구원하고 그들을 섬길 큰 지도자가 될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주로 채색옷 입고 다니면서 잘난 체하면 되겠습니까? 자기는 일도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잘못을 잡아내고 입바른 소리나 하면 되겠습니까? 꿈 하나 잘 꿨다고 자기가 세상에서 최고인 것처럼 뻐기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가 꿈대로 장차 민족의 구원자요,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꿈도 꿈이지만 그 꿈을 하나님께서 이루실만한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꿈을 주시고 많은 연단의 인생길을 반드시 우리에게 던져주십니다. 우리는 그 연단의 인생길을 잘 걷고 감당해야 합니다. 요셉이 진정한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에 대한 이해심도 넓어야 하고 삶의 현장도 체험해 봐야 하고 각종 인생들의 아픔을 알아야 합니다. 배도 고파봐야 하고, 사랑받지 못한 자의 설움도 느껴봐야 합니다. 소외된 자, 구덩이에 던져져 억울해하는 자들의 서러움도 알아야 합니다. 자기 백성들이 앞으로 400년 동안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게 될 터인데 그 노예들의 슬픔도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형들을 쓰셔서 요셉에게서 채색옷을 벗기시고 구덩이에도 던지시고 노예로도 팔려가게 하신 것입니다. 분명 꿈꾸는 시간은 행복하지만 연단 받는 시간은 괴롭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연단 받는 그 시간이 바로 꿈이 영글어가는 시간이라는 사실을. 우리의 현실이 때로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꿈과는 전혀 상관없는 방향으로 가고 때로는 정반대로 간다 할지라고 잘 참고 견딜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반드시 그 꿈대로 인도하시고 축복하시리라 믿습니다.
Ⅱ. 유다와 다말 (38장)
38장은 요셉의 역사 중간에 유다의 역사를 집어넣은 것입니다. 이는 저자의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가장 부끄러운 죄성과 그 죄 가운데 흐르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간 후에 유다는 가출을 했습니다. 요셉에 대한 미안함 때문일까요? 더욱 알 수 없는 일은 그가 이방 여인과 결혼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조상들이 그토록 싫어하던 일입니다. 그는 세 아들을 낳았는데 다말이라는 여인을 큰 며느리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은 신혼 첫 날 밤 큰 아들을 데려가셨는데 그가 악했기 때문입니다. 졸지에 다말은 과부가 되었는데 더욱 슬픈 것은 상속자가 없는 것입니다. 당시 이런 불행한 사태를 조금이나마 돕고자 계대제도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유다는 이 관습에 따라 둘째 아들을 형수에게 장가들게 합니다. 그러나 그는 마음에 두었던 여인이 있었는지 아이를 일부러 갖지 않았습니다.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십니다. 유다는 겁이 덜컹 났습니다. 이러다가는 세 아들을 모두 잃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셋째는 큰며느리에게 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셋째가 아직 어리다는 핑계를 대며 시간을 끌었습니다. 그리고 며느리를 친정으로 보냅니다. 유다 가문은 후계자가 끊길 위기를 맞습니다.
이 위기가 어떻게 극복됩니까? 얼마 후 아내가 세상을 뜨자 유다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친구를 찾습니다. 이 소식이 며느리 다말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녀는 몸 파는 여인으로 변장하고 유다를 유혹합니다. 셋째 아들이 어른이 되었는데도 자기에게 장가를 보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다말을 창녀로 생각하고는 잠자리를 같이 했습니다. 그리고는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를 담보로 잡힙니다. 다음 날 아침 다말은 안개처럼 사라집니다. 그로부터 3개월 후 유다의 친구가 이야기합니다. “자네 며느리가 임신했어, 인터넷망이 후끈 달아올랐어.” 유다는 놀라 말합니다. “그녀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다말은 장작더미 앞에 서서 최후진술을 합니다.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잉태했나이다.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유다의 것이었습니다. 유다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26절을 보십시오.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무엇이 옳다는 것일까요? 유다는 다말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그 자손과 가족 공동체의 미래는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는 의롭지 못합니다. 그런데 다말은 자신의 의무를 충실히 다합니다. 그녀에게는 상속자를 낳아 남편의 대를 잇게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그녀는 이 의무에 충실한 것입니다. 즉 가문의 후사를 잇고 가족 공동체를 보존하는 일에 충실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다말의 행위는 유다보다 옳습니다.
그럼 이 사건이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사람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대로 일하십니다. 그 방법은 우리의 관습이나 도덕률을 뛰어 넘습니다. 다말의 행위를 일반윤리의 잣대로 본다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녀를 구속사역에 귀하게 쓰십니다. 다말은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쌍둥이가 나오는 모습은 할아버지 야곱과 에서를 쏙 빼닮았습니다. 형이 먼저 나오려고 하는 순간 동생이 선수를 쳤습니다. 다말의 둘째 아들 베레스는 다윗 왕의 할아버지가 됩니다. 다말은 육신의 혈통으로는 예수님의 선대 할머니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구속역사를 사람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구원자를 세상에 보낼 때 죄인들의 후손으로 보내십니다. 하나님의 구속역사는 의인이 아닌 죄인들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의 허물과 실수, 그리고 부끄러움을 감당하시며 쓰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캠퍼스 구원역사에 쓰임 받는 것 또한 이 하나님의 은총 때문입니다. 사람의 관습이나 전통과 자격에 근거한다면 우리는 택함 받을 수 없고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방적인 방법 때문에, 하나님의 크신 은총 때문에 택함 받고 쓰임 받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요셉을 택하시고 그에게 꿈을 주신 것을 배웠습니다. 또한 그 꿈을 성취하기까지 필요한 연단을 받게 하신 것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사 우리에게 꿈을 주시고 그 꿈대로 인도하시고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깊이 영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그 꿈대로 인도하시는 과정에서 우리를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겸손하고 충성스럽게 영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꿈이 이루어짐을 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