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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에 앞서
게이머란, 넓은 의미로는 게임 - 비디오 게임이든 보드 게임이든 - 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하는 단어다.
학교에서 쉬는시간에 친구랑 모여서 젠가를 하는 학생들도 게이머고, 퇴근하고 나서 게임기 붙잡고 몇 게임 하면서 스트레스 풀고 자는 사람도 게이머다.
그렇다면 그런 게이머와는 다른 단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하드코어 게이머란 뭘까 하는 의문이 들 것이다.
[내 몸에 손대지마 이 더러운 캐주얼 게이머 놈들!]
캐주얼 게이머라는 말은 비교적 자주 쓰이니 관심이 조금 있다면 들어봤을 것이다. 코어 게이머, 혹은 하드코어 게이머는 그들과 대칭점을 이루는 사람들, 게임 그 자체가 주된 취미인 사람들이다. 이렇게만 본다면 왜인지 방구석에 틀어박혀 눈 큰 캐릭터가 나오는 게임만 해대는, 어떤 부정적인 인물상이 떠오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대략 이러한 이미지]
하지만 일반적인 생각과는 다르게, 이런 스테레오타입의 사람은 오히려 하드코어 게이머가 아니다.
2. 하드코어 게이머는 뭐하는 놈들인가
다음의 테스트를 간단히 해보자.
1. 게임을 처음 시작하면 메뉴 화면에서 '게임 시작'을 먼저 누른다
2. GOTY 및 GOTY 에디션이라는게 뭘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3. 괜찮은 고전게임이라면 지금도 재미있게 즐길 수 있다
4. 선호 장르보다 별로인 장르를 꼽기가 더 수월하다
5. 머릿속에서라도 어떤 게임에 대한 평가를 내려본 적이 있다
6. 20초 안에 유명한 게임계 인물을 관련된 작품명까지 포함해 4명이상 나열할 수 있다
7. 세계 3대 게임쇼가 각각 뭔지 알고 있다
8. 게임하면서 그 게임에다 현질은 잘 안하는 편이다
9. 게임은 예술인가? 라는 화두를 가지고 골똘히 생각해본 적이 있다
물론 심도있는 학술적 고찰이 들어간 것도 아니고, 점수가 낮거나 높다고 비정상이라는 것이 아닌, 반 농담식 10문항짜리 테스트다. 9문항이 아니냐고? 표시되지 않은 10번째 문항은 다음과 같다 '튜토리얼을 스킵하지 않는다'. 만약 당신이 9문항에 답하지 않고 스크롤을 내렸다면 당연히 X가 된다.
1번문항을 제외하고, O가 많을수록 게임 그 자체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1번문항은 왜 반대냐고?
[하드코어 게이머는 저 '옵션' 이라는 글자를 먼저 누르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사람들이니까]
적다보니 너무 야매같아서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 같아, 외국산 논문을 가져와봤다. HEARTS, CLUBS, DIAMONDS, SPADES: PLAYERS WHO SUIT MUDS(출처 :http://www.mud.co.uk/richard/hcds.htm)라는 제목으로, 리처드 바틀이라는 사람이 쓴 온라인 게이머 성향에 대한 연구논문에서는 온라인 게임을 즐기는 게이머들을 4종류로 분류했다. 간단히 요약해보자면...
[게임내에 마련된 과제들을 달성하는 것을 좋아하는 달성가]
[게임 월드와 시스템 자체를 분석하고 파고드는 탐험가]
[채팅과 친목도모가 주 목표인 사교가]
[남 조지는게 제일 재밌는 킬러]
이 4종의 게이머들 중에서, 하드코어 게이머라 할 수 있는 것은 달성가와 탐험가다. 타인과의 상호작용보다는 게임 그 자체와 상호작용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다.
이렇듯 특정 게임 혹은 특정 장르를 좋아하는 일반적인 게이머들과는 달리 그들은 게임 그 자체를 좋아한다. 새로운 게임을 플레이하며 그 게임만의 규칙과 게임 방식을 배우고, 나아가 그 규칙들을 활용해 게임 자체를 공략하는 것 혹은 게임에 몰입하여 제작자가 게임에 넣어둔 메세지, 관점을 받아들이거나 재해석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게임의 장르나 테마는 큰 걸림돌이 되지 않으며, 좀 더 많고 다양한 게임을 체험해보기를 원한다.
3. 그들이 말하는 게임이란
예전에는 그저 게임을 두루 잘 하는 사람이라면 거진 다 하드코어 게이머로 싸잡을 수 있었지만, 2010년대의 게임계는 90년대처럼 좁지도, 얕지도 않다. 하루가 멀다하고 다양한 매체로 다양한 테마를 가진 많은 장르의 게임이 나오고 있으며, 팬 베이스는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고, 그들은 직접 게임을 개발하거나 모드를 제작하며 포럼에서 게임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을 구태의연하게 요약하기보다는 그들 사이에서 떠도는, 핫한 떡밥을 몇 개 소개하도록 하겠다.
<작가주의>
무슨 주의 라고 떡하니 나와있으니 어려운 말 같지만, 별거 아니다. 그냥 제작자가 원하는대로 만든다는 것이다. 게임이라는 것은 제작자(들)의 기발한 아이디어나 독특한 관점을 구현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으며, 굳이 그런 심적인 요소가 아니더라도 제작자마다 게임은 그 독특한 색채를 띠게 되어 있다. 무미건조하게 게임을 만드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수능 영어 지문에도 출현했던, 최근 독자 스튜디오를 차린 히데오 코지마]
물론 무조건 독창적인 것만이 최선인 것은 아니다. 너티독의 언차티드처럼 새로운 것은 없지만 시의적절하게 괜찮은 요소를 결합해서 탄생한 명작도 있으며, 그 적절한 배합 자체가 새로운 것이자 그들만의 색깔이 될 수가 있다. (하드 코어 게이머들이 독립한 코지마에 대해 걱정하는 것도 그것이다. 과연 메기솔 IP를 빼고도 그만의 색깔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이 회사도 그런걸 잘해서 먹고 산다. 여캐 엉덩이 잘만들어서 먹고 사는게 아니라.]
그래서 하드코어 게이머들은 그러한 게임이 가지는 색채에 집중하며, 자신이 선호하는 것이 무엇인지, 왜 좋은지 혹은 어떤 회사가 어떤 시리즈를 어떻게 망쳤는지를 이야기하곤 한다. 특히 그들은 굉장히 계산적이거나 과보호적으로 디자인된 게임을 싫어하는데, 비유하자면 영양제로만 이루어진 곤죽으로 식사를 하는 것과 같다. 배는 부르고 영양가도 있지만, 결국 심리적인 공복감은 해결되지 않는다.
<재미란 무엇인가>
사람은 어떤 것에서 재미를 얻는가? 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들이다. 이 재미에 대한 주제는 비단 게이머들 뿐만 아니라, 게임 제작자들도 심도있게 논하는 것이다. 결국 게임이란 재미를 얻기 위한 것이니까.
https://kocca.kr/knowledge/abroad/indu/__icsFiles/afieldfile/2012/05/30/Ot0JENX0yov0.pdf
자칫 집중력이 떨어질 수 있는 주제이므로, 링크로 대신한다.
<예송...아니 예술논쟁>
게임은 예술인가? 라는 것은 상당히 오래된 떡밥이다. 예전의 영화가 그랬고, 더 예전에 사진이 그랬듯이 새로운 (주로 상업적인)매체가 등장할 때 마다 예술성 논란은 일어났다. 가장 최근의 것이 바로 종합매체인 게임이다. 이런 토론이 시작되면 항상 다른 주제가 곧장 튀어나온다.
"예술이라는게 뭔데? 그것부터 이야기하자!"
물론 이런 화두에서 예술이란 보통 소위 말하는 high-art를 지칭하는 것이다. 대중적인 면에서라면 몰라도 과연 게임이 그런 것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많은 게이머들이 쉽사리 답을 내 놓지 못한 주제다.
[그저 평화롭고 미려하다고 게임이 예술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시각과 의견이 존재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게임 역시도 예술이 될 수 있음이 서서히 받아들여질 것이라는데에 대해서는 대부분이 동의하고 있다. 게임과 예술에 대한 탐구는 지금도 인디/메이져를 막론하고 심도있게 이루어지고 있다.
<아마추어리즘>
게임은 상품이다. 그것도 일부 소수를 위한 맞춤이 아니라 대량양산해서 대중에게 판매하는 것이며 애니메이션처럼 투자효율이 구린데 리스크 역시 크다. 물론 투자금의 몇십 배를 뽑는 대박을 터트릴 수는 있지만, 그런 케이스는 정말로 희귀하다.
[그래서 기업들은 어중간한 게임을 만들어 어중간한 수익을 얻는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런 리스크를 감당하려 하지 않고 검증된 요소들만 투입하려는 메이저 제작사 혹은 유통사들에 의해 위에 말한 게임의 '색깔'이 옅어지거나 탁해지게 된다. 게임이 가진 본질적인 재미를 추구하는 하드코어 게이머들로써는 이런 꼴을 보며 한숨을 쉴 수 밖에 없다.
[본 사진을 보고 언짢으실 춪팬들에게 심심한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게임사 입장에서는 하드코어 게이머란 숫자도 적은게 입맛만 까다로운 골치아픈 짐덩어리기 때문에, 의견에 잘 귀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리뷰어 평점은 낮은데 유저평점은 높은 게임들이 있는 것 처럼, 하드코어 게이머들의 의견이라고 다 정확한(=판매에 도움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시간과 예산이 한정된 회사가 수익을 내기 위해 안전한 선택을 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고, 일단 그럭저럭 재미있어서 잘 팔리면 그만이라지만 본질을 잃은 게임은 흥행하건 말건 그들은 쳐다보지 않는다. 그것이 그들의 자존심이니까.
[자꾸 이쪽 예시만 들어서 미안합니다]
다행히, 스팀을 위시한 전자유통망의 출현으로 수많은 인디게임들이 물위로 올라왔고, 욕구불만에 시달리던 많은 게이머들은 그 안식처를 찾았다고 할 수 있다. 인디게임이 빛을 보지 못했던 것은 게임 볼륨이 적어서도, 폴리싱이 덜 되어서도 아닌, 그저 그들도 받아주는 유통망이 없었기 때문이니까. 그런 다양한 게임의 공급을 통해 게임의 저변은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넓어졌으며, 메이져 게임에 대한 시선 역시도 전보다 더 이완되었다. 관심없는 게임에 쓸데없는 기대를 할 일이 없어졌으니까.
[스팀이 진정으로 고평가받는 것은 세일이 아니라 인디게임 및 게임계에 대한 공헌 때문이다]
4. 게임도 별 다를 것 없는 취미다
야구도 이승엽이 좋아서 삼성 경기를 자주 보는 사람과, 세이버매트릭스 수치까지 읊으며 보는 사람이 있고, 미식축구가 그냥 떡대들 들이박는 게임인줄 아는 사람도 있는 반면 복잡한 작전과 룰을 알고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 영화도 그냥 신나고 재밌는 걸 보는 사람이 있고 진지한 고찰을 하며 보는 사람들이 있다. 동일한 매체를 즐기더라도 일반인과 매니아로 양분할 수 있는 것이다.
매니아들은 일반인에 비해 뭔가 더 특별한 재능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며, 더 똑똑하거나 고학력이라서도 아니다. 매니아와 일반인은 위아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매니아들은 단지 그것에 한 걸음 더 다가간 사람들일 뿐이다.
게임 역시도, 마찬가지다.
소설속에서나 나오던 가상현실이 VR이라는 것으로 차츰 구현되려 하는 2015년의 끝자락에서, 게이머들 역시도 그들의 세계가 존중받는 당당한 취미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게임 좋아합니다 하면 마약사범이 되는 사회... 더이상은 naver....]
첫댓글 와 너무 좋은 글 잘봤습니다
글 진짜 잘쓰셨네요
문장 하나하나 공감하면서 읽었습니다 :)
이 글을 개념ㄱ...아니 클래식으로!
삭제된 댓글 입니다.
그래서 중간쯔음에 위치한 사람들을 일컫는 코어게이머라는 단어도 있는데... 글이 너무 늘어질까봐 뺐습니다. 경계가 좀 희미한 선이기도 하고...
인디게임, 풀프라이스 게임만 하는건 또 아니니까 그런 말에도 어폐가 있고요.
빠진 스샷 추가, 오타 수정, 내용 보충.
테스트 1번문항에 옵션부터 누른다는 얘기가 없길래 난 하드코어 게이머가 아닌줄 알았더니...
하드코어 게이머는 아니지만 게임에 관심있는 사람으로서 재밌는 글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