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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선 목사 선친 순교자 서용문 목사 이야기
자료 1. 순교신서Ⅲ. 순교열전212-215쪽에서 발취 2005년 12월 22일 김종희목사 편집
다시 시작한 목회 순교로 마감
순교자 서 용문(徐 用 文)목사
“목사님. 목회자 지망생이 사업에만 저념하다니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얼굴을 붉히며 참회하는 서용문의 말에 선교사 감부열(Campbal)은 껄껄걸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런 아픔도 느낒 못하고 있다면 어떻게 주의 후예라고 하겠 오. 그렇게 괴로워한다면 이 참에 교역을 다시 하지 뭐” 감선교사의 말에 서용문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의 눈은 가격으로 빛이 일었다. “길이 있을까요? 목사님.” “길이야 언제던지 있지 마음이 문제가 아니겠오.” “목사님 저 장사 때려치우고 목회 길로 들어서겠습니다. 저에게 길을 안내해 주십시오” 서용문은 막무가내로 달렸다. 감부열도 그의 열성을 보아 만주지역으로 교민선교사업을 위해 그의 길을 주선해 주었다. 1940년 교단 폐쇄령이 내려지기 1년전이었다.
서용문은 1905년 4월20일 함경북도 어느 산골에서 이조 마지막 무관이었던 아버지의 5남매중 막내로 태어났다. 서용문의 아버지는 국가가 일본에 병탄되고 군대가 해체되자 울분을 견디지 못하고 의병을 모아 일보에 대항하다가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장군의 아내는 비통한 나머지 자식들과 동반 자살을 하면서 어린 핏덩어리 하나만을 남겨놓았다.주변의 이웃들은 장례를 치러주고 그와 가까운 친척을 찾아 아이를 맡기게 되어 서용문은 강계의 두메 사놀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그는 공부도 못하고 어려서부터 너무나 하면서 자랐다. 그때 마침 길을 잃은 아주머니를 만났다. 서용문은 그 아주머니를 길 인도를 해주었는데 이분이 여자 賣書人 ㅣ었다. 그 여인은 어린 용문이가 불쌍했던지 ㅁㅊ건의 쪽복음을 주고갔다. 그는 그 쪽복음을 가지고 글공부를 하면서 하나님에 대해 눈뜨기 시작했다.
용문은 나이 15세 장군의 아들답게 뼈대가 굵고 키가 큰 그는 친척의 집을 떠나 강계로 나왔다. 생각에는 공부를 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돈도 잠잘 곳도 먹을 것도 없어 英實학교 앞에서 서성이다 교장인 감부열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다. “왜 학교 앞에서 서성이느냐.” “공부는 하고 싶은데 누구를 만나야 좋을지 몰라서 이리 서 있습니다” “그래 ? 그럼 이리로 들어오거라” 교장은 용문을 교장실로 불러 자초지종으 드어보니 너무 가련하여 그를 공부 시키게 되었다. 교장 사택에서 일하고 공부하는 생활을 하며 중등학교 과정을 마친후 그는 평양신학굥 입학을 했다. 그도 다른 학생들처럼 한학기 공부하고 몇학기 쉬는 그런 공부였다. 그러기 위해서 압록강 연변의 산간벽지를 그의 아내와 더불어 떠돌며 개척했다. 兩江, 渭原, 楚山 , 등지에서 몇개 교회를 개척해 건축했지만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너무 극심하여 그는 중도에서 신학교를 포기해 버렸다. 그리고는 압록강 국경도시인 만포진으로 이사하여 작은 잡화 식료품 가게를 열었다. 근면 성실했던 두 부부는 장사에 성공했다. 먹을 것에 걱정이 없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서용문은 괴로웠다. 가야될 니느웨를 떠나 다시스로 가버린 요나으 심경이 되어 마음속으로 고통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괴로움을 가지고 아버지 같은 감부열을 만나 용기를 얻은 후 다시 만주땅 통화현 快多帽子라는 소도시로 드어가 한인들을 상대로 목회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박형용박사와 박윤선목사가 재직하고 있는 봉천신학교에 편입학해 졸업을 했다
1945년 8월 15일 그리도 소망하던 광복이 찾아들고 서용문전도사는 가족을 끌고 귀국길에 올랐다. 그는 주로 압록강 연변에서 목회를 했다. 백두산이 바라다 보이는 하늘아래 첫 동리라고 하는 후창에서 목회하던 1946년 강계지역 산서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맏았다. 그는 이어 아록강변 후창교회를 사임하고 평양으로 돌아왔다. 평양시내 보통강 옆 보령교회에서 청빙해 부임했다. 그러나 평양은 후창교회에 비해 교역자를 턱없이 괴롭혔다. 무엇보다 그를 괴롭힌 것은 조선기독교연뱅이었다. 조선기독교연맹은 동료, 선배 교역자들을 동원해 가입하라고 압력을 놓았고 심하게는 내무서에서까지 은근히 협박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호하게 거절했다. 기독교도연맹은 가룟 유다였기 때문이었다. 주변에서는 월남하란 권유도 없지 않았다. 그때 그의 대답은 이것이었다. “목자가 양을 버리고 도망치는 것은 삯꾼 양치기나 하는 노릇이다“ 그는 끝내 평양을 떠나지 않고 주일날이면 손수 종줄을 잡고 종을 쳐서 교이늘을 손짓해 불렀다. 솔직 담백한 성격에 불의를 참지 못하던 서용문목사 지나치에 타협을 거부해 제직들을 당황하게 할 때도 많았다. 그러면서도 성격은 비단결같이 단순했고 예술과 문학을 사랑해 공부하는 교역자상을 보였는가 하면 교이늘 앞서 솔선수범함으로 교인들이 스스로 따라오게 하는 교역을 했던 그였 것이 그를 아는 이들의 후평이다. 1950년 6.25가 날 때도 평양을 한발자욱도 떠나지 않고 강단을 지키다 그해 10월 11일 내무서원들에게 연행되어 행방을 몰랐다가 대동강 하류 강기슭에 시처들이 표류한 소문을 듣고 찾아가니 여러명 목사 장로들의 시체들과 함께 뒤엉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손이 뒤로 묶여진채 끄집어내진 서목사으 몸은 성한 곳이라곤 한군데도 없었고 몸과 얼굴에 따발총 관통상을 입고 있었다. 서목사는 문창권목사의 집례로 장포동교회의 뒷산에 장례되었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서목사으 후예로는 이대 기도교학과 교수인 서광선박사의 2남 2녀가 있다.
순교신서Ⅲ. 순교열전212-215쪽에서 발취 2005년 12월 22일 김종희목사 입력
자료 2.한국교회기념사업회 홈페이지: kcmma.org 김종희 목사 입력
서용문 목사
출 생 일 : 1905. 04. 20
순 교 일 : 1950. 10. 11
교단 : 장로교
영실학교를 거쳐 평양신학교입학
兩江, 渭原, 楚山 개척
평양신학교중퇴 후 봉천신학교(만주) 입학 및 졸업
후창교회 부임
1946년 목사안수(산서노회) 후창교회 목회 중 안수
보령교회(평양) 부임
“목사님. 목회자 지망생이 사업에만 전념하다니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얼굴을 붉히며 참회하는 서용문의 말에 선교사 감부열(Campbal)은 껄껄걸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런 아픔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어떻게 주의 후예라고 하겠오. 그렇게 괴로워한다면 이 참에 교역을 다시 하지 뭐” 감부열선교사의 말에 서용문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의 눈은 감격으로 빛이 일었다. 감목사님 “길이 있을까요? 목사님.” “길이야 언제던지 있지요 마음이 문제가 아니겠오.” “목사님 저 장사 때려치우고 목회 길로 들어서겠습니다. 저에게 길을 안내해 주십시오” 서용문은 막무가내로 달려들었다. 감부열목사도 서용문의 갸륵한 용단과 강한 열성을 보고 만주지역으로 교민선교사업을 위해 그의 길을 주선해 주었다. 1940년 교단 폐쇄령이 내려지기 1년전이었다.
서용문은 1905년 4월20일 함경북도 어느 산골에서 이조 마지막 무관이었던 아버지의 5남매중 막내로 태어났다. 서용문의 아버지는 국가가 일본에 병합되고 군대가 해체되자 울분을 견디지 못하고 의병을 모아 일본에 대항하다가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장군의 아내는 비통한 나머지 자식들과 동반 자결을 하면서 어린 핏덩어리 하나만을 남겨놓았다. 주변의 이웃들은 장례를 치러주고 그와 가까운 친척을 찾아 아이를 맡기게 되어 서용문은 강계의 두메 산골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그는 공부도 못하고 어려서부터 산에가서 나무나 하면서 고생고생 성장했다. 그때 마침 길을 잃은 아주머니를 만났다. 서용문은 그 아주머니를 길 인도를 해주었는데 이분이 여자 賣書人(성경을 파는 사람)이었다. 그 여인은 어린 용문이가 불쌍했던지 몇권의 쪽복음을 주고갔다. 그는 그 쪽복음을 가지고 글공부를 하면서 하나님에 대해 눈뜨기 시작했다.
용문은 나이 15세 장군의 아들답게 뼈대가 굵고 키가 큰 그는 친척의 집을 떠나 강계로 나왔다. 생각에는 공부를 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돈도 잠잘 곳도 먹을 것도 없어 英實학교 앞에서 서성이다 교장인 감부열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다. “왜 학교 앞에서 서성이느냐.”하고 관심을 보였다. “공부는 하고 싶은데 누구를 만나야 좋을지 몰라서 이렇게 서 있습니다” “그래? 그럼 이리로 들어오거라” 교장은 어린 서용문을 교장실로 불러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너무 가련하여 그를 공부 시키게 되었다. 교장 사택에서 일하고 공부하는 생활을 하며 중등학교 과정을 마친 후 그는 평양신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도 당시 다른 학생들도 그랬던것 처럼 한학기 공부하고 몇학기 쉬는 그런 공부였다. 그러기 위해서 압록강 연변의 산간벽지를 그의 아내와 더불어 떠돌며 개척을했다. 兩江, 渭原, 楚山 , 등지에서 몇개 교회를 개척해 건축했지만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너무 극심하여 그는 중도에서 신학교를 포기해 버렸다. 그리고는 압록강 국경도시인 만포진으로 이사하여 작은 잡화 식료품 가게를 열었다. 근면 성실했던 두 부부는 장사에 성공했다. 먹을 것에 걱정이 없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서용문은 괴로웠다. 가야될 니느웨를 떠나 다시스로 가버린 요나의 심경이 되어 마음속으로 고통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괴로움을 가지고 아버지 같은 선교사 감부열목사을 만나 용기를 얻은 후 다시 만주땅 통화현 快多帽子라는 소도시로 들어가 한인들을 상대로 목회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박형용박사와 박윤선목사가 재직하고 있는 봉천신학교에 편입학해 졸업을 했다. 박형용박사와 박윤선목사는 모두 학자이면서 후에 신학교 총장이 된분이다)
1945년 8월 15일 그리도 소망하던 광복이 찾아들고 서용문전도사는 가족을 이끌고 귀국길에 올랐다. 그는 주로 압록강 연변에서 목회를 했다. 백두산이 바라다 보이는 하늘아래 첫 동리라고 하는 후창에서 목회하던 1946년 강계지역 산서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맏았다. 해방이되자 그는 이어 압록강변 후창교회를 사임하고 평양으로 돌아왔다. 평양시내 보통강 옆 보령교회에서 청빙해 부임했다. 그러나 평양은 연변 후창교회에 비해 교역자를 턱없이 괴롭혔다. 무엇보다 그를 괴롭힌 것은 조선기독교연맹이었다. 조선기독교연맹은 동료, 선배 교역자들을 동원해 연맹에 가입하라고 압력을 놓았고 심하게는 내무서에서까지 은근히 협박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기독교도연맹은 서용문목사가 보기에는 조선기독교연맹은 가룟 유다였기 때문이었다. 주변에서는 월남하라는 권유도 없지 않았다. 그때 그의 대답은 이것이었다. “목자가 양을 버리고 도망치는 것은 삯꾼 양치기나 하는 노릇이다“ 그는 끝내 평양을 떠나지 않고 주일날이면 손수 교회 종줄을 당기며 종을 쳐서 교인들을 손짓해 불렀다. 병합의 울분을 품고 의병을 일으켜 일본에 저항하다가 종신형을 받은 부친의 혈통을 받아 솔직 담백한 성격에 불의를 참지 못하던 서용문목사는 단호하게 타협을 거부해 당회와 제직들을 당황하게 할 때도 많았다. 그러면서도 성격은 비단결같이 단순했고 예술과 문학을 사랑해 공부하는 교역자상을 보였는가 하면 교인들에 앞서 솔선수범함으로 교인들이 스스로 따라오게 하는 교역을 했던 그였다는 것이 그를 아는 이들의 후평이다.
1950년 6.25가 발발할 때도 평양을 한발자욱도 떠나지 않고 강단을 지키다 그해 10월 11일 내무서원들에게 연행되어 행방을 몰랐다가 대동강 하류 강기슭에 시체들이 표류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니 여러명 목사 장로들의 시체들과 함께 뒤엉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손이 뒤로 묶여진채 끄집어내진 서용문 목사의 몸은 성한 곳이라곤 한군데도 없었고 온 몸과 얼굴에 따발총 관통상을 입고 있었다. 서목사는 후에 서울에 무학교회 담임으로 목회하신 문창권목사의 집례로 장포동교회의 뒷산에 장례되었으니 그의 나이 45세의 젊은 나이에 거룩한 순교를 하였던 것이다.순교자 서용문 목사의 유족으로는 이대 기독교학과 교수인 서광선박사와 부인 함선영교수와 2남 2녀가 있다. 아들 서광선 목사의 아내 함 선영 교수는 이화여대 영문과 출신으로 김활란 총장과 김옥길 총장의비서실장으로 1956년에서 1979년 까지 봉직했다. 김옥길 총장이 1979년 최규하 정부의 문교부 장관으로 취임하면서 문교부 장관 비서실장으로 정부에서 일한 경력이 있고, 그 이후 이화여대 비서학과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다가 1996년 서 광선 박사와 함께 은퇴하였다.
자료 3. 2008년 열린사랑세계선교회 월간지에 투고한 자료 김종희 편집
다시 시작한 목회 순교로 마감한 서용문목사(서광선목사 선친)
“목사님. 목회자 지망생이 사업에만 전념하다니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얼굴을 붉히며 참회하는 서용문의 말에 선교사 감부열(Campbal)은 껄껄걸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런 아픔도 느낒 못하고 있다면 어떻게 주의 후예라고 하겠오. 그렇게 괴로워한다면 이 참에 교역을 다시 하지 뭐” 감부열선교사의 말에 서용문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의 눈은 감격으로 빛이 일었다. 감목사님 “길이 있을까요? 목사님.” “길이야 언제던지 있지요 마음이 문제가 아니겠오.” “목사님 저 장사 때려치우고 목회 길로 들어서겠습니다. 저에게 길을 안내해 주십시오” 서용문은 막무가내로 달려들었다. 감부열목사도 그의 서용문의 갸륵한 용단과 강한 열성을 보고 만주지역으로 교민선교사업을 위해 그의 길을 주선해 주었다. 1940년 교단 폐쇄령이 내려지기 1년전이었다.
서용문은 1905년 4월20일 함경북도 어느 산골에서 이조 마지막 무관이었던 아버지의 5남매중 막내로 태어났다. 서용문의 아버지는 국가가 일본에 병탄되고 군대가 해체되자 울분을 견디지 못하고 의병을 모아 일본에 대항하다가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장군의 아내는 비통한 나머지 자식들과 동반 자결을 하면서 어린 핏덩어리 하나만을 남겨놓았다. 주변의 이웃들은 장례를 치러주고 그와 가까운 친척을 찾아 아이를 맡기게 되어 서용문은 강계의 두메 사골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그는 공부도 못하고 어려서부터 산에가서 나무나 하면서 고생고생 성장했다. 그때 마침 길을 잃은 아주머니를 만났다. 서용문은 그 아주머니를 길 인도를 해주었는데 이분이 여자 賣書人(성경을 파는 사람)이었다. 그 여인은 어린 용문이가 불쌍했던지 몇권의 쪽복음을 주고갔다. 그는 그 쪽복음을 가지고 글공부를 하면서 하나님에 대해 눈뜨기 시작했다.
용문은 나이 15세 장군의 아들답게 뼈대가 굵고 키가 큰 그는 친척의 집을 떠나 강계로 나왔다. 생각에는 공부를 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돈도 잠잘 곳도 먹을 것도 없어 英實학교 앞에서 서성이다 교장인 감부열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다. “왜 학교 앞에서 서성이느냐.”하고 관심을 보였다. “공부는 하고 싶은데 누구를 만나야 좋을지 몰라서 이렇게 서 있습니다” “그래? 그럼 이리로 들어오거라” 교장은 어린 서용문을 교장실로 불러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너무 가련하여 그를 공부 시키게 되었다. 교장 사택에서 일하고 공부하는 생활을 하며 중등학교 과정을 마친후 그는 평양신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도 당시 다른 학생들도 그랬던것 처럼 한학기 공부하고 몇학기 쉬는 그런 공부였다. 그러기 위해서 압록강 연변의 산간벽지를 그의 아내와 더불어 떠돌며 개척을했다. 兩江, 渭原, 楚山 , 등지에서 몇개 교회를 개척해 건축했지만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너무 극심하여 그는 중도에서 신학교를 포기해 버렸다. 그리고는 압록강 국경도시인 만포진으로 이사하여 작은 잡화 식료품 가게를 열었다. 근면 성실했던 두 부부는 장사에 성공했다. 먹을 것에 걱정이 없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서용문은 괴로웠다. 가야될 니느웨를 떠나 다시스로 가버린 요나의 심경이 되어 마음속으로 고통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괴로움을 가지고 아버지 같은 선교사 감부열목사을 만나 용기를 얻은 후 다시 만주땅 통화현 快多帽子라는 소도시로 들어가 한인들을 상대로 목회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박형용박사와 박윤선목사가 재직하고 있는 봉천신학교에 편입학해 졸업을 했다. 박형용박사와 박윤선목사는 모두 학자이면 후에 신학교 총장이 된분이다)
1945년 8월 15일 그리도 소망하던 광복이 찾아들고 서용문전도사는 가족을 이끌고 귀국길에 올랐다. 그는 주로 압록강 연변에서 목회를 했다. 백두산이 바라다 보이는 하늘아래 첫 동리라고 하는 후창에서 목회하던 1946년 강계지역 산서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맏았다. 해방이 되자 그는 이어 압록강변 후창교회를 사임하고 평양으로 돌아왔다. 평양시내 보통강 옆 보령교회에서 청빙해 부임했다. 그러나 평양은 연변 후창교회에 비해 교역자를 턱없이 괴롭혔다. 무엇보다 그를 괴롭힌 것은 조선기독교연뱅이었다. 조선기독교연맹은 동료, 선배 교역자들을 동원해 연맹에 가입하라고 압력을 놓았고 심하게는 내무서에서까지 은근히 협박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기독교도연맹은 서용문목사가 보기에는 조선기독교연맹은 가룟유다였기 때문이었다. 주변에서는 월남하라는 권유도 없지 않았다. 그때 그의 대답은 이것이었다. “목자가 양을 버리고 도망치는 것은 삯꾼 양치기나 하는 노릇이다“ 그는 끝내 평양을 떠나지 않고 주일날이면 손수 교회 종줄을 당기며 종을 쳐서 교이늘을 손짓해 불렀다. 병탄의 울분을 품고 의병을 일으켜 일본에 저항하다가 종신형을 받은 부친의 혈통을 받아 솔직 담백한 성격에 불의를 참지 못하던 서용문목사는 단호하게 타협을 거부해 당회와 제직들을 당황하게 할 때도 많았다. 그러면서도 성격은 비단결같이 단순했고 예술과 문학을 사랑해 공부하는 교역자상을 보였는가 하면 교인들에 앞서 솔선수범함으로 교인들이 스스로 따라오게 하는 교역을 했던 그였다는 것이 그를 아는 이들의 후평이다.
1950년 6.25가 발발할 때도 평양을 한발자욱도 떠나지 않고 강단을 지키다 그해 10월 11일 내무서원들에게 연행되어 행방을 몰랐다가 대강 하류 강기슭에 시처들이 표류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니 여러명 목사 장로들의 시체들과 함께 뒤엉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손이 뒤로 묶여진채 끄집어내진 서용문 목사의 몸은 성한 곳이라곤 한군데도 없었고 온 몸과 얼굴에 따발총 관통상을 입고 있었다. 서목사는 후에 서울에 무학교회 담임으로 목회하신 문창권목사의 집례로 장포동교회의 뒷산에 장례되었으니 그의 나이 45의 젊은 나이에 거룩한 순교를 하였던 것이다.
서광선목사는 1931. 4. 15 평북 강계에서 순교자 서용문목사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서용문목사를 따라 목회자요 순교자의 아들로 신앙수학을 한 서광선 목사는1960년 미국 로키마운틴대학교를 졸업하고, 일리노이주립대학교 신학대학원과 뉴욕유니온 신학대학원을 거쳐 1970년 밴더빌트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64년 이후 (1993)년 현재까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교수로 있다. 1978년 동 대학교 문리대학장을 지냈고, 1981년 현대교회 목사로 부임했다. 1983년 기독교학회장, 전국신학대학협의회 23대 회장역임. 1990년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장 등을 역임했다.
1970년대 제5공화국 당시 신학의 사회참여를 주장하여 한때 해직교수가 되기도 했으니 그가 생업을 걸고 신학의 사회참여를 주장한 것도 애국애족의 조부와 순교자 목회자인 아버지의 순교혈통을 이어받아 국가와 교회의 통합적인 조화를 시도하것도 우연이 아니요 이로서 한국교회 사회참여신학의 선구자가 되게하셨던 것이다. 오늘날 국가와 교회사이에 있는 온 역사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그를 통해서 확연히 들어난 것이 틀림없다. 서광선 목사는 은퇴 후에도 대학특강 교회 설교 교회갱신을 위한 세미나 저서활동 등 대내외적인 여러 가지 활동을 통하여 한국사회와 교회에 공헌하고 있다.
유족
순교자 서용문 목사의 유족으로는 이대 기도교학과 교수인 서광선박사와 부인 함선영교수와 2남 2녀가 있다. 아들 서광선 목사의 아내 함 선영 교수는 이화여대 영문과 출신으로 김활란 총장과 김옥길 총장의 비서실장으로 1956년에서 1979년 까지 봉직했다. 김옥길 총장이 1979년 최규하 정부의 문교부 장관으로 취임하면서 문교부 장관 비서실장으로 정부에서 일한 경력이 있고, 그 이후 이화여대 비서학과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다가 1996년서 광 선 박사와 함께 은퇴하였다.
장남 서정실은 연세대학교 화공학과에서 2년 수학, 음악에 뜻을 두고 도미, 뉴욕의 만해탄 음악대학에서 클래식 기타로 음악학사와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하여, 여러 대학에 출강하면서 연주활동을 하고 있다. 그의 처 정 은경은 같은 음대에서 피아노 연주로 석사학위를 취득, 고양시에서 음악학원 원장으로 많은 훌륭한 젊은 음악인을 양성하고 있다. 이들의 슬하에는 초등하교 3학년생 경빈 군이 있다.
차남 서 진실은 이화여대 부속 고등학교 출신으로 음악에 뜻을 두어 미국 등지에서 쟤즈 음악을 수학하고 드럼어로서 대중음악에 심취하고 한국 뿐 아니라 홍콩, 중국,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활발한 음악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의 처 임 정하와의 사이에 1남 1녀, 유하와 연아가 있다.
순교자 서용문목사의 아들 서광선목사의 근황은
사단법인 희망의 소리 이사장
남북 평화재단 이사
민중신학자 서남동목사 기념사업회 이사장
그리고 글로벌 여성 리더십 센터 이사 등 자원봉사
대학과 교회 세미나 등에 특강, 설교, 강의하는 일로
소일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지성·세속·신앙〉·〈현대사회와 종교〉·〈사랑의 하나님 감사합니다〉<계절따라 서령따라> ·〈한국기독교의 새인식〉·〈종교와 인간〉 <독일신학사전 RGG에 한국과 한국선교 투고 등이 있다. <하국기독교정치신학의 전개><기독교 시앙과 신학의 반성> <한의 이야기> < 민중신학의 이해><벙어리의 노래><신앞에 민중과 함께> <서광선 엣세이집><한국여성과 종교>
순교신서Ⅲ. 순교열전(1) 212-215쪽에서 발취 2005년 12월 22일 김종희목사 입력
자료 4. 총회순교자기념선교회가 2007년에 출간한 자료 순교보
2007년 순교보에 실린 <순교자 서용문목사님 아들 서광선목사 탐방>기사(아래)
니느웨로 돌아가 순교로 마감한 서용문목사
2008년 6월 녹음방초 아름다운 계절 순교자 기념주일을 마지하여 순교자 서용문 목사님의 장남 서광선 목사(신학자, 교수, 목회자)에게 순교자 아버지 서용문목사의 순교이야기를 들어봄으로 한국교회 순교역사의 맥을 짚어본다.
문 김목사:서 목사님의 조부님이 마지막 무관...이셨다고 하셨는데요?
서광선목사 답: 저의 할아버지 이야기는 선친 살아계실 때, 그러니까 저의 어린 시절 옛날 이야기식으로 말씀하신 것이 전부입니다. “전설(傳說)”이고 거의 신화(神話)에 가까운 것입니다. 저희 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할아버지는 구한말 과거의 무과(武科)에 합격하신 무장으로 단단한 체격에 용감한 전사였다고 합니다. 조선조의 군대가 일본에 의해서 해산된 이후 의병대장으로 출전하여 말을 타고 의병을 지휘하면서 단칼로 일본 군인들을 무찔렀다고 합니다. 항일 의병대장으로 우리는 할아버지를 영웅시하면서 자라났습니다.
문 김목사: 선친되시는 순교자 서 용문 목사님의 성장과정에 대해서 듣려 주시기 바랍니다.
서광선목사 답:저의 아버지는 고아로 성장하셨습니다. 할아버지가 일본 군경에 체포되어 함흥 감옥에 수감되어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저희 할머니는 아이들 다섯에게 독약을 주어 죽게 하신 다음 말도 못하는 두 살 백이 용문(用文 )이를 도저히 독살할 수가 없어서 살려 두시고 스스로 자결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웃 분들이 모여서 장례를 치러주시고, 용문이는 평안복도 두메산골에 사는 친척을 찾아 맡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공부랄 것도 없고, 산에 가서 나무를 해 오는 일을 하기도 하고, 동네 사람들의 염소 치는 일, 허드렛일을 하면서 소일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문 김목사: 선친께서는 어떻게 예수를 영접하고 공부하게 되셨습니까?.......
서광선목사 답:그 당시, 그러니까 1920년경이겠지요. 3.1 운동도 듣도 보도 못했을 때인데, 산 속에서 염소를 치고 있다가 어떤 아주머니를 만나게 됩니다. 아주머니는 길을 잃었는지 염소 치기 소년에게 길을 물었다고 합니다. 길을 가르켜 드리면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하다가 한글 읽는 이야기가 나왔다고 합니다. 글을 모른다는 소년의 말에 이 아주머니가 주머니에서 주섬 주섬 한권의 작은 책을 내 놓으면서 한글을 떼면 이 책을 읽을 수 있게 된다고 해서 한글을 이 아주머니에게 배우게 됩니다. 이 아주머니, 한 주일에 한 번씩 염소 치기 소년을 산골로 찾아 와 한글을 가르쳐 주고 했는데, 일 년도 못되어 아주머니가 주는 작은 책을 읽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 작은 책은 그 당시에 성서 매서인(賣書人)인 전도부인들이 들고 다니면서 거저 주기도 하고 팔기도 한 쪽 복음 (마태복음, 마가복음 등 복음서 하나씩을 따로 인쇄한 책)을 말 합니다.
소년 용문이는 매서인 아주머니가 주는 쪽 복음으로 성경을 읽게 되고 여기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주일 마다 찾아오는 매서인 전도부인과 기도를 하게 되고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이 전도부인은 이 소년을 두메산골에 그냥 두지 않고 그 지방에서 가장 큰 고을인 강계(江界)라는 도시에 있는 선교학교인 영실(英實)학교에 가서 공부하라고 일러 줍니다. 천애고아 용문은 맨손으로 강계로 갑니다. 간신히 도시 밖에 자리 잡은 영실학교 교장님 집 앞에서 교장 선생님인 감 부열 (Campbell, Archbald(1890-1977) 선교사를 만나게 됩니다. 우리 아버지 말솜씨가 괜찮았던 것 같아요. 감 부열 목사님은 우리 아버지 말에 감동되었던지, 즉석에서 입학을 허가했을 뿐 아니라 선교사 집에서 일하면서 공부하는 고학생으로 받아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영실학교에서 초등과와 중등과를 수료하게 된 겁니다. 아버지는 살아생전 이 말씀을 하실 때, “우등생”이였다는 자랑은 안하시더군요. 선교사 집에서 일하면서 주경야독(晝耕夜讀)을 하셨을 테니 성적이 좋을 수가 없었겠지요. 아니면 우등생이었는데 겸손해서 말씀을 안 하셨을 수도 있겠지요 (웃음). 하여튼, 감 목사님은 우리 아버지가 목사 되는 것을 원하셔서, 평양에 유학을 보내게 됩니다. 평양신학교에 입학을 하시게 됩니다. 평양에서는 어떻게 학비를 조달했는지 이야기를 들어 본적이 없습니다. 상상컨대 빈 주머니 무일푼으로 평양에 나가서 얼마나 고생하면서 그 어려운 신학공부를 하셨을까.
한 일 년 인가 다니시다가, 한 해 정도 전도사 일 보면서 저금한 돈으로 다시 평양으로 나가자는 생각으로 강계로 돌아 와서 감 부열 선교사님과 의논해 봅니다.
문 김 목사: 서목사님께서 압록강 강변 벽지 전도사시절과 초등학교를 6군데나 다시신 서목사님의 사연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서광서목사 답:감 부열 목사님과 의논 끝에 압록강 가에 있는 개척교회 전도사로 나가게 됩니다. 그때는 이미 결혼을 하셨을 때이고, 저도 강계에서 태어나 얼마 안 되는 때였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제가 유치원 다니는 나이에 위원(渭原)이라는 시골이었습니다. 그리고 초산(楚山)이라는 동네에서 개척교회를 하셨습니다. 서 용문 전도사의 정열적이고 헌신적인 목회로 개척교회는 성장하고, 부흥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부흥하면서 교회당 건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교회 장로님들과 제직들과 갈등이 많았습니다. 개척교회 시작하고 교회 건물을 지을 정도로 부흥하게 되면 장로님들과의 불화 때문에 거의 일 년에 한 번씩 교회를 옮기고 우리 식구는 이사를 해야 했습니다. 글쎄 저는 초등학교를 여섯 군데나 다녔다니까요 (웃음).
문 김목사: 선친 목사님께서 식품 잡화상을 하시게 된 동기와 고기국에 쌀밥 잡수신 이야기가 궁굼합니다.
서광선목사 답:아버지 전도사 시절에 기억나는 것은 어린 아이로서 경험하는 목회자 가족의 가난과 배 고품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시골 전도사 가족의 가난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1930년대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 다 가난했고 굶주리면서 살았지만, 저의 어린 생각에는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 장로님 댁 만 빼 놓고는 모두 가난하고 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전도사는 이 가운데 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앞으로 커서 절대로 목사나 전도사가 되지 않겠다. 의사가 되어서 장로로 교회 일을 맡아 보며 목사 전도사들을 “내어 쫓는” 사람이 되겠다고 공언하며 다녔습니다 (웃음).
가난 보다 더 무서웠던 것은 신사참배 강요 문제였습니다. 작은 동네의 경찰서 순경들이 아버지를 찾아 와서 동네 뒷산에 모신 일본 귀신 집에 가서 절하고 어쩌고 하라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당연히 성경을 들고 나와, 절대 할 수 없다고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일본 군경이 우리 집에 찾아 와서 협박도 하고 권유도 하다가 하도 말을 안 들으니까, 경찰서에 연행해서 협박하는 것이었어요. 나는 아버지를 따라 가서 경찰서 밖에서 엿들을 때도 있었는데,
경찰서장이 큰소리로, “일본 천황이 높은 거요, 당신 하나님이 높은 거요?” 소리 지르면,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거야 물론 우리 하나님이 훨씬 더 높지요...” 그러면 경찰서장이 아버지 따귀를 때리는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옵니다. 나는 밖에 서서 울다가 아버지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 온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신사참배를 하느니 교회 일을 그만 두겠다고 결심한 아버지는 전도사 일을 접으시고 만주 땅이 보이는 압록강변의 만포진(滿浦鎭)이라고 하는 소도시로 이사를 하게 됩니다. 아버지는 이 국경도시의 친구들의 도움으로 시내 중심에 작은 잡화 식품가게를 열게 됩니다. 장사가 너무 잘되었습니다. 그 때는 우리 식구도 3남 1녀의 큰 식구가 되었지요. 그런데 저는 난생 처음으로 하루 세끼 고기 국에 쌀밥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웃음). 우리는 모두 행복했습니다. 아버지만 빼 놓고요. 목회 지망생이, “하나님의 일꾼”이 잡화상을 하면서 돈을 벌고 있다니...고민을 많이 하신것 같았습니다.
문 김목사:순교자이신 선친 서목사님의 고민과 감 부열 목사님과의 만나 만주로 이민가서 개척한 이야기와 아드님 서목사님의 애환에 대해서
서광선목사 답:결국 아버지는 영원한 지도자이며 선생님이신 감 부열 목사님을 찾아 갑니다. 감 목사님 역시 신사참배 거부와 일본의 태평양 전쟁 준비로 한국을 떠나야 하는 어수선한 상태였지만, 서 용문 전도사의 고민을 듣고는 만주에 살면서 고생하는 한족들을 위한 선교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는 일언지하에 “네, 가겠습니다.” 그리고 한 달도 안 되어 이사 짐을 싸들고 압록강 철교를 넘고 국경을 넘어 미지의 세계 만주 벌판에 자리를 잡고 개척교회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저는 동생들과 함께 만주로 가지 못했습니다. 장남인 제가 영양실조로 몸이 허약하다는 이유로 외할머니가 가지 못하게 한 겁니다. 외삼촌이 숭실 전문학교 졸업생으로 시골 초등학교 교장을 하고 있었어요. 거기에 가서 일 년 동안 살면서 영양 섭취하고 몸을 추수리고 만주로 가든지 말든지 하라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동생들과 떨어져서 일 년을 외삼촌의 영향을 받아 가면서 그래도 외로운 삶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외삼촌은 압록강 근처의 소학교 선생이었지만 보기 드문 애국 지성인이어서 많은 이들의 존경과 주목을 받았습니다. 시인이기도 해서 당시 동아일보에 그의 시조와 시들이 실리곤 했습니다. 그중에 아직도 기억하는 시조 한 구절을 소개하면,
이기랴 못 이길 건 이내 몸이 기로구나
오늘도 일곱 번을 나하고 싸웠어도
이 내 몸 못내 이김을 서러(워)서러(워) 하노라
외삼촌은 이 시에 곡조를 부쳐서 노래까지 가르쳐 주신 분이었습니다. (이 삼촌도 6.25가 터지면서 공산군에 끌려가 총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결국 부모님과 동생들 그리움에 잡 못 이루던 저는 만주 두메산골 아버지의 개척교회 사택으로 가게 됩니다. 기차로 몇 시간, 시골 버스로 몇 시간이 걸리는 허허 벌판의 중국 촌에서 한인 초등학교에 다니게 됩니다. 다시 배고픈 생활, 외국에서의 외국인 생활을 감내하게 된 겁니다. 아버지는 통화성 (通化省) 쾌대모자(快大帽子)라고 하는 이름도 야릇한 고장의 한인교회를 개척하시면서 그 주변 100리 이내에 있는 작은 교회를 순회하는 전도사 겸 선교사 일을 보시게 된 겁니다. 다시 우리 식구는 배고프고 가난한 생활을 감내해야 만 했습니다.
3년 전엔가 중국 연길에 있는 연변 과학기술대학 (총장 김 진경 박사)을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통화에서 온 조선족 학생을 만나게 되었는데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아버지는 이곳에서도 일 년 동안의 부흥을 뒤로 하고 만주 서 쪽에 있는 공업도시 본계호 (本溪湖)에 있는 한인교회에 부임했습니다. 그리고 그 근처에 있는 봉천(奉天) 지금의 심양(審陽)에 있는 한인신학교 봉천신학교에 편입해서 신학공부를 마치셨습니다. 이 신학교는 한국의 신사참배 강요에 반대하고 피난 간 목회자들을 위해서 개설한 신학교로 박 형룡 박사님이 교장으로 일하셨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하나 밖에 없는 일본인 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항일 운동가인 아버지가 왜 나를 일본중학교에 넣었는지 여쭈어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일본과 싸우려면 일본을 알아야 해. 일본 사람처럼 일본 말을 할 수 있도록 열심히 공부하라”는 부탁 만 하시더군요.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해방이 되었습니다. 방학이 되어서도 집에서 쉬지 못하고 우리 중학생 모두는 산에 올라가 소련군 탱크가 내려오다가 빠지게 한다는 구덩이를 파고 있는데 선생이 일손을 멈추게 하고 라디오를 듣게 했습니다. 일본 천황의 죽어가는 목소리가 들리더니 일본이 미국에 항복했다는 겁니다. 선생과 학생들이 서로 붙들고 모두 눈물바다가 되었는데, 나만 혼자 기쁜 거애요. 슬프지도 않은데 우는 척만 할 수는 없고...(웃음) 그렇게 우리 집안의 만주 생활은 해방이 된 겁니다.
한가지 비극은 저희 어머니가 막내인 만선(만주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滿善이라고 이름 했지요)을 출산한 뒤 영양실조에다가 산후 조리 부족 등 과로로 폐렴에 걸려 세상을 뜨신 것입니다. 아버지는 저희 형제들의 권고에 못 이겨 곧 재혼하셨습니다.
문 김목사:아버지의 목사 안수식에 기쁘고 슬펐던 사연은?
서광선목사 답:우리는 만주에서 피난민 열차를 타고 다시 압록강을 건너 한국으로 돌아 왔습니다. 압록강을 건너서 기차를 그대로 타고 있으면 서울로 내려오거나 부산 까지도 내려 갈 수가 있었는데 아버지 고집은 고향으로 가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평양에서 기차를 갈아 타고 온 식구가 고향 아닌 고향인 강계 근처 작은 동네에 있는 외할머니 댁으로 쳐들어 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해 9월 학기부터 저는 강계 중학교에 편입학을 하게 됩니다.
아버지는 이곳 저곳에서 임시로 전도사 일을 보시다가 백두산 아래 첫 동네라고 하는 후창(厚昌)의 장로교회에 부임하고, 곧 목사 안수 절차를 밞아 강서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게 됩니다. 신학 공부를 시작한지 그야말로 10년이 넘어서야 목사가 되는, 길고 긴 여정을 되새기면서 목회자의 고난의 길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저는 한편 기쁘면서도 왜 그리도 슬펐는지 알 수 없는 눈물 만 흘렸던 기억이 납니다.
문 김목사:해방후 인공치하에서의 서용문목사님과 기독교연맹과의 갈등문제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서광선목사 답:1948년 남과 북이 각각 분단 단독정부를 수립하면서 북의 공산정권은 김 일성 숭배 일변도로 단속을 강화하기 시작했습니다. 학교에서는 반공 학생 운동이 전개되었지만, 민주화는 희망사항일 뿐이었습니다. 공산정권은 기독교를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는 서울로 피난 갈 준비 작업으로 우선 평양으로 가야한다는 생각으로 평양에 있는 교회로 옮겨 왔습니다. 처음에는 보통강가에 있는 보령교회로 나중에는 대동강 남쪽에 있는 장포동교회에서 목회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설교는 일제하에서 하던 항일 설교와 이스라엘 해방의 설교를 이제는 반공 해방의 설교로 더욱 열을 올리셨습니다. 공산당 지도부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보안서 서장의 방문도 받기 시작 했습니다. 공산정부의 어용 단체인 기독교도연맹 가입을 거절하는 등, 주목 받는 일만 하신 셈이지요.
6.25가 터질 때 까지 남으로 피난하라는 권유를 받기도 하고 기회도 있었지만, 아버지는 도저히 교인들을 평양에 두고 떠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6.25가 터지면서 교회에서 아버지는 계속 한민족의 해방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건 남쪽이 승리해야 한다는 기도였으니 공산당이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었던 겁니다. 당시 평양 신학교의 교장이던 이 성휘 박사가 연행 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아버지도 조심하라는 충고의 말을 많이 들었지만, 결국 미군과 국군이 평양을 탈환하는 몇 주일 전에 아버지도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저는 인민군에 징집되는 것을 피해서 교인 친구 집 지하실에 숨어 있어서 알지도 못하고 작별인사도 못하고 영원한 이별을 한 셈이 되었습니다.
문 김목사: 아버지 시신 발견 당시의 직접 목격하신 정황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서광선목사 답:나는 지하 동굴에 숨어 있다가 국군과 미군이 평양을 탈환했다는 소식을 라디오에서 듣고 거리로 나갔습니다. 모두들 태극기를 들고 이 승만 대통령과 국군과 미군을 환영하는 대열에 나갔지요. 눈물 나도록 감격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이젠 평양도 수복이 되고 통일 될 날이 머지않았다고 확신했었으니까요.
그러면서도 저희 교회 교인들이 거의 총동원되어서 목사님의 행방을 찾아 나섰습니다. 저도 함께 다니면서 많은 시체들을 보았습니다. 탄광 안에 사람들을 가두어 놓고 다이나마이트를 터뜨려 죽인 시체들, 우물 안에 산 사람을 처넣어 익사한 시체들... 저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 많은 시신들을 보고 다녔습니다. 한주일 동안 그렇게 다니다가 하루는 소식이 왔습니다. 대동강 하류 강가에서 아버지 시체를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달려 가보니 시체 다섯이 밧줄에 묶여 대동강 하류 강기슭에 건져져 있었습니다. 저희 교회 장로님이 발견했는데 저더러 확인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 얼굴에는 총알 자국이 많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총살당한 시체들의 얼굴과 몸에는 총알 자국이 한두 개가 아니었습니다. 모두들 목사님들이 아니면 교회 장로님들이라고 들었습니다. 인민군이 이분들을 대동강 강가에 세우고 다발총으로 일제 사격으로 총살한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리고 시체를 강물 속에 쳐 넣었지만, 강물 속의 나무 가지에 걸려 떠내려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평양의 10월은 벌써 영하로 내려가는 추위여서 시체가 부패하지 않아서 곧 아버지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총살 당한 대동강 하류는 토마스 선교사가 1866년 미 상선 셔만호를 타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다가 대원군이 보낸 한국군대가 쏘아 대는 화살에 맞아 불이 나서 순교한 것을 기념한 토마스 기념관이 있는 데서 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순교자의 반렬에 서신 것입니다. 당시 아버지의 나이는 45세. 한창 일할 나이였습니다. 저는 올해 만 77세, 아버지에 비하면 너무 편하게 오래 살았습니다. 죄송하고 부끄럽기만 합니다.
시체를 거두어 장포동 교회 뒷산, 대동강이 멀리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아버지의 제자이며 친구였던 문 창권 목사님의 집례로 장례식을 지내고 우리 가족은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3년 전엔가 평양에 갈 일이 있어서 대동강 남쪽에 서 있는 김일성 주체탑에 올라가 멀리 아버지 묘소를 찾아보았지만 그 일대에 아파트 건물이 들어 서 있는 것 만 바라다보고 돌아 왔습니다. 56년 만에 평양을 찾아 갔지만 성묘도 하지 못하고 돌아 온 안타까움, 말해서 무얼 하겠습니까.
문 김목사:부친의 예술과 문학을 사랑한 이야기, 부친의 목회 스타일과 인품.아버지에 대한 인상 깊었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서광선목사 답:아버지는 철저한 근본주의 신앙인이셨습니다. 성경은 누가 뭐래도 하나님의 말씀이고 글자 그대로 믿고 행해야 된다고 하는 믿음에 결코 흔들리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금욕과 가난과 근검절약은 몸에 배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집안에서는 화투 놀이를 해 본적이 없습니다. 화투놀이는 안되지만 정 놀고 싶으면 서양식 트럼프는 해도 된다는 식이었습니다. 집안에서 찬송가 이외에는 다른 노래는 불러서는 안 되었습니다. 서양 노래들, 고전 음악은 들어도 되지만 한국의 유행가나 민요마저도 불으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정도로 철저한 분이셨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종아리를 많이 맞고 자라났습니다. 목사 아들은 학교에서도 모범생이여야 하고 우등생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학교 성적이 일등이거나 이등이 아니면 종아리를 맞아야 합니다. 동생들이 잘못한 것이 있으면 제가 동생들을 잘 지도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대표로 맞아야했습니다. 자상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의 분노와 체벌에 저는 항상 시달려야 했고, 학교와 교회와 집안에서 항상 긴장하며 사는 얌전한 소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요(웃음).
아버지는 목회 현장에서도 강직한 전도사와 목사로 유명했습니다. 불의에 대해서 절대 타협이 없는 목회자였습니다. 일단 옳다고 생각하시면 결코 물러나는 법이 없었습니다. 항일 투사였고 반공투사였습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도 아버지를 존경했습니다. 정열적인 설교,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설교와 간절한 기도에 저는 감동 받았고 아버지처럼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다짐하면서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문학청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즐겨 읽는 이 광수의 소설들을 거의 다 읽었습니다. 그리고 김 동인의 역사 소설들도 많이 읽었습니다. 아버지가 어머니랑, 혹은 다른 교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국소설 이야기하는 것을 엿 들으면서 소설의 내용과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나라 사랑 이야기, 남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이해하려고 많은 질문도 던지면서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1938년 창씨개명을 강요받았을 때 내 이름을 지으면서 일본 신학자 가가와 도요히코의 “사선을 넘어서”라는 자전적 소설의 주인공 “에이 이찌 (榮一)”라는 이름을 주셨을 정도였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일본의 빈민굴에 들어 가 희생적으로 일하다가 폐병에 걸려 죽어 간 젊은이의 이야기였습니다. 아버지의 시신을 평양 남쪽 뒷산에 묻으면서 설교하신 원고들도 함께 묻었지만, 지금 생각나는 명 설교들이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문 김목사:6.25 피난 시절과 서목사님의 유학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서광선목사 답:평양에서 빠져 나왔을 때 저는 어머니와 동생들과 따로 떨어져서 서울로 나왔습니다. 북을 탈출한 많은 피난민들, 특히 기독교인들은 영락교회에 모였었지요. 거기에 혹시 우리 식구들이 와 있는 것이 아닌가 하여 찾아보았으나 헛수고였습니다. 그 대신 평양에서부터 가까이 지낸 안 성진 목사님을 우연히 만나서 며칠인가 가족들과 함께 지내다가 다시 헤어져 부산으로 내려갔습니다. 부산으로 내려 갈 때에는 당시 서울에 나와 있던 선교사들이 교인 피난민들을 위해 마련한 특별열차로 평안하게 식사도 얻어먹으면서 부산까지 내려 왔습니다. 부산에 내려 와서 가족들을 찾아보았으나 헛수고였습니다. 부산에서는 목회자 가족들을 수용하는 곳이 있어서 그 많은 가족들 잠자는 틈에 끼어 밤을 지새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대한민국 해군에서 “소년 통신병”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지원해서 5대 1의 경쟁을 뚫고 합격해서 진해에 있는 신병훈련소와 통신학교에서 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어머니와 동생들은 평양을 떠나 고생 고생하면서 그야말로 사선을 넘어 삼팔선을 넘어 부산으로 내려와 순애원이라고 하는 순교자 가족 복지시설에 안착하게 되고, 생이별한지 2년인가 3년 만에야 재회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해군에 있으면서 하사관 학교 성적이 좋다고 미국 해군 훈련소에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1953년 한국전쟁이 휴전되는 해에 미국 동부지역에 있는 해군기지에 가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거기서 만난 해군 친구가 “너는 해군에서 썩을 친구가 아니다. 미국에 와서 대학 공부를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면서 자기 고향에 있는 작은 대학에 알선해 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956년 미국 서부 몬타나주에 있는 아주 작은 기독교 대학인 Rocky Mountain College 에 입학해서 미국 유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내가 유학생활을 하는 동안 어머니는 교회 전도사일로, 동생들은 고학을 하면서 고생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모두 대학을 나오고 교회 장로로 권사로 집사로 순교자 아버지 부끄럽지 않는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문 김몫가:서목사님께서 목사가 된 계기와 신학수학 및 사랑이야기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앞에서도 말했지만, 정말 저는 어려서부터 목회자의 생활이 너무 가난하고 배고파서 절대로 목사가 안 되겠다고 맹세까지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미국 가서 기독교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우등생으로 졸업했습니다. 대학원에 가서도 철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철학 공부를 하면서 철학이라는 학문에 대해서도 회의를 가지기 시작했지만 신학에 대한 흥미도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대학원에 수학하고 있는 동안 이화대학에서 유학 온 사람과 사랑에 빠지면서 인생에 대한 생각, 성공에 대한 생각, 학문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한 여인에 대한 사랑에 눈을 뜨면서 인생에 대한 고민과 사랑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철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자마자 신학대학원에 원서를 냈습니다. 뉴욕에 있는 유니언 신학대학원의 입학허가를 받고 어머니에게 편지를 드렸지요. 어머니는 답장하시기를 왜 프린스턴이 아니고 유니언이냐? 친지 목사님에게 네가 유니언에서 신학공부를 한다고 했더니, “마귀학교”에 가서 무슨 신학을 하느냐 라고 하시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웃음). 유니언 신학대학원은 미국에서도 유명한 "신 신학“ 학교라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거기서 저는 많은 것을 배웠고, 저의 어린 신앙에서 성숙한 신앙을 터득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지적 대화와 지성으로 설명할 수 있는 신학에 대한 철학적 만족을 얻을 수 있었고, 신학대학원의 분위기와 학교 쵀플을 통한 영적 생활에서 참된 신앙과 영성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학교육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사회 윤리적 행동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당시는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중심으로 하는 흑인 민권운동이 한창일 때였습니다. 흑인과 유색 인종차별에 저항하는 운동에 저희 신학생들이 앞장 설 때였습니다. 저도 나름대로 참여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책임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제가 신학대학원 2학년 되는 해에 이화여대 총장이신 김 활란 박사님을 유니언에서 처음 뵈올 수 있었습니다. 총장님은 1961년 5.16 군사혁명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에 의하여 총장직을 내어 놓고 수학 겸 휴가차 유니언 신학대학원 총장의 초청으로 유니언에 와서 한 학기 계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저의 약혼자는 김 활란 총장 비서실에 근무했던 터에 유학 공부를 바치고 이화여대로 귀국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김 활란 총장님을 가까이 모시게 될 수 있었지요. 총장님은 저를 이화여대로 초청하여 주셔서. 학생 신분으로 이화여대 교목실의 인턴으로 근무하게 되고, 이대 중강당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 박사학위를 마치면서 이화여대교수로 봉직하게 되는 행운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문 김목사:유신정권하에서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사직을 하게 된 정황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서광선목사 답:박사학위를 마치고 귀국한 해는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이 삼선개헌을 강행하고 있던 때이고 김 재준 목사님이 주동이 되어 이를 저지하는 국민운동이 전개되던 한국정치의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그 이후 70년대 초의 유신헌법 제정과 긴급조치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 에큐메니칼 진영의 인권과 민주화 운동은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것 기억하실 겁니다. 저는 대학에 몸담으면서 민주화 학생운동에서 배운바 많았습니다. 기독자 교수협의회 등에서 활동하면서 기독교인 대학교수들과의 만남과 민주화 운동에 가담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참여를 주장하고 강조하면서, 신학과 철학을 강의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민주화와 인권을 주장하는 성명서를 기초하기도 하였습니다.
1979년 박 정희 대통령이 자신의 측근인 중앙정보부장 김 재규에 의해 시해되어, 서울의 봄이 온 줄로 알았지만, 신군부에 의해 서울의 봄은 다시 추운 겨울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도 이화여대 문리대학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동안, “김 대중 내란음모 사건 참고인”이라는 영장을 가지고 온 “합동수사본주” 형사들에게 서대문 경찰서 근처에 끌려가 주야로 조사를 받고 결국 사직서를 쓰도록 강요받고 해직이 되었습니다.
합동수사본부에서 “자술서”를 쓰고, 밤을 새우면서 신학 대확원을 나오고 신학으로 박사학위 까지 받으면서 목사 안수를 받지 않은 것에 대해서 많은 생각과 고민을 했습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나가게 되면, 목사 안수를 받으리라 순교자 아버지에게 맹세하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곧장, 광나루 신학대학에 이 종성 총장을 찾아가 제 뜻을 밝히고 일년동안 충실하게 장로회신학대학 학생 노릇을 했습니다 (웃음). 다행이도 목사 고시에 첫 번째로 합격이 되어 압구정동에 있는 현대교회의 부름을 받아 강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것이 1981년 가을 노회였습니다. 1984년 전 두환 정권은 무슨 생각인지 수 십 명에 달하는 해직교수들을 모두 복직시켜 저는 다시 대학으로 돌아 올 수 있었습니다.
문 김목사: 서목사님 순교자의 후예로서 순교에 대한 현대적인(신학적)의미를 말씀해 주세요.
서광선목사 답:우리 구약과 신약성서에는 순교자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성서의 많은 이들이 순교했고 초대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로마 황제들의 탄압으로 순교를 당했습니다. 우리나라 만 해도 개신교가 들어오기 전 부터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의 길을 갔습니다. 우리나라 만큼 순교자로 "성자" 성호를 받은 이가 많은 나라가 없을 정도입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감옥에서 순교하신 주 기철 목사님을 비롯하여 우리 장로교회에도 많은 순교자들이 있습니다. 모두 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순교의 길을 택하신 분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간다는 사람들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처럼, 그 많은 순교자들처럼 우리 모두 목숨을 걸고 옳은 것은 옳다, 신앙 양심을 걸고 발언하고 생활해야 합니다. 그러나 모두 순교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순교자가 될 수도 있지만 약한 인간들이기 때문에 현실에 타협하고 어정쩡한 신앙인으로 고민하면서 살아남을 수도 있습니다.
일본의 캐톨릭 작가인 엔도 슈샤꾸 라는 작가가 쓴 소설 "침묵"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옛날, 일본의 천주교인들이 정부의 박해를 받는 때 이야기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바닷가 모래밭에 모아놓고, 모래 위에 십자가를 그려놓고 십자가를 밟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을 부인하는 걸로 알고 살려 주었습니다. 그러지 않고 십자가를 피해서 지나가는 신자들은 현장에서 즉각 참수했다는 것입니다. 한 여인이 모래 위의 십자가를 감히 밟지 못하고 주저앉아 울고 있는데 모래 위에 예수님의 얼굴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 "괜찮다. 밟고 지나가라. 그리고 살아남아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 큰 영광을 돌려보낸 훌륭한 신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에 살아남아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또 다른 의미에서 훌륭한 순교자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재미 작가 김 은국 선생은 1950년 대 초에 "순교자"라는 작품을 세상에 내어 놓아 작가로서의 찬사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의 작품에서 던진 질문은 과연 누가 참된 순교자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감옥에서 애걸복걸 목숨을 살려 달라고 하면서 간수의 모욕을 받으면서 소리 지르며, 하나님을 저주 까지 하면서 죽어 가는 성직자를 과연 순교자라고 할 수 있는가? 감옥에서는 살아남아 세상으로 돌아 와 사람들에게 배신자로 불리고 모욕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의 일을 묵묵히 계속하는 성직자를 살아 있는 순교자로 칭송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정의와 사랑과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이들, 포악하고 악독한 권력에 저항하면서 옳은 말, 바른 말로 우리의 양심을 일깨워 주는 이들, 성직자가 아니어도, 그리스도인이 아니어도, 어떤 종교를 가졌어도, 순교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순교자의 정신으로 예수 믿는 이들, 평신도 성직자 할 것 없이 모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순교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산위에서 하신 설교말씀,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순교자의 뜻을 말씀하셨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너희보다 먼저 온 예언자들도 이와 같이 박해를 받았다 (마태복음 5장 10-12절 표준 새 번역)”*>
순교자 서용문목사의 후예
서 용문 목사의 유가족으로 서 광선 박사의 동생들로는 서울대 음대 출신의 성악가이며 교육가인 서 인선 권사가 있고, 서 철선 집사와 숭실대학교 총동문회장 서 만선 장로가 있다. 이들 형제들의 가족 모두 봉원교회에 적을 두고 봉사하고 있다. 차남인 서 웅선은 6.25 당시 인민군에 끌려가 생사를 모르고 있다.
서광선목사와 부인 슬하에 장남 서 정실은 연세대학교 화공학과에서 2년 수학, 음악에 뜻을 두고 도미, 뉴욕의 만해탄 음악대학에서 클래식 기타로 음악학사와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하여, 여러 대학에 출강하면서 연주활동을 하고 있다. 그의 처 정 은경은 같은 음대에서 피아노 연주로 석사학위를 취득, 고양시에서 음악학원 원장으로 많은 훌륭한 젊은 음악인을 양성하고 있다. 이들의 슬하에는 아들 경빈이 있다.
차남 서 진실은 이화여대 부속 고등학교 출신으로 음악에 뜻을 두어 미국 등지에서 쟤즈 음악을 수학하고 드럼어로서 대중음악에 심취하고 한국 뿐 아니라 홍콩, 중국,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활발한 음악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의 처 임정하와의 사이에 1남 1녀, 유하와 연하가 있다.
이와같이 순교자 서용문목사의 후손들이 모두 의병 장군이었던 할아버지와 순교자 서용문목사의 후손답게 순교정신과 예술적 재능을 이어받아 서광선목사는 한국교회만 아니라 세계적인 신학자로 활동할뿐 아니라 많은 신학저서들을 저술하여 한국교회 신학발전에 지대한 공헌하고 있으면 그의 형제자매와 자녀 손들도 국내외적으로 교계는 물론 교육계 음악계에 등 크게 공헌하는 등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
순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고 말한 터툴리안의 말을 빌린다면 서용문목사의 순교의 피는 세계교회는 물론 한국교회와 예능, 교육 등 다방면에 따르는 한국문화 발전에 자양분이 되었다.
순교자 서용문목사의 아들 서 광선목사의 근황
사단법인 희망의 소리 이사장
남북 평화재단 이사
민중신학자 서남동목사 기념사업회 이사장
그리고 글로벌 여성 리더십 센터 이사 등 자원봉사
대학과 교회 세미나 등에 특강, 설교, 강의하는 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지성·세속·신앙〉·〈현대사회와 종교〉·〈사랑의 하나님 감사합니다〉<계절따라 서령따라> ·〈한국기독교의 새인식〉·〈종교와 인간〉 <하국기독교정치신학의 전개><기독교 시앙과 신학의 반성> < 민중신학의 이해><벙어리의 노래><신앞에 민중과 함께> <한국여성과 종교>
자료 5. 이신규 목사가 보내온 글 추가
어떻게 원수를 용서하나
휴심정 2017. 0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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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의 아들을 용서하기까지, 노교수의 인생 여정
서광선 명예교수 1945년 8월 15일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글은 서광선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지난 8월 7일 서울 수유동 마을찻집 마주이야기에서 열린 브루더호프 공동체의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추모 모임'에 초대되어 이야기한 내용으로, 필자의 동의를 얻어 원고 전문을 싣습니다.
1931년 4월 15일 평안북도 강계에서 태어났다. 1960년 미국 로키마운틴대학교를 졸업하고, 일리노이주립대학교 신학대학원과 뉴욕유니온 신학대학원을 거쳐 1970년 밴더빌트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64년부터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교수로 일했다. 1981년 현대교회 목사로 부임했다. 제5공화국 당시 신학의 사회참여를 주장하여 한때 해직교수가 되기도 했다. ‘88선언’이라 불리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 작성에 참여했다. ⓒ복음과상황 이범진
만주 산언덕에서 맞이한 8.15
» 서광선 목사 겸 이화여대 명예교수
저는 1945년 8월 15일, 8.15 날 저 만주의 한 도시 산언덕에서 땅을 파고 있었습니다. 만주에 아버지가 식구들을 끌고 망명 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아버지는 압록강 근처에서 교회 전도사로 시골 교회를 개척하는 고된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일제는 한국 교회목사님들과 전도사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습니다. 우리 아버지 전도사는 왜 일본 귀신들 앞에 가 절을 해야 하나, 우상을 섬길 수 없다고 반항했습니다. 경찰에 끌려가 매도 맞고 별아 별 수모를 당하다가, 만주로 망명길에 올랐던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항일 전도사였습니다. 뼛속 까지 일본 제국주의를 증오하는 애국자 전도사였습니다. 그럴만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 그러니까 저의 할아버지는 고종 밑에서 무과 과거에 합격한 조선 군대의 대장이었습니다. 일본제국주의가 1905년 을사늑약을 밀어붙이고는 조선 군대를 강제 해산했습니다. 이에 반발하고 반항한 조선 군대는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맞서 싸웠습니다. 저의 할아버지는 함흥에서 의병을 일으켜 싸웠다고 합니다. 우리 아버지 이야기로는 우리 할아버지는 의병대장이라 말 타고 칼을 휘두르며 일본 군인들과 싸웠는데, 단칼에 일본군인 목 다섯을 쳐서 떨어뜨리는 맹장이었다고 자랑하시곤 했습니다. “단칼에 어떻게 일본군인 목 다섯을 벨 수 있을까?” 마음속으로 질문을 하면서도 한 번도 입 밖에 내 놓고 질문하지 못하고 그냥 와아 하고 자랑스러워했던 기억이 납니다.
할아버지는 결국 기관총을 쏴 대는 일본 침략군에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했고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당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우리 할머니는 나라 잃은 백성, 의병대장의 부인으로 일본 밑에서 살아갈 이유도 없고 살아갈 길도 없다고 생각해서 아이들에게 독약을 먹이고 자신도 자결했습니다. 그러나 두 살배기 갓난아이, 우리 아버지는 도저히 죽일 수가 없어서 살려 두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천애 고아가 된 우리 아버지를 동네 사람들이 거두어서 저 평안북도 두메산골에 있는 고모를 찾아 맡겨 주었습니다.
우리 아기 아버지는 고모 슬하에서 준수한 소년으로 자라 산골짜기에서 염소치기가 되었습니다. 어엿한 소년 염소치기가 하루는 낮잠을 자고 있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흔들어 깨웠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쪽 복음이라고 하는 성경 책, 가령, 마태복음만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팔기도 하고 나누어 주면서 전도를 하는 판서원이라고 하는 전도부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아주머니가 주는 성경책으로 한글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아주머니가 소개하는 강계 고을에 있는 미국 선교사 감부열 목사님이 교장으로 있는 영실학교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천애 고아 우리 아버지는 교장선생님댁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공부를 하면서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평양 신학교에 진학합니다. 신학 공부를 하면서 시골 마을에 개척교회 전도사 일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신사참배 반대한다고 한국에서 쫓겨나다시피 만주로 떠났던 것입니다.
일본의 항복
만주에서 한국 아이들을 위한 초등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중학교에 들어 가야 하는데 만주의 우리 동네에는 한국 중학교가 없었습니다. 한국에 유학 보내기도 형편이 안 되고 해서, 아버지는 우리가 살던 공장지대에 와 있는 일본 사람들을 위해서 세운 일본 중학교에 진학하게 했습니다. 항일 운동하시는 아버지가 왜 저더러 일본 중학교에 가라고 하시느냐고 항의를 했더니, 하시는 말씀 “너는 한국의 모세가 되어야 해. 너 성경책에서 모세 이야기 읽었지? 모세가 원수의 나라 애급 궁전에서 자라면서 애급 애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공부해서, 애급 말도 배우고 애급 정치도 배워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는 해방자가 됐지 않아? 너는 한국의 모세가 되어야 해.” 저는 아버지의 명령을 어길 수가 없어서 한국 학생이 들어가기에 어려운 일본 중학교에 합격을 했던 것입니다.
1945년 8월 15일 무더운 여름 방학인데도 우리 중학생들은 산에 올라가 구덩이를 파고 있었습니다. 8월 7일엔가 소련 군대가 만주로 쳐 내려온다고 탱크를 몰고 내려오다가 우리가 판 구덩이에 빠져서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날도 그 무더위에 땀을 흘리며 구덩이를 파고 있는데 12시 5분 전에 일본인 담임선생이 학생들을 불러 모아 차려 자세를 시키고는 라디오를 틀어 놓고 경청하라는 것이었습니다. 12시 시보가 울리자, 일천황의 음성이 흘러나왔습니다. 목이 쉰 것 같은 늙은이 목소리로 일본이 미국에게 항복했고 전쟁이 끝났다고 하는 말이 들렸습니다. 일본 학생들은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은 눈물을 닦으면서, “이제 집에 가서 짐을 싸 들고 고향 땅 일본으로 돌아가자. 사요나라…….”하며 소리 내어 통곡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눈물은커녕, 만세를 부르고 싶은데 그랬다간 아이들에게 몰매를 맞아 죽을 것 같은 공포심에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선생님의 사요나라 말이 떨어지자마자 걸음아 날 살려라, 헐레벌떡 산언덕을 뛰어 내려왔습니다. 집 앞에 도착하니,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시며, “대한독립 만세.”소리 지르며 저를 환영했습니다. 어머니와 우리 아이들은 아버지를 얼싸안고, 영문을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면서 만세를 몇 번이고 소리 질렀습니다.
분단 된 북한 땅으로
우리는 급하게 짐을 싸서 메고 이고 손에 들고 하면서 한국으로 오는 기차에 올라탔습니다. 그리고 압록강을 건너 평양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평양에 도착하자 기차에서 모두 내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영문을 몰라 하는 우리에게 아버지는 우리 고향 땅 강계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차를 그대로 타고 있으면, 서울로 아니면 부산이나 목포로 그냥 타고 갈 수 있는데 내리라는 것입니다. 강계로 가서 피난민 생활을 하면서, 아버지는 목사 안수를 받고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백두산이 보이는 시골 동네에서 목회를 시작하셨습니다. 저는 강계 중학교에 편입학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러는 동안에 한반도가 38선을 가운데 두고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북에는 소련군이 쳐들어오고 남에는 미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더니 평양에 김일성이라고 하는 공산당 장군이 들어 와서 공산주의 나라를 세운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공산당 경찰들이 아버지를 보안서라는 경찰서에 끌고 가서 반공 설교를 하면서, 이제 미국이 우리분단된 조선을 통일 시킬 것이라는 설교를 그만하라고 협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항일 목사 아버지는 졸지에 반공 목사가 되었습니다. 주일날 설교하실 때 만다. 일본 제국주의에서 우리 한국 민족을 해방시켜 주셨으니, 이제 무신론 공산주의 독재로부터도 해방시켜 주실 것이라고 큰 소리로 자신 있게 설교하셨습니다. 공산당 보안서 경찰은 거의 매 주일 목사 아버지를 데려다가 협박을 하고 야단을 치면서 우리 목사 아버지를 친미 반공 목사로 찍었습니다. 우리 교회 장로님들과 집사님들이 땅을 뺏기고 야반도주해서 월남하기 시작했습니다. 교인들은 목사 아버지를 찾아와 어서 짐 싸 들고 야반도주해서 북한을 빠져나가라고 강권하기 시작했습니다. 목사 아버지는 어떻게 어린 양과 같은 교인들을 이런 공산당 독재 치하에 버리고 가느냐 못 간다, 우겼습니다. 결국 강권에 못 이겨 우리 식구는 야심한 밤에 평양으로 가는 기차에 올라탔습니다. 우선 평양에 가서 있다가 기회가 되는대로 38선을 넘어 서울로 월남한다는 심산이었습니다.
평양, 대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교회를 맡아서 목회를 시작하자 공산당의 감시와 압박이 심해졌습니다. 목사 아버지의 반공 설교는 유명해졌습니다. 김일성과 가까운 친척이라고 하는 강양욱 목사가 기독교도연맹이라는 것을 만들고 목사들이 공산당 김일성 정권에 복종하고 협조하는 친공 교회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아버지는 몇 번이고 불려가서 연맹에 가입하라는 압력을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습니다. 그리하여 다시 공산 당국의 미움과 감시를 받게 되었습니다.
6.25 발발
1950년 6월 25일은 2017년 올해처럼, 일요일 주일날이었습니다. 그날 우리 목사 아버지의 설교는 정말 신나는 설교였습니다. 김일성이 뭘 모르고 전쟁을 시작해서 38선 넘어 남쪽으로 진군한다고 소리 지르지만, 이제 곧 국군과 미군이 반격해서 쫓겨 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분단된 조국이 한 나라로 통일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대략 그런 설교였습니다. 교인들과 나는 너무도 신나서 이제 곧 통일이 될 것처럼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라디오 방송은 인민군이 승승장구, 괴뢰 이승만 군대를 밀어붙이고, 이제 곧 부산까지 밀고 내려간다고 떠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들리는 흉흉한 소문은 제가 다니던 평양신학교 교장 선생님과 다른 유명한 목사님들이 납치되거나 북한 군인들에게 어딘지 모르게 끌려갔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목사 아버지는 내가 군대 갈 나이 19살이라고 교회 목사관 마루를 뜯고 그 밑에 땅을 파고, 나를 그 속에 밀어 넣고 숨어 있으라고 하고는 마루를 덮어 버렸습니다. 낮에는 하루 종일 흙구덩이 안에서 숨을 죽이고 숨어 있다가, 밤늦게 기어 나와,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다시 흙구덩이 안에 들어 가 자고…….그렇게 지냈습니다. 미군 폭격기가 날아와 평양 시내를 폭격하고 공장지대와 군부대가 있는 데 폭탄을 터뜨리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목사 아버지는 교인들 심방 나갔다가, 보안서원들에게 체포되어 어디론가 끌려가셨다는 소식을 어머니에게 들었습니다. 저의 동생들은 모두 시골에 있는 친척 집에 피난을 가고 마루 밑에 숨어 있는 저와 어머니만 목사관에 남아 있었습니다.
“너는 환자야!”
8월이 되었습니다. 그해 평양은 너무 더웠습니다. 우리 집 마루 밑 땅 구멍도 시원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답답해서 공습이 지나간 틈을 타서 맑은 공기라도 마시려고 마루 밑에서 기어 나와 동네 구석진 데 산책 나왔다가, 그만 보안서원에게 붙들렸습니다. 그리고 강제로 기다리고 있던 트럭에 올라탔습니다. 저 말고도 숨어 있다가 붙들려 나온 동네 청년들이 트럭에 타고 있었습니다. 대동강 다리를 건너서 어느 고등학교로 끌려갔습니다. 신체검사장이라고 하는데 신체검사 할 청년들이 서 있는 줄이 꽤 길었습니다.
내 차례가 돼서 헌병의 안내로 군의관이 있는 작은 방에 들어섰습니다. 흰 가운을 입은 50대로 보이는 군의관이 내가 방에 들어서자마자, 큰 소리로, “너 어디 아프지?”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얼떨결에 사실대로 “아닙니다. 아픈 데 없습니다.” 그렇게 큰 소리로 대답을 해 놓고는 후회했습니다. ‘아니, 아프다고 해야, 신체검사에 떨어져서 군대 안 가게 되는데…….’ 그런데 그 군의관은 더 큰 소리로 “넌 기관지염으로, 군대 갈 수 없어. 여기 신체검사 불합격증을 써 줄 테니, 어서 여기를 나가 집으로 가.”하면서 불합격증에 뭔가 쓰고 큰 도장을 꽝 꽝 하고 찍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도대체 누군데, 우리 교회에 나오는 의사 선생님인가 생각해 봐도 난생처음 보는 의사 선생님이었습니다.
신체검사 불합격증을 들고 그 방을 다시 나왔습니다. 신체검사를 기다리는 길고 긴 줄을 따라 반대쪽으로 걸어 나오는 데, 누가 뒤에서 “형”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돌아다보니 저의 바로 밑 동생입니다. 17살 겨우 된 남동생이 나를 보고 “형 어디로 가는 거야?” 신체검사 불합격증을 보여 주면서, 집으로 간다는 말을 힘없이 했습니다. 동생은 내 두 손을 잡고 맥없이 “그래 형은 군대 가면 안 되지, 내가 대신 갔다 올게…….” 우리 형제는 그렇게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올해까지 67년 동안 우리는 동생의 소식을 모르고 있습니다.
다시 대동강을 건너 평양 남쪽에 위치한 집으로 돌아오면서 “왜 그 난생처음 보는 면색 없는 북한의 군의관이 나를 살려 주었을까?” 생각에 잠겼습니다. “아니 이건 하나님이 날 살려 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뜻이 무엇일까? 하나님은 왜 나를 살려 주셨을까? 뭐 하라고?” 이 질문은 그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저의 평생의 질문이었습니다. 어떻든 여러분, 저는 그렇게 살아남아서 오늘 여러분 앞에 서 있습니다.
1950년 9월 그리고 대한민국 해군
나는 마루 밑에 숨어 있으면서도 전쟁 소식은 모두 다 듣고 있었습니다. 늦은 9월의 어느 날 맥아더 장군이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했고, 서울로 진격해서 서울을 탈환했다는 승리의 소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10월 초에는 UN 군과 국군이 평양에 입성했다는 기쁜 승리의 소식이었습니다. 우리 평양 시민들은 엉성하게 그린 태극기와 그리기 어려운 미국 성조기를 손수 그린 깃발을 들고나와서 군인들이 평양에 들어오는 것을 소리 높이 환영했습니다. 815 해방되던 날보다 더 큰 소리로 만세를 불렀던 것 같습니다. 곧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이 평양 정부 청사 광장에 나타나서 평양 해방을 선포하고 통일이 다 된 것처럼 환성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할 일이 있었습니다. 행방불명이 된 목사 아버지의 행방을 찾는 일이었습니다. 평양 대동강 남쪽 산언덕에서부터 시작해서 강가와 경찰서 감옥을 찾아다니며 아버지를 찾았습니다. 기진맥진하고 있던 차에 교회 장로님들이 목사 아버지를 대동강 강가에서 시체로 찾았다는 전갈을 받고 달려갔습니다. 목사 아버지는 다른 네 분의 목사님들과 한 밧줄로 묶여서 총살당한 체 누워있었습니다. 아버지 시체를 부둥켜안고 인민군 따발총 총알이 박혀 있는 아버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한없이 울었습니다. “아버지, 이 원수를 어떻게 같아야 합니까?” 하면서.
아버지를 대동강이 내려다보이는 교회 뒷산 언덕에 묻어 드리고, 우리는 중공군이 치고 내려온다는 소식과 함께 후퇴하는 미군과 국군들을 따라 남으로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나는 부산에서 대한민국 해군에 자원입대했습니다. 해군 소년 통신병으로 훈련을 받고, 얼마 있다가 미국 해군에서 훈련을 받을 기회를 얻어 1953년 미국 해군에서 좋은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 미 해군 친구의 덕분에 미국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미국 대학과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목사 아버지의 대를 이어야 되겠다는 결심으로 신학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그때가 1960년대 초였습니다. 신학교에서 성경을 다시 배우고 기도생활을 하면서 당시 미국 흑인 민권 운동에 뛰어든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습니다. 비폭력 평화적 인권 운동이 어떤 것인지 신학생 친구들과 함께 참여하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사회 참여의 필요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가 나치에 저항해서 히틀러 암살계획에 참여했다가 붙들려 감옥에서 쓴 옥중서한들을 읽으면서, 우리 목사 아버지의 순교정신, 항일저항운동, 그리고 공산 독재에 대한 저항, 그것이 신앙운동만이 아니라 정치 운동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아버지의 신앙과 행동을 곰곰이 성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는 것”의 의미, 실제 행동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민주화운동, 반독재 운동
반공 순교자 목사의 아들이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이화여대에서 철학과 신학을 강의하기시작했습니다. 그때가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이 3선 개헌을 하고 다시 대통령 자리에 오르려고 하던 때였습니다. 저는 경험적인 반공주의자입니다. 공산 독재의 총탄에 순교하신 목사 아버지의 아들로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민주주의를 한다는 대한민국에서 인권을 무시하고 민주인사와 언론을 탄압하고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학생들을 잡아가고 고문하는 군사 독재 정치를 “반공”의 이름으로 찬성하고 방관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신학을 하는 선배 목사님들과 한국 NCC 인권운동가들과 함께, 그리고 기독자 교수들과 함께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을 비판하고 유신 정권을 반대하는 민주화 인권 운동에 가담했습니다. 그리고 군사정권의 미움을 사서 1980년 전두환 신군부의 합동수사 본부에 잡혀가서 해직당하고 장로교 목사 안수를 받고 4년 동안 아주 작은 교회에서 목회 일을 보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를 학살한 공산주의와 싸운다는 것, 순교자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는 것은, 결국 이 나라가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하는 것이다. 최선의 반공은 민주주의 나라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순교자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는 것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 북한 공산당 치하에서 허덕이고 배고프고 아프고 서러운 한 맺힌 암흑의 삶을 살아야 하는 동포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돌보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1980년대 신군부 아래서 광주 민중항쟁의 쓰라린 경험을 하면서 이제는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평화와 통일을 이룩해야겠다는 데 관심을 가지고 우리 민족의 평화와 통일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가 통일이 되지 않고서는 북에서나 남에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하기는 힘들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1980년대 신군부 정권의 감시와 통제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협의회는 남북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갈라진 민족의 화해와 평화 통일을 위한 선교사업을 시작했습니다. 1984년 분단 이후 처음으로 세계교회협의회의 도움으로 남과 북의 교회 지도자들이 일본에서 만나서 화해와 평화 통일을 위한 운동을 개시하기로 합의했습니다. 그리고 1986년에는 분단 이후 처음으로 북한 교회 지도자들과 남한 교회 지도자들이 스위스 제네바에 모여 앉아 세계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한국의 평화 통일 문제를 놓고 진지한 토론을 시작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주님의 성찬을 남북 교회지도자들이 함께 나누면서 눈물을 흘리는 감격적인 그리스도 안에서의 화해의 기쁨을 나누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하여 1988년 우리 NCC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 이른바 88선언을 공표했습니다.
순교자 아버지의 원수 아들과의 만남
이렇게 우리 한국 교회 에큐메니컬 운동 지도자들은 5.18 이후 전두환 정권의 감시와 방해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기독교도연맹 지도자들과 제네바와 미국 등에서 끊임없이 접촉하고 모여 앉아서 한반도의 평화와 화해 통일을 꿈꾸고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중에 이 사람도 끼어 있었습니다. 1991년 가을, 제가 환갑을 맞이하는 해였습니다. 이번에는 캐나다에서 북한 그리스도교도 연맹 이른바 조그련 대표 목사님들과 세계교회협의회 여러 유럽과 미국 교회 지도자들, 평화운동가들과 만나는 모임에 한국대표로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캐나다 토론토에 도착했는데, 북한에서는 조그련의 총무격인 강영섭 목사가 다른 4명의 대표들과 함께 도착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치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면서 만사 제쳐 놓고 치과병원으로 직행했다고 합니다. 강영섭 목사는 저와 동갑내기였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북한의 영양문제와 위생문제가 컸으면, 강영섭 목사의 치아가 엉망이 돼서 외국에 나오자마자 치과병원을 찾아갔으랴 불쌍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 우리 순교자 아버지의 원수 강량욱 목사의 아들과 마주 앉아서 우리나라 평화와 통일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감격과 기쁨보다는 마음속의 갈등과 혼란을 어찌할 줄 몰랐습니다. 1950년 6 25 전쟁 통에 평양에서 순교자 아버지를 교회 뒷산에 묻고 대한민국으로 내려와 해군에 입대한 이 순교자의 아들이 아버지 원수의 아들과 마주 앉아서 평화를 이야기해야 하는 운명, 저의 고민과 번민은 옛날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면서 고민하는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밤을 새워 가면서 순교자 아버지에게 호소했습니다. 밤새 기도했습니다. 순교자 아버지는 침묵했습니다. 내 기도에 응답이 없었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새벽에 잠에서 깬 저의 가슴에 와 닿는 소리는 “원수를 사랑하라. 원수 갚는 최선의 길은 원수를 도와주고 화해하고 사랑하는 일이다.” 저는 눈물을 흘리며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아침 우리 대화 모임의 회의장으로 입장했습니다. 벌써 북한 그리스도교 연맹의 목사님들과 참석자들이 들어 와 앉아 있었고 미국과 유럽의 교회 대표들 그리고 캐나다 정부의 고위 관리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해외 대표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내 자리를 찾아 앉았습니다. 그 개회식에서 저는 남한 교회를 대표해서 주제 강연을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내 자리를 찾아 좌정하자마자, 북조선 조그련 대표 목사인 강영섭 목사가 나를 보더니만, 내 옆으로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인사는 하는 둥 마는 둥, 저더러 자기가 하는 주제 강연을 조선말로 하는데 영어로 동시통역을 해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아니 우리 순교자 목사 아버지 원수의 아들이 나더러 자기 연설을 통역해 달라니? 이런 무례한 짓이 어디 있을까?” 화도 나고 불쌍하기도 해서, 잠깐 머뭇거리다가 “아니 강 목사님, 통역을 데리고 오지 않았습니까?”하고 정중하게 물었습니다. “아니야…….” 손을 흔들면서 그 사람은 영어를 못 하고 자기를 감시하러 온 사람이라고 하면서, 사람들이 내가 영어를 제일 잘한다고 해서 부탁하는 거라고 머리를 숙여 가면서 도움을 청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이건 이적행위다. 우리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에는 북한의 적을 이롭게 하고 도와주면 배신자로 국가보안법 위반자로 감옥에 가야 한다.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극단적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목사님, 잠깐, 우리 대표들과 의논에서 알려 드리겠습니다.” 하고 한국에서 온 대표 목사님들과 의논했습니다. 내 이야기를 듣더니만, 우리 친구 대표들이 모두 돌아앉으면서 “그건 서 박사가 알아서 해야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그날 새벽 나에게 들려오는 음성이 생각났습니다. 그래 내가 할 거다. 강영섭목사에게 다가가서 “하겠습니다. 원고를 주십시오.” 강 목사는 눈물을 흘릴 정도로 좋아하면서 주제 강연을 하기 위해 강단으로 올라갔습니다. 저는 동시통역하는 좁은 통 속으로 들어가 땀을 흘리면서 한마디 한마디 북한 교회와 북한 정부의 입장을 영어로 번역해 나갔습니다. 밖에 앉아 있는 강 목사를 감시하러 왔다는 북한 통역관은 내 통역을 검열하는지 강연 원고와 내 통역을 열심히 비교하는 것 같았습니다.
강연이 끝나자 우레 같은 박수가 터졌습니다. 동시통역 통 속에서 땀을 닦으며 나오는 저에게 강목사가 먼저 달려와 감사의 박수를 청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온 대표 친구들이 몰려와 내 손을 잡으면서 강 목사 우리말 강연보다 영어 통역이 더 분명하고 명 통역이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거 틀림없이 국가보안법에 걸렸구나…….” 하면서도 나는 보람을 느꼈습니다. 강영섭 목사의 주제 강연은 북한 정권 선전이 전부였지만, 내가 원수가 부탁하는 일을 해냈다는 데 나 스스로 감격했습니다.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리고 내 차례가 되어 한국 교회를 대표해서 우리 남한 교회의 평화 통일을 위한 염원을 담은 주제 강연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나에게 영어 동시통역을 부탁한 우리 순교자 원수의 아들 강영섭 목사에게 한없는 사랑과 감사를 느꼈습니다. 강 목사는 원수라고 하는 남한의 순교자 목사 아들인 저에게 스스럼없이 통역이란 어려운 일을 부탁했습니다. 전혀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어색해하지도 않고, 내가 혹시 통역을 잘 못 하거나 왜곡하거나 의심하지도 않고 허심탄회하게 마음 문을 열고, 그야말로 전적으로 나를 믿고 통역을 부탁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땀을 흘리면서 감사했습니다. 나는 아버지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해방되는 해방감을 실감했습니다. 북한에 대해서, 북한 동포들에 대해서 북한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무한한 사랑과 동정과 대화와 기도를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회가 닿는 대로 북한의 조그련 대표 목사님들과 평신도를 만나서 대화하고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평양 봉수교회에서의 만남
저의 평양 방문 경험을 나누고 싶습니다. 10여 년 전, 제가 홍콩에서 아시아의 기독교 대학을 지원하는 미국 재단의 일을 보고 있는 동안, 평양에 시작하는 과학기술대학 건립을 지원하는 방문단에 끼어서 평양에 가게 되었습니다. 평양 과기대 총장으로 초대된 재미 교포 김진경 총장과 함께 봉수교회에 가서 주일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봉수교회 앞마당에서 10여 년 전 제네바와 미국에서 만난 북한 조그련 여성 대표였던 김혜숙 선생을 만났습니다. 김혜숙 선생은 1986년 첫 번째 제네바와 글리온 남북 교회 대표자 회의에 통역으로 왔다가 거기서 남북교회 대표들이 세계교회 대표들과 함께 한 성찬식에서 감동을 받고 예수를 믿게 되어 평양으로 돌아 가 봉수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공산당원이며 북한 정부의 고급 관리였습니다. 제네바 회의가 끝나고 한국 식당에서 작별의 점심을 먹다가 이 양반 벌떡 일어나서 하는 말이 “서 박사님, 저는 남조선의 이화여자대학교에 가서 영어 공부를 더 해서 정말 훌륭한 통역이 되고 싶어요. 저를 꼭 불러 주세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작별한지 10년이 넘도록, 서로 소식을 모르고 있다가 2005년엔가 평양 봉수교회 앞뜰에 만난 것입니다. 자기는 1986년 글리온 남북 교회 지도자들과 나눈 성찬식에서 은혜를 받고 돌아와 세례를 받고 성가대원이 되었고, 이제는 집사가 되었다고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큰아들이 김일성대학을 졸업하고 군대 간 지 얼마 안 됐다고 가족 자랑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봉수교회 교인들 앞에서 인사말을 하라고 해서 앞에 서서 교인들을 둘러보았습니다. 300명 가까운 교인들이 줄을 정돈해서 앉은 것처럼, 정렬해 앉아 있었습니다. 모두들 얼굴이 까맣게 보이고 야윈 모습이었습니다. 나는 그들 앞에서 온 힘을 모아서 말을 꺼냈습니다. “저는 평양을 떠난 지 벌써 60년이 되어 옵니다. 대동강도 옛날 같이 흐르고 있고, 모란봉도 옛날과 다름없이 푸르고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남과 북은 아직도 갈라져 있습니…….” 저는 눈물을 참고 있었습니다. “남조선의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고 있는데, 앞에 앉은 교인들은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는 소리가 들리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평양을 방문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마지막 말로, “여러분 얼마 안 있어 다시 오겠습니다. 통일된 평양에 서울서 기차 타고 다시 오겠습니다. 살아생전에…….” 저는 말을 끝내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자리에 앉았습니다.
여러분, 분단된 우리 민족과 나라를 위해 간절한 기도를 드립니다. 우리 살아생전에 평양 가는 기차를 타고 휴전선을 넘어서 봉수교회에 가서 우리를 기다리는 형제자매들을 얼싸안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고 감사기도를 드리는 그 날, 그 날을 위하여 기도하고 행동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서광선
1931년 4월 15일 평안북도 강계에서 태어났다. 1960년 미국 로키마운틴대학교를 졸업하고, 일리노이주립대학교 신학대학원과 뉴욕유니온 신학대학원을 거쳐 1970년 밴더빌트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64년부터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일있다. 1978년 동 대학교 문리대학장을 지냈고, 1981년 현대교회 목사로 부임했다. 1983년 기독교학회장, 1990년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장 등을 역임했다. 제5공화국 당시 신학의 사회참여를 주장하여 한때 해직교수가 되기도 했다. ‘88선언’이라 불리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 작성에 참여했다. 저서로는 지성·세속·신앙》《현대사회와 종교》《사랑의 하나님》《한국기독교의 새인식》《종교와 인간》등이 있다.
이 글은 <복음과 상황>(http://www.goscon.co.kr/)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