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자 김수수
수상작 가을을 줍다가 당신을 만났다 외 4편
본심위원 장석주 송재학 김이듬
예심위원 김소희 유금란 코샤박
수상작
가을을 줍다가 당신을 만났다 외 4편
삼켰을까 뱉었을까
단내 올라오는 목울대까지
초승달 차올랐다
타국의 심해를 박차고
이제는 떠오르고 싶은 밤 크레센트 비치*에서
꼭지를 돌리면, 달의 정수리
당신이 사는 나라의 바람을 지나왔을까
조각달 속에서
한 꺼풀씩 떨어지는 젖은 눈썹
나는 오래 당신을 앓았다
물결의 껍질이 끊어질 듯 이어질 때
이제 소원을 밝혀도 될까
당신의 괴로움을 솎아내지 못한 밤
바위 앞에서
내 약속은 반쪽뿐이라고 고백할 때도
달이 자라는 고요한 밤*
기도는 공중에서 붉게 자랐다
언젠가
날 선 바람이 툭, 치면
잘 익은 달이
쿵, 떨어지는 날도 있겠지
조각조각 꾸었던 꿈
가을을 줍다가 보았다
둥근 시 굴리고 있는 윤동주, 당신을
*크레센트 비치 : 캐나다 도시 써리에 위치.
*윤동주 시인의 시 「달같이」 일부분.
아름다운 점자 씨
흰 점, 글자들
하늘에서 쏟아집니다
공중의 부리가
행간을 넓힙니다
눈이 바다의 어린 바다가 되고
섬의 등에 업힌 어린 섬이 되는 것을
당신은 바라봅니다
갈비뼈를 여닫는 밤
바다의 서랍에는 파도 두루마리
어린 자식을 잃은 설화가 말려 있습니다
눈 어두워지면 등대처럼
손끝이 환해져
다시 태어나는 얼굴이 있습니다
당신이 읽는 저편에는
함박눈이 내릴까요
철새가 돌아오면
당신은 열에 들떠서
백지 위에 안부를 묻고
눈은 다시 종이를 펼칩니다
겨울에 떠난 것들은
철새처럼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눈보라가 구겨진 종이처럼 구를 때
어린 새 한 마리
총총총 밑줄을 긋습니다
바다의 바닥을 알 수 없어
눈은 속수무책 내리고
나는 눈을 감습니다
손끝으로 읽어야 하는 이야기가
포말로 부서집니다
새가 한 줄 문장을 물고 날 때
손을 내밀어 흰 점, 글자를 받습니다
그리고 한 자 한 자 씁니다
세상의 모든 당신
나의 점자 씨, 잘 가요
두 집배원
대문을 고치고 싶다고 했다
그가 상처 입은 짐승처럼 서성거릴 때
송곳니 같은 기억이 돋아난 곳에서
자전거와 늙은 집배원이 나란히 걸었다
마을 어귀를 굴리다가
해 질 녘을 깔고 앉은
그림자 둘
노을을 게워 낸 얼굴로
바스락거리는 시월이었다
쭉정이 같은 고향에서
아버지처럼 살지는 않을 거야
바람은 쓸어버린 나뭇잎처럼 날리고
그는 낡은 대문을 박차고 떠났는데
어떤 통증은 일찍 도착하고
어떤 통증은 늦게 도착했다
위니펙*의 집배원이 된 그는
걸어가 봐야만 알 수 있는 주소지에서
늙은 집배원의 발자국을 줍고는 했다
들어갈 수도 나올 수도 없는
가을의 문틈에서
순한 짐승의 눈빛이 되어
삐거덕 삐거덕
문을 고치고 있는 그는
강원도 홍천 은행나무 숲
늙은 집배원의 아들이었다
* 위니펙 : 캐나다의 도시.
데커레이션케이크
새가 열리는 나무
한 그루 있습니다
베이커리 진열대 케이크 위
새소리 무성한 나무 아래에
주문하기도 전에 내린 폭설
푹푹 빠지는 발자국을 따르다가
뜬 눈으로 새운 밤을 세 컵
어스름 새벽별을 두 스푼
새벽까지 서성이던 골목 여섯 가닥을 휘저으면
후드득 날아오르는 기억
나무는 어느새 내 명치에 뿌리를 내렸는지
귀를 기울이면, 보고 싶다는 말 들립니다
당신을 통과한 바람인 듯
네 곁에 있어, 라고 속삭이기도 합니다
다운타운의 베이커리에서
대책 없이 눈 내릴 때만 보이는 유년의 손길
문 열린 갈비뼈 새장에는
한 줌 잔설이 흩어집니다
저, 시린 나무가 있는 케이크
포장해 주실래요?
둥지가 돋아나는지
몹시 가렵고
하루 종일 함박눈을 이고 싶은
오늘은 저편에서 맞는 당신의 첫 해,
눈이 내리나요?
연기처럼 새들이 날아오릅니다
아직 나는 사슴
어린 몸은 영문도 모른 채
깊은 잠에 빠져든다
바닥을 알 수 없으므로
아스팔트에 사슴이 누워 있다
새벽을 덮고 적요한 새끼 사슴
시멘트처럼 발린 위로나
벽돌처럼 단단한 슬픔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자국을 남기며
딸꾹딸꾹 차가 지나간다
속도를 줄이거나 우회하지 않고
할퀴고 지나가는 바퀴
마지막 숨이 전류처럼 퍼지며
붉은 몸에서
소중한 이름이 흘러나온다
바람은 하얗게 질린 나도바람꽃에 매달리고
이파리들은 새파란 입술을 들썩인다
마구 잘린 나뭇가지의 피를 닦아 본
사람의 표정으로
멈출 수 있다면
되돌릴 수 있다면
계절은 길을 잃지 않겠지
동공을 잃은 사슴이
주위를 서성이고 있다
때아닌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어미 사슴이
너덜너덜해진 심장에
얼굴을 묻고 있다
엄마, 여전히 나도 사슴 같아
바람이 여전히 나도바람꽃을 흔들었다
수상소감
쓸 것입니다 숨 쉬는 것처럼
별이구나, 깨물어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별이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겁니다. ‘난 정말 안 되는 건가.’ 실패의 시간이 파지처럼 쌓여 있던 책상 한가운데에 말입니다. 기다림의 끝, 이런 날이 오긴 오는군요.
쉬운 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유목민처럼 떠도는 이민 생활이었습니다. 길을 잃었습니다. 찾은 것 같았는데 또 길을 잃었습니다. 불안한 나날이었습니다. 길을 잃을 때마다 빛이 되어 주던 별, 시라는 별을 나침판 삼았습니다. 사막에 누워 별을 짚어보며 내 별은 언제 뜰까, 생각했습니다. 칠흑 속에서 그래도 저는 ‘뭐, 어쩌겠어요, 그냥 쓸 겁니다, 숨 쉬는 것처럼.’ 두 손을 들고 기꺼이 투항하면 편해졌습니다.
끝까지 그 별을 따라가겠습니다. 제 길을 밝혀주던 시들이 많습니다. 사다리, 동아줄, 장대, 영혼……. 시인들의 특별한 방법을 연마할 수 있을까요? 별을 잘 닦아 달아 놓은 시인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드립니다. 이 순간에도 바람은 부드럽고 깜짝선물처럼 달이 뜨기도 합니다. 사막의 숨결이 저를 통과하는 시간을 놓치지 않겠습니다.
낡은 책상 위에 별을 놓아주신 장석주, 송재학, 김이듬 심사위원님 부족한 저를 불러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부끄러워 붉어진 눈을 크게 뜨겠습니다. 윤기 나도록 닦아 보겠습니다. 언젠가 이빨 자국 난 별을 찾으시거든 한 번 더 바라봐 주세요. 사막에서 쏘아 올린 유목민의 고백일 것입니다. 그리고 문정영 발행인님 시산맥 일원으로 열심히 해나가겠습니다.
한국과 캐나다의 친구들. 우리는 함께 아침을 맞았었지. 당신들이 좋아. 살아가는 이유이자 내 삶의 증거인 단 은 겸 찬 그리고 락아, 곁에 있어 줘서 고맙고 마음 깊이 사랑해. 항상 고마운 작가님, 나의 사슴, 대장 그리고 가족들. 오늘만 사는 나, 당신들이 걷게 했어요. 총총.
김수수(본명 김미영)
현재 캐나다 벤쿠버 거주.
제19회, 24회 재외동포문학상 수상.
제5회 동주해외신인상 수상.
이메일 miangbaby@hanmail.net
심사평
제5회를 맞이한 동주해외신인상에 세계 각지의 신인들 30여 명이 옹모를 하였다. 해외 등단 10년 이내(2015년 이후) 시인이나 신인들에게 응모 자격이 주어진다.
기 동주해외신인상 수상자들의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작품은 아래와 같이 네 분의 응모작이었다.
문숙희(엘에이) 「Lamb's Ear」외 9편
최재준(시애틀) 「보노보 난독증」 외 9편
김수수(밴쿠버) 「가을을 줍다가 당신을 만났다」 외 9편
송마리(엘에이) 「장난질」 외 9편
응모작 중 최종으로 두 명의 작품을 두고 토론이 이어졌다. 최재준의 「보노보 난독증」 외 9편은 일상적 경험 속에서 독특하고 가파르게 자신만의 인식을 벼려가는 지점이 돋보였다. 개성적이며 솔직담백한 문체가 주는 강력한 몰입감이 있었다. “시간은 닮아야 할 사람을 닮게 한다”(「오월에 내린 폭설」), “우린, 속에서 발효하는 얼룩을 가지고 있다”(「지하상가」), “포위되어 갇힌 사각형은 답답하다”(「몬드리안 사각형」)에서처럼 한 개의 문장을 포석처럼 던져 한 행으로 처리하는 형식적 유사성이 시적 선선함을 깨뜨린다는 점이 아쉬움을 자아냈다. 작품 간의 편차를 줄인다면 조만간 지면에서 꼭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김수수의 「가을을 줍다가 당신을 만났다」 외 9편은 대체로 담담한 진술과 묘사를 통해 서정적인 시공간을 확보하고 있었다. 때로는 경쾌하게, 때로는 고요하고 애잔하게 사유를 폭넓게 확장해가는 태도가 미더웠다. 늙은 집배원의 아들이었던 그가 “쭉정이 같은 고향에서/아버지처럼 살지는 않을 거야”라며 고향을 떠나와 “위니펙의 집배원이 된”(「두 집배원」) 과정은 어쩌면 이민자로서의 모든 존재의 목소리가 아닐까. “다음 생엔 숨결로 오렴//태평양 너머에 두고 온/내 동생 임연수”(「꾸덕꾸덕 마르는」)와 같은 속삭임은 상상과 현실의 통로를 만들고 있다. 과도한 수사 없이 시선을 붙드는 시, 고른 완성도를 지닌 작품들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새로운 출발선에 서 있는 김수수 시인에게 축하를 드린다.
해외에서 모국어로 시를 읽고 쓰는 시인들, 먼 곳에서 시인으로 발돋움하려고 언어와의 힘겨운 사투를 벌인 모든 응모자들에게 박수와 응원을 보낸다.
심사위원 장석주(시인) 송재학(시인) 김이듬(시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