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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을 심은 장사꾼
― 여불위
운곡 조이무
농부는 씨앗을 고를 때 겉만 보고 판단하지 않는다. 손바닥 위에 몇 알을 올려놓고 무게를 가늠하고, 껍질의 윤기와 단단함을 살핀다. 쭉정이는 아무리 몸집을 부풀려도 손끝에서 먼저 버림을 받는다. 반대로 작고 볼품없는 씨앗이라도 속이 단단하면 농부의 눈에는 가을의 풍경이 미리 보인다. 그래서 작은 낟알 속에 한 됫박의 수확이 숨어 있다는 것을 농부는 경험으로 짐작을 한다. 중국 전국시대 말기, 여불위도 사람을 그렇게 바라보았다. 다만 그는 씨앗을 고르는 농부가 아니라 사람의 운명에 값을 매기는 인간 장사꾼이었다.
그는 위나라 출신의 거상이었다. 귀족의 혈통도, 왕실의 문벌도 없었지만 재물과 판단력은 누구보다 넉넉하고 예리했다. 그는 물건의 희소성을 알아보았고, 사람의 욕망을 읽었으며, 세상의 흐름이 어느 쪽으로 기울고 있는지 계산할 줄 알았다. 사람들이 이미 오른 값만 좇을 때 그는 아직 값이 붙지 않은 가능성을 찾아 나섰다.
그러던 그의 눈에 조나라의 볼모로 와 있던 진나라 왕자 자초가 들어왔다. 자초는 왕족이기는 했으나 후계 서열에서 멀리 밀려나 있었고, 국가의 보호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어려운 처지였다. 사람들의 눈에는 쓸모없는 가지였고, 비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곧 말라버릴 묘목처럼 보였다. 하지만 여불위의 눈에는 달랐다. 남들이 초라한 볼모를 볼 때 그는 장차 왕관을 쓸 가능성을 보았다. 남들이 버려진 돌을 볼 때 그는 갈고 닦으면 빛을 낼 옥을 보았다. 그는 자초를 두고 귀한 물건은 사두어야 한다는 의미의 ‘기화가거’(奇貨可居)를 떠올렸다고 전한다. 오늘날의 말로 바꾸면 미래 가치가 높은 투자처를 발견한 셈이다. 그의 안목은 놀라웠다. 그러나 놀랍다는 말이 곧 옳다는 뜻은 아니다. 사람은 씨앗일 수는 있어도 상품이어서는 안 된다. 여불위는 자초의 가능성을 알아보았지만 그의 인격보다 가격을 먼저 계산했다. 한 인간을 도와주는 일과 한 인간을 투자 대상으로 삼는 일은 겉으로 비슷해 보여도 뿌리가 다르다. 하나는 연민에서 시작되고, 다른 하나는 이익과 탐욕에서 시작된다.
여불위는 자초에게 재물을 아낌없이 주고 인맥을 동원했다. 진나라 왕실의 실력자들에게 접근하여 자초가 후계자가 될 수 있도록 정치적 밭을 갈았다. 척박한 흙에 거름을 넣고 물길을 내듯 그는 왕실 내부의 관계를 하나씩 손질했다. 마침내 자초는 진나라 왕위에 올라 장양왕이 되었다. 여불위의 투자는 성공했다. 아니,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농부가 봄에 콩 한 말을 심어 가을에 열 말을 얻었다면 큰 수확이다. 그러나 여불위는 볼품없는 왕자 한 사람에게 투자해 결국 제국의 권력을 거두었다. 그는 승상이 되었고, 막대한 재산과 명예를 손에 넣었다. 세상의 장사꾼들이 이익을 장부에 적을 때 그는 제왕의 이름을 장부에 적었다. 그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에는 가능성을 보고도 겁을 먹어 물러나는 사람이 많다. 여불위는 달랐다. 자기 전 재산과 목숨을 걸었다. 판단력과 결단력만 놓고 본다면 그는 시대를 앞선 투자자였으며, 한 왕조의 흐름을 바꾼 전략가였다.
그러나 농부는 씨앗을 심었다고 해서 그 생명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지 않는다. 싹이 트고 줄기가 자라면 햇빛과 바람과 흙의 몫이 더 크다는 것을 안다. 여불위는 이 사실을 몰랐다. 그는 자초를 왕으로 만든 뒤 왕과 왕실까지 자신의 수확물로 여겼다.
이것이 인간이 해서는 안 되는 첫 번째 잘못이다.
누군가를 도왔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인생을 소유하려 해서는 안 된다. 부모가 자식을 키웠다고 자식의 삶을 대신 살 수 없고, 스승이 제자를 가르쳤다고 그의 영혼에 말뚝을 박을 수 없다. 정치인이 국민의 지지를 받아 권력을 얻었다고 나라를 자기 재산처럼 다루어서는 더욱 안 된다. 도움을 권리로 바꾸고, 은혜를 복종으로 바꾸는 순간 선의는 폭력이 된다.
여불위는 사람을 발굴했지만 끝내 사람을 존중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애첩 조희를 자초에게 보내 아내가 되게 했다고 전한다. 이 기록에는 후대의 의혹과 논쟁이 뒤따르지만, 중요한 것은 여불위의 삶을 둘러싼 인간관계가 언제나 거래와 계산의 언어로 전해진다는 점이다. 사람과 사랑, 혈연과 권력까지 그의 장부에서는 손익으로 환산되었다. 사람의 마음을 권력을 얻는 도구로 삼는 일은 장사의 재능이 아니라 인간성의 파산이다. 돈으로 물건은 살 수 있다. 그러나 양심을 사고팔기 시작하면 그 사람은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이 된다. 가진 것이 많아도 사람을 수단으로 보는 순간 마음의 곳간은 이미 비어 있다. 여불위는 창고에 금은보화를 가득 쌓았지만, 정작 인간의 존엄을 담을 한 됫박의 그릇은 준비하지 못했다. 농사를 지어보면 작물보다 잡초가 먼저 자란다. 농부가 며칠 밭을 돌보지 않으면 잡초는 곧 작물의 햇빛을 가리고 뿌리를 얽는다. 욕망도 그렇다. 처음에는 작은 풀잎처럼 보이지만 뽑지 않으면 인생 전체를 덮는다.
여불위의 권력도 처음에는 자초를 돕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단은 곧 목적이 되었다. 장양왕이 죽고 어린 정, 그가 훗날의 진시황으로 왕위에 오르자 여불위는 상국으로서 국정을 장악했다. 그는 왕을 대신해 제국을 움직였다. 권력의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그는 조정과 왕실을 자유롭게 오갔다.
그때 그는 멈췄어야 했다.
큰 수확을 거둔 농부는 다음 해의 씨앗을 남긴다. 땅을 쉬게 하고 수확의 일부를 이웃과 나눈다. 욕심을 부려 밭의 기운을 한 해에 모두 빼버리면 다음 해에는 아무것도 거둘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력자는 좀처럼 땅을 쉬게 하지 않는다. 오늘 열 섬을 거두면 내일 스무 섬을 원하고, 백 명이 머리를 숙이면 천 명의 복종을 요구한다. 여불위는 천하의 흐름을 계산했지만 자기 욕망의 염류집적은 계산하지 못했다. 비료도 지나치면 땅을 망친다. 권력 역시 지나치면 사람의 정신을 메마르게 한다.
조희와 노애를 둘러싼 사건은 그의 권력이 얼마나 사적인 욕망과 얽혀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궁궐의 질서는 흔들렸고, 왕실의 추문은 어린 왕의 가슴에 깊은 불신을 심었다. 진시황의 출생을 둘러싼 의혹도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사실 여부와 별개로 이런 소문이 생겼다는 것 자체가 여불위의 정치와 개인 사생활이 얼마나 혼탁했는지를 말해준다.
한 나라의 권력자가 사적인 욕망을 공적인 권력과 섞는 순간 국가는 진흙탕이 된다.
농부가 농약을 잘못 사용하면 자기 밭만 망치는 것이 아니라 옆 논의 물길까지 오염시킨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의 잘못은 개인의 일탈로 끝나지 않는다. 그의 욕망은 제도와 사람, 사회의 신뢰까지 병들게 한다. 권력자는 자기 집 안방의 욕망도 공적인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여불위는 이 경계를 넘었다.
그가 남긴 『여씨춘추』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수많은 학자를 모아 유가·도가·법가·음양가 등 여러 사상을 한데 엮은 것은 대단한 지적 사업이었다. 그는 학문을 존중했고, 인재를 모을 줄 알았으며, 다양한 생각을 하나의 저술로 결실하게 했다.
이 점에서 여불위는 단순한 탐욕가로만 규정할 수 없는 인물이다. 사람은 선과 악을 한 몸에 품은 복잡한 존재다. 좋은 책을 남긴 사람이 반드시 좋은 삶을 산 것은 아니며, 큰 업적을 이룬 사람이 반드시 훌륭한 인간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것이 더 큰 교훈이다.
지식이 많다고 인격이 저절로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책을 편찬하면서도 욕망을 다스리지 못할 수 있고, 나라의 앞날을 내다보면서도 자기 발밑의 함정을 보지 못할 수 있다. 밭의 토양 분석표를 줄줄 외워도 직접 흙을 만지지 않으면 농사를 망칠 수 있다. 사람의 인생도 마찬가지다. 지식은 방향을 알려주지만, 절제만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진시황이 성장하자 여불위의 권력은 점차 위협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궁중의 음모와 소문 속에서 자란 진시황은 누구도 쉽게 믿지 않았다. 그는 왕권을 되찾기 위해 노애의 반란을 진압하고, 여불위를 권력의 중심에서 밀어냈다.
여불위는 유배되었고, 결국 독주를 마시고 생을 마감한 것으로 전한다.
한때 제국의 운명을 흥정하던 사람이 마지막에는 자신의 목숨조차 흥정하지 못했다. 왕을 만든 장사꾼은 있었지만, 자기 운명을 살 장사꾼은 없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가격으로 계산했던 그의 장부에서 죽음만큼은 값을 매길 수 없는 항목이었다.
흙은 이런 인간을 비웃지 않는다.
왕도 흙으로 돌아가고, 장사꾼도 흙으로 돌아간다. 황금관을 쓴 사람도 한 줌의 흙이 되고, 호미를 들고 평생 허리를 굽힌 농부도 한 줌의 흙이 된다. 죽음 앞에서는 왕관과 밀짚모자의 무게가 같아진다.
여불위 뒤에는 이사가 있었다.
초나라 출신인 이사는 여불위의 문하에서 기회를 얻어 진시황의 눈에 들었다. 여불위가 왕위로 가는 길을 놓았다면, 이사는 그 길 위에 제국의 제도와 법률을 세웠다. 군현제를 확대하고 문자와 도량형을 통일하여 광대한 영토를 하나의 체계로 묶었다.
그의 행정적 능력은 뛰어났다. 그러나 이사 역시 큰 잘못을 범했다.
법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 사람을 두렵게 하고 입을 막으며 생각까지 통제하는 법은 정의가 아니라 권력의 몽둥이다. 밭의 울타리는 작물을 지키기 위해 세우는 것이지, 작물이 숨 쉬지 못하게 가두기 위해 세우는 것이 아니다.
이사는 질서를 위해 법을 만들었지만 인간을 법 아래 지나치게 짓눌렀다. 분서와 사상 탄압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강한 국가를 만드는 과정에서 다양한 생각과 인간의 숨결을 희생시켰다.
무서운 것은 그가 만든 법이 끝내 자신에게 돌아왔다는 점이다. 진시황이 죽은 뒤 그는 환관 조고와 함께 황제의 유서를 왜곡하고 태자 부소를 제거하는 데 가담했다. 권력을 지키기 위해 진실을 저버린 것이다. 그는 결국 조고의 모함을 받아 혹독한 형벌로 죽었다.
자기가 갈아놓은 칼날에 자기 몸이 베인 셈이다.
다른 사람에게만 적용될 것이라 믿고 만든 가혹한 법은 언젠가 만든 사람의 문 앞에도 도착한다. 그러므로 정치인은 법을 만들 때 원수에게 적용할 법이 아니라, 자기 자식과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법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법은 정의가 아니라 보복이다.
조고는 더 깊은 잡초였다.
그는 사슴을 말이라 부르게 한 지록위마(指鹿爲馬)의 인물로 기억된다. 그러나 그가 저지른 죄는 단순히 동물의 이름을 바꾼 데 있지 않다. 그는 권력이 진실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신하들이 사슴을 보고도 말이라고 대답하게 만든 순간, 그는 사람들의 눈과 입을 동시에 빼앗았다. 인간이 해서는 안 되는 가장 비겁한 일 가운데 하나는 자기가 살기 위해 진실을 거짓이라고 부르는 일이다. 또 하나는 권력을 이용해 다른 사람에게도 같은 거짓말을 강요하는 일이다. 사슴은 아무리 말이라 불러도 사슴이다. 봄에 심은 콩은 가을에 콩으로 열린다. 팥이라고 명령해도 팥이 되지 않는다. 자연은 권력자의 말을 듣지 않는다. 진실도 마찬가지다. 잠시 입을 막을 수는 있어도 본질까지 바꿀 수는 없다.
조고는 이사를 제거하고 황제 호해마저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제국의 충신들은 사라지고, 진나라의 거대한 궁궐은 내부에서 썩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만리장성이 서 있었지만, 나라 안의 신뢰는 이미 무너져 있었다.
밭은 밖에서 들어온 벌레보다 뿌리에서 시작된 병에 더 빨리 죽는다. 진나라도 외적보다 내부의 탐욕과 거짓 때문에 무너졌다.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했다. 문자와 화폐, 도량형과 행정제도를 정비하고 전국시대의 오랜 분열을 끝냈다. 그의 업적은 분명 크다. 그러나 그는 천하를 하나로 묶으면서 사람의 마음까지 쇠사슬로 묶으려 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했고 불로장생을 원했다. 세상을 정복한 사람도 자기 생명의 마지막 하루는 정복하지 못했다. 지방 순행 중에 죽은 그의 시신은 죽음을 숨기기 위해 한동안 수레에 실려 이동했다. 황제의 죽음조차 정치적인 비밀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참으로 기묘한 일이다.
천하의 모든 문을 열 수 있었던 사람이 죽음의 문만은 열지 못했다. 수많은 백성에게 명령을 내린 황제도 심장에게 계속 뛰라고 명령할 수 없었다. 만리장성을 쌓았지만 죽음이 넘어오는 길은 막지 못했다. 권력자는 흔히 자기가 세상을 움직인다고 믿는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명령이 아니라 계절이라는 것을. 왕이 봄을 늦출 수 없고, 황제가 가뭄을 꾸짖어 비를 내리게 할 수 없다. 사람은 자연의 주인이 아니라 잠시 머무는 세입자라는 것이다.
여불위는 왕을 심었다. 이사는 법이라는 울타리를 세웠다. 조고는 거짓의 잡초를 퍼뜨렸고, 진시황은 천하의 수확을 혼자 거두려 했다. 그 결과 진나라는 강력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좋은 밭은 한 해 수확량만 많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다음 세대도 씨를 뿌릴 수 있어야 한다. 땅의 힘을 모두 빼앗아 한 철의 수확만 늘리는 농사는 약탈이지 농업이 아니다. 나라 또한 마찬가지다. 한 시대의 왕이 모든 것을 거두고 다음 시대에 황폐한 땅만 남긴다면 그것은 통치가 아니라 수탈이다. 오늘날에도 여불위와 이사와 조고는 사라지지 않았다.
돈으로 권력을 사고, 권력으로 더 큰 돈을 버는 사람에게서 여불위의 그림자가 보인다. 법을 자기편에게는 느슨하게, 반대편에게는 가혹하게 적용하는 사람에게서 이사의 오만이 보인다. 명백한 사실을 두고도 권력자의 눈치를 보며 거짓을 말하는 사람에게서 조고의 혀가 보인다.
역사는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이름과 옷만 바꾸어 오늘도 우리 곁을 걸어 다닌다.
그러므로 역사를 읽는 목적은 죽은 사람의 잘못을 꾸짖는 데만 있지 않다. 그들의 욕망이 내 안에도 자라고 있음을 발견하는 데 있다. 작은 권한을 얻었다고 다른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는지, 도움을 주는 대가로 복종을 요구하지 않았는지, 내 이익을 위해 진실을 구부리지 않았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농부는 밭의 잡초만 뽑아서는 안 된다. 마음의 잡초도 뽑아야 한다. 탐욕은 명아주보다 빠르게 자라고, 오만은 환삼덩굴보다 질기다. 거짓은 뿌리를 깊이 내려 한번 퍼지면 온 밭을 덮는다. 그래서 사람은 날마다 자기 마음의 밭을 돌아보아야 한다.
나는 여불위를 위대한 장사꾼이라 부를 수는 있어도 위대한 인간이라 부르기에는 조금 망설여진다. 그는 사람의 가능성을 알아보았지만 사람의 존엄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 제국의 문을 열었지만 욕망의 문은 닫지 못했다. 많은 학자를 모았지만 자기 마음속 스승의 충고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에게서 우리는 안목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을 상품으로 보는 태도는 배우지 말아야 한다. 결단력은 배울 수 있다. 그러나 목적을 위해 인간관계와 양심을 거래하는 행동은 따라 해서는 안 된다. 지식을 후원한 업적은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권력을 사유화하고 사적인 욕망을 국가의 질서 위에 올려놓은 잘못은 분명히 비판해야 한다.
인간은 성공보다 성공한 뒤의 태도로 평가받는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권력자는 높이 오를수록 목을 세운다. 익은 벼와 덜 익은 인간의 차이는 고개 하나에서 드러난다. 가을 들판에서 나는 종종 왕관보다 밀짚모자가 더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왕관은 한 사람의 머리에 올라가지만, 밀짚모자는 수많은 사람의 밥을 만든다. 왕관은 백성에게 고개를 숙이라 명령하지만, 밀짚모자를 쓴 농부는 먼저 흙에 허리를 숙인다.
진시황은 만리장성을 남겼고, 이름 없는 농부들은 논두렁을 남겼다. 만리장성은 제국의 경계를 지켰지만 논두렁은 사람의 생명을 지켰다. 제국은 무너졌으나 논과 밭은 다시 봄을 맞았다. 여불위의 장부에는 수많은 이익이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장에는 아마 이런 결산이 남았을 것이다.
왕을 얻고 사람을 잃었다.
권력을 얻고 평안을 잃었다.
천하를 움직이고 자기 마음을 다스리지 못했다.
흙은 정직하다.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고, 가시를 심으면 상처를 거둔다. 탐욕을 심고 정의를 바랄 수 없으며, 거짓을 심고 신뢰를 기대할 수 없다. 이것이 농부가 계절마다 배우는 가장 단순하고도 엄격한 법이다. 역사는 왕의 이름을 기록하지만 문명은 농부의 손에서 이어진다. 권력은 잠시 사람 위에 설 수 있지만, 흙은 마지막까지 모든 사람을 품는다.
그래서 나는 제국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왕을 심은 여불위보다 한 알의 볍씨를 심는 농부가 더 오래 세상을 먹여 살린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