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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1장 망한 나라를 살리다 (4)
앞서 얘기했듯 허목공의 부인은 선강(宣姜)의 딸, 즉 위대공의 누이다.
그녀는 친정국인 위나라가 성곽도 없는 조읍에다 도성을 차리고, 오라비인 위대공(衛戴公)이 백성 5천 명만으로 군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전해받자 눈물을 쏟으며 슬퍼했다.
속히 달려가 돕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이때 그녀가 자신의 심정을 노래로 지어 읊은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재치(載馳)>라는 시(詩)이다. 이 시는 <시경> 용풍편에 실려 오늘날까지 그 내용이 고스란히 전해오고 있다.
달리고 달려라, 수레여. 위나라 제후를 조문하리라.
머나먼 길 쉬지 말고 달려라, 조 땅으로.
대부들이 산 넘고 물 건너 조문했으나
내 마음은 오로지 근심뿐이네.
내가 가는 것을 못마땅히 여기지만 내 마음 돌이킬 수 없네.
내가 가는 것을 허락지 않지만 내 마음 멀어지지 않네.
내가 가는 것을 못마땅히 여기지만 내 마음 돌이킬 수없네.
내가 가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지만 내 마음 그치지 않네.
저 높은 언덕에 올라 패모(貝母, 한약재)를 캐보세.
여자는 근심이 많다고 하지만 거기엔 다 이유가 있다네.
허나라 사람들은 나를 나무라지만 어리석고 유치한 짓이라네.
들판에 나가면 푸릇푸릇 싱싱한 저 보리싹
큰나라에 도움을 청해도 누가 달려와 구해줄지 모르거늘.
세상의 군자들이여, 나를 허물치 마오.
그대들이 생각하는 바가 내 생각에는 미치지 못한다오.
재치(載馳)란 '수레여 달려라'라는 뜻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친정 나라로 달려가 위로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여실히 나타나 있다. 이것은 또한 주변 강대국, 특히 패공을 자처하는 제환공(齊桓公)을 겨냥하고 지은 것일 수도 있으며, 위나라를 돕자는 호소의 노래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녀가 지어 부른 노래는 곧 허나라 전체로 퍼져나갔고, 이어 중원의 여러 제후들 귀에도 전해졌다. 제환공(齊桓公)도 그 노래를 들었다. 그는 위나라의 위기에 안일하게 대처한 자신의 처신을 부끄러이 여겼다.
"아아, 나의 마음씀이 아녀자의 그것보다 못하구나."
제환공(齊桓公)이 관중을 불러 본격적으로 위나라 도울 일을 의논하려는데, 또 다른 급보가 들어왔다.
"위대공(衛戴公)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위의공의 뒤를 이어 군위에 오른 위대공은 본래 어질 적부터 병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 난리를 겪으면서 그 병이 도졌고, 급기야는 임금에 오른 지 채 한 달도 되기 전에 죽어버린 것이었다.
"위나라의 환란이 어찌 이처럼 끊일 새가 없는가."
제환공(齊桓公)이 탄식하고 있을 때 위나라 대부 영속이 조읍에서 달려와 제환공에게 알현을 청했다. 위대공에게는 공자 훼라는 친동생이 있었는데, 공자 훼는 일찍이 위의공의 폭정에 불만을 품고 제(齊)나라로 망명했었다.
"위대공(衛戴公)에게는 후사가 없습니다. 그 동생 공자 훼를 새로이 군위에 올리려 합니다. 패공께서는 공자 훼를 귀국케 하여 위나라를 존속케 해주시기 바랍니다."
대부 영속은 눈물을 뿌리며 간곡히 청원했다.
그의 청이 아니더라도 제환공(齊桓公)은 이미 위나라를 적극적으로 돕기로 마음을 정하고 있었다. 그는 곧 공자 훼를 불러 위나라로 돌아가 군위에 오르게 하는 한편 귀국하는 공자 훼에게 좋은 말 1승(乘, 4필의 말을 1승이라고 함)과 제복(祭服) 다섯 벌, 소, 염소, 돼지, 닭, 개 등 가축을 각 3백 쌍씩 내주고, 또한 궁중 권속들이 입을 수 있는 비단옷 3백 벌을 내주어 가져가게 했다.
아울러 조읍에 파견나가 있는 공자 무휴(無虧)에게 조읍을 철저히 경비하라는 명을 내렸다.
공자 훼는 감격했다. 그는 이마를 찧을 정도로 절하고 나서 위(衛)나라 임시 도성인 조읍을 향해 떠나갔다.
공자 훼의 귀국을 전후로 하여 대부 굉연(宏演)을 모시던 시종들도 조읍에 당도했다. 그들은 공자 훼에게 굉연이 배를 가르고 위의공의 간을 자기 뱃속에 집어넣고 죽은 사실을 자세히 고했다.
공자 훼는 즉시 관을 갖추어 형택으로 달려가 죽은 굉연(宏演)의 시체를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위의공과 위대공에 대한 장례식을 치르는 한편 굉연의 자식을 등용하여 아버지의 벼슬을 이어받게 했다.
그 이듬해 봄, 공자 훼는 위나라 임금 자리에 올랐다. 그가 곧 위문공(衛文公)이다.
그러나 나라의 살림살이는 초라하고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수레라고는 온 도성을 통틀어 30대밖에 되지 않았고, 백성들의 생활 또한 하루 세 끼를 모두 죽으로 연명할 정도였다.
위문공(衛文公)은 검소했다. 그는 제환공이 구호물품으로 보내준 비단옷을 입는 대신에 베옷을 입었고, 음식도 채소만 먹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났고, 밤에는 늦게 잤다. 틈나는 대로 돌아다니며 백성들을 위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읍 백성들은 위문공의 덕을 칭찬하기 시작했다.
한편, 굉연(宏演)이 위의공의 간을 뱃속에 집어넣고 죽었다는 사실과 위문공(衛文公)이 위나라를 다시 일으키려는 눈물겨운 의지는 삽시간에 이웃 나라에까지 퍼져나갔다.
패공 제환공(齊桓公) 역시 그 소문을 듣고 감탄했다.
"학만 좋아하는 어리석은 임금에게 그토록 놀라운 충신들이 있었을줄이야. 그러한 충신들에다가 위문공 같은 어진 사람이 임금에 올랐으니, 위나라는 망하지 않을 것이다."
관중(管仲) 또한 감격하여 말했다.
"지금 위나라 도성인 조읍(漕邑)은 작고 황폐합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넓고 기름진 땅을 골라 성을 쌓아 도성을 축조해주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좋은 생각이오. 어디에다 위나라 도성을 정하는 곳이 좋겠소?"
"황하 동쪽 초구(楚丘)라는 땅은 넓고 기름진 곳입니다. 그 곳에 성을 쌓으면 능히 오랑캐의 침공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초구는 지금의 하남성 활현(滑縣) 동쪽 일대이다.
제환공은 곧 여러 나라에 통보하여 축조에 필요한 물건들을 부조받아 힘을 합해 초구(楚丘)에다 위나라 도성을 쌓아주었다. 도성이 완성되자 위문공(衛文公)은 초구로 도읍을 옮겼다.
이로써 위나라는 비로소 나라다운 성곽과 궁을 갖추게 되었다. 위문공(衛文公)은 제환공의 배려에 감격하여 특별히 <모과(木瓜)>라는 시를 지어 그의 은혜를 기리었다. 이 시 역시 <시경> 위풍편에 기록되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당시 세상 사람들은 제환공(齊桓公)이 위태로움에 빠진 나라 셋을 구했다고 칭송했다.
첫번째로는 멀리 북쪽까지 진출하여 산융을 정벌함으로써 위기에 빠진 연나라를 안정시킨 것이고, 두 번째는 대가 끊어진 노(魯)나라에 노희공을 세워 대를 잇게 한 것이고, 세 번째는 도성을 잃은 위(衛)나라에게 초구성을 쌓아줌으로서 망한 위나라를 다시 살린 것이었다.
이 3대 공로로 인해 제환공은 춘추시대 5패공(五覇公) 중 으뜸가는 패공으로 꼽히고 있다.
🎓 다음에 계속........
출처 - 평설열국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