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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교황(Pope 敎皇)의 역사를 알아봅니다
교황은 라틴어로 Papa 라고 합니다 아버지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죠
그 시작은 기독교가 로마에 전파되는 과정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고 기독교가 시작됩니다 로마제국은 다신교를 허용하나 유일신 이외 다신교를 부정하고 황제숭배 마저 거부하는 기독교를 탄압합니다
2세기 말경 생존의 위협을 느낀 기독교인들은 자기들만의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당시 로마 교구장을 교황으로 세우고 기독교를 총괄하게 합니다. 혹자는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보기도 합니다
점차 교인이 늘어난 기독교는 313년 로마제국 콘스탄티누스 황제로부터 종교로서 인정(=밀라노칙령)을 받고, 392년 테오도시우스 황제 시절 로마제국의 국교로 선포됩니다 로마 황제의 재정적 지원과 귀족들의 재산기부로 기독교의 권세와 재산이 급속도로 늘어납니다
교황의 권한은 로마제국이 동서로 나누어진 후에도 점차 높아집니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하면서 서유럽은 여러 나라로 분열되고, 동로마제국은 게르만족의 침략을 계속 받습니다. 그러던 중 게르만족 출신 영주들의 위협을 받던 로마 교황 스테파노 2세는 프랑크왕국의 피핀 3세 Pepin III 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교황의 인정이 필요한 피핀 3세는 지금의 이탈리아 반도 중부지역에서 게르만족을 몰아내고 그 땅을 교황에게 헌납합니다.
이것이 교황령 (敎皇領 Papal States)의 시작으로 봅니다 754년 경입니다
이제 교황은 황제를 인정하는 권한까지 가지게 됩니다 이탈리아 북부와 독일 지방까지 정복한 샤를 마뉴 Charlemagne 는 800년 교황으로부터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인정받습니다
교황의 권위를 잘 보여준 또다른 일이 생깁니다 카노사의 굴욕 Humiliation of Canossa 이라고 부릅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성직자 임명권의 회수를 거부하는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를 폐위시킵니다 폐위 선언 이후 주변 세력들이 자기 곁을 떠나가는 것에 위기를 느낀 하인리히 4세는 1077년 1월 알프스산을 넘어 이탈리아 북부 카노사성까지 가서 교황의 용서를 구합니다
이제 교황들은 예루살렘을 탈환해야 한다고 전쟁을 부추깁니다 흔히 일컫는 십자군 전쟁입니다 200년 가까이 전쟁을 계속하나 결국 실패합니다 교황의 권위가 떨어지고 교회의 부패는 심해집니다
교황의 위신이 추락했다는 상징적인 사건이 생깁니다 아비뇽의 유수 Avignonese Captivity 라고 부르는 시절입니다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의 강압에 굴복하여 1309년 로마의 교황 클레멘스 5세는 프랑스의 아비뇽에 자리 잡습니다 이후 6명의 교황이 프랑스에서 선출됩니다
돈을 내면 죄를 용서해준다는 면죄부 Indulgence 까지 발행하는 등 교회는 계속 타락합니다 독일 신학자 마르틴 루터는 면죄부의 부당함을 비판하는 글을 붙힙니다 1517년입니다 이미 그 전후하여 유럽 여기저기에서 기독교를 새롭게 하자는 움직임이 활발하던 중입니다 종교개혁 Reformation 이라고 합니다
산업혁명이라는 과학기술 발전을 거쳐 식민지 확장에 나서는 유럽국가들의 성장에 비해 로마 교황의 위상은 점점 위축됩니다 결국
1870년 이탈리아 통일과 함께 교황 비오 9세는 교황령을 모두 잃습니다
1929년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정부와 비오 11세의 교황청간에 맺은 라테라노조약 Patti lateranensi 에 따라 교황청은 바티칸에 독립국가로서의 주권을 가집니다 바티칸 Vatican City State 은 경복궁 정도의 크기이며 UN의 참관국가로서 자체 여권과 용병군사 화폐 우표 등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대의 교황은 전세계 카톨릭기독교의 수장일 뿐만 아니라 여전히 세계 정치와 외교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옮김)
오늘은 교황(Pope 敎皇)의 역사를 알아봅니다
교황은 라틴어로 Papa 라고 합니다 아버지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죠
그 시작은 기독교가 로마에 전파되는 과정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고 기독교가 시작됩니다 로마제국은 다신교를 허용하나 유일신 이외 다신교를 부정하고 황제숭배 마저 거부하는 기독교를 탄압합니다
2세기 말경 생존의 위협을 느낀 기독교인들은 자기들만의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당시 로마 교구장을 교황으로 세우고 기독교를 총괄하게 합니다. 혹자는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보기도 합니다
점차 교인이 늘어난 기독교는 313년 로마제국 콘스탄티누스 황제로부터 종교로서 인정(=밀라노칙령)을 받고, 392년 테오도시우스 황제 시절 로마제국의 국교로 선포됩니다 로마 황제의 재정적 지원과 귀족들의 재산기부로 기독교의 권세와 재산이 급속도로 늘어납니다
교황의 권한은 로마제국이 동서로 나누어진 후에도 점차 높아집니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하면서 서유럽은 여러 나라로 분열되고, 동로마제국은 게르만족의 침략을 계속 받습니다. 그러던 중 게르만족 출신 영주들의 위협을 받던 로마 교황 스테파노 2세는 프랑크왕국의 피핀 3세 Pepin III 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교황의 인정이 필요한 피핀 3세는 지금의 이탈리아 반도 중부지역에서 게르만족을 몰아내고 그 땅을 교황에게 헌납합니다.
이것이 교황령 (敎皇領 Papal States)의 시작으로 봅니다 754년 경입니다
이제 교황은 황제를 인정하는 권한까지 가지게 됩니다 이탈리아 북부와 독일 지방까지 정복한 샤를 마뉴 Charlemagne 는 800년 교황으로부터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인정받습니다
교황의 권위를 잘 보여준 또다른 일이 생깁니다 카노사의 굴욕 Humiliation of Canossa 이라고 부릅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성직자 임명권의 회수를 거부하는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를 폐위시킵니다 폐위 선언 이후 주변 세력들이 자기 곁을 떠나가는 것에 위기를 느낀 하인리히 4세는 1077년 1월 알프스산을 넘어 이탈리아 북부 카노사성까지 가서 교황의 용서를 구합니다
이제 교황들은 예루살렘을 탈환해야 한다고 전쟁을 부추깁니다 흔히 일컫는 십자군 전쟁입니다 200년 가까이 전쟁을 계속하나 결국 실패합니다 교황의 권위가 떨어지고 교회의 부패는 심해집니다
교황의 위신이 추락했다는 상징적인 사건이 생깁니다 아비뇽의 유수 Avignonese Captivity 라고 부르는 시절입니다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의 강압에 굴복하여 1309년 로마의 교황 클레멘스 5세는 프랑스의 아비뇽에 자리 잡습니다 이후 6명의 교황이 프랑스에서 선출됩니다
돈을 내면 죄를 용서해준다는 면죄부 Indulgence 까지 발행하는 등 교회는 계속 타락합니다 독일 신학자 마르틴 루터는 면죄부의 부당함을 비판하는 글을 붙힙니다 1517년입니다 이미 그 전후하여 유럽 여기저기에서 기독교를 새롭게 하자는 움직임이 활발하던 중입니다 종교개혁 Reformation 이라고 합니다
산업혁명이라는 과학기술 발전을 거쳐 식민지 확장에 나서는 유럽국가들의 성장에 비해 로마 교황의 위상은 점점 위축됩니다 결국
1870년 이탈리아 통일과 함께 교황 비오 9세는 교황령을 모두 잃습니다
1929년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정부와 비오 11세의 교황청간에 맺은 라테라노조약 Patti lateranensi 에 따라 교황청은 바티칸에 독립국가로서의 주권을 가집니다 바티칸 Vatican City State 은 경복궁 정도의 크기이며 UN의 참관국가로서 자체 여권과 용병군사 화폐 우표 등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대의 교황은 전세계 카톨릭기독교의 수장일 뿐만 아니라 여전히 세계 정치와 외교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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