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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에스라의 나무 강단이 제공하는 성경의 어휘 연구를 오늘 계속합니다. 성경의 어휘를 연구하는 목적은 단어의 의미를 파악해서 그 본문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올바른 신학을 수립하는 것입니다. 오늘 함께 공부하는 이 단어는 우리의 건전하고 바른 신학을 수립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믿습니다. 그 단어는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오늘 148번째 강의입니다.
율법과 율법주의, 율법이라고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일찍이 우리 어휘 연구 83번 강의와 84번 강의를 통해서 율법의 정의가 무엇인지, 율법의 종류와 목적이 뭔지를 앞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오늘 그것을 반복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의미에서 율법의 정의만 잠깐 보고 율법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율법이란 단어는 히브리어로 '토라(Torah)'입니다. 신약의 헬라어로는 '노모스(Nomos)'입니다. 이 토라라고 하는 말은 지시, 교훈, 가르침입니다. 토라의 어원적인 의미가 왜 그러냐 하면, 토라의 원래 어원이 '야라(yara)'라는 동사에서 왔기 때문입니다. 야라는 '가르치다', '지시하다' 그런 뜻입니다. 야라에서 파생된 명사가 토라입니다. 앞에 타우(t)가 붙으면 '~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지시하는 것, 교훈, 가르침이며 이것을 하나님의 가르침에 적용하면 율법, 법률로 간주됩니다.
이 단어를 70인역(구약 히브리어 성경을 맨 처음으로 외국어인 헬라어로 번역한 번역본으로, 약 70명의 학자가 번역했다고 해서 그 이름이 70인역입니다. 라틴어 부호로 표시할 때는 L이 50이고 X가 10이고 다른 X가 10이니까 LXX로 씁니다)에서 헬라어 '노모스'로 번역했습니다. 노모스는 법을 뜻합니다. 그리하여 '율법'이라는 의미로 고착되게 되었습니다. 토라나 노모스나 마찬가지로 율법이라 번역하지만, 실제로 내용은 지시하고 가르치고 교훈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이 모세오경(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 다섯 권)을 토라, 즉 율법이라고 칭하는 것은 거기에 포함된 책들이 모두 법 조문이라는 뜻은 아니고,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것, 즉 하나님이 지시하시고 교훈하신 것이라는 뜻에서 토라입니다. 이 단어가 구약에 220회 사용되었습니다. 아주 많이 사용되었지요. 그다음 신약에 오면 헬라어로 노모스는 179회 사용되었습니다. 220회와 179회를 더하면 399회입니다. 성경 전체에 거의 400회나 율법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번역은 문맥에 따라 좀 다르게 되었지만 기본 의미는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율법은 어떤 성격과 속성을 가지고 있는지 몇 가지 알아보겠습니다. 로마서 7장 12절에 보면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율법은 거룩한 것입니다. 여기서 계명은 율법에 준하는 말이며 율법의 일환이자 부분입니다. 그래서 율법도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것은 다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는 뜻입니다. 그다음 로마서 7장 14절에 보면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율법은 신령한 것, 즉 영적인 것입니다.
또한 시편 19편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 칭송하는 시인데,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보면 율법의 속성과 그것의 기능이 아주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속성은 완전하고, 확실하고, 정직하고, 순결하며, 그것의 역할은 영혼을 소성시키고,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고, 마음을 기쁘게 하며, 눈을 밝게 하는 것입니다. 시편 19편에 있는 말씀입니다.
시편 119편에도 아주 좋은 율법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시편 19편과 119편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에 대한 노래입니다. 그러니까 그 율법의 특성을 가장 잘 설명하는 장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 119편 151절, 152절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가까이 계시오니 주의 모든 계명들은 진리니이다 내가 전부터 주의 증거들을 알고 있었으므로 주께서 이들을 영원히 세우신 줄을 알았나이다." 하나님의 율법은 다 진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영원히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번 세우신 율법을 변개하지 않으십니다. 확실합니다. 그다음 시편 119편 96절에도 "내가 보니 모든 완전한 것이 다 끝이 있어도 주의 계명들은 심히 넓으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율법은 그것이 커버하는 뜻도 넓고 적용되는 것도 아주 넓습니다. 또 시편 119편 172절에 보면 "주의 모든 계명들이 의로우므로 내 혀가 주의 말씀을 노래하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계명이나 말씀이나 다 율법을 가르치는 다른 용어들입니다. 이처럼 율법은 아주 거룩하고, 완전하고, 의롭고, 좋은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율법이 하는 역할은 무엇일까요? 뭉뚱그려서 말하면 성경에 여러 구절이 있지만, 첫째,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밝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렇게 살기를 바란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율법이요, 계명이요, 하나님의 지시이자 뜻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언약의 기초입니다. 하나님은 법에 기초하여 언약하십니다. 언약을 남발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되는 것이 아니라, 법적 구속력이 있는 언약을 하시는데 그 기초가 바로 율법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심판의 기초와 기준입니다. 하나님이 무턱대고 누구는 예쁘다고 용서해 주고 누구는 안 예쁘다고 벌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법에 기초하고 법을 기준으로 심판하십니다. 아주 공의롭고 공정하십니다. 그 기준이 법입니다. 넷째, 죄인이 회심하도록 촉구합니다. 율법을 딱 보면 내가 잘못했음을 깨닫고, 이런 형벌이 있으니 자중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합니다. 회개를 촉구합니다. 다섯째, 진정한 자유를 얻게 합니다. 율법을 지키고 사는 사람은 아무런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법을 범하는 즉시로 우리는 마음의 두려움과 아주 불편함을 느끼게 되고 부자유해집니다. 진정한 자유를 얻게 하는 것이 율법입니다. 여섯째, 악을 제어하고 복을 가져다줍니다. 법에 있는 대로 다 행하면 복이 옵니다. 그것을 어기면 안 됩니다. 악을 제어하는 그런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율법은 죄를 보게 하고 깨닫게 하는 거울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얼굴에 무슨 티가 묻었는지 거울을 안 보면 보이지 않아서 모릅니다. 그러나 거울 앞에 서면 "아하, 여기 검정이 묻었구나" 하고 알게 되듯이, 내가 율법 앞에 서면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율법입니다. 로마서 3장 20절은 아주 중요한 성경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 율법입니다. 오늘날 국가에도 죄형법정주의가 있습니다. 죄에 대한 형벌은 법으로 정해져 있고, 법에 정해지지 않은 것은 좀 잘못되었다 싶어도 벌할 수가 없습니다.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다 정해져 있으며, 그 법에 따라서 우리는 살아가는 것입니다.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안전하고 자유롭습니다.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 한 역할이고, 그다음 율법의 역할은 초등교사 또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초등교사는 아주 기본이 되는 학문을 가르치는 교사입니다. 인간이 앞으로 공부를 하거나, 사업을 하거나, 무엇을 하든지 간에 가장 기초가 되어서 이것을 모르면 잘 안 되는 기본적인 학문을 가르치는 역할을 뜻합니다. 그러나 항상 초등학교에만 머물러 있으면 안 되지 않습니까? 졸업해서 빨리 올라가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24절입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우리 개역한글판 성경에는 '몽학선생'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몽학의 몽(蒙) 자는 계몽한다는 뜻입니다. 계몽하여 가르치는 선생, 즉 초등 학문을 가르치는 교사 같은 것입니다. 영어로는 '튜터(tutor)'인데, 튜터라는 말은 가정교사를 가르칠 때 쓰는 말입니다. 학습이 좀 부진할 때 집에 가정교사를 두어 공부를 따라가게 하지 않습니까? 영어 번역에는 많은 번역이 이 초등교사를 튜터로 번역했습니다.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 역할을 한다는 것은 참 좋은 말입니다. 옛날 헬라 시대에는 아주 철학을 공부하는 많은 학자들도 전쟁에 지거나 하면 부잣집에 노예로 가곤 했습니다. 학문은 지극히 높지만 직분은 이 몽학선생이 되는 것입니다. 집에 가서 초등학교 수준의 가정교사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참 억울했겠지요. 그런 노예 교사들이 아이들이 학교에 갈 때 돌봐주고, 올 때 데리고 오며 모자란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교사 밑에서 수년, 수십 년을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아이는 망칩니다. 빨리 다른 고등 학문을 이해하도록 발전시켜야 합니다. 아주 초기 단계에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 주는 교사 역할을 하는 것이 율법입니다. 우리가 율법 아래서 시키는 것만 기계적으로 하고 있으면 사람이 넓은 안목을 가질 수 없고 발달이 되지 않습니다.
율법은 참 좋은 것이고 거룩하고 의롭지만,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율법이 할 수 있는 일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할 수 없는 게 무엇일까요? 갈라디아서 2장 16절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은 우리를 의롭게 만들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은 율법이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우리의 죄를 지적해 주고 올바르게 살라고 권면하는 것에 머무릅니다. 의롭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을 아무리 잘 행하고, 헌금을 많이 바치고, 아주 정직하게 한다고 해도 그 행위 자체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 행위가 우리의 구주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은 우리의 구원이며,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 자체는 의롭지만 우리를 의롭게 하지는 못합니다. 율법 자체는 거룩하지만 우리를 거룩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우리를 의롭고 거룩하게 하는 것은 오직 우리 주님의 능력뿐입니다.
같은 갈라디아서 2장 21절 마지막 절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맞지요? 만일 율법이 우리를 의롭게 하고 율법이 우리를 구원한다면, 예수님이 무엇 하러 십자가에 돌아가십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이 헛일이 되고 헛것이 됩니다. 우리가 혹시라도 내가 하는 행위나 율법을 잘 지키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고 조금이라도 믿는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팽개치는 것입니다. 절대로 그것은 안 됩니다. 율법으로는 우리가 구원받을 수 없고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다시 로마서 3장 20절을 기억하십시오. 율법의 행위로는 그분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으며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을 뿐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서 구원을 얻을 수는 없다는 것이 바울의 강력한 교훈입니다. 십자가를 헛되게 돌리는 것은 절대 안 되는 일입니다.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고, 의롭거나 거룩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오직 십자가의 능력으로 예수님이 우리를 그렇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주의'라는 말이 나오는데, 율법주의가 무엇일까요? 영어로는 '리걸리즘(Legalism)'이라고 합니다. 율법주의라는 말을 사전을 찾아보면 율법 또는 계명을 엄격하게 준수하거나 준수하도록 강조하는 주의라고 나옵니다. "이것 지켜라, 저것 지켜라" 하며 율법 자체를 지킴으로써 큰일을 이루는 듯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좀 더 성경적이고 신학적으로 율법주의란 무엇인가 하면,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얻고자 하는 그러한 삶의 태도를 뜻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행하고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얻고자 생각하여 그 일을 한다면, 우리는 다 율법주의자들입니다. 율법주의자는 절대로 하나님 앞에 옳다고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율법을 준수하는 그 공로에 의하여 구원을 얻으려면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야 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잘 지켜도 완벽하게 지킬 수 있습니까? "살인하지 말라" 하신 계명에 대해 예수님은 미워하기만 해도 살인하는 것이라 하셨지 않습니까? 우리가 전혀 미움 없이, "저 사람과는 같이 못 살겠어" 이런 생각을 단 한 번도 먹지 않고 평생을 살 수 있습니까?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예로 들면,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기 위해 손가락 하나도 함부로 까딱하지 않는 식으로 안식일을 지킨다면 그것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무엇이며 나에게 무슨 공로를 가집니까?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얻고자 하는 그 사상을 율법주의라고 합니다.
우리 삶에는 이처럼 율법주의로 기울어질 위험이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방금 이야기한 안식일 준수도 그렇습니다. 아주 엄격하게 지키기 위해 물길도 안 가고, 아침에 일어나서 전등 스위치도 안 올리며 유대인들처럼 지키는 방식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맞이할 때 불을 다 금요일 오후에 미리 켜 놓고 안식이 해질 때까지 만지지 않습니다. 스위치를 올려서 밥솥에 밥을 새로 하지도 않습니다. 스위치를 올리는 행위는 불을 지피는 것과 같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구약 출애굽기에 보면 안식일에는 처소에서 불을 피우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 "야, 나는 안식일을 잘 지켰다 나는 이제 구원을 얻었다"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착각입니다. 엄격하게 지킬수록 자기의(Self-righteousness)가 자꾸 솟아나는 것입니다.
철저한 채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채식하는 것 참 좋습니다. 저도 채식하는 사람인데, 채식한 덕분으로 저는 현재 82세가 되도록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고, 그렇게 하는 것이 참 좋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유익하고 좋아서 합니다. 그런데 "야, 내가 채식하니까 나는 정말 하나님께 더 가까워졌고 더 의로워졌다"라고 생각한다면 착각입니다. 그것은 율법주의로 기울어지는 것입니다.
정확한 십일조도 그렇습니다. 누구에게 선물 하나 받은 것도 값으로 따져서 그것의 10분의 1을 따로 떼어 놓고, 아주 엄격하고 정확하게 계산해서 십일조를 내면서 "야, 나는 하나님께 완전한 헌금을 드린다"라고 자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율법주의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희생적인 헌금도 그렇습니다. 수해나 재난이 났을 때 내가 다른 사람보다 두 배, 세 배를 더 바쳤다고 해서 내가 조금 더 의로워진 듯한 착각을 하기 쉽습니다. 아닙니다. 헌신적인 교회 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교회에 와서 벽도 닦고, 전기도 수리하고, 청소도 많이 하는 것 참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교만해지거나 내가 더 의로워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율법주의입니다.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헌신하고 바치고 봉사하는 것은 구원받기 위함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감사해서 하는 생활입니다. 모든 헌신은 받은 구원에 대한 감사이고, 모든 노력은 우리를 구원하신 구주에 대한 순종의 표현이지 그것 때문에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구원하셨으니 우리는 감사의 반응으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해하거나 착각하면 안 됩니다.
의인은 누구일까요? 율법을 철저히 지키려고 노력하고 애쓰는 사람이 겉보기에 의롭게 보이지만, 그것 때문에 더 의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좋아하는 성경 구절인 잠언 24장 16절을 보십시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 의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는 사람이 의인입니다. 이를 7전8기라고 합니다.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여덟 번째 다시 일어나는 사람이 의인입니다. 우리가 안 넘어집니까? 자꾸 넘어집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넘어집니다. "에라, 넘어졌으니 그냥 누워 있겠다" 하고 자포자기하는 것은 절대로 안 됩니다. 넘어질지라도 또 일어나고, 또 일어나고, 또 일어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를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하셨는데, 내 생명과 신앙을 함부로 다룰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을 잘 유지하는 것은 우리의 책무입니다. 그러나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고 나면 다시 일어난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의인과 악인의 차이는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나느냐, 아니면 넘어진 채로 일어나지 못하느냐의 차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삶은 하늘 본향으로 가는 나그네 길입니다. 걷다 보면 자꾸 넘어집니다. 돌뿌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어떤 때는 거센 바람이 불어와 휩쓸리기도 하고, 장애물이 와서 부딪혀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일어나야 합니다. 일어나면 의인입니다. 일어나지 않으면 악인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어 성경 구절을 보면 "For a righteous man may fall seven times and rise again, but the wicked shall fall by calamity"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내 스스로를 의롭게 할 수 없으므로, 우리를 의롭게 여겨 주신 분의 손을 붙잡고 살아가면서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계속해서 의인입니다. 아무리 넘어뜨려도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아무리 넘어뜨려도 벌떡벌떡 일어나는 장난감이 무엇입니까? 오뚝이입니다. 오뚜기야말로 가장 의로운 존재의 모형입니다. 몇백 번을 넘어뜨려도 다시 일어납니다. 오뚝이처럼 의인으로서 벌떡 일어나야 합니다.
구원은 오직 은혜로 받는 선물입니다. 내가 무엇을 벌어서 대가로 취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무엇을 드렸기 때문에 받는 보상이 아닙니다. 순종은 받은 구원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조건으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 안식일 교인들을 두고 "아, 저 사람들은 율법주의자들이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 안식일을 조마조마하게 지킨다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다니다가 나간 어떤 사람이 그렇게 잘못 보았던데, 우리 안식일 교회는 그런 교회가 아닙니다. "아이고, 안식일 범하면 내가 멸망받지. 나 지켜야지" 해가면서 해 지는 시간만 쳐다보고 조바심을 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얻었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그 사랑에 화답하여 순종하는 마음으로 율법을 준수합니다.
로마서를 보면 1장 5절과 16장 26절에 아주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1장 5절은 로마서의 초반부이고, 16장 26절은 맨 종반부입니다. 1장 5절에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믿게 한다는 말로 끝나지 않고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참된 믿음에는 순종이 항상 뒤따라붙습니다. 로마서의 마지막 부분인 16장 26절에서도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저는 로마서의 알파와 오메가라고 표현합니다.
로마서의 알파와 오메가는 '믿어 순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흔히 로마서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다룬 책이라 하는데 맞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에는 반드시 순종이 따라붙습니다. 순종 없이 "아, 나는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을 알아. 예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알아.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을 알아"라고 지식적으로 동의하는 것만으로는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이란 그렇게 행하신 분의 뜻을 따라서 율법을 지키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의 도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굉장히 주의해야 합니다. 율법 자체는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지만, '율법주의'는 아주 악한 것입니다. 얼마나 악한가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헛일로 돌려버리고 헛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에 악한 일입니다. 꼭 사람을 해쳐야만 악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아주 무가치하게 만들어 버리는 신학적 이단이기에 악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모든 '주의'에 주의하라고 말씀드립니다. 율법은 좋지만 율법주의는 빠지면 안 되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율법은 좋지만 율법주의가 되어서는 안 되고, 믿음은 구원을 주지만 '믿음주의'도 곤란합니다. "믿음만 있으면 다 되니까 행동은 아무렇게나 해도 상관없다"라고 하는 태도는 참된 믿음이 아니라 잘못된 믿음주의(구원파적 사상)입니다. 아주 주의해야 합니다. '복음주의' 좋습니다. 우리는 다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복음이 우리에게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이 우리에게 있으니 행실은 다 팽개치고, 가족도 팽개치고, 내가 할 의무와 법도 필요 없다 복음인데 뭐 어떠냐"라고 방종하는 태도는 잘못된 복음주의이므로 안 됩니다. '채식주의'도 채식 자체는 건강에 아주 좋지만, 내가 채식하니까 더 의로워진다고 생각하며 남을 정죄하는 채식주의가 되면 곤란합니다. 안식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지만, 안식일을 지킴으로써 내 노력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는 안식일주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재림주의'도 주님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려야 하지만, 재림을 기다린답시고 온 세상의 일과 직장을 다 팽개쳐 버리고, 가족도 돌보지 않으며, 학생이 공부하는 것도 다 버리는 식으로 정형화되면 안 됩니다. 재림을 기다리되 현재 나에게 주어진 삶의 의무에 충실해야 합니다. '사랑주의'도 사랑은 참 좋고 율법의 완성이며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이지만, "사랑만 있으면 법도 필요 없고 아무렇게나 해도 다 포용된다"라고 방종하는 사랑주의가 되면 안 됩니다. '완전주의'도 우리가 품성적으로 완전함을 추구해야 하지만, 내가 완전해져서 그 공로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완전주의 태도는 안 됩니다. 오늘 율법과 율법주의를 공부하면서 이 모든 '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실 것을 당부드리는 것입니다.
결론을 내립니다.
우리가 율법의 행위, 즉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받고자 하는 태도인 율법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헛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절대 안 되며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내가 의로워서 구원받는다는 자의(Self-righteousness)는 불가능하며, 오직 예수님의 의로만 우리는 구원받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것은 구원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율법 준수는 구원받은 자의 당연한 의무이자 감사로 누리는 특권입니다. 내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나를 구원해 주셨으니 이 날이 정말 좋은 날이고, 거룩한 날이며, 우리를 위해 주어진 축복의 날이기에 기쁨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내가 안식일 안 지키면 구원 못 받고 벌 받을까 봐" 두려워서 벌벌 떨며 억지로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도 마찬가지이고 헌금도 마찬가지이며 모든 헌신이 다 그러합니다. 내가 그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쟁취하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주의에 빠진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받는 것이며, 율법 준수는 구원받은 백성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거룩한 삶의 양식입니다.
오늘 율법과 율법주의라는 말을 여러분에게 이렇게 구분해서 말씀해 드리면서, 율법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오늘 148번째 율법과 율법주의에 대한 강의를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다음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 핵심 요약정리
율법(토라, 노모스)의 성경적 정의
히브리어 '토라(Torah)'는 '가르치다, 지시하다'라는 뜻의 동사 '야라(yara)'에서 유래하여 본래 '하나님의 지시, 교훈,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70인역(LXX) 번역자들이 이를 헬라어 '노모스(Nomos, 법)'로 번역하면서 '율법'이라는 개념으로 고착되었습니다. 성경 전체에 거의 400회 등장합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율법의 속성과 역할
속성: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며, 신령(영적)하고 완전하며 확실하고 정직합니다.
역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밝히고, 언약과 심판의 공정한 기준이 됩니다. 또한 거울처럼 죄를 깨닫게 하여 죄인을 회심으로 촉구하며, 궁극적으로는 참된 자유와 복을 누리게 합니다.
율법의 한계와 초등교사(몽학선생)의 기능
율법은 죄를 지적해 줄 뿐, '인간을 구원하거나 의롭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24절에 의하면 율법은 죄인인 우리를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몽학선생, Tutor)의 역할을 담당할 뿐이므로, 그 율법 아래에만 영원히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율법주의(Legalism)'의 신학적 폐단
율법주의란 '율법을 지키는 인간의 행위와 공로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삶의 태도'를 뜻합니다. 인간은 결코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으므로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 만일 인간이 율법 준수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은 완전히 헛된 것이 되고 맙니다. 안식일 준수, 채식, 정확한 십일조, 교회 봉사 등이 구원의 조건이 되는 순간 율법주의의 덫에 빠지게 됩니다.
최종 결론: 은혜로 얻는 구원과 감사로 드리는 순종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로 받는 값없는 '선물'입니다. 의인은 결코 넘어지지 않는 자가 아니라, 잠언 24장 16절 말씀처럼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오직 주님의 손을 잡고 여덟 번째 다시 일어나는 오뚝이 같은 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율법 준수와 순종은 구원을 받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이미 조건 없이 받은 구원에 대해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반응이자 성도의 의무와 특권'입니다. 로마서의 시작과 끝이 선포하듯, 우리는 '믿어 순종하는' 참된 복음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