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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1장 5-7절. 고난과 그리스도의 위로
5절.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or just as the sufferings of Christ are ours in abundance, so also our comfort is abundant through Christ.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ὅτι καθὼς περισσεύει τὰ παθήματα τοῦ Χριστοῦ εἰς ἡμᾶς,
because as abound the sufferings of Christ toward us
직역하면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고난들이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넘친 것 같이’에서 동사(περισσεύει)는 현재형으로서(abound) 현재 넘치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οὕτως διὰ τοῦ Χριστοῦ περισσεύει καὶ ἡ παράκλησις ἡμῶν.
thus through the Christ abounds also the comfort of us
직역하면 ‘이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고 있다’는 뜻입니다.
‘넘치는도다’(περισσεύει)는 현재형으로서(abounds) 현재 넘치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Holman Christian Standard Bible: 그리스도의 고난들이 우리에게 넘치는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를 통해서 역시 넘치는도다 (For as the sufferings of Christ overflow to us, so through Christ our comfort also overflows.)
New Living Translation: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을 받을수록 더욱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의 위로를 우리에게 부어 주실 것이다 (For the more we suffer for Christ, the more God will shower us with his comfort through Christ.)
1. 그리스도의 고난
(1) 이 단어(τὰ παθήματα τοῦ Χριστοῦ)는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고난'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자가 받는 고난'을 의미합니다(Ewald).
모든 고난이 다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고난이 '그리스도의 고난'일 때 의미가 있고 위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자신의 잘못에서 나온 결과가 아니라 무고한 고난이며(눅 22:52,53; 23:22-24), 그 고난의 결과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메시아적 고난’(Messianic sufferings)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있는 한 이런 고난은 필연적인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로마서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라.
즉,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을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또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운다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2) 사실상 바울은 이러한 고난을 많이 당했습니다.
복음을 증거하다가 사도행전 14장에서는 루스드라에서 유대인들에게 돌로 맞아 거의 죽을 지경까지 갔었고(행 14:19), 사도행전 16장에서는 빌립보에서 귀신들린 여종을 낫게 해주었다가 도리어 고소를 당해 매를 맞고 투옥되기도 했으며, 사도행전 23장에서는 유대인 자객단에 의해 살해당할 위험도 겪었습니다(행 23:12-15).
(3)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고난에 비할 수 없는 많은 위로를 받았으므로, 고난에 비례하는 위로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4)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그 고난에 참여하도록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오히려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4: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도 주님을 위하여 고난받는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11-12.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6절.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ut if we are afflicted, it is for your comfort and salvation; or if we are comforted, it is for your comfort, which is effective in the patient enduring of the same sufferings which we also suffer;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εἴτε δὲ θλιβόμεθα, ὑπὲρ τῆς ὑμῶν παρακλήσεως καὶ σωτηρίας·
if however we are afflicted, for the your comfort and salvation
직역하면 ‘그러나 만일 우리가 환난을 당한다면, (그것은)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환난을 당하는 것도’에서 동사(θλιβόμεθα)는 현재 수동태로서(we are afflicted) 현재 우리가 환난을 당하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εἴτε παρακαλούμεθα,
if we are comforted
직역하면 ‘만일 우리가 위로를 받는다면’이란 뜻입니다.
동사(παρακαλούμεθα)는 현재 수동태로서(we are comforted) 현재 위로를 받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ὑπὲρ τῆς ὑμῶν παρακλήσεως
for the your comfort
직역하면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란 뜻입니다.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τῆς ἐνεργουμένης, ἐν ὑπομονῇ τῶν αὐτῶν παθημάτων, ὧν καὶ ἡμεῖς πάσχομεν.
the operating, in endurance of the same sufferings, which also we we suffer
직역하면 ‘역사하여, 똑같은 고난들을 견디는 가운데, 우리가 또한 고난을 견디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ἡμεῖς: we)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역사하여’(ἐνεργουμένης)는 현재분사로서(operating) 현재 역사하고 있는 것을 가리키는데, 한글 번역은 해석적으로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로 번역했습니다.
‘우리도 고난을 견디고 있다’(πάσχομεν)는 현재형으로서(we suffer) 현재 고난을 견디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English Standard Version: 만일 우리가 고난을 당하면 그것은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위로를 받는다면, 그것은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다. 이 위로는 우리가 당하는 동일한 고난들을 너희가 꾸준히 견딜 때 너희가 경험하는 것이다. (If we are afflicted, it is for your comfort and salvation; and if we are comforted, it is for your comfort, which you experience when you patiently endure the same sufferings that we suffer)
1. 성도들 중 많은 사람이 자기가 환난을 당했기 때문에 자기와 같은 환난을 당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전도하는 도구로 쓰였습니다.
예컨대, '노만 라이트'(H. Norman Wright)라는 유명한 상담심리학자는 자기가 딸(쉐릴)이 가출과 임신을 하고, 아들(메튜)이 뇌성마비로 고생을 하다가 젊은 나이에 죽었기 때문에, 진정으로 청소년 문제를 상담해주는 세계적인 상담가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자녀들 문제를 당하기 전에는 순수한 학문에 그치는 학자에 불과했으나, 자기가 직접 문제에 봉착한 후에 진정 영혼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는 상담가가 되었습니다.
헨리 나우웬’(Henri J. M. Nouwen, 1932-1996)이라는 상담가도 학문으로만 연구하다가 강단을 떠나, 직접 페루의 빈민가와 정신지체 장애인의 공동체인 라르쉬에 참여하여 고통을 체험한 후에야 진정한 상담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상담가는 본인이 직접 상처를 입어본 사람만이 환자의 고통을 이해하면서 치료할 수 있는 참된 상담가가 된다고 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상처입은 치유자>(The Wounded Healer)라는 책을 저술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상담가인 정동섭 교수도 본인이 마음에 병을 많이 경험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처럼 훌륭한 상담가가 되었습니다.
일본의 미우라 아야꼬 같은 분도 자기가 척추 결핵에 걸려 죽게 되었다가 예수님을 믿고 치료를 받았기 때문에, 결핵으로 고생하는 많은 사람들을 전도할 수 있었습니다.
필립 얀시의 책에 나오는 어떤 여성도는 사지가 다 묶인 채, 살이 찢어지는 질병의 고통을 당하면서, 누구도 자기를 이해할 사람이 없다고 원망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사지가 못 박히고, 살이 찢어지는 고통을 당했다는 전도의 말씀을 받고서, 예수님이라면 자기의 고통을 이해해주실 것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이겨서 병도 나았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 인간의 고통을 이해하실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친히 인간이 되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4장 15-16절에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자"고 했습니다.
2. 사도 바울이 환난을 받는 것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위해서 받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누가 나를 위해서 대신 고난을 당한다면, 나는 그 사람을 얼마나 고맙게 생각하겠습니까?
(1) 40여년 전에 서울대학교에 다니는 김 * 이라는남학생 하나가, 전국의 학생운동을 주도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전국에 수배자 포스타가 나붙고 숨어서 쫒겨 다녔습니다.
그런데, 군대 문제 때문에 꼼짝없이 체포되어 수감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같은 대학에 다니면서 함께 학생운동을 하던 여학생 하나가 이 남학생을 동정하여 자기가 대신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유명한 청송 교도소에서 2년간 수감 생활을 했습니다.
그 덕분에 이 남학생은 무사히 군생활을 하고 제대를 했습니다.
그러자, 이 남학생은 자기 대신 감옥생활을 한 여학생이 너무도 고마워서, 두 사람은 결혼하기로 했습니다.
그 때 남학생의 아버지(김*규)가 고급 공무원이었기 때문에, 데모하고 전과 경력이 있는 여학생과 결혼하는 것을 극구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했습니다.
그 후, 이 남자는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교수 겸 국회에서 고급 공무원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결혼하여 아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남편 뒷바라지에 만족하지 않고, 사법고시에 도전했습니다.
그러자, 남편이 헌신적으로 도와주고, 아내는 고시촌에 들어가 만 2년간 고시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너무도 빨리 사법고시에 합격했고, 사법연수원에서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자기의 소신을 법조계에서 펴고자 했으나, 이 여인을 정죄하여 감옥에 가두었던 선배 검사들 때문에, 변호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 두 부부는 서로 상대방을 위해서 희생을 해주었고, 그것이 고마워서 또 서로 도와주고 사랑하는 아름다운 부부입니다.
제가 이 부부를 잘 아는 것은 이들이 제 사촌 동생 내외이기 때문입니다.
(2) 고려대학교 법대에 다니던 어떤 사람은 병들어서 죽게 되었는데, 같은 학교 여학생이 희생하여 결혼하고 몇십 년 동안 간병하여 건강한 사람으로 살려주었습니다.
그러자, 이 남자는 너무도 고마워서, 남은 평생을 이 여인을 위해 헌신하고, 사랑하여 자녀들을 모두 훌륭하게 길러내는 모범적인 가정을 이룩했습니다.
(3) 예수님은 우리 죄인을 위해서 대신 십자가에서 죽어주셨습니다.
이 죽음은 단순히 육신적인 죽음만이 아니라, 영원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고 이토록 고마워하며, 마음과 생명을 다해 사랑하는 것입니다.
(4) 바울 사도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을 위해서, 아무런 사례도 받지 않고, 손수 수고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목회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인들이 이 사실을 알아주고, 제발 바울 사도에 대해서 비난과 대적을 하지 말아달라는 것입니다.
(5) 이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서 대신 고난을 당한다면, 이 두 사람 간에는 말할 수 없이 큰 유대감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특히 전투 관계에 있을 때, 누가 내 편을 들어서 상대방과 싸우다가 희생을 당했다면, 나는 얼마나 그 은혜에 감격하고 사랑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2.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고난을 견디게 하느니라
(1) 이 말씀은 고난들을 잘 견디어 내는 인내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의 구원이 확고한 반석 위에 세워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 3-5절에는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라"고 했습니다.
(2) 우리가 환난을 당했다면, 이것이 나를 훈련하는 기회인 줄 알고, 마음 자세를 바로 가짐으로, 말씀을 상고하면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해결해 주십니다.
피할 길을 주시든지, 통과하면서 승리하게 하시든지 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3) 우리가 환난을 이기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4) 그리고,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큰 위로는 우리가 예수님의 희생으로 영원한 구원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궁극적인 좌절은 죽음에 대한 생각이고, 죽음을 이기는 영원한 구원이 가장 큰 소망과 위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5) 본 절은 바울이 당한 ‘고난’과 고린도 교회가 받는 ‘위로’ 사이의 관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성도를 구원하기 위한 고난이었듯이, 바울 사도의 고난도, 비록 똑 같지는 않는 것일지라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바울은 사도로서 이것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가 당하는 고난을 극복하게 하시고 위로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고린도 교인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바울은 그가 환난을 당하든지 위로를 받든지 여전히 고린도 교인들에게 유익이 됨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4:8-12, 15)
왜냐하면, 고린도 교인들이 고난과 핍박을 받을 때, 바울이 고난 속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권능과 위로를 고린도 교인들이 목격함으로써, 고린도 교인들이 고난과 핍박을 잘 견디고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할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7절.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nd our hope for you is firmly grounded, knowing that as you are sharers of our sufferings, so also you are sharers of our comfort.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καὶ ἡ ἐλπὶς ἡμῶν βεβαία ὑπὲρ ὑμῶν,
and the hope of us steadfast for you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앎이라
εἰδότες ὅτι ὡς κοινωνοί ἐστε τῶν παθημάτων,
having known that as partners you are of the sufferings
직역하면 ‘너희가 고난들의 참여자들이 된 것을 앎이라’는 뜻입니다.
‘앓이라’(εἰδότες)는 완료분사로서(having known)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뒤의 동사(ἐστε)는 현재형입니다(you are).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οὕτως καὶ τῆς παρακλήσεως.
as also of the comfort
English Standard Version: 너희에 대한 우리의 소망이 흔들리지 않음은 너희가 우리의 고난들에 동참한 것 같이 너희가 우리의 위로에도 역시 동참하게 될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Our hope for you is unshaken, for we know that as you share in our sufferings, you will also share in our comfort)
New Living Translation: 우리는 너희가 우리의 고난들에 동참한 것 같이 너희가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위로에도 동참할 것을 확신하노라. (We are confident that as you share in our sufferings, you will also share in the comfort God gives us)
1.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
(1) 바울이 고난 가운데서 고린도 교인들을 격려할 수 있었던 것은 `확고한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소망’(ἐλπὶς)은 문자적으로 '강한 확신'(confidence of what is sure)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소망이 무엇인지 분명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바울은 그것이 견고하다고 말합니다.
분명히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소망은 고린도 교회가 겪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 즉 이단 문제, 바울의 사도권에 관한 문제 (3:1; 4:2; 5:11,12; 7:2; 10:7,11; 11:6), 교회의 분열에 관한 문제(1:10 이하) 때문에 다소 혼란이 있었지만, 결국에는 바울의 가르침이 참되다는 것을 고린도 교인들이 알게 되리라는 소망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소망에 대한 확신은 디도가 고린도 교회를 다녀와서 바울에게 고린도 교회의 기쁜 소식을 전해줌으로써 더욱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7:6, 7).
즉 바울은 자신의 경험으로 볼 때 고린도 교회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 있지만, 고린도 교회에도 하나님의 위로가 주어질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2) 따라서 오늘날 우리들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들에게는 틀림없이 하나님의 위로가 넘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도 결국에는 고난 중에서도 든든한 소망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5장 9-10절에는,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3) 또한 성도들이 함께 고난을 당하고, 함께 위로를 받는 것은 어떤 것보다도 성도들을 하나로 단단히 묶어줍니다.
군인들도 전투의 고난 속에서 굳은 전우애가 생기는 법입니다.
부부간에도 젊어서 고난을 같이 한 부부가 부부애가 깊습니다.
‘조강지처’란 말도 그래서 생긴 것 아닙니까?
(4) 그리고 우리들은 자녀를 기를 때도 계속 기대를 가져야 합니다.
자녀가 뭘 좀 잘못한다고 해도, 자녀의 자존심을 짓밟아버리거나 저주를 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너 그럴 줄 알았다. 네까짓 것이 그래 뭘 하겠느냐? 밥이나 축내지 말고 일찌감치 나가서 돈이나 벌어라”-이래서는 안 됩니다.
부모는 자녀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지 말고 계속 기대해야 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6장 4절에는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했습니다.
즉, 자기 성질대로 자녀를 학대하거나 저주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하고 바라리라”는 시편 5편 3절의 말씀대로, 계속 기도하고 바라야 할 것입니다.
어른들 눈에는 신통치 않는 자녀나, 성도들이라고 할지라도, 계속 말씀으로 양육하면, 때가 될 때, 아름다운 그릇으로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에디슨 같은 훌륭한 발명가도 어렸을 때는 선생님이 도저히 가르칠 수 없는 저능아 취급을 받았으나, 어머니의 신뢰와 인내로 그처럼 위대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누가복음 13장에는, 포도원 주인이 3년이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를 보고 뽑아버리겠다고 할 때, 농부는 자비심이 많은 부모와 목자의 심정으로 “주인이시여, 참으소서. 올해 땅을 파고 거름을 주고 열심히 해보겠으니, 올해만 참아주소서”라고 했습니다.
가정의 부모와 교회의 직분자들은 이와 같이 자비로운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인내하면서 자녀들과 구역원들과 주일학교 학생들을 돌봐야 하겠습니다.
금년에도 여러 부모님들과 성도님들은 모두 다 이처럼 자비심을 가지고, 오래 참으면서 가정의 자녀들과 주의 자녀들을 돌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특별한 잘못이 없이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날 버리셨나?”하고 회의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비록 고난을 당할지라도, 구원의 길에서 이탈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고난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고난에서의 구원들을 삶 속에서 어떻게 체험하고 계십니까?
아무쪼록 금년에 어떤 고난을 당하더라도, 고난 속에서 믿음을 잃지 말고, 그리스도의 큰 위로를 체험하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