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함(1517-1578)의 본관은 한산이고, 자는 형중, 호는 토정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그의 형 이지번에게 글을 배웠다. 장성하여 모산수 이성랑의 사위가 되었다. 결혼식을 올린 이튿날 외출하였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돌아왔는데 그가 입고 갔던 명주 도포가 없어진 것을 알고 집안 사람이 물으니 대답하였다. "홍제원 다리를 지나다가 거지 아이가 추위에 얼어 신음하는 것을 보고 찢어서 세 아이에게 나누어 주었다" 어느 날 자기 형에게 말하였다. "제가 저의 처가를 관찰하였더니 길한 기운이 없습니다. 그곳을 떠나지 않으면 장차 재화가 미칠 것입니다" 그가 처자를 데리고 서쪽으로 갔는데, 이듬해에 정말 재화가 일어났지만 모면하게 되었다. 이지함은 또 배를 잘 부려 넓은 바다를 평지처럼 다녔으며, 국내의 산천은 거리가 멀다고 하여 안 간 곳이 없었다. 그리고 여러 해 동안 떠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는 또 평상시 자제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여색을 경계하라. 여색에 대한 경계를 엄격히 하지 않으면 그 나머지는 볼 것이 없다" 이지함은 배고픈 것을 참아 보려고 열흘 동안 불에 익힌 음식을 먹지 않았으며, 목마른 것을 참아 보려고 한더위에 물을 끊기도 하였고, 고달픈 것을 참아 보려고 발이 부르트도록 걷기도 하였다. 그는 화담 서경덕에게 글을 배우기도 하였다. 그는 늘 무명옷에다 짚신 차림으로 솜옷을 짊어지고 다니며 사대부의 집에 가서 어울려 놀면서 곁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기탄 없는 언행을 하였고 여러 방면의 잡술에 환하게 통달하였다. 큰 박을 네 모서리에 매단 거룻배를 타고 노도 사용하지 않은 채 세 번이나 제주에 들어갔지만, 풍파의 위험을 겪지 않았다. 그때마다 장사를 하여 맨손으로 경영한 사업이 몇 년 사이에 수천 석의 곡식을 축적하여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에게 모두 나누어주고는 소매를 털고 떠났다. 또 섬에 들어가 오이를 길러 그것으로 곡식을 샀으며, 또 여러 척의 배로 경강(한강)에 이르러서는 낮고 습기가 있는 곳에다 흙으로 축대를 쌓았는데 높이가 수십 자나 되었다. 거기에다 흙집을 지어 밤에는 흙집에서 자고 낮에는 흙집 위에 올라가 지냈는데, 그 흙집을 토정이라 하였다. 그곳에서 얼마 동안 살다가 버렸다. 그는 또 쇠로 갓을 만들어 쓰다가 벗어서는 거기에다 밥을 지어 먹기도 하였으며, 끝나면 씻어서 다시 쓰곤 하였다(지금의 벙거지가 이것이다). 더러는 패랭이를 쓰고 거친 칡옷에다 나막신을 신고 팔도를 두루 돌아다니며 스스로 천한 사람의 일을 하여 밑바닥 생활까지 모르는 것이 없었다. 그는 일생 동안 남에게 맞아본 적이 없었다. 그가 하루는 느닷없이 민가에 침입하여 어느 부부 곁에 앉아 있었다. 주인이 크게 화를 내어 그를 때리려고 하다가 그가 늙은 사람이라 온화한 말로 내쫓기만 하였다. 또 볼기 맞는 형벌을 받아 보려고 일부러 높은 관원이 지나가는 앞길을 범하였더니 그 관원이 화를 내어 볼기를 치려고 하다가 자세히 살펴보고는 그 모습이 이상하므로 볼기치려던 것을 그만두었다. 그의 할아버지 장례를 치르는데 장사지낼 묘터를 보니 자손 중에 반드시 두 사람의 정승이 나올 터이기는 하지만 막내아들에게는 불길하다는 터였는데, 막내아들이란 바로 이지함 그였다. 그러나 이지함은 스스로 그 불길한 것을 떠맡겠다고 하였는데, 뒤에 그의 조카 이산해는 정승이 되었고, 이산보는 벼슬이 1품이었지만 그의 아들은 현달하지 못하였다. 포천현감이 되어 다갈색 무명 베옷에다 짚신을 신고 부임 하니 딸린 관속들이 음식을 차려 올렸는데, 이지함이 눈여겨 자세히 보고는 수저를 들어보지도 않고 말하였다. "먹을 것이 없다" 아전들이 뜰에 꿇어앉아 아뢰었다. "고을에 토산물이 없어 차린 음식에 특별한 것이 없었으니 다시 차려 올리겠습니다" 조금 있다가 진수성찬을 차렸지만 이지함은 또 앞서와 같이 말할 뿐이었다. "먹을 것이 없다" 아전들이 겁을 내어 벌벌 떨면서 죄주기를 바라므로 이지함이 말했다. "우리 나라 백성들의 생활이 어렵고 고달픈 것은 모두 먹고 마시는데 절제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음식을 차릴 때에 소반 사용하는 것을 몹시 싫어한다. 오곡을 섞어서 지은 밥 한 그릇과 나물을 넣어 끓인 국 한 그릇을 갈모나 갑에 담아서 올리라" 이튿날 포천 고을 안의 품관이 인사하러 찾아오자 말린 나물로 죽을 쑤게 하여 그 죽을 들도록 권하였다. 품관들은 갓을 나직이 내려 숟가락을 들고서 조금 먹다가 조금 토하곤 하였는데 이지함은 한 그릇을 다 먹었다. 그러다 얼마 있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니 고을 사람들이 길을 막으며 만류하였지만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집안 살림이 너무 가난하여 끼니를 잇기가 어려웠다. 어느 날 내당에 앉았노라니 부인이 말하였다. "남들은 모두 당신을 비범한 사람이라고 여기는데 어찌 저를 위해서는 조금도 시험을 하지 않으십니까" "내가 곧 나비를 만들어 낼 터이니 구경하겠소?" "지금은 깊은 겨울인데 어찌 나비가 있단 말입니까. 당신 말씀이 너무나 허망할 뿐입니다" "구경만 하시오" 이지함이 곧장 옷을 꿰매는 재료며 용기를 담아 둔 데로 가서 여러 가지 색깔의 재단하고 남은 비단과 명주 조각을 가져다 손에 쥐고 무어라고 중얼중얼 주문은 외우고는 조금 있다가 공중으로 던져서 흩으니 나비가 분분하게 방 안에 가득하고 오색이 찬란한데, 각기 재단하고 남은 본바탕의 색깔을 따라 나비가 되어 오락가락 날며 춤을 추는데 현란스러움이 헤아리기 어려웠다. 부인이 그 광경을 보고 놀라자, 이지함이 다시 공중을 향하여 손바닥을 펴고 주문을 외웠다. 나비가 모두 즉각 손바닥으로 도로 모였는데 조금 있다가 쥐었던 손바닥을 펴니 비단과 명주 조각이 그전처럼 있었다. "지금 식량이 떨어져 밥을 지을 수 없는데 어찌 신기한 술수를 부려 이렇게 급박한 형편을 구제하지 않으십니까?" "그쯤이야 어려울 것이 없지요" 이지함이 즉시 계집종에게 놋그릇 한 개를 주면서 말했다. "이 그릇을 가지고 경기 감영의 다리 앞에 가면 한 노파가 백전을 주며 사려고 할 것이니 팔아 오너라" 계집종이 명을 받고 갔더니 과연 그릇을 사려는 사람이 있었고 모두 가르쳐준 그대로였다. 그래서 그릇을 팔고 값을 받아 오니 또 명하였다. "네가 이 돈을 가지고 서소문 밖의 저자 가에 가면 대나무를 결어 만든 삿갓을 쓴 사람이 급히 수저를 팔려고 할 터이니 사가지고 오너라" 계집종이 또 가서 보니 과연 말한 그대로였으므로 수저를 사다가 바쳤는데 은으로 만든 수저였다. "네가 이 수저를 가지고 경기 감영 앞으로 가면 어느 하인이 금방 은수저를 잃어버리고 같은 색깔의 은수저를 구하려고 할 터이니 이것을 보이면 열 다섯 냥의 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팔아 오너라" 계집종이 가보니 모두가 가르쳐준 그대로이므로 열다섯 냥을 받아다 바쳤다. 이지함이 다시 한 냥의 돈을 주면서 말했다. "그릇을 샀던 노파가 처음에는 그릇을 잃어버려 그것을 대신하려고 샀다가 이제는 그 그릇을 찾게 되어 샀던 자에게 도로 물리려고 할 것이니 도로 물려주고 오너라" 계집종이 또 가서 보니 과연 그 말과 같으므로 그릇을 도로 가지고 와서 바쳤다. 이지함이 그 남은 돈과 그릇을 부인에게 주어 아침, 저녁의 끼니를 잇게 하였다. 부인이 더 많은 양을 청하였더니 이지함이 웃으며 말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오. 재물이 많은 자에게는 반드시 재앙이 따르게 마련이니 더 보탤 필요가 없소" 그 뒤에 그가 아산현감이 되었는데, 어느 늙은 아전이 죄를 범하였다. "네가 비록 늙기는 하였으나 마음은 어린아이와 같다" 이지함이 나무라며 그의 갓을 벗기고 센 머리를 땋아 애들 머리처럼 만들게 하고 벼루를 들고 책상 앞에서 시중들게 하였다. 그 늙은 아전이 원한을 품고 있다가 몰래 지네 즙을 가져다 술에 타서 올린 것을 이지함이 마시고 죽었는데, 나이 60세였다. 이조 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