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부(3), 다섯 번째 교회, 사데 교회/ *사데(개신교회) 교인들이 더러운 옷을 입은 이유(계:4-6)
계3:4절은 “그러나 사데(사르디스, 개신교회)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a few)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예수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고 말한다.
애석하게도 종교개혁운동의 후예들이 저마다 교파를 만들고 이단으로 서로를 정죄하면서 안주하고 말았다. 그로 인해서 종교개혁의 정신은 사라졌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교단이라는 장벽에 막혀서 고립되고 말았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교파로 분열되고 끝없는 사이비 이단 시비로 종교개혁의 정신은 사라져 버렸다.
예수님께서는 사데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 옷을 더럽혔다고 책망하셨다. 단지 “몇 명만”더럽히지 않았다”고 말씀하신다. 이런 책망과 함께 예수님께서는 옷을 더럽히지 않은 성도들은 장차 하늘에서 예수님과 함께 흰 옷을 입고 다닐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다. 하늘에서 예수님과 함께 흰옷을 입고 다니려면, 먼저 이 땅에서 흰옷을 입는 경험을 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장면에서 한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된다. “왜 사데 교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옷을 더럽혀서 “흰옷”을 입지 못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흰옷”에 대한 교리가 크게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흰옷을 입는 경험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살펴보자. “흰 옷”이란 무엇인가?
첫째는 성도의 의로움이다. “그에게 허락하사 깨끗하고 흰 세마포(linen)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의(義)로다 하더라”(계19:8, 킹제임스 영어성경역). 이 말씀에서 우리는 흰 옷이 성도들의 의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데 교인들이 흰옷을 입지 못했다는 말은 그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그 삶 속에서 의의 열매가 열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말하며, 그분께 기도드리고, 예배드린다고 하더라도, 그 마음과 삶 속에 의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는데, 그것은 흰옷, 곧 그리스도의 의를 입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사람은 교회는 다니지만 불신자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왜 교회를 가는지? 예수가 누구신지? 믿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습관적으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오늘날 도시의 골목골목마다 불교 사찰 간판을 걸어놓은 무당이나 점집들이 수없이 늘어나고 있는 현상과 이슬람 신도와 사원이 급성장하고 있음에 비례하여, 교회 안에서도 무자격의 성직자와 외면적이고 기복적인 신자들의 수가 수없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과연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통과할 수 있을까?
흰옷이 가지고 있는 두 번째 의미는 계명을 지키는 신앙이다. 계22:14절에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고 말한다. 한글 성경에는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라고 했지만, 킹제임스 성경에는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므로 두루마기 옷을 빠는 것과 계명을 지키는 것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사데 교회 교인들이 입고 있는 “더러운 옷”을 어떻게 해야 희게 만들 수 있을까? 성경은 어린양 예수의 피에 씻으라고 말한다.
계7:14절은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고 말한다. 이 말씀에서 어린양의 피에 씻어 그 옷을 희게 하였다고 했는데, 이것은 무슨 뜻이며 어떤 체험을 말하는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관념적이고 추상적으로 받아들이는데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매우 실제적인 체험을 통하여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다. 히브리서9:13-14절에서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라고 말한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 양심을 깨끗하게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가 과거에 지은 죄를 용서할 뿐 아니라, 현재의 죽은 행실에서 벗어나 깨끗한 삶을 살게 해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더러운 양심을 씻어서 깨끗하게 해주기 때문에 우리의 행실도 깨끗하게 되는 것이다.
누구든지 온 마음을 다해서 그리스도의 생애와 십자가의 피를 바라보고 받아들이면 성령으로 양심이 정결케 되는 체험을 갖게 된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는 그리스도께 큰 빚을 진자로 살아가게 된다. 아버지께 돌아와 큰 죄를 용서받은 탕자의 심령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더러운 옷”을 그리스도의 피에 빨아 깨끗케 하는 것이다. 이런 체험을 한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는 주님의 마음을 다시는 아프게 하고 싶지 않다는 거룩한 소원이 샘솟게 된다. 더러운 양심을 씻는 또 하나의 방법이 있다. 엡5:26절에서 바울 사도는 말씀으로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어”라고 말한다. 우리 마음과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씻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흰옷 입은 삶, 곧 성화가 가능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이 왜 날마다 말씀을 읽고 먹어야만 하는가? 날마다 양심을 씻어내기 위해서 인 것이다.
흰옷을 입기 위해서 말씀을 영으로 먹어야 하고, 입고 있는 흰옷이 더렵혀지지 않기 위해서 말씀을 먹어야 한다. 여기서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우리의 영으로 말씀 안에 있는 성령을 접촉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심을 씻는 사람은 자아를 부인하며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곧 세상과 죄에 대해서 죽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고전15:31-34절은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똑같이 성경 말씀을 읽는데, 어떤 사람의 양심은 깨끗하게 씻겨지고, 어떤 사람의 양심은 그대로 더럽다. 왜 그럴까? 말씀을 눈과 지식과 고정관념으로 읽어서 그런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양심으로 읽어야만 한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영으로 읽어야 한다. 양심은 영의 기능, 곧 직관, 교통, 양심 그 중의 하나이다.
그래야만 말씀이 생명수가 되어 영에 깨달음을 주고 회개해서 씻겨지게 되는 것이다. 말씀을 영으로 읽어야 성령께서 “이것은 죄니 버리라”고 가르쳐 주시고, “이것을 회개하라 저것을 고치라”라고 말씀해 주실 수 있는 것이다.
롬10:17절은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말한다. 믿음과 말씀을 연결하는 들음은 살아계신 성령의 역사인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양심과 삶이 깨끗이 씻겨지게 된다.
흰옷 입는 경험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너희 가운데 이 마음을 품으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으로 집약된다(빌2:5). 우리의 양심이 씻겨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채워진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거하셔서 그분의 마음이 우리 속에 공급되고 새겨지면 자연스럽게 의의 열매가 열리게 된다.
그것은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행위가 아니며 내 속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열매는 내 의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의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 영 안에서 그분을 살아내면, 육체의 음성을 거절하고 성령의 음성에 순복하게 된다. 그런 사람에게는 성령의 열매가 열리게 된다.
이것이 흰옷을 입는 체험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흰옷 입는 체험을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 설명하셨다. 요한15:5절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셨다.
구원받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고, 멸망 당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었으며, 축복받기 위해서 예배드렸던 것이 유대인들의 신앙이었다. 그런 동기와 의도로 계명을 지키면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율법주의가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성령의 음성을 따르고 계명을 지키는 것은 의의 열매를 맺는다.
이것은 사도 요한이 가르친 중요한 복음이다. 요일3:24절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고 말한다. 또한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요일5:1-5절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라고 말한다.
이 단락에서는 믿음과 사랑을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놓는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란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 고백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시는 데서 하나님은 세상에 자기의 사랑을 입증하셨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형제 사랑의 원천이시다. 형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곧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참된 사랑은 구체적인 사랑의 계명을 이루는 데서 입증된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계명들은 단 하나의 계명이다(요일2:7-8). 그러나 이것을 이루는 것은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이 계명은 받은 바 하나님의 사랑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곳에서는 세상을 이긴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