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중동의 역사에 관해서는 많은 단행본이 출간되었다. 그 내용의 대부분은 기독교의 등장과 함께 끝을 맺거나, 이슬람의 출현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기독교 시대로부터 역사서술을 시작하는 나의 목적은 두 가지이다. 첫번째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페르시아와 비잔틴이라는 두 거대 제국과 함께 예언자(무함마드)의 성장배경이 되었고, 이슬람 국가의 기초가 되었던 이슬람 이전의 아라비아를 복원해보는 것이다. 수세기 동안 중동을 분할하고 차지해왔던 이러한 경쟁적인 세력들은 (단순한) 호기심 이상의 가치가 있다.
두번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오늘날의 중동과 고대 자료나 기념물을 통해서 배워왔던 중동의 고대 문명 사이에 어떤 연결을 시도해보자는 것이다. 기독교초기 시대, 발하자면 예수에서 무함마드(마호메트)에 이르는 기간동안 페르시아 제국의 서쪽은 헬레니즘화, 로마화, 기독교화의 연속적인 진행으로 변형을 거듭하면서, (전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고대 문명의 흔적들이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이러한 흔적들은 거의 최근까지도 고고학자나 동양학자(Orientalist)에 의해서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고대 문명을 중세를 거쳐서 현재의 중동과 직접 연결하는 지속적인 작업은 그만큼 가치가 있는 것이다
초기의 중동사 서술은 일련의 정치적, 군사적 사건에 초점이 두어졌는데, 이것은 심층적인 역사의 이해에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선학들의 그러한 작업의 덕택으로 정치적인 서술은 극소화하고 사회적, 경제적, 무엇보다도 문화적 변화에 보다 많은 비중을 둘 수 있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는 연대기, 여행기, 문헌 기록, 비문, 심지어는 산문과 일화와 같은 광범위한 동시대 자료들을 직접 인용했다. 영어 번역이 가능한 자료는 그것을 직접 이용하고 인용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나 나름대로 해석했다. 도판이 이러한 목적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독자는 도판을 통해서 서술이나 분석이 결여된 사실에 대한 통찰력 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p.5)
서론
(p.23)
오늘날 중동인들의 의식 속에 있는 지배적인 요소는 유럽의 영향(후일 더욱 일반화된 용어로 서구의 영향)과 그리고 그 영향이 안겨준 변형(변위)이다. 이 지역의 근대사는 급속하고도 강력한 변화의 역사였으며, 이질적인 세계로부터의 도전의 역사였으며, 대항과 거부, 반응에 대한 다양한 단계와 양상의 역사였다. 어떤 면에서 그 변화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절대적이었으며, 그러한 변화가 더욱더 진행되기를 바라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한편 다른 면에서 변화는 제한적이고 피상적이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아직도 거꾸로 가고 있기도 하다. 보수적이고 급진적인 계층 모두에게 이러한 반전이 지속되고 확산되기를 바라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들은 서구 문명의 영향을 이 지역에 닥친 최대의 재앙으로, 심지어 13세기 몽골의 침략에 의해서 이 지역이 유린되었을 때보다 훨씬 더 큰 재앙으로 보고 있다. 그리하여 한때는 "제국주의 "라는 단어가 서구의 영향을 표현하는 일반적인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점차 받아들이기 어렵게 되었다. 왜냐하면 유럽의 짧은 직접 지배는 과거 속으로 묻혀가고 있고, 미국은 지리적으로 멀 뿐만 아니라 개입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서구의 영향이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호메이니가 미국을 "거대한 사탄"이라고 말함으로써 보다 정확히 표현했다. 사탄은 제국주의자가 아니고 유혹자이다. 사탄은 정복하지 않고 부추긴다. 유혹자를 증오하고 두려워하는 그리고 유해하다고 생각하여 서구식 생활방식의 힘을 증오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들과, 서구화를 문화와 문명의 지속적이고 유익한 상호 교류를 위한 진보와 새로운 기회로 파악하는 사람들 사이의 투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중동에서 이러한 투쟁의 결과는 아직 오리무중이다. 그것의 진로를 결정하는 원천이나 전개과정, 문제 등은 중동의 역사와 문명을 대비해서 비추어봄으로써 더욱 잘 이해될 것이다. (저자의 역사관) (p.23)
제1부 고대 문화
(p.37)
한 중요한 측면에서 유대인, 그리스인, 로마인은 서로 유사하고 고대의 다른 민족들과는 달랐다. 그 유사성과 차이점이 세 민족 모두에게 연속되는 문명의 형성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부여했다. 세계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중동에서도 자신과 다른 사람 사이에 명확하게 선을 긋고, 집단을 규정하고, 외부인을 거부하는 것은 인간 집단의 보편적인 관습이었다. 이러한 관습의 최초의 근원적인 필요성은 인간의 시초로 거슬러 올라가고, 나아가 인간이 아닌 대부분의 동물세계에서도 나타난다. 내부자와 외부자 사이의 구분은 항상 혈통, 즉 친족이나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인 종족성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지중해의 가장 뚜렷한 두 고대 인종인 그리스인과 유대인은 그리스인이 아닌 사람을 야만인으로, 유대인이 아닌 사람을 이교도로 간주하는 타자에 대한 두 고전적 정의를 남겨놓았다. 이러한 용어에 의해서 표현되는 경계는 절대적이었지만, 한 중대한 혁신이 이루어져서 그 경계를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 점에서 그 경계는 보다 원초적이고 출생과 혈통에 근거한 보다 보편적인 차이에 대한 정의와는 달랐다. 그러한 경계는 한편으로는 그리스인의 언어와 문화를 받아들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대인의 종교와 법률을 받아들임으로써 서로 섞이고 때로는 제거되기도 했다. 집단 자체가 새로운 구성원을 찾아 나서 지는 않았지만, (유대나 그리스) 양 집단 모두가 그들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기독교 시대가 시작될 때까지 그리스화된 야만인과 유대화된 이교도들은 중동의 많은 도시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모습이 되었다.
또 다른 측면에서 고대 세계의 그리스인과 유대인의 독특함은 그들의 적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 자신이 페르시아 전쟁의 영웅으로서 페르시아 침략자들의 고통을 그린 그리스 극작가 아이스킬로스의 동정적 묘사나, 요나 성서에 표현된 아시리아 니네베 사람들에 대한 배려 등의 비슷한 예는 어떤 다른 곳에서도 찾을 수 없다.
로마인은 포용의 원칙으로 공동의 제국 시민권을 점차 발전시켜나감으로써 중요한 진전을 이룩했다. 그리스인들은 시민권 개념을 발전시켜 시민을 정치의 구성원으로 보고 정부의 구성과 운영에 참가할 권리를 가진 자로 보았다. 그러나 그리스 도시의 구성원은 토착 시민과 그 자손들에 한정되었고, 외국인이 갈망하는 최상의 것은 외국인 거주 신분이었다. 로마의 시민권도 근본적으로 같은 개념이었지만, 로마 시민의 권리와 의무는 단계적으로 제국 내의 모든 지방에까지 확대되었다.
그리스 문화의 접근 가능성, 유대의 종교, 로마의 정치 모두가 전도(傳道)종교인 기독교의 발생과 확산을 위한 길을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기독교 추종자들은 자신들이 신의 마지막 계시를 소유했다고 믿었고, 그 계시를 전 인류에게 전달하는 것은 그들의 신성한 의무라고 여겼다. 수세기 후에 두 번째 보편적인 세계 종교인 이슬람이 발생하여 비록 내용과 방법은 달랐지만, 추종자들에게 (기독교와) 비슷한 확신과 임무를 불어넣었다. 이 두 세계 종교는 똑같은 확신에 의해서 유지되고, 똑같은 야심을 가지고 돌진하면서 한 지역에서 나란히 살아갔기 때문에, 조만간 그들이 서로 격돌하는 것은 불가피했다.
2. 이슬람 이전의 중동: 기독교 시대의 종말 (p.31)
기독교의 발생에서 이슬람의 발생에 이르는 기원후의 처음 6세기는 사건의 과정이나 문명의 이동이라는 두 측면에서 일련의 중요한 발전을 이룩한 시기였다.
이러한 발전 가운데 최초이자 여러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독교 그 발생 그 자체는 물론 기독교의 점진적인 전파와 수용 그리고 결과적으로 유대교와 페르시아 종교를 제외한 모든 기독교 이전 종교의 소멸 또는 최소한 수면 밑으로의 침잠이었다. 고전적인 그리스-로마의 이교도가 일시적으로 남아 있었고, 기독교 역사에서 '배교자 율리아누스'로 알려진 율리아누스 황제(재위 361-363)시대에 (이교도의)마지막 부흥의 빛이 발하기도 했다. 기독교 시대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4세기초까지 기독교는 로마의 질서에 대항하는 저항세력으로 성장하고 전파되었다. 때때로 관용스러웠지만, 많은 경우에 박해가 따랐다. 기독교는 부득이 국가로부터 분리되었고, 고유한 구조와 조직, 자신들만의 지도력과 위계질서를 가진 교회라고 하는 독자적인 제도를 발전시켰다. 교회는 서서히 로마 세계 전체를 포용해갔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재위 311-337)의 개종으로 기독교는 로마를 사로잡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로마가 기독교에 사로잡혔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종은 로마 국가의 단계적인 기독교화로 이어졌다. 이제 새로운 신앙을 증진시키코자 하는 신념에 권위가 더해졌고, 위대한 기독교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재위 527-569) 시대에 이르기까지 다른 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우위를 확립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기독교 분파를 초래한 여러 교파 가운데 유일하게 국가가 공인한 교의의 우월성을 강화하기 위해서 로마의 모든 힘이 사용되었다. (그럼에도) 오늘날 하나의 교회가 아닌 주로 신학적인 교의를 달리하는 여러 개의 교회가 있고, 때때로 개인적, 율법적, 지역적 이유, 심지어는 국가의 충성심에 의해서도 (서로) 분리되었다.
두 번째 주요한 변화는 로마 제국의 중심부를 서쪽에서 동쪽, 즉 로마에서 콘스탄티누스가 그의 동쪽 수도로서 건립했던 도시인 콘스탄티노플로 옮겨간 사실이었다. 결국 395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죽은 후 로마 제국은 로마의 통치를 받는 서부 제국과 콘스탄티노플의 통치를 받는 동부 제국으로 분열되었다. 비교적 작은 기간 내에 서부 제국은 계속된 야만족의 침입으로 멸하여 사라져버렸고, 동부 제국은 난관을 극복하고 살아남아 그후 천 년을 더 유지했다.
오늘날 우리가 동부 제국을 칭하는 비잔틴 제국이라는 이름은 근대 학자들이 붙인 용어인데, 콘스탄티노플의 원래 거주지 명칭에서 유래된 것이다. 비잔틴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를 결코 비잔틴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을 로마인이라고 불렀고, 로마 법을 따른다는 취지에서 로마 황제의 통치를 받았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점도 있었다. 황제와 신하들 모두가 이교도가 아닌 기독교도였고, 비잔틴 시민들이 스스로를 로마인이라고 불렀지만, 라틴어 로마니(romani)가 아닌 그리스어 로마이오이(rhomaioi)로 불렀다. 이것은 변경지방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여러 곳에서 "로마의 지배"를 기원하는 비문이 그리스어 "hegemonia ton Rhomaion"으로 쓰였다. 페르시아에 의해서 축출되었다가 로마에 의해서 회복된 변경지방인 에데사의 한 영주는 당당하게 그리스어로 "필로로마이오스(philorhomaios, 로마의 친구)"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로마의 전성기에도 그리스어는 로마 제국의 제2 언어의 지위를 누렸다. 동로마 제국에 서는 그리스어가 주된 언어였다. 라틴어는 일시적으로 잔존했고, 라틴 용 어는 비잔틴의 그리스어와 또 수세기 후 칼리프 치하의 아랍어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어는 오래 명맥을 유지했고, 정부의 공식 용어일 뿐만 아니라 문화언어가 되었다 심지어는 콥트어, 아람어 그리고 후일의 아랍어 같은 동부 지방의 잔존하는 비그리스계 언어나 문학조차도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적 전통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수세기 일찍 시작된 세 번째 주요한 변화는 알렉산드로스의 제국과, 시리아와 이집트에서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서 건립된 제국들에 의한 중동의 그리스화였다. 로마 국가와 기독교 교회도 그리스 문화로부터 심대한 영 향을 받았다. 양쪽 모두 기독교의 광범위한 전파에 기여했다. 동로마 국가 의 정부제도는 알렉산드로스와 그 후계자들의 그리스 왕권의 전통에 영향 을 받았고, 그 왕권의 개념은 많은 면에서 로마의 황제와는 중대한 차이가 있었다. 종교에 있어서도, 초기 기독교도들은 오랫동안 그리스인들을 사로잡았던 철학적 묘미에 관심을 가졌지만, 로마인이나 유대인과도 결코 지나친 말썽을 부리지 않았다. 비록 더 이상 아테네 극작가나 철학자의 작품이 아니었음에도, 기독교 경전인 신약이 훌륭한 그리스어로 쓰였다. 수 세기 전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스어를 사용하던 유대인 공동체에 의해서 편찬된 그리스어판 구약도 있었다.
부분적으로 이전의 영향 탓도 있겠지만, 또 다른 주요한 변화는 오늘날 흔히 통제경제로 불리는 것의 점진적인 성장이었다. 그것은 국가의 권위를 행사해서 경제를 기획하고 지시하는 시도였다. 이집트와 같은 강 유역 사회에서 그러한 정책이 발달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집트의 통제경제는 알렉산드로스의 부하 장군에 의해서 건설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하에서 진보를 이루었다. 초기 기독교 시대, 특히 3세기 이후국가는 산업이나 무역, 제조업은 물론 농업에까지 개입을 확대해나갔다. 더욱이 국가 당국은 민간기업의 경제활동에 대한 통제를 실시하고, 국가 경제정책을 계통화하고 강제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많은 면에서 국가는 개인 무역업자를 무시해버렸고, 국가의 업무를 조직화해나갔다. 예를 들면 군대는 무기나 군사 장비, 때때로 군복의 제조까지 국가기업에 절대적으로 의존했다. 군대를 위한 식량은 일반적으로 세금의 형태로 거두어져 배급의 형태로 군대에 제공되었다. 국가의 경제활동이 증가할수록 기업주, 조달업자, 생산자 등 의 입지는 점 점 줄어들었다.
농업에서도 국가의 개입이 따랐다. 경작지 면적이 지속적으로 감소했다는 증거가 있다. 적정한 금액을 유지하고자 했던 제국입법은 방기되어 황폐화된 경작키의 증가에 대한 국가의 관심과 다양한 국고지원과 혜택을 통해서 농부와 지주들을 유도하고 토지를 재배치하고자 하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이것이 주된 문제가 된 것처럼 보이는 시기는 특히 3세기에서 6세기까지, 다시 말하면 경제개입주의의 대표적 전형이었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재위 284-305)시대부터 이슬람의 정복과 그 결과로 나타난 경제적 기능과 경제력의 제한기까지였다
비잔틴과 페르시아 제국 모두는 7세기 초 이슬람의 새로운 기운에 압도당했는데, 그들의 운명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비잔틴 군대는 몰려드는 패배로 고통 당하고 아랍에 의해서 많은 영토를 상실했지만, 소아시아 의 핵심 지역은 여전히 그리스와 기독교도들의 수중에 있었고, 제국의 수 도 콘스탄티노플은 수많은 공격에도 불구하고 육지와 해안 성벽의 뒤안에 서 침략을 면했다. 비잔틴 제국은 약화되었지만 700년이나 더 지탱했고, 그 언어와 문화, 제도 등은 나름대로의 리듬을 유지하며 계속 발전해나갔다. 그리고 145)년 그리스 기독교 제국의 마지막 잔재가 소멸되었을 때도 비잔틴 사람들은 그들의 기억과 이전의 기록을 남겨둘 기독교 세계가 있었다.
반면에 페르시아의 운명은 사뭇 달랐다. 변경지방은 물론 수도와 전 영토가 정복되어 새로운 아랍-이슬람 제국에 병합되었다. 시리아와 이집트 의 비잔틴 고관들은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으로 도피할 수 있었지만,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 교도들은 무슬림의 통치하에 남아 있거나, 유일한 출구인 인도에서 망명지를 구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이란에서는 무슬림의 지배 초기에 소수의 소규모 집단을 제외하고는 고대 언어와 고대 문자는 서서히 잊혀졌다. 앵글로-색슨어가 영어로 바뀐 것 같이 그 언어조차도 정복자들에 의해서 변형되었다. 비교적 최근에 와서야 고대 페르시아의 기록과 비문에 대한 회복과 판독이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서 이슬람 이전 이란의 역사에 대한 탐구가 시작되었다.
기독교 시대 처음 6세기 동안 이란 제국의 역사에서 두 개의 주요한 국면이 있었다. 첫 번째는 파르티아이고, 두 번째는 사산 왕조이다. 사산 왕조 의 첫 통치자인 아으다시르 1세(재위 226-240)는 로마에 대항한 새로운 전쟁을 시작했고, 그의 후계자인 샤푸르 1세(재위 240-271)는 전쟁 중에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를 사로잡기도 했다. 이 업적은 그를 대단히 열광 시켜 몇몇 이란의 산 위의 바위에다 그것을 새겨놓게 했고, 지금도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말을 탄 폐르시아샤(황제)와 그의 말밑에 (엎드려)있는 로마 황제를 묘사해 놓았는데, 샤의 발이 로마 황제의 목에 걸려 있는 모습이다 발레리아누스는 사로잡혔다가 최후를 맞았다.
페르시아-로마, 후일의 페르시아-비잔틴간의 쟁패는 이슬람 칼리프 국가가 등장할 때까지 이 지역 역사의 지배적인 정치적 사건이었다. 이 이슬람 국가의 등장은 한 경쟁자를 멸망시키고, 다는 경쟁자를 심각하게 약화시켰다. 오랜 기간의 끝없는 전쟁의 연속은 평화가 유지되었던 기간을 제외하면, 확실히 그러한 궁극적인 결과에 중대하게 기여했음이 분명하다.
예외적으로 긴 평화가 1세기 이상 계속되었다. 384년에 샤푸르 3세(재위 383-388)가 로마와 평화적 관계를 이루었다. 421-422년의 일시적인 국경 충돌을 제외하면, 전쟁은 6세기초까지 재개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전쟁이 시작되어 일시적인 휴전이 있었지만 628년까지 계속되었다. 그 때는 이미 새로운 세력이 성장하여, 곧 두 교전 당사자들을 무력화시켰다.
당대나 중세의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전쟁의 주된 이슈를, 누구나 예측하듯이, 영토 문제로 보았다. 로마는 그 당시 오랫동안 페르시아에 의해서 통치되던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를 요구했다. 로마가 그 땅을 요구하는 이유는 트라야누스 황제가 그곳을 점령하여 영구적인 권리를 확립했다 는 것이었다. 이 주장은 로마와 페르시아, 후일의 무슬림에 의해서도 공유되었다. 비잔틴은 더 나아가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의 주민이 대부분 기독교도이기 때문에 기독교 황제에 대한 충성을 빚지고 있다는 논쟁을 벌였다. 페르시아는 키루스의 아들 캄비세스에 의해서 기원전 525년에 정복된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를 요구했다. 전쟁의 과정에서 그들은 수시로 이 땅들을 침략하고 유린했으며, 심지어 짧은 기간 동안 그곳을 점령하기도 했다. 그곳에는 페르시아인이나 조로아스터 교도가 남아 있지 않고 다른 비기독교도 집단이 있었는데, 페르시아는 그들 가운데 동조자를 얻었다.
근대사가들은 영토 요구 이외의 다른 이유들을 발견하고 이를 증명해 보였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동서 무역로의 통제였다. 지중해 세계에서 극도로 중요한 두 개의 동방 수입품은 중국의 비단과 인도 및 동남아시아의 향료였다 이러한 물자의 거래는 너무나 광대해졌고, 로마의 법률 규정은 이것이 방해받지 않고 보호되는 데 지속적인 관심을 표명했다. 이 무역으로 인해서 로마와 비잔틴 세계는 아시아 저편, 즉 중국과 인도의 문명 을 접하게 되었다. 정기적인 관계도 없었고, 방문자들의 교류도 거의 기록 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양국으로부터 수입품이 있었고, 그 대가로 로마 나 후일의 비잔틴은 주로 금화를 지불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 비단이나 인도 향료와의 교환에서 지중해 세계가 제공할 수 있었던 것은 거의 없었다. 금은 항상 통용되었기 때문에 대량의 로마 금화가 지중해 분지에 도착한 수입품의 지불수단으로 동아시아로 흘러갔다. 동아시아뿐만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페르시아가, 특히 그들의 통치를 동쪽으로, 즉 중앙아시아의 내륙으로 확대하여 비단무역의 출발지로 지배한 일정 기간동안, 중국과의 비단 무역에서 중개인으로서 엄청난 이득을 얻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방으로 유출되는 금괴의 고갈에 대해서 간간이 불평이 따랐지만, 전반적으로 로마는 그러한 고갈로부터 놀랄 만큼 잘 버티었다.
지중해에서 동방의 저편으로 향하는 가장 직접적인 경로는 페르시아 통치 영역을 통과해야 했다. 따라서 폐르시아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경로의 개발은 경제적으로나 전략적으로 명백한 이점이 있었다. 그 채안은 중국에서 출발하여 유라시아 스텝 지역의 터키족 영토를 관통하여 흑해와 비잔틴 영역으로 향하는 북쪽의 육상로, 혹은 인도양을 통하는 남쪽의 해상로였다. 이러한 경로는 육로와 연결하여 이집트와 수에즈 지협을 통해서, 혹은 예멘과 시리아 접경에 이르는 서부 아라비아의 대상 경로를 통해서 걸프해와 아라비아 혹은 홍해로 이른다. 로마와 비잔틴의 관심은 중국과 인도와의 외곽 교역로를 설립하고 보존해서 페르시아의 지배 중심부를 우회하는 것이었다. 페르시아 제국은 비잔틴 무역을 통제하는 통과로의 입지를 활용하려고 했다. 즉 평화시에는 그곳을 미끼로 이용하고, 전쟁시에는 그곳을 봉쇄해버리는 것이었다. 이것은 두 제국의 경계 밖의 나라에서 두 세력간의 반복되는 영향력의 투쟁을 의미했다. 이러한 상업적, 외교적 그리고 드물기는 하지만 군사적 형태의 개입의 영향은 양 지역 모두에서 매우 컸다. 일차적으로 영향을 받은 세력은 북부의 터키계 부족과 공국들 그리고 남부의 아랍계 부족과 공국들이었다. 터키족이나 아랍족이 이 지역의 고대 문명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연속된 침략의 물결을 따라서 양 부족은 후일 중세 이슬람의 심장부에서 주도적인 역할 을 하게 된다.
기독교 시대의 처음 6세기 동안 터키족과 아랍족은 모두 제국의 경계 바깥에 있는 유목이 가능한 스텝 지역과 사막 지역에 머물러 있었다. 페르시아나 로마 모두 심지어 제국 팽창기에도 스텝이나 사막 부족의 점령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그들과 밀접하게 연루되는 것을 피했다. 시리아 출신의 4세기 로마 역사가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양 부족에 대 해서 언급해놓았는데, 그가 스텝 민족들에 관해서 관찰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든 이역의 주민들은 야만적이고 호전적이며, 전쟁과 충돌에서 즐거움을 얻는다.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자는 다른 사람보다 행복하게 여겨진다 자연사로 세상을 하직한 사람에게 그들은 변절자나 겁쟁이라고 모욕을 준다. (XXIII, 6.44)
남쪽의 사막 거주자들에 대해서 그는 "... 우리가 친구로서나 혹은 적으로서 어떤 바람직한 사실을 결코 발견할 수 없었던 사라센"(XIV, 4. 1)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러한 이웃을 무력으로 점령하는 것은 71비싼 대 가를 치뤄야 하는 것은 물론 어렵고 위험한 일이었고, 그 결과가 확실하지 도 유용하지도 않았다. 대신에 양 제국은 고전적인 제국정책을 추종했는 데, 그것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부족민을 설득하고, 재정적, 군사적, 기불 적 원조와 칭호와 명예 그리고 그와 유사한 것들을 통해서 그들의 우호를 확보하고 가능한 한 그것을 존속시키는 것이었다. 초기부터 그리스 용어로 "필라르크(phylarch)"라고 불려온 남북의 부족장들은 이쪽이나 저쪽, 때로는 양쪽에 의지하거나 또는 어느 편에도 의지하지 않으면서 그들의 입장을 유리하게 이용하는 법을 터득했다. 때로는 대상 무역으로 벌어들 인 부를 바탕으로 해서 제국세력의 위성세력으로, 심지어는 우방으로 그 들 스스로가 정치적인 역할을 하는 독자적인 도시와 왕국을 수립하기도 했다. 제국세력들은 안전하다고 판단했을 때 접경지대의 공국들을 정복하여 직접 통치에 복속시키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일종의 간접 통치나 피보호국 형태를 더 선호했다.
이러한 형태는 아주 오래된 것으로 의심의 여지없이 먼 고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는 폼페이우스가 지금의 요르단의 하심가 왕국에 있었던 고대 페트라(Petra)의 나바테아(Nabatea)에 진군한 기원전 65년에 이 미 사막 정책을 시도했다. 당시 나바테아인은 비록 그들의 문화와 문자는 아람적이었지만, 아랍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페트라의 오아시스 에 번성하는 대상 도시를 건설했는데, 로마가 그들과 우호관계를 수립하는 것을 적절한 방편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페트라는 로마 영토와 사막의 완충국가로서, 남부 아라비아와 인도 무역로로 향하는 귀중한 보급기지로서 기능했다. 기원전 25년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정책전환을 결정하고 예멘을 정복하기 위해서 원정대를 파견했다. 그 의도는 홍해 남단에 로마의 교두보를 확보해서 인도 항로를 로마가 직접 지배하는 길을 여는 것이었다. 그 원정은 참담하게 실패했고, 로마는 두번 다시 시도하지 않았다. 이 것은 로마가 아라비아 본토에 대한 군사적 침공을 중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신 평화시에는 무역을 위해서, 전쟁시에는 전략적인 필요를 위해 서 대상 도시와 사막 접경 국가에 의존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이러한 로마의 정책은 일련의 아라비아 접경 공국들의 융성기를 가능하게 했고, 로마 시대에 들어서 페트라가 그중 첫 번째 국가였다. 몇몇 다른 예로서는 오늘날 남동부 시리아의 타드모르에 해당되는 유명한 팔미라 (Palmyra)가 있었다. 팔미라는 시리아 사막의 샘 주변에서 번성했다. 고대 지역으로서 팔미라는 이른 시기에 거주와 무역의 중심지였음에 분명했던 곳이다. 팔미라인들은 유프라테스 강변의 두라(Dura)에 중앙시장을 가지 고 있어서, 지중해에서 메소포타미아와 걸프해로 향하는 사막 횡단 무역 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었다. 이것은 그들에게 상업적으로나 전략적으로 중요한 입지를 제공했다.
두 제국의 북쪽과 흑해 및 카스피해의 북부는 중앙아시아를 가로질러 중국으로 통하는 육로가 있었는데, 그곳 역시 여러 면에서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1세기 후반에 이 지역에서 중국의 막연한 종주권 요구에 대항 한 중앙아시아 부족들의 반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반란을 주도한 민족은 중국 역사서에서 "흉노"로 불렸는데, 유럽 역사에 등장하는 훈족과 동일한 민족으로 생각된다. 이때 반초라는 중국 장군이 중앙 아시아에 대한 원정을 단행하여, 반란을 평정하고 흉노를 실크로드 저편으로 몰아내었다. 나아가 중국은 더욱 서쪽으로 진출하여 후일 투르키스탄으로 알려진, 현재의 우즈베키스탄과 그 서부 지역을 정복했다. 그리하여 반초는 그곳으로부터 내륙 아시아로 향하는 실크로드를 확보하여 중국 의 통제하에 두었다. 동시에 그는 감영을 사절로 보내어 서쪽의 로마사람들과 접촉하게 했다. 이 사절은 97년 걸프해에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동방의 군사적, 외교적 활동은 중동 지역에서 적극적이고 야심적인 팽창 계획을 실시했던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의 정책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106년 트라야누스는 페트라와의 전통적인 관계를 끊고, 그곳을 침략하여 정복해버렸다. 그리하여 나바테아 지역은 '아라비아 주'로 불리는 로마의 한 주로 전락했고, 보스라(Bosra)에 주둔하던 로마 군단의 총독에 의해서 통치되었다. 또한 트라야누스는 운하와 나일 강 지류를 연결하는 수로망을 정비하여 로마의 배가 지중해에서 홍해로 항해할 수 있게 했다. 107년에는 로마의 사절이 인도에 파견되었고, 시리아 동부 접경에서 홍해로 이르는 도로가 개통되었다.
트라야누스의 이러한 정책들은 당연히 당시 두 제국 사이의 전쟁에서 주도귄을 잡고 있던 파르티아를 긴장시켰다. 114년에 시작된 윈정에서 트라야누스는 양 제국 간 핵심 분쟁지대 중의 하나였던 아르메니아를 정복 하고, 독립 기독교 공국인 에데사의 지배자와 셥정을 체결했다. 이어 티그리스 강을 건너 동진을 계속한 그는 116년 여름, 오늘날의 바그다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던 페르시아의 대도시 크테시폰을 점령했다. 결국 그는 걸프해에 까지 다다랐다. 물론 이러한 일은 그 시기에 유대에서 일어났던 반란과는 무관했다. 117년 트라야누스가 죽고 난후, 그의 후계자인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아라비아 주'만 남겨두고 동방의 모든 점령지로부터 철수했다.
100년경, 즉 트라야누스의 정복사업이 시작되기 전, 아라비아 반도의 개략적인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반도의 중앙부는 완전히 권력의 공백 상태에 있었고, 지방이나 외곽은 공국의 성격을 띠는 군소 국가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은 동쪽의 파르티아나 서쪽의 로마 제국과 다양한 형태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아라비아를 가로질러 예멘으로 향하는 대상무역이나, 동아프리카나 인도로 향하는 해상교역을 통해서 생계를 꾸려나갔다.
이러한 상태에서 로마의 페트라 합병은 심각한 정책 변화를 초래하여, 당시 유지되고 있던 팀의 균형을 깨트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후일 로마는 팔미라에 대해서도 유사한 정책을 펴나가다가 결국, 시기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팔미라를 합병해버렸다. 2세기까지 팔미라에 로마 군대 가 주둔했다는 기록이 있다.
페르시아에 사산 왕조가 등장하여 중앙집권적이고 훨씬 군사적인 정권 이 수립됨으로써, 상황은 다시 한번 반전되었다. 이번에는 아라비아의 북 동쪽 접경에 위치한 페르시아가 접경지대의 공국들을 합병하고 복속해나갔다. 3세기 중엽에는 페르시아가 고대 아라비아의 중심지인 하트라(Hat-ra)를 파괴하고, 걸프 해안에 연해 있는 동아라비아 일대를 차지했다.
로마 역사가들은 3세기말에 일어난 흥미있는 사건 하나를 기록하고 있다. 제노비아(아마도 아랍어로는 자이나브라는 여군주가 팔미라의 독립을 회복하기 위해서 마지막 노력을 기울인 이야기이다. 이 투쟁은 아우렐리 아누스 황제가 파견한 로마 군대에 제노비아가 패퇴함으로써 무위로 돌아가고, 팔미라는 또다시 로마의 완전한 속령이 되었다.
한편, 아라비아 반도의 남쪽 끝에서도 또다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경작지와, 왕조 중심의 군주가 통치하는 도시들로 구성된 남아라비아는 반사막의 북부와는 판이했다. (남부에는) 이러한 전제군주들이 도태되고, '힘야르족(Himyar)'에 의한 새 왕권이 수립되어, 동쪽의 페르시아와 서쪽의 에티오피아를 축으로 하는 외부세력의 격전장이 되었다. 에티오피아에서 흥기한 호전적인 기독교 전제군주는 홍해 저편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로부터 자연적으로 이점을 취하고 있었다 물론 페르시아도 로마나 기독교 세력에 대항하는 문제에 항상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에게 로마와 기독교는 거의 같은 존재로 비쳤다.
이 시기에 이러한 지중해 문명의 변방 중심지들은 고대 세계의 일반적인 경제적 퇴조 현상, 특히 3세기 이후의 교역 감소에 크게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 시기 이후로)로마 동전이 갈수록 적게 발견된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준다. 217년에 사망한 카라칼라의 통치 이후에는 인도에서 로마 동전이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4-6세기에 아라비아는 일종의 암흑시대를 맞았다. 이 시기는 궁핍과 베두인화(사막 유목화)시대, 기존의 경작과 정주의 쇠락 시대, 낙타유목의 확장시대였다. 이슬람이 도래하기 직전이었던 이 시기의 장면들은 초기 무슬림들의 전승에 생생하게 재현되어 있다.
아라비아의 퇴조에 대한 부분적인 이유는 최소한 경쟁적인 양 제국에 의한 관심의 소멸에서 찾아야 한다. 384년에서 502년에 이르는 긴 세월 동안 로마와 페르시아는 평화 상태에 있었다. 그들은 아라비아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길고 비용이 많이 드는, 그러면서도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사막과 오아시스의 대상 무역로는 매력을 잃었다. 교역로는 (딴 곳으로) 바뀌었고, 지원금은 중단되었다. 대강 교통도 끝을 맺고, 도시들은 버려졌다. 오아시스의 정주민들조차도 딴 곳으로 이주하거나 유목생활로 전환했다. 교역의 퇴조와 유목생활로의 전환으로 아라비아는 종래 보다 더욱 문명세계와 고립되었고, 일반적으로 생활과 문화 수준의 하락을 초래했다. 심지어는 훨씬 잘살던 아라비아 남부 지역도 피해를 입었다. 남부의 많은 유목민들은 보다 나은 목초지를 찾아 북으로 이동해갔다 과거에도 아라비아 사회에서 유목은 항상 중요한 요소였다. 이제 유목은 거의 절대적이 되었다. 이 시기를 무슬림들은 "자힐리야(Jahiliyya)", 즉 "무지의 시대"라고 부른다. 물론 이 용어는 "여명의 시대"인 이슬람 시대에 대비된 개념이다. 이 시기는 그 이후에 새롭게 맞은 시기나 과거의 시기와 비교할 때 암흑의 시기였다. 이런 면에서 이슬람의 도래는 일종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고 꾸란에 명시된 대로 아브라함 종교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다.
무함마드가 탄생한 6세기는 모든 것이 다시 한번 급변하는 시기였다. 이 시기의 가장 우선하는 상황 변화는 1세기 이상의 긴 평화상태를 깬 페르시아-비잔틴의 재격돌과 끊임없는 전쟁의 재개였다. 두 제국간의 전쟁 과 경쟁의 상태에서 아라비아는 다시 한번 투쟁의 한 변수로 떠올랐고, 아라비아의 거주민들은 관심과 명예, 때때로 양측의 지원을 받는 경험을 만 끽하게 되었다. 평화시에 지중해 세계에서 동방으로 진출하는 가장 편리 한 교역로는 (나틸) 강 계곡을 통해서 걸프해로 나아가는 경로였다. 짧은 몇몇 구간이 육로로 연결되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교역로는 수로로 연결되었고, 다른 경로에 비해서 훨씬 경제적이고 안정적이었다. 이제 비잔틴과 페르시아가 다시 전쟁에 돌입함으로써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비잔틴으로서는 메소포타미아와 걸프해 경로는 공격받을 염려가 너무 컸다. 전시에는 페르시아의 군사적 행동으로 언제든지 차단 당할 수 있었고, 두 제국간에 평화가 유지되는 시기라고 해도 쉽게 경제적 봉쇄를 당할 수 있었다. 따라서 비잔틴의 정책은 페르시아의 군사적 행동이 미치지 않는 대체로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기존교역로로써) 두가지의 가능성이 있었다 북쪽의 스텝과 남쪽의 사막과 해로였다. 아시아 육로 횡단 경로의 재개는 비잔틴 황제와 중앙아시아 스텝 칸(khan, 군주)사이에 일련의 흥미로운 협상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하여 (중앙아시아) 터키계(투르크계) 칸의 사절들이 콘스탄티노플에 당도하기 시작했다. 비잔틴 연대기에는 다른 칸들과는 달리 현명하게 페르시아와 비잔틴 양측 모두에게 사절을 보냈던 일부 칸들의 기이 한 이야기가 적혀 있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비잔틴의 배신을 비난한 사람들은 칸들이었다. 비잔틴 역사가 메난드로스는 576년의 한 사건을 전하고 있다. 한 비잔틴 사절이 칸에게 신임장을 제출했을 때, 칸이 자신은 물론 자신의 적들과도 동시에 거래한 그 사절을 격렬히 비난하는 내용이다 자 신의 입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은 채 칸은 다음과 같이 큰 소리로 말했다.
네가 바로 열 개의 혀로 속임수를 쓰던 로마 놈이 아니더냐? ... 입 속에 열 개의 손가락이 있는 것처럼 너는 열 개의 혀를 가졌구나. 하나로는 나를 속이고, 다른 하나로는 아바르인들을 속이고 ... 너는 교활한 언변과 사술로 아첨하고 사기를 치면서 무고한 사람들을 불행에 빠트리고, 네 자신의 잇속만 챙기는구나.
... 터키인(투르크인)에게 거짓은 기이하고 부자연스런 행위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서로간에는 보호와 종속, 남과 북의 관계로 비교적 이해가 잘 맞아떨어졌다.
6세기까지 남쪽 경로가 북쪽 경로에 비해서 보다 중요시되었다. 이것은 페르시아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몇 가지 대안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초기 사료를 통해서 세 관련 당사자들과 정책과 활동을 잘 그려볼 수 있다. 비잔틴은 페르시아의 간섭을 받지 않는 인도로의 통로를 개통해 서 유지하려고 했고, 페르시아는 그러한 인도로의 통로를 방해하거나 봉쇄하려고 했다. 한편 그 통로상에 있는 여러 민족들은 당시 상황으로부터 이점을 취하려고 했는데, 그들의 목표는 이익이 분명한 이 통로의 개통을 유지하되, 비잔틴이 그것을 독점하거나 통제하지 못하게 하는 것, 즉 비잔틴의 독자적인 역할을 감소시키는 것이었다.
이 시기의 대부분의 발전은 이러한 패턴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 하나는 비잔틴과 페르시아 양 제국의 변방에 접경국가와 피보호 공국들이 재등장한 것이었다. 비잔틴의 사막 접경 지대, 대충 오늘날의 요르단에 해당하는 지역에는 가산(Ghassan)이라는 아랍 공국이 있었고, 페르시아 쪽에는 히라(Hira) 공국이 있었다. 양 공국 모두는 기독교를 신봉하는 아랍 국가였고 아람 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나, 한쪽은 비잔틴에 그리고 다른 한쪽은 페르시아에 복속되어 있었다.
527년경 비잔틴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는 가산 공국을 부추겨 히라 공국을 공격하게 했다. 그 결과는 고전적인 방식대로 비잔틴과 페르시아의 대리전 성격을 띠었다. 가산의 지배자에게는 커다란 영예가 주어졌다 그는 로마 제국의 귀족으로 선언되었고, 콘스탄티노플로 초대되었다. 로마의 무기와 교관 그리고 상당량의 로마 금화가 제공되었다 같은 시기의 페르시아측 공국들에 관한 내용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거의 같은 형태를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의 두 번째 중요한 발전은 티란 해협 중부에 있는 시나이 반도의 남쪽 끝에 요타베(Yotabe)라고도 불린 티란 도서국가가 잠시 역사 무대에 재등장한 사실이었다. 그곳에는 일찍부터 중개무역에 종사하던 작은 정착 집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의하면 473년에 그 섬의 부족장이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했고, 이어 여러 사람의 방문이 뒤따랐는데, 일부는 (로마)제국에 우호적이었으나 일부는 적대적이었다. 그 섬의 정착집단은 유대인이었던 것으로 분명히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들이 토착 고대 유대인이었는지, 유대교로 개종한 집단이었는지, 아니면 유대로부터 새로 도 착한 정착민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주로 홍해 하류의 남쪽 교역에 종사하던 그들은 처음에 독립을 유지하며 비잔틴에 우호적이지 않은 태도를 취했다. 그러다가 홍해 무역이 주관심사가 되는 6세기부터 이 섬은 비잔틴의 통제하에 들어갔다가, 다시 편의상의 문제로 가산 공국으로 넘어갔다.
525년에는 여러 가지 흥미 있는 사태의 진전이 있었다 티란-요타베의 유대인들이 (비잔틴에)복속된 반면에, 홍해의 남쪽 끝에 또 다른 유대인 집단이 등장했다. 그곳의 힘야르족의 왕이 유대교로 개종한 것이었다. 그리 하여 수세기만에 처음으로 아라비아의 남서쪽 모서리에 유대 군주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홍해의 양끝에서 거의 동시에 유대인 집단이 갑자기 등장하게 된 사실에는 필연적으로 어떤 관련이 있을 것이다. 양 집단 모두 홍해 무역에 종사했고, 친 페르시아-반비잔틴 정책을 표방했던 것으로 보인다.
비잔틴의 기본 정책은 물론 직접적인 반페르시아 정책이었다 그러나 비잔틴의 정책은 반페르시아 뿐만 아니라 반중립도 추구했다. 이는 지방세력들을 제거하거나 복속시켜 비잔틴의 우위를 다지고 흥해 전역에서 독점적인 교역권을 확립하기 위함이었다. (홍해) 북쪽에서 비잔틴은 아랍 지윈 부대의 협조를 통해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갔으나, 남쪽 끝에서는 이것 이 불가능하자 에티오피아를 개입시켜 도전에 대처해갔다. 기독교 국가인 에티오피아는 예멘의 유대인과 그들 배후에 있는 동쪽의 페르시아에 대항해서 비잔틴과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때쯤 에티오피아는 이지 동쪽으로 인도까지 항해하는 배와 아라비아 본토에 군대를 가진 국제 무역세력으로 부상했다. 새로 개종한 에티오피아인들은 기독교에 열정적이었기 때문에, 비잔틴 사절에게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불행히도 에티오피아는 그들에게 부과된 임무를 완수할 수가 없었다. 초기에 그들은 남부 아라비아의 마지막 독립국가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그곳이 기독교와 다른 외부세계의 영향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유지할 만한 힘이 충분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멘으로부터 북쪽으로의 진출을 시도했다. 그리하여 507년에는 북쪽으로 향하는 대상로에 있는 예멘인들의 교역 거점인 메카를 공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히려 에티오피아의 공격은 실패하고 패퇴 당했다. 그 결과, 얼마 되지 않아서 그들을 대신하여 페르시아가 예멘에 진입하게 되었다.
예언자(무함마드)의 생존 초기 그리고 그후 일시적으로 예멘은 페르시아 태수의 통치를 받았고, 나라 전체는 페르시아의 통제하에 있었다. 홍해 남쪽에 폐르시아 세력이 확립된 것은 동방으로 향하는 독자적이고 개방적인 무역로를 확보하려고 했던 비잔틴 정책의 실패를 의미했다. (그러나)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시기에 당시의 모든 관심사를 제쳐두게 만 든 중요한 발전이 목격되었다. 수세기 동안중국에서 비단의 제조는 철저한 비밀에 부쳐졌고, 누에의 수출은 사형으로 다스렸다. 그런데 552년 두 사람의 네스토리우스파 승려들이 중국에서 누에알을 몰래 비잔틴 제국으로 밀반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7세기 초까지 양잠업이 소아시아에 서 착실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중국 비단은 여전히 그 아름다움과 품질의 우수성으로 인해서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었지만, 적어도 중국의 비단 독 점 체계는 끝이 났다.
6세기는 두 경쟁자 모두의 위축이나 약화로 마감되었다. 에티오피아인들은 아라비아에서 물러났고, 그들의 정권은 에티오피아 내에서조차 크게 약화되었다. 페르시아는 일시 명맥을 유지해갔지만, 그들 역시 내부의 권력투쟁과 조로아스터교 내에서의 갈등으로 야기된 심각한 종교적 문제로 인해서 극도로 약화되었다. 유스피니아누스의 통치시대가 끝난 후, 비잔 틴 제국은 자체 문제에 봉착했다. 비잔틴 기독교를 소용돌이로 몰고간 (동서)교회 논쟁이 그것이었다. 아라비아 반도의 독립된 중심세력이었던 남부의 공국들은 소멸되고, 외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는 아라비아 반도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사건들이 있은 후 아라비아에는 외국인이 몰려들고, 식민지 개척자들과 난민, 외부 집단들이 반도에 정착했다. 그들과 함에 새로운 방법과 물품, 이념 등도 유입되었다. 계속되는 페르시아-비잔틴 전쟁의 결과, 아라비아를 관통하는 무역로가 확고히 수립되었고, 상인과 교역품의 이동도 상당했다. 북쪽에서도 일부 변경국가가 다시 흥기하여 그들의 보호제국들과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나머지 지역은 여전히 아라비아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모든 외적 영향은 아랍인 스스로의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그 반응의 일부는 물질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각종 무기와 갑옷의 사용 그리고 당시의 전술을 배웠는데, 앞으로 닥칠 사태를 위한 귀중한 교훈이었다. 또한 그들은 무역상들이 전에는 몰랐던 물품들을 가져다줌으로써, 보다 선진화된 사피를 맛보게 되었다. 그리고 재빨리 (그것들을)즐기는 법을 배웠다. 나아가 보다 잘 정비된 이웃으로부터 종교와 문화의 일부를 접하게 되면서 지적이고 영적인 반응도 나타났다. 글을 배우고 문자를 창제하면 서 그들 자신의 언어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특히 그들은 외부세계로부터 새로운 이념을 받아들였다. 아마 가장 중요한 반응은 그들이 그들의 종교, 즉 그때까지 지켜왔던 원시적인 우상숭배에 만족하지 못하고 보다 나은 이념을 추구하기 시작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들의 인지권 내에는 여러 종교가 있었다. 기독교는 이미 상당한 발전을 거두고 있었다. 접경지대나 페르시아 영토 그리고 비잔틴 영역 내에 있는 대부분의 아랍인들은 기독교도들이었다. 멀리 남쪽의 나지란(Najiran)과 예멘 지역에도 기독교 정착민들이 있었다. 물론 유대인들도 있었다. 특히 예멘과, 히자즈(Hijaz)의 여러 지역에 유대인들이 살았고, 그들 중에서 일부는 필경 유대 난민들 후손이었고, 나머지는 유대교 개종자들이었을 것이다. 1세기까지 (이들) 기독교도와 유대인 모두는 철저히 아랍화되었고 아랍 공동체의 일부가 되었다. 일부 개종자가 있기는 했지만 페르시아의 종교가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페르시아의 종교는 비페르시아인들을 매료시키기에는 지나치게 민족적인 색채를 띠었기 때문이다.
초기 이슬람 사료에는 아람어로 하니프(Hanif)라고 불리는 집단에 대한 언급이 있다. 그들은 우상숭배를 포기하면서도 당시에 팽배했던 어떠한 종교적 교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이 바로 후일 이슬람이라고 하는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인 최초의 개종자 집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