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오백년!
초롱초롱 박철홍의 역사는 흐른다! 104
명성황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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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는 우리 기억속에 오랫동안 '민비'로 불리우며 나라를 말아 먹은 대표적인 여자이었다.
오래 전 흥선대원군을 주인공으로 한 Kbs '풍운'이라는 역사대하드라마에서도 대원군 역할을 한 이순재가 가장 많이 썼던 말이 " 암닭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더니 잘못들인 며느리 한 명 때문에 나라가 망해가는 구나" 라고 탄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민비'라는 명칭과 그녀의 행적은 일제강압기에 일본에 의해 왜곡된 일제식민사관에 대표적인 사례도 뽑히면서 요즈음은 '명성황후'라는 제목의 뮤지컬, 드라마, 영화, 노래로 까지 각광 받고 있고 새롭게 긍정적으로 재조명 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나는 조선의 국모다!"
이미연의 한맺힘 외침과 열연, 일본 자객역을 한 허준호의 냉혹함 그리고
"슬퍼도 살아야 하네 나 슬퍼서 살아야 하네 이 삶이 다하고 나야 알텐데 내가 이 세상..."
조수미의 애절한 노래와 가사로 우리에게 각인된 뮤직비디오가 선풍적 인기를 끌면서 명성황후를 재조명 시켰다.
비극의 여인 명성황후!
나라를 사랑한 조선의 가장 비극적인 여인으로....
우리 민족이 가장 싫어하고 미워하기도 하는 일본인에 의해서 잔인하게 살해당한 조선의 국모로....
명성황후!
뮤직컬에 나온 것처럼 진심으로 조선과 백성을 사랑했을까?
역사적 사실로 객관적으로 봤을 때 명성황후는 조선의 왕비로서 비극적인 최후를 마친 여인임에는 분명하지만 우리가 그토록 슬퍼하며 그리워해야만 할 인물만은 아니다.
앞으로 내가 써 나가는 글을 읽다 보면 명성황후가 우리 민족과 조선에 긍정적인 일 보다는 부정적인 일을 훨씬 더 많이 행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물론 명성황후 개인 잘못만은 아니다.
그녀는 한미한 가문 출신의 조선의 왕비로서 당시 어쩔 수 없는 시대적 한계와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무능력한 남편이자 왕인 고종대신에 괴팍하고 끝없는 권력욕에 사로 잡힌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도 있다.
어쩟든 명성황후가 의도했던 안 했던 그녀는 우리 민족에게 너무나 큰 아픔을 많이 주게 된다.
조선 말기를 구한말 (舊韓末)이라고도 한다. 이 舊韓末이 언제부터 시작되느냐는 다양한 시선이 있는데 보통 구한말은 흥선대원군의 집권을 그 시점(始點)으로 일제에 의한 한일합방 때 까지로 본다.
한편으로는 대한 제국의 시기 즉 1897년에서 1910년까지만을 구한말의 시기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나는 대한제국 또한 조선말기의 한 현상에 불과하므로 구한말은 이전 조선과는 완전히 다른 엄청난 변화가 시작 된 흥선대원군 시대부터 보는 것이 옳다고 본다.
구한말 이 시기는 흥선대원군이 대외통상수교거부 정책을 유지하던 조선에게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 등 외세가 밀려 들어 오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또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동학혁명 갑오경장 등이 일어나는 변혁의 시기였다.
청과 일본은 조선을 집어삼키려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던 시기였다.
러시아도 이런 조선의 상황에 무관심 하지 않았던 조선에게는 엄청난 혼란과 혼돈의 시대였다.
이런 혼돈의 시기에 일본은 조선보다 이십년 앞서 개항을 했고 이십년만에 근대산업국가로 발돗움 해 서양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중국 청나라도 영국과 아편전쟁으로 처참하게 깨지고 나서 서양 과학문물의 우수성을 깨닫고 양무운동으로 서양문물을 받아 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대외정세에 대해서는 너무 무지했다.
흥선대원군은 오로지 빗장만 걸어놓으면 안전 할 것이라는 안이한 태도로 끝까지 버텼다.
명성황후가 정권을 차지하고 나서 조선조정은 일본의 무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개항을 한다. 그리고 수도 없는 우여곡절을 겪다가 기어코 나라까지 빼앗기고 만다.
조선이 세계추세를 못 따라가고 이와 같은 상황까지 빠지게 된 책임은 당시 집권했던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에게 있기도 하겠지만 가장 큰 책임은 조선의 양반사대부들이다. 그 중 노론세력이다.(세도정치도 노론세력 중 일부가 변질된 것일 뿐이다)
그들은 조선오백년 내내 그리고 그때까지도 유교 성리학 질서에만 빠져있었고 중화사대주의 세계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조선을 소중화여기고 우물안 개구리로 살고 있었다.
그들은 일반 백성들을 수탈하면서 너무 살기 좋고 안락한 자기들만의 나라인 조선에서 영원히 안주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조선을 바꾸고 변혁시키고 싶은 마음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그러다 조선을 망하게하고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고 말지만 그들 대부분은 일제강점기때 친일파로 살아남아 조선때와 마찬가지로 호의호식을 누린다.
명성황후의 잘못된 점도 대부분 이런 조선사대부들 무책임한 권력놀이 책임이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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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혼란의 시기에 조선 왕은 고종이었다. 그러나 고종은 이 시기의 주역은 아니었다. 초기 십년은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주인공이었고 그 이후는 오랫동안 민비로 불리어왔던 오늘 이야기의 주역 명성황후가 주인공이 된다.
자~~
지금부터 그런 그녀의 궤적을 찬찬히 쫒아 가 보자!
흥선대원군은 집권하자마자 왕비를 간택한다.
이때 흥선대원군의 눈에 쏙 든 여인이 있었다. 경기도 여주 출신 민자영이었다. 대원군은 그동안 안동김씨, 풍양 조씨들의 세도정치에 치를 떨었기 때문에 외척의 발호를 없애려면 왕비 집안은 최대한 한미하고 외척 수도 적어야 했다.
여흥 민씨인 자영의 집안은 조선 땅에서 알아주는 명문 가문이었다. 그러나 부모가 일찍 죽어 그녀는 일가붙이 하나 없는 혈혈단신 외톨이였다. 가문의 세력이 대원군이 바라는 만큼 거의 없다 할 정도로 미약했다.
대원군이 생각하기에 이런 여자가 왕비가 되어야 했다. 그래야만 더 이상 외척의 발호를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대원군은 흔쾌히 민자영을 며느리로 맞아 들였다.
그러나 대원군의 이 판단은 완전한 오판이 되고 만다.
앞으로 써 나가겠지만 조선의 국모가 된 명성황후에게 민씨 세력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고종이 장성하자 명성황후는 고종을 조종하여 깊숙히 나랏 일에 관여하며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과 사사건건 대립하기 시작한다.
지금부터 명성황후 행적을 뒤따라 가보면 대원군 이후의 시대가 적라하게 펼쳐진다.
나는 새도 떨어뜨리던 대원군의 위세는 어떻게 보면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게 무너지고 만다. 권불십년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대원군 집권초기 부터 시작한 서원철폐는 1871년에 전국에 47개소만 남기고 철폐를 완결 짓는다. 이에 성리학에 찌들대로 찌든 유학자들의 거센 반발이 일어난다.
특히 골수 성리학자였던 위정척사의 대표주자인 최익현이 반발이 가장 거셌다. 최익현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를 강력하게 비난하는 상소를 올린다. 이 상소가 대원군을 물러나게 하는 빌미가 되고 만다.
대원군의 가장 큰 개혁이 대원군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역시 조선은 유교사대부의 나라였다. 썩어도 준치라고 조선사대부들은 흥선대원군이 기세등등할 때는 조용히 죽어지내다 대원군 힘이 빠졌다 싶을 때 들고 일어 섰다.
최익현이 그 일에 앞장 섰다.
최익현은 대원군이 대외통상수교거부정책을 할 때 까지는 동반자였지만 뼈속 까지 유교 중화주의에 젖어있었다. 그에게 중국 유학자들을 모시는 서원철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최익현의 정신세계는 오로지 중화사상에만 머물러 있을 뿐 다른 모든 세계는 배척해야 할 오랑캐에 불과했다.
물론 최익현이 일본및 외세에 절대 굽히지 않았고 일본에 까지 끌려가서 대마도에서 죽은 위정척사의 의기는 높이 살만하다. 그러나 최익현은 중국도 외세라는 생각을 끝까지 하지 못했다.
이런 최익현을 대원군에 대항하는 상소를 처음으로 올리게 만든 것이 명성황후라는 설이 있다.
명성황후는 고종이 스물살이 되자 대원군을 몰아내고 친정을 해야 한다면서 고종을 자꾸 꼬두겼다. 하지만 심약한 고종은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 준 아버지를 내 칠 수 없었다.
이때 명성황후는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를 전국에 47개만 남겨놓고 단행한 것에 불만이 많고 반발하던 유학자 중 가장 강경하고 강직한 최익현에게 대원군을 비난하는 상소를 쓰게 했다는 것이다.
어쩌든 이 상소를 시작으로 대원군에 대한 비난 상소가 봇물처럼 터지고 고종의 친정을 주장하는 세력이 힘을 얻는다.
이때는 흥선대원군을 발탁하고 못 다한 효명세자의 개혁을 같이 이루어 낸 조대비도 대원군과 등을 돌리고 대원군의 정적이 되어있었다.
최익현의 상소를 시작으로 비로소 대원군에 대항하는 연합세력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명성황후를 필두로 한 민씨세력, 최익현을 비롯한 사대부 성리학자들, 조대비의 조씨세력 등 이 연합군의 대표 명성황후는 기어코 고종을 꼬두겨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게 만든다.
그런데 당시는 실질적으로는 흥선대원군은 섭정공으로서 모든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현실적으로는 공식적으로 어떤 직책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고종이 대원군을 내 칠 명분도 없었다.
고종이 고육직책으로 내 놓은 것이 흥선대원군의 궁실 전용 출입문인 금호문(金虎門)을 막아 버린 것이었다.
문 하나 막아 버린 것으로 십년간 조선팔도를 호령하던 대원군의 시대는 그렇게 허무하게 막이 내리고 만다. 참으로 허술하기 짝이 없는 조선의 권력세계였다.
어쩟든 권불십년이란 말이 딱 맞아 떨어졌다.
드디어 명성황후 시대가 열렸다.
명성황후 주위로 민씨 세력들이 구름처럼 몰려 온다. 명성황후는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양오라버니인 민승호에게 관직을 내리는 것을 시작으로 계속 민씨들을 등용했다.
다시 조선에 민씨 세도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일본, 중국은 개항을 하고 근대산업국가로 나가고 있는데 조선은 다시 세도정권시대로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참으로 안타가운 조선이었다.
이제부터 더 기가막히는 일들이 조선에 벌어지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