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왕사(四天王寺(址)>
'사천왕'을 명칭으로 삼은 사찰이고, 도심에 있다. 사천왕을 명칭으로 삼지 않은 우리 사찰은 절마다 사천왕상이 있는데, 명칭으로 삼은 이곳에는 사천왕상을 찾기 힘들다. 도다이지에도 본당 뒷편에 있었다. 도리이를 통과하여 들어온 절에서 못 만났으니 다음에 다시 가봐야 할 거 같다.
1. 사찰대강
명칭 : 사천왕사(시덴노지)
大阪府大阪市天王寺区四天王寺1-11-18
電話:06-6771-0066
입장료 : 300엔
방문일 : 2023.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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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로 불탄 거 외에 최근에는 2차 세계대전 때 폭격으로 거의 불타 다시 지었다. 우리만 6.25등 전쟁으로 문화재 손실을 입었는가 했는데, 일본도 전쟁으로 훼손을 당했구나, 싶으니 신기하다. 임진왜란 때 우리 국토에 들어와 그렇게 많은 걸 훼손하더니, 자신들이 일으킨 전쟁의 댓가로 안방이 훼손되었으니 하소연할 데도 없게 되었다. 훼손에 동정도 얻지 못하는 것이 우리와 다르다고 할까. 그래도 문화재의 훼손은 인류역사의 훼손이라 안타까운 마음이 인다.
우리 사찰과는 참 많이 다르다. 사찰에 있어서는 우리와 중국과의 거리보다 일본과의 거리가 더 먼 것처럼 느껴진다. 우선 절안에 세 가지가 안 보인다. 마당에 나무가 없고, 불당에 단청이 없고, 천왕문에 사천왕상 찾기가 힘들다.
1) 사찰 소개
오사카에 위치한 아스카 시대의 사찰. 시텐노지는 우리말로 "사천왕사"다. 호류지와 함께 백제의 건축 양식 영향을 받은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주요 건축물들이 모두 파괴되어 복원하였다.
위치는 오사카시 텐노지구, 텐노지역 근처에 있다. 텐노지역의 역명도 시텐노지에서 따온것.
서기 578년에 쇼토쿠 태자가 백제로부터 장인 세 사람을 받아들여 절인 시텐노지를 건축하게 하였고 593년에 완성되었다. 이는 호류지보다 이른 것이다. 아스카데라가 역사상 일본 최초의 사찰이지만 사라졌다면,[3] 시텐노지는 최초의 관사이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사찰이다. 그러나 1576년에 있었던 화재로 전체 가람이 완전히 소실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재건되었다. 이 때문에 건물 자체는 호류지가 더 오래되었다.
에도시대를 거치면서 시텐노지 역시 계속 증축되었으며, 금당과 탑 등의 건축 양식 역시 바뀌었다. 사실상 사진으로 볼 수 있는 시기에 이르러서는 공포의 형식이나 기둥의 배치조차 바뀌어 지붕이나 하앙 정도만 옛 흔적이 남아있던 것으로 추측된다. 다만 가람의 배치만큼은 창건 그대로다. 지금도 시텐노지식이라고 함은 강당과 금당, 탑, 정문이 일직선으로 놓여져 있는 배치를 뜻하며, 백제식 가람배치라고 부른다.
이후 1934년에는 태풍 등으로 큰 피해를 입었으나 복구하였지만 결국 태평양 전쟁 때는 미군의 폭격으로 인해 탑과 정문, 금당, 남측 회랑이 완전히 불타버렸다. 이후 일본 정부에 의해 셋 다 아스카 시대의 양식으로 고증하여 철근 콘크리트로 복원을 하고 말았다.(…) 양식을 되돌리는 것이야 종종 있는 일이지만 콘크리트라니... 콘크리트 건축물은 그 무게 때문에 기초공사를 하기 위해 땅을 다 파해쳐야 한다. 이 과정에서 과거의 흔적이 남아있는 주춧돌과 기단은 제거되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이라는 별명이 있던 건축 업체 곤고구미의 상징이 바로 이 시텐노지다. 시텐노지를 건축한 세 명의 목수 중 한 명인 금강중광(金剛重光: 곤고 시게미츠)이 일본에 남아 대대손손 시텐노지의 증축과 유지보수를 하게 되었고, 이 것이 곤고구미의 시작이다. 에도시대까지 곤고구미는 시텐노지의 유지보수를 전담해 왔기 때문에 시텐노지로부터 매년 정해진 돈을 받아 회사를 유지해왔다. 시텐노지의 완성 이후로도 계속 보수와 증축을 하였으며, 1576년에는 시텐노지 전체가 불에 탄 것을 재건한 기업도 곤고구미다. 그러나 1868년에 메이지 유신 직후에 내려진 "신불 분리령"에 의해 시텐노지는 소유한 사원의 토지를 모두 잃고, 곤고구미도 고정수입을 잃게 되었다. 그래도 1934년에는 태풍으로 무너진 시텐노지의 탑을 재건하는 등의 일을 하였다. (나무 위키 전재)
2) 四天王寺(してんのうじ)は、大阪市天王寺区四天王寺にある和宗の総本山の寺院。山号は荒陵山(あらはかさん)。本尊は救世観音(ぐぜかんのん)。聖徳太子建立七大寺の一つとされている。新西国三十三箇所第1番札所のほか多数の霊場の札所となっている。(일본 야후재팬 위키피디아)
우리 홍살문처럼 중요하거나 성스러운 공간에는 어디나 있다. 당연히 신사는 물론 사찰에도 예외없이 서 있는 도리이. 중국 패루와 우리 홍살문의 기능과 비슷하다. 다만 어떤 곳에서는 여러 개가 겹으로 서 있어 세우는 방식에 차이가 있다. 근원은 인도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본 카페 헤이안 신궁 조 참조)
서대문
사천왕이 있어야 할 자리에 탱화가 있다. 부처님과 그 제자들을 그린 그림이다. 사천왕사에 사천왕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아마 오른쪽 입구 쪽에 있는 거 같다. 백제식 가람배치이고, 재건 때 아스카식으로 이루어졌다는데, 여러 모로 한국 사찰과 다르다.
솔가지 판매. 공양물인 거 같은데, 우리 사찰에서는 못 보던 것이다. .
초를 준비하고
境内中央南寄りに回廊に囲まれた中心伽藍があり、その北に六時堂(六時礼讃堂)、東に聖徳太子を祀る聖霊院(しょうりょういん)がある。境内西部の一画は四天王寺中学校・高等学校の校地となっている。境内の北側は、東方が庭園のある本坊、西方が墓地となっている。境内南端と東端の入口にはそれぞれ南大門、東大門が建つが、西の入口には門ではなく石鳥居が建ち、西大門はその鳥居をくぐった先(東)に建つ。南大門が本来の正門であるが、「極楽浄土の入口に通じる」と信じられた石鳥居からの参拝者も多い。
中心伽藍は南から北へ中門(仁王門)、五重塔、金堂、講堂を一直線に配置し、中門の左右から出た回廊が講堂の左右に達する「四天王寺式伽藍配置」を踏襲したものとなっている。これらは第二次世界大戦後に再建され、1963年(昭和38年)に落慶法要が営まれた鉄筋コンクリート造建築だが、日本の飛鳥時代、高句麗、六朝などの建築様式を加味して創建当時(6世紀末)の様式に近付けようとしたものである。設計は建築史家藤島亥治郎[19]。
金堂 - 1961年(昭和36年)3月再建。入母屋造で屋根は上下二重とする。中門、講堂と同様、錣葺とし、鴟尾を乗せる。外観は法隆寺金堂に似るが、裳階(もこし)を付さない点が異なっている。内部には中央に本尊救世観音菩薩(ぐぜかんのんぼさつ)像、向かって左に舎利塔、右に六重塔を安置し、仏壇周囲に四天王像が立つ。周囲の壁面には中村岳陵筆の「仏伝図」の壁画がある。基壇下には青竜池があるという。金堂は新西国三十三箇所第1番札所。西国三十三所番外霊場札所。河内飛鳥古寺霊場第1番札所。摂津国八十八箇所第25番札所。摂津国三十三ヶ所第33番札所。神仏霊場巡拝の道第43番札所となっている。
本尊 - 四天王寺の本尊は、近世以前の史料には「如意輪観音」とするものが多いが、現本尊は救世観音と称されている。彫刻家平櫛田中の指導で造像されたもので、左脚を踏み下げて座す半跏像である。こうした半跏形式の菩薩像は右手を頬に当てる「思惟像」(しゆいぞう)が多いが、当寺の本尊像は右手の掌を正面に向ける施無畏印とする。なお、仏壇四隅に立つ四天王像は仏師松久朋琳・宗琳の作である。
五重塔 - 現在の塔は1959年(昭和34年)再建の8代目。「六道利救の塔」ともいう。壁面には山下摩起筆の仏画がある。舎利塔が奉安されている5重目まで階段で上がれるようになっている。
講堂(講法堂) - 入母屋造単層。堂内西側を「夏堂」(げどう)、東側を「冬堂」(とうどう)と称し、それぞれ阿弥陀如来坐像(松久朋琳・宗琳作)、十一面観音立像(佐川定慶作)を本尊とする。周囲の壁面には郷倉千靭筆の「仏教東漸」の壁画がある。
龍の井戸
西重門
東重門
回廊
中門(仁王門) - 大日本相撲協会(現・日本相撲協会)による寄進。門の正面左右には松久朋琳・宗琳作で日本相撲協会東西会が寄進した金剛力士(仁王)像を安置することから仁王門とも呼ぶ。入母屋造単層で、屋根は段差を付けて瓦を葺く「錣葺」(しころぶき)とし、棟上に鴟尾(しび)を乗せる。仁王像の大きさは奈良県の東大寺南大門仁王像に次ぐものである。
六時堂(重要文化財) - 六時礼讃堂とも呼ばれる。中心伽藍の北に位置する。入母屋造、瓦葺き。元和9年(1623年)徳川秀忠による建立。以前の六時堂が焼失した後、椎寺・薬師堂(境内北西、大江小学校付近にあった)を移築したものである。椎寺とは天慶6年(943年)に建立された四天王寺の別院であり、薬師堂(薬師院)と普門院(現:元三大師堂)からなっていた。六時堂の堂内には薬師如来坐像と四天王像が安置されている。西国薬師四十九霊場第16番札所。
亀の池
石舞台(重要文化財) - 元和9年(1623年)再建。六時堂の手前の「亀の池」の中央にある。石舞台は「日本三舞台」の一つとされる(他2つは、住吉大社の石舞台、厳島神社の平舞台)。この舞台では毎年4月22日の聖霊会(聖徳太子の命日法要)の日に雅楽が終日披露される。四天王寺の雅楽は、宮中(京都)、南都(奈良)と共に三方楽所とされた「天王寺楽所」によって伝えられ、雅楽の最古の様式を持ち、現在は「雅亮会」が伝統の様式を継承している。(야후재팬 위키피디아 전재)
나무가 있는 곳은 이곳 외당까지만이다.
절 안으로 들어서는 문
금당
금당 안에 천황도 모시고 있다. 금당 안의 불상은 '구세관음'이라고 한다.
금당 안 불공
5중탑
5중탑 1층 내부. 부처님 공양물에 술도 있다. 우리와는 다르다.
5중탑
아래 묻힌 것은 사찰 발굴 당시의 유물인 거 같다.
회랑
천정에 매달린 등이 우리와 완전 다르다. 영구적일 거 같은, 비쌀 거 같은 등이다. 지등을 다는 우리 풍속과는 다르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러나 산자의 현세복록과 사자의 극락왕생을 비는 마음은 같은 거 같다.
마당에는 잔 조약돌이 깔려 있다. 이쁘고 부드러운 돌이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마당에 잔디를 심지 않고 흙을 그대로 두었다. 흙마당에서 반사되는 햇빛을 처마 안으로 들이고 복사열로 이는 바람으로 통풍을 일으키기 위해서이고 생활의 공간으로서의 쓰임새를 중시해서다. 여기 잔 돌은 무슨 연유일까. 아무래도 큰스님 참선에 방해되는 사람들의 접근을 금지하기 위해서 아닐까,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마당 안에 나무도 없는 것과 연관될 거 같기도 하다.
3. 관람후
한국의 사찰과 맥락을 같이 하는 면이 있으면서도 후세에 일본식으로 많이 변형된 절이다. 근처는 모두 사천왕사, 덴노지 천지이다. 역사 이름이 덴노지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도 시덴노지다. 심지어 시덴노지대학도 있다. 한국의 어느 사찰보다도 지역민의 삶 속에 깊이 파고든 절이라 할 수 있다. 일본 문화 속의 절의 모습을 배우는 데 매우 요긴한 일본 문화의 핵심이다. 공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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