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어 키건 <맡겨진 소녀>의 아주 짧은 독후감 / 이훈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추천 받아서 ‘밀리의 서재’에서 검색했더니 오디오북만 올라왔어요. 들어 보려고 했는데 안 되더라고요. 읽는 거랑은 완전히 달라서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어요(아마 낡은 세대여서 그렇겠지요?). 그래서 몇 분 못 가 멈추고 공립 도서관에서 검색했더니 다 대출 중이어서 세 군데다 예약해 놨어요.
그런데 이 작가의 다른 단편 <맡겨진 소녀>(이것도 ‘밀리의 서재’ 오디오북에서 들을 수 있어요.)도 예약해 뒀는데 사흘이 지나자 책이 들어왔다는 연락을 받고 바로 빌려서 집으로 오면서 읽기 시작했어요. 책 뒤표지에 “애정 없는 가족으로부터 먼 친척 부부에게 떠맡겨진 소녀가 인생 처음으로 마주하는 짧고 찬란한 여름”이라고 해 놨는데 소설 내용을 제대로 옮겼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얼추 맞는 얘기이기는 해요. 글쎄, ‘애정 없는 가족’이라고 했는데 그렇다고 하기보다는 가난한 데다 아이들이 많고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서 자식에게 일일이 관심을 쏟지 못한다고 해야 맞지 않을까 싶어요. 내가 어릴 때 보통의 가정에서 부모가 자식에게 했던 일을 떠올리면 이 소설에서 소녀를 맡은 부부처럼 자상하지는 못했다는 점에서 저런 요약이 틀린 것은 아니나 나로서는 받아들이기가 좀 어려워요. 무심도 사랑의 다른 방식이 아니냐고 우리 부모의 편에서 억지를 부리고 싶어요. ‘찬란한’이라는 말에도 과장과 왜곡이 섞여 있는 듯해요. 처음 겪는 일이 많고 그래서 소녀가 성장하는 과정이 잘 드러난 것은 맞아요. 그래서 관심과 돌봄이 세상을 좋게 만들어 준다는 걸 실감하게도 해 줍니다. 그렇지만 찬란하기만 한 것은 아니에요. 이 소녀를 맡은 부부의 슬픔도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까요. 섬세하고 예민한 소녀로서는 놓칠 수가 없지요. 사실, 찬란 일색이기만 하다면 삶의 실상과는 어긋나게 마련이지요.
아이의 성장 과정은 이구동성이라고 할 만큼 여기저기서 다들 얘기하니까 찾아서 읽어 보세요(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118160.html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15552626&start=slayer). 그런데 내가 본 독후감이나 소개 글 가운데서는 아무도 얘기하지 않은 게 한 가지 있어요. 이 소설의 원래 제목은 ‘Foster’예요. ‘아이를 맡아서 키우다’라는 뜻이래요. 그러니까 우리말 번역판 제목은 수동태로 옮겨서 아이의 눈으로만 소설을 읽게 해 놨습니다. 소녀가 1인칭 주인공이고 화자이기도 하니까 이런 독법이 잘못됐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되면 잠시 맡아 기운 부부가 아이의 성장을 돋보이게 해 주는 역할에 머물러 덜 주목받게 되고 맙니다. 나는 이 부부의 자기 아들을 잃은 슬픔과 거기서 벗어나려는 마음의 행로를 살피지 못하면 이 소설의 반만 읽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부의 고통스러운 길을 제대로 따라잡아야 소녀의 성장도 오롯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부모도 같이 커 간다는 진실을 여기서도 확인합니다(학생이 제대로 된 선생을 만들지요. 그래서 다 선생일 수밖에요.). 영화로도 나와서 호평을 받았다는데 이 부부를 어떻게 그렸는지가 제일 궁금해요. 물론 독자가 주목한 반만으로도 그 가치는 충분합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도 빨리 읽고 싶네요.
첫댓글 제가 그저께, <맡겨진 소녀>는 도서관에서 읽고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대출해 왔는데, 그 두 권을 말씀해 주시니 아주 반갑습니다. 교수님께서 쓰신 독후감을 읽으면서 제가 생각해보지 못한 부분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교수님!
와, 벌써 읽으셨군요.
독서에 방해될까 봐 여름 동안 아이를 맡아 키운 킨셀라 부부의 '성장'은 얘기하지 않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