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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따르는 생활
함석헌
“복음에 대안매(大安賣)”라는 간판만이 아직 교회 문전에 서지 않았다. ‘간판보다 사실’이라는 금언을 아는 고로 그러함인가.
복음이 팔린다. 도매상인의 손에서 나가는 썩는 반찬같이 대염가로 팔려나간다. 이 염가의 복음을 사려고 소용이 별로 있는 것도 아니요 긴히 구하던 것도 아니로되 하도 염가니 사기로서 큰 손해야 있으랴(더구나 외양도 훌륭하니 일시 장식품으로라도 괜찮고 그러나 혹 사실 소용이 되는 곳이 있을는지도 모르고) 하는 종로 가두 야시점 앞에 방황하는 듯한 호기심의 고객이 교회문에 혹 출(出) 혹 입(入)한다. 가산의 낭매(浪賣)를 하는 자는 패가자요 그의 뒤를 따라가며 폭리를 탐하려는 자는 그와 동양(同樣)으로 사회에 해독을 끼치는 간(奸)상인이다. 기독교를 부패시키고 타락시키는 자도 복음의 헐가방매를 하려는 전도자와 그것을 사서 기리(奇利)를 얻으려는 세속적 교인들이다. 우리는 이 “싸구려, 복음이 싸구려” 하는 복음 안매상의 선전소리를 들을 때마다 또는 그것을 사기 위하여 교활한 세상의 아들들이 신성한(?) 시점 앞에서 자기네의 주머니를 더듬는 것을 볼 때마다 또는 그 염가의 기성복 기독교를 사 입은 진실한(?) 신사들이 신성한(?) 연락장 안에서 잔을 드는 양을 볼 때마다 그리고 몇 날이 못하여 낡은 신짝 버리듯이 냉담과 모욕으로써 이 복음의 겉옷을 벗어버리는 양을 볼 때마다 분개와 격노를 금억(禁抑)할 수가 없다. 예수께서 만일 오늘날 저들에게 오신다면 일찍이 바리새교인을 향하여 발하시었던 “화 있을진저!”를 아끼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는 복음의 안매(安賣)를 하는 전도자를 향하여 부르짖는다 ⎯ 누가 너희더러 복음을 팔라 하더냐. 누가 너희에게 영혼을 사들이라고 명하였더냐. 누가 너희더러 하나님의 말씀에 할인 정가표를 붙이라더냐. 누가 너희더러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을 넓히고 그 길을 평평하게 만들어 들어가는 사람이 많게 하는 선(?)을 행하라더냐. 누가 너희더러 지나가는 자를 유인 강청하여 들여 교회를 흥성흥성하게 발전시키라더냐. 누가 너희에게 하나님 나라를 너희 손으로 만드는 권세를 주더냐. 어리석고 참 딱한 자들아, 복음은(네게 만일 명령이 내리거든) 오직 있는 대로를 전하는 것밖에는 너는 아무 자격도 가지지 못한다.
성경에 있는 대로를 소개하며 네게 보인 것을 증거해야 할 것뿐이요 강박할 것도 아니고 팔 것도 아니다. 네게는 영혼을 구하는 능력도 없고 권세도 없다. 너는 다른 사람의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 간원하고 그를 위하여 네게 명령하실 때에 충실히 역사는 할지언정 네가 다른 사람의 영혼을 위하여 염려하고 네 힘으로 크리스천을 만들려고 하는 것은 분외의 일이다. 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상한 영혼’ 뿐이요 다수한 교인도 아니요 굉대(宏大)한 사회사업도 아니다. 추수 고군(雇軍)에 주지 않은 고가(雇價)도 주를 향하여 소리를 발하거늘(야고보, 5:4) 하물며 속여 감할(減割)을 당한 복음의 값이냐. 안매자는 말일의 두려움을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안가(安價)의 복음을 사가지고 교회로부터 기독교 신사의 면허증을 얻은 자들이여, 우리는 그대들을 향하여 고한다. 그대들은 위선 세례 요한의 광야의 노호(怒呼)를 재독(再讀)하라 ⎯ “독사의 종류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래의 노하심을 피하라 하더냐. 그런 고로 회개함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맘에 생각하기를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하지 말라.” (마태복음, 3:7~9) 아브라함 ⎯ 신앙의 조상이요 하나님이 그에게 특별한 언약을 하였던 ⎯ 의 자손이라는 신분을 가지고도 복음을 살 수는 없었다. 그대들이 누구관데 그대들의 이름을 가지고 크리스천의 자격을 사려는고. 그대들은 또한 베드로의 증거를 다시 들어보라 ⎯ “네 생각에 하나님이 주신 것을 돈주고 사겠다 하니 은과 네가 같이 망할지어다.” (사도행전, 8:20) 이적 행하는 권능도 그렇거늘 황(況)복음이랴. 그대들이 회개치 않으면 이미 산 줄로 생각하던 것을 잃을 뿐 아니라 그대들의 은과 함께 망할 것을 기억하고 두려워하라. 그대들은 또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읽지 않았는가 ⎯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8:11~14)
자기의 인격 덕행을 가지고 복음을 사겠다는 그대들이여, 율법주의의 바리새 성인으로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지는 못한 것을 알아두라. 또한 교회의 모든 규모(規模)를 잘 지키고 모든 사업에 열심으로 진력하는 것으로 구원을 사려는 그대들이여, 하나님은 그대들을 위하여 이미 선지자의 입을 빌어 책망하여 두었다 ⎯⎯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이사야, 1:11~15)
생명의 도를 찾으려고 번뇌하고 방황하는 영혼들이여, 그대들은 저 복음 안매자의 선전에 유혹되지 말라. 또 염가의 복음을 사가지고 가장하여놓은 기독교 신사, 기독교 청년, 기독교 학생, 기독교 사업가의 외양에도 속지 말라. 기독교를 그들의 전하는 것같이 생각하고 신앙에 들어가기를 저들같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대들도 한번 그렇게 시험하여보려고 생각하는 자는 어떤 사람을 물론하고 턱도 없는 실패를 하게 된다. 고로 산 진리인 기독교를 믿으려는 자는 적어도 다음 같은 주의를 할 필요가 있다.
첫째로 복음은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여서는 아니 된다. 살 수도 없고 살 필요도 없다. 일정한 대가를 지불하고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복음이라고는 할 수 없다. 복음이 복음 된 소이는 대가 없이 누구나 받을 수 있다는 데 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복음이 학자의 위안의 철학이나 도덕가의 수양 도덕과 달리 특히 복음이라 하는 까닭이다. 그대는 복음을 얻기 위하여 금을 낼 필요도 없거니와 동양(同樣)으로 지식을 낼 필요도, 재능 권세 기타 아무것을 낼 필요도 없다. 복음은 은혜의 선물이다. 그저 받는 것이다. 고로 신분이나 지위에 의한 차별이 없다. 누구나 능하고 누구나 가하다. 성경 중에는 이것이 명백히 적혀 있다. 독자는 몸소 성경의 좌기(左記) 구절을 찾아 참고하기 바란다.(마태복음, 3:9, 11:28, 13:33, 22:1~10 누가복음, 13:21, 14:16~24 마가복음, 2:17 요한복음, 3:16: 로마서, 3:28~30, 4:4~6, 9:24)
이 명백한 진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도자들은 기독교에 들어오는 데는 일정한 대가의 지변(支辨)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정직한 심정의 소유자를 뇌쇄(惱殺)시킨다. 그러나 오늘날은 거기 다시 일보를 더 타락하여 지변해야 한다는 그 대가를 지극히 간편 저렴한 것으로 하려고 애쓴다. “대가를 지불하여야”라는 것보다도 (약간) “지불하기만 하면”이라는 것이 현금 교회의 소론이다. 그렇게 하여서라도 교인을 모집하지 않으면 교회를 지지하여 갈 수 없으리만큼 오늘날 교회는 타락하였고 무력하고 생명이 없다. 교회가 지은 죄는 여러 가지지만은 그중에도 큰 것의 하나는 이 복음에 값을 붙였다(붙이되 될수록 저렴하게)는 것이다. 복음은 거저 받는 것은 되나 염가로 사는 것은 아니다. 거저 받는 것은 비천하여서가 아니요 값으로써 헤아릴 수 없이 고귀함으로써다.
고로 제2로 기독교를 이행도(易行道)라 오상(誤想)하지 말라. 기독교는 어떤 의미에서는 인생이 밟을 수 있는 길 중 최난 최험의 행로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 자신이 이미 여기 대하여 명백히 말씀하셨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태복음, 7:13~14)
그러나 독자 중에는 혹「마태복음」 11장 말절을 들어 그리스도의 말에 모순 있음을 반문하는 이도 있을 줄 안다. 과연 모순이라면 모순이다. 전자에서는 명백히 좁고 험하다 하면서 여기서는 쉽고 가볍다 한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진의를 깨달을 때에 우리는 이것을 이대로 수긍하게 된다. 즉 그리스도의 명령대로 그의 멍에를 메고 그를 배울 때에 곧 이미 맘이 편히 쉼을 얻은 것을 깨닫는다. 우리의 가진 바 소유를 다 팔아가지고 나선 때에 곧 지극히 귀한 보패(寶貝)는 이미 내 것이 되었음을 깨닫는다. 고로 우리는 복음의 안매자가 말하는 것같이 웬만웬만한 대가가 필요치 않을 것을 아는 동시에 또 드러누워서 기독교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성서를 정독하여 보면 기독교는 모든 사람에게 무차별로 개방되어 있는 한편에 또 매우 엄격한 요구가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복음서중 나타난 것을 대체로만 들어도 여하하다. (「마태복음」, 7:21, 8:18~22, 10:34~39, 11:29, 13:11~12, 16:24~26, 18:34, 19:16~22, 2:11~14, 25장의 세 가지 비유 「누가복음」, 9:23~27, 9:57~62, 14:25~35, 18:28~30:「마가복음」, 4:11, 8:34~35절, 10:17~25)
고로 제3으로 인생을 전연 희생할 각오가 없어서는 아니 된다. 기독교는 수양도 아니요 개량도 아니다. 한 생활에서 전연 다른 생활로 변함이다. 거듭남이다. 그런 고로 인생 전체를 들어 제단 위에 놓아야 한다. 약간의 부, 약간의 지식, 약간의 재능, 약간의 사업 심지어는 아내 하나, 남편 하나, 며느리 하나, 사위 하나로, 기독교를 팔고 사고하는 자들은 마땅히 상기의 성경 본문을 찾아 숙독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그중「마태복음」, 10:34~39 (혹은「마가복음」, 8:35「누가복음」, 14:25~35)을 읽어보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그렇게 수월한 일이 아님을 알 것이다.
일찍이 역사 있은 이래로 인생을 대하여 한 요구 중에 이에서 더 엄격한 것이 없었다. 부모ㆍ형제ㆍ처자를 버리고 자기를 이기고 제 십자가까지를 지지 않고는 크리스천이라고 할 수가 없다. 인생은 이것을 제하고 무엇이겠느냐. 그런 고로 인생 전부를 포기하여야 희생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지불할 필요가 없는 대신에 전부를 드려야 한다. 과연 그리스도는 그의 사(死)로써 생명의 길을 열었다. 우리가 그 이하의 것을 가지고 그에게서 새 생명을 얻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자들이여, 안매자의 말을 듣고 이 의외에 험한 함정에 빠지지 말라(나는 함정이라고 한다. 전도자들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대들은 크리스천이라고 자백하기 전에 위선 비통한 각오가 필요하다.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누가복음, 9:57~62)
예수를 믿어 풍부한 교양을 얻으려는 자는 가라. 사회에 유익한 사업을 하려는 자도 가라. 무슨 이익을 얻으려는 자는 첫째로 가라. 예수는 오직 자기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고 자기에 의하여 새로 살기를 원하는 자만을 허락한다. 크리스천은 (문자대로) 생명을 버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
성서조선 1929. 9월, 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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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20; 19-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