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숙 수필집_향기에 잠기다
옥수수
치과에서 치료를 받고 나오니 늦여름 파란 하늘에 햇빛이 밝다. 근처에 있는 전통시장 앞을 지나는데 시골 할머니가 옥수수를 무더기 지어 놓고 팔고 있다. 걸음을 멈추고 좌판 앞에 선다. 며칠 전에 옥수수를 먹고 싶다고 하던 아들의 말이 떠올라 여덟 개씩 모아 놓은 두 무더기를 산다.
집에 돌아와 싱크대 앞에서 보석함을 열듯이 옥수수 껍질을 연다. 부드러운 수염이 옥수수자루를 명주 망사(網絲)처럼 촘촘히 두르고 있다. 손가락 끝에 신경을 모아 한 올도 남기지 않고 수염을 벗겨 낸다. 상앗빛을 띤 알알이 한 줄 한 줄 가지런히 드러난다.
아들이 곁에 와서 한마디 한다. “내가 옥수수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좀 더 일찍 사 주지 않고.”
순간, 먼 들녘을 휘감아 도는 바람 소리가 귓전에 스친다. 그 바람 소리 사이로 들리는 음성이 있다.
아들이 대여섯 살 때였다. 저녁밥을 먹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드니 어머니 음성이었다.
“승재 먹이라고 옥수수 심었다.”
이 늦은 시간까지 옥수수를 심고 있었다니, 젖은 솜뭉치로 누르는 듯 가슴이 먹먹했다. 당신은 이가 성치 않아 옥수수를 맛나게 먹을 수 없지만 귀여운 외손자가 먹는 모습을 그리며 굽은 허리를 더욱 굽혀 씨앗을 뿌렸을 것이다. 마지막 한 알을 땅에 묻고 나서 흙 묻은 손을 씻기도 전에 전화기부터 찾았으리라. 풍성한 수확을 약속 받기라도 한 것처럼 기쁨에 들뜬 목소리였다.
어머니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옥수수를 심었다. 옥수수는 비옥하고 너른 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옆의 땅은 넘보지 않고 하늘만 바라보고 자란다. 그 직립의 성질을 아는지라 집 앞밭 가장자리에다 빙 둘러 옥수수를 심었다. 기름진 땅은 다른 작물에게 양보하고 둘레에 묵묵히 서 있는 자세가 마치 보초를 서고 있는 파수꾼 같았다. 다른 사람의 안위를 위해 자신의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는 모든 욕망을 잠재우고 있는 묵연한 모습….
옥수수는 돌보는 손길을 달리 요구하지도 않는다. 농부의 손길이 와도 그만 안 와도 그만, 척박한 환경에서도 까탈 부리지 않고 스스로 알아서 쑥쑥 자란다.
다 자라면 양쪽 겨드랑이에 어긋나게 뾰족 주머니가 솟는다. 계절 감각을 잃어버린 산타클로스가 거꾸로 세워 매달고 간 걸까. 어린이의 양말만한 주머니 속에 들어앉은 자루에는 아름다운 진주알이 총총히 박혀 있다. 자루가 주머니를 가득 채우면 알들은 부처의 사리처럼 은은한 빛을 머금는다. 그래서일까. 옥수수 구수한 맛은 많은 이의 입맛을 사로잡는다.
옥수수 안친 솥을 가스레인지에 얹고 불을 켠다. 확 인 푸른 불길이 꽃받침처럼 솥 밑바닥을 감싼다. 솥 앞에서 서성이다가 식탁 의자에 앉는다. 불길을 받아 익어가는 옥수수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입 안에 침이 고인다.
내가 예닐곱 살 무렵이었다. 그해에는 무슨 까닭이었는지 들녘에 있는 밭에다 옥수수를 심었다. 그해 따라 예기치 않은 여름 태풍이 몰아쳐 왔다. 휘몰아친 비바람에 옥수숫대는 모조리 쓰러지고 부러져 쑥대밭이 되었다. 태풍이 물러가고 거짓말같이 고요해진 이튿날, 어머니는 쓰러진 옥수숫대를 일으켜 세우고 드러난 뿌리에 흙을 돋워 주었다. 정성을 들인 보람이 있어 며칠 뒤에는 겉보기에 멀쩡한 모양새를 갖추었다. 그러나 거두어들인 옥수수는 쭉정이뿐이었다.
방학을 맞아 어머니를 따라 외가 동네 ‘검단약물탕’에 갔을 때였다. 지금이나 그때나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장사꾼이 몰려든다. 그 장사꾼들 틈바구니에 옥수수를 파는 시골 할머니가 있었다. 자연 내 눈길은 옥수수에 가 멎었다. 그 옥수수는 우리 집에서 먹던 것과 크기와 색깔이 달랐다. 자루의 크기는 절반 정도요, 색깔은 상앗빛이 아니라 자줏빛이었다. 저 옥수수 맛은 어떨까? 쉬 눈을 떼지 못하고 지나치려는데 뜻밖에도 어머니가 옥수수 한 묶음을 사서 내 손에 쥐어 주었다.
그러고 나서 약물을 먹었는지, 외갓집에는 들렀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옥수수 맛이 고소했는지 달콤했는지도 떠올릴 수 없다.
다만 태풍이 옥수숫대를 싹 쓸어 가 버린 그해 여름, 잘 익은 옥수수를 먹이고 싶어 했을 어머니의 마음만이 오롯이 살아난다. 그 때 일을 생각하면 옥수숫대는 아기를 등에 업고 밭두렁에 서서 밭작물을 둘러보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되살아난다.
삶은 옥수수를 쟁반에 담아 식탁에 올려놓는다. 기다리고 있던 아들 녀석이 잘 생긴 옥수수를 두 손으로 잡고 하모니카를 분다. 음계의 변화가 심해서인지 하모니카의 좌우 움직임이 경쾌하다. 흥겨운 가락이 흐르는 것만 같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다가 나도 못생긴 옥수수 하나를 집어 들고 하모니카를 불기 시작한다. 엄마와 아들의 이중주가 가슴에서 화음을 이룬다. 눈빛을 주고받으며 연주하자 아름다운 선율이 집 안을 가득 채운다.
이제는 시장에 가서 사다 먹을 수밖에 없는 옥수수다. 옥수수를 무척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 내일모레 치과에 갔다 올 때에도 전통시장 앞 좌판을 유심히 둘러봐야겠다. 먹음직스러운 옥수수가 있으면 몇 자루는 따로 간수하였다가 어머니 유택에도 가져가야겠다. 옥수수자루를 두 손으로 잡고 눈웃음을 지으며 하모니카를 부는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어린다.
아들과 나와 어머니, 삼대가 연주하는 하모니카 화음이 반짝이는 강물이 되어 가슴에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