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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문(祭文)
고봉 기대승에 대한 제문 /정염(丁焰) 만헌(晩軒)
임신년(1572, 선조5) 12월 27일에 능성 현령(綾城縣令) 정염은 삼가 고봉 기 선생의 영전에 제사를 올립니다.
아, 강학(講學)의 공이 세상에 도움이 된다는 것에 대해 저는 굳이 옛 시대에서 근거를 찾아 알아볼 것도 없이 당장 오늘에 경험하였습니다. 세상 사람 중에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초야에 물러나 자기의 존재를 숨기기에 힘쓰는 자는 그 덕이 참으로 훌륭하긴 합니다. 그러나 그를 아는 사람이 적을 수도 있으니, 그를 아는 사람이 적으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넓지 못할 것이 당연합니다.
공께서는 높은 재기(才器)와 큰 역량으로 처음에는 문자(文字)의 공을 바탕으로 하셨으나, 뒤에 자못 도학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고 선각(先覺)을 만나 더욱 그 길을 단단히 믿으셨습니다. 고증은 극도로 해박하게 하고 논변은 지극히 자상하게 하셨으며, 나아가 자신이 얻은 도의 정수를 혼자서만 간직하지 않고 기꺼이 남들에게 일러 주셨으니, 여느 사람들처럼 학문을 가지고 세상에서 명예를 구하는 도구로 삼지 않으셨다는 것은 거론할 것도 못 됩니다.
게다가 벼슬길이 창창해도 그것을 꼭 해야겠다는 뜻이 없으셔서 마음에 어긋나는 일이 있으면 애써 본심을 억누르면서까지 억지로 벼슬하지는 않았으니, 잠시 사이에 나왔다 물러갔다 하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대개 어려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문(斯文)의 책임을 스스로 짊어졌기에 머뭇거리며 관망하는 뜻이 없고 과감하고 호탕한 기운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가운데 처음에는 그렇지 않다고 여긴 자도 있었으나 차츰차츰 믿게 되어 질문할 내용이 있을 때면 반드시 공을 찾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습속이 더럽고 잘못된 줄을 알고 옛 도가 행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데에는 공의 힘이 많이 작용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강학의 효과가 아니겠습니까. 더 긴 수명을 누리셨다면 그 성취가 과연 어떠하였겠습니까.
저는 실로 외람되고 천박하여 도의(道義)의 벗은 되지 못했지만 버리지 않고 거두어 주신 은혜를 오래도록 입은 덕에 얼굴을 뵙고 말씀을 나누었으니, 저로서는 큰 다행이었습니다. 다만 번잡한 공무에 매여 사모하는 마음을 펴지 못했는데, 이제 그 모습을 다시는 뵙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애통하고 안타까운 심정이 어찌 산 자를 위한 것이겠습니까. 이에 조촐한 제물로 거칠게나마 보잘것없는 정성을 표합니다. 아, 슬프오이다. 부디 흠향하소서.
[주]정염(丁焰) : 1524~1609.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군회(君晦), 호는 만헌(晩軒)이다. 23세 때 정황(丁熿)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성균관 직강을 거쳐 안성 군수(安城郡守), 광주 목사(光州牧使), 고부 군수(古阜郡守)를 지냈다.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을 평난한 공로로 1590년(선조23)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고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녹선되었다. 저서에 《만헌집》이 있다.
祭文[丁焰晩軒]
維歲壬申十二月二十七日。綾城縣令丁焰。敬祭于高峯奇先生之靈。嗚呼。講學之功。有補於世。吾不待徵於古。而卽驗於今之時矣。之潛退不伐。務自韜晦者。其德固盛矣而知之者或尠矣知之者尠。則其及人。宜未廣也。惟公才器之高。力量之雄。始因文字之功。頗泝道學之源。賴遇先覺。益信其歸。攷據極其博。辨論極其詳。方且不自靳秘。樂與人誦之。其不爲希世寵之資者固未足論也。而官業有裕。亦無必爲之志。有所違於心。則亦未嘗抑志龜勉也。少間做進退。已非一矣。蓋不懼其難。而以斯文自任。無遲佪顧望之意奮決浩壯之氣。始或謂其不然。而稍稍信之。有所質問必以公爲歸。知習俗之鄙謬。意古道之可行者。公之力。與有多焉。玆豈非講學之效歟。假之以年。所造當如何也。焰實猥卑。雖不得爲道義之交。久蒙不棄。接英眄奉良晤。其自幸多矣。第緣官冗。未酬嚮往之素。而今其形容。不可得而復見矣。慟惜之情。豈爲生者爲者。玆因薄奠粗敍微衷。嗚呼哀哉。尙饗。
고봉 기대승에 대한 제문 /김계휘(金繼輝) 황강(黃岡)
세차 계유년 1월 27일에 예조 참의 김계휘는 삼가 돌아가신 벗 고봉 선생에게 고합니다.
아, 하늘이 사문(斯文)에 화를 내리는 것이 어찌 이리도 혹독합니까. 몇 해 전에는 퇴계 선생께서 돌아가시더니 이제는 우리 명언(明彦)이 또 고인이 되었습니다. 하늘이 이 사람을 세상에 냈을 때에는 이 세상을 위한 뜻이 필시 없지 않았을 터인데 어찌 이다지도 빨리 빼앗아 간단 말입니까. 옛날 큰 선비로서 장수를 누린 자를 보건대, 어떤 이는 나라를 경영하고 백성을 구제하여 세도(世道)를 붙들기도 하고 어떤 이는 학설을 수립하여 도맥(道脈)을 튼튼히 하기도 하였습니다.
아, 그대의 수명은 겨우 46세로, 살아생전에는 이미 세상에 크게 쓰여 가슴속에 축적한 경륜을 펴 보지도 못했고 죽어서는 또 저술을 남겨 뒷사람의 길잡이가 됨도 없으니, 어찌하여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 풍부함에도 베풀어 쓴 것은 이처럼 적단 말입니까. 죽음과 삶, 장수와 요절이 한 번 오고 한 번 가는 그 사이를 조물주가 아니면 그 누구도 간섭하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른바 현명하고 어리석음과 선하고 악함이란 다 사람이 억지로 붙인 이름일 뿐 하늘은 실제로 화를 내리고 복을 주는 것에는 무관한 것인지, 저 푸른 하늘은 참으로 아득하여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아, 오늘날의 세상 사람들은 성리(性理)의 학문에 어두워 진정 그대가 나아간 경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퇴계는 한 시대 유림의 종장(宗匠)으로서 도학의 종통을 그대에게 맡겼고, 조정을 하직하고 돌아가면서 성상을 면대하실 때 유독 그대만을 추천하면서 학문을 좋아한다고 칭찬하였습니다. 조정에 들어와 남의 시기를 받는 것은 참으로 선비에게 늘 있는 일입니다. 더구나 학문을 좋아한다는 이 이름표는 참소하는 자의 표적이 되는 것이기에 우리 동방의 여러 원로 선생들이 모두 여기에 걸려 큰 화를 면치 못하셨으니, 우리 그대가 자주 황급하게 오가게 된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원수 사이일지라도 감히 비난하지 못할 점이 있으니, 그대의 숙속(菽粟) 같은 문장입니다. 요즘에 지으신 여러 원로들에 대한 비문(碑文), 지문(誌文), 행장(行狀)은 또한 그 솜씨를 빌려 고인(古人)에게 보이더라도 충분히 부끄러움이 없을 만합니다. 그 다음으로 어진 이를 좋아하고 선비를 반기는 정성은 역색(易色)의 정도만이 아니었으니, 배우는 자들이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추앙한 것이 어찌 한유(韓愈)와 구양수(歐陽脩)보다 못하였겠습니까.
나는 천품이 혼매하고 또 도를 배운 것도 독실하지 못하여 반평생 동안 벗에게 신임을 받지 못하였는데, 오직 그대가 문회(文會)의 일원으로 받아 주셨습니다. 그대의 언론을 듣노라면 마치 장강대하(長江大河)가 유장하게 흘러 동쪽으로 내려가는 것과 같아서 가슴속에 맺힌 답답함이 봄날의 얼음처럼 시원하게 녹는 것을 느꼈습니다. 정직함과 진실함과 넓은 식견, 이 세 가지 덕목을 갖춘 자는 참으로 성인께서 말씀하신 유익한 벗입니다. 옛사람이 “도가 쇠잔해진 세상에 태어났지만 유감이 없는 것은 오직 아무개를 알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참으로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먼저 한 것입니다.
아, 한강변 객관에서 하룻밤을 묵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더디 더디 조정을 떠날 때 나는 그래도 벗을 아끼는 마음에, ‘초야에 편히 누워 있더라도 충분히 많은 선비의 모범이 될 것이고, 또 혈기 가운데 치우친 부분을 전부 변화시켜 그 덕업(德業)을 더 높이고 넓힐 수 있겠지.’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이 길로 영영 유명(幽明)이 갈라질 줄 알았겠습니까. 그날 작별할 때의 음성과 모습이 아직도 마음에 아른거리고 눈에 선하니, 흉금은 봄바람처럼 따스하고 얼굴빛은 지는 달처럼 쓸쓸하였습니다. 아, 벗이여 가신 그대를 다시는 살릴 수 없겠지요. 우리 도를 위하고 이 세상을 위하여 슬퍼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우선 천 리 멀리 제문을 보내어 나의 사적인 슬픔을 곡합니다.
[주]김계휘(金繼輝) : 1526~1582.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중회(重晦), 호는 황강(黃岡)이다. 일찍이 경서와 사서 등을 폭넓게 읽었으며 문장에도 뛰어났다. 식년 문과에 을과로 입격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에 뽑혔다. 평안도 관찰사로 있다가 1581년(선조14)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한 주청사(奏請使)로 중국에 다녀오고, 이어서 예조 참판에 올라 경연관(經筵官)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산천ㆍ마을ㆍ도로ㆍ성지 등의 형세와 전술적인 문제점, 농작물의 생산 현황, 각 지방의 전통ㆍ연혁ㆍ씨족 원류 등을 두루 파악하여 기록으로 남겼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이조 판서로 추증되었고, 나주 월정서원(月井書院)에 제향되었다.
祭文[金繼輝黃岡]
維歲次癸酉正月二十七日。禮曹參議金繼輝。敬告于亡友高峯先生。
嗚呼。天禍斯文。何其酷耶。去歲退溪云亡。今吾明彦。又奄至於不淑。天之生此人。未必無意於斯世。何奪之速也。古之大儒能享高年者。或以經濟扶世道。或以立言隆道脈。嗟子之生世。纔四十有六。生旣不能大用於世。以展布其所蘊。沒又無著述。以爲後人之啓。迪是何稟賦之豐厚。而施用如是之嗇也。將死生壽夭。一往一來於其間。非造物者。不能管幹耶。抑所謂賢愚善滛皆出於人之强名。天實無預於降禍錫福耶。彼蒼者天。誠渺冥而難測。嗚呼。今世之人。旣眛於性理之學。固不識子造詣之閫域。退溪一代之儒宗。衣鉢之博。惟子焉是托。逮辭歸之面對。乃獨薦子爲好學。入朝見嫉。固士之常。況此題目。爲讒夫之標的。吾東方諸老先生皆不免於奇禍。宜吾子之挈挈往來者數矣雖在讎敵。猶不敢譏誚者。子之文章如菽粟。
近日所撰諸老碑誌行狀。亦足以藉手。見古人而無忸。其緖餘好賢樂士之誠不啻易色。學者仰之如泰山北斗。寧有少貶於韓文公歐陽永叔。惟余稟之昏謬。又學道之不篤。半生不見信於友朋。惟子乃許文會之辱。聽子言論。如長江大河。順流而東下。胸中已覺春氷之融釋。直諒多聞。備此三者。眞聖之所謂益矣。古人云生衰世而無憾者。惟以得識某人。誠我心之先獲。嗚呼。漢水之邊。亭館一宿。遲遲棲棲。慘然去國。友朋相愛之情。猶望其偃息乎丘園。亦足爲多士之矜式。又能盡化其血氣之偏處。以崇廣其德業。何知此行。永作幽明之隔。當日臨別之音容。尙今了然於心目。春風襟懷。落月顔色嗚呼。斯也不可作矣。爲吾道爲斯世慟者。固非一端。寄辭千里。以爲吾私哭。
고봉 기대승에 대한 제문 /김경생(金景生)
세차 계유년 2월 7일 무오에 문인 김경생은 감히 맑은 술과 때에 맞는 제물을 마련하여 삼가 고봉 선생의 영전에 제사 드립니다.
아, 선생께서 어찌 이렇게 되셨습니까. 원기가 혼연히 모여서 쉽게 흩어질 기미가 없고 대덕(大德)이 순수하게 쌓여서 반드시 장수하실 조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갑자기 사도(斯道)가 의탁할 곳이 없게 되고 후학은 귀의할 데가 없어졌으니, 참으로 천심을 알 수 없고 이치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엄정하면서도 공손하고 온화하면서도 강직하신 덕과 진실하고 밝으며 고금을 통달하신 학문, 인재를 성취시키는 즐거움과 천하를 경륜하는 공업을 장차 다시는 이 세상에서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성현의 학문이 끊어지고 시대의 기운이 쇠해진 일에 대해서야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만, 경생(景生)처럼 어리석어 향방(向方)을 모르는 사람이 귀의할 곳을 잃은 것은 이제 어찌해야 한단 말입니까. 어찌해야 한단 말입니까.
아, 소생이 선생을 만난 지는 겨우 2년이고 가까이 모시고 직접 배우는 즐거움을 누린 것은 10여 개월뿐이었습니다. 선생께서는 북으로 중국에 사신으로 가라는 명이 환수되자 남으로 고향에 돌아오는 말 등에 또 안장을 올렸으니, 조정에 나아가서는 비록 포부를 펴지 못했으나 물러나서는 장차 도를 전수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소생은 마음속으로 백 년 동안 선생을 백운정(白雲亭) 아래에서 종유하여 풍월을 읊조리며 즐겨야겠다고 생각하였는데, 하늘은 어찌 이다지도 매정하여 이 계획을 이룰 수 없게 한단 말입니까. 지난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대궐을 떠나 강가의 절에서 이틀 밤을 묵으실 때 모시고 따라가 이별하매 참담하기만 했었는데, 그때에 지극히 자상하고 진지하게 가르쳐주시며 “선한 마음만 지니고 그럭저럭 세월을 넘기면 자잘한 인물이 되고 만다.”고 경계하셨습니다. 소생은 그 가르침을 받고서 마음을 가다듬고 그에 부응하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있으니, 이제까지도 면전에서 가르침을 받는 것처럼 뚜렷합니다.
아, 애통합니다. 매당(梅堂)에서 헤어진 것이 10월 8일이고 선생께서 병환이 깊으시다는 말을 들은 것은 그달 28일이었는데, 그 뒤 12일이 지나서 비로소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스스로 생각건대 못난 소생이 은혜를 받고도 평소에 보답해 드리지 못한 데다 병환 중에 그 증세를 살펴보지도 못했고, 돌아가실 때 시신을 부여안고 매달리지도 못하고 달려가 곡하는 것도 남들보다 뒤졌으니, 이 또한 제 평생의 끝없는 슬픔이 될 것입니다.
아, 애통합니다. 성인은 시대가 아득하고 경전은 낡아 방 안에 먼지와 좀벌레만 수북하니, 갈팡질팡하는 말세에 어디로 돌아가야 합니까? 그래도 믿을 만한 것은 사문(斯文)이 없어지지 아니하고 끼쳐 주신 가르침이 아직 남아 있으니, 이를 받들어 따르며 사문(師門)을 행여 저버리지 않는 이것이 곧 구구한 저의 바람일 뿐입니다. 더 이상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아, 애통합니다. 아, 애통합니다. 부디 흠향하소서.
[주]김경생(金景生) : 1549~? 자는 자길(子吉), 본관은 언양(彦陽)이다. 1573년(선조6) 알성시(謁聖試) 병과에 입격했다. 감찰(監察)을 지냈다.
祭文[金景生]
維歲次癸酉二月壬子朔初七日戊午。門人金景生。敢以淸酌時羞。敬奠于高峯先生之靈。
嗚呼先生。胡至於斯耶。渾然元氣之會。無易散之幾。粹然大德之蓄。有必壽之徵。而斯道遽無所托。後學遽無所歸。天果不可知。而理果不可推矣。嚴恭溫厲之德。誠明貫徹之學。成就人才之樂。經綸天下之業。將不得復見於世矣。聖學之絶時運之衰。且不敢言也。如景生之蚩蠢。未知向方。而失依歸之所。尙何爲哉。尙何爲哉。嗚呼。生之得先生纔二年。而函丈之間。親炙之樂。則十餘月而止耳。北朝之命旣收。南旋之馬又鞍。進雖未施。退將有博。自以爲百年從遊於白雲之下。吟風弄月以歸也。天何不仁。使此計無所遂也。遲遲行邁信宿江寺。追別黯然。誘掖諄至。戒以徒抱善端。優游年日。不害其爲伎倆人物也。承敎警惕。懼不自副。至今依然若面受也。嗚呼痛哉。梅堂之別。十月初八日也。聞先生之病。其月二十八日也。又十二日而始聞終夫之訣。自惟無狀。受恩。不報。病不詳其證。歿不憑其尸。奔哭後於人。又以爲此生無涯之悲矣。嗚呼痛哉。聖遠經殘。塵蠧滿壁。倀倀末路。何所歸宿。有可賴者。斯文未喪。遺訓尙存。奉以周旋。幸不負乎師門。則區區之願也。復夫何言哉。嗚呼痛哉。嗚呼痛哉。尙饗。
고봉 기대승에 대한 제문 문인 /정철(鄭澈) 송강(松江)
소자(小子)가 선생을 사모한 지 오래되었으나 오늘에 이르러 더욱 생각이 간절해집니다. 그 까닭은 흐려져 가는 사류(士類)의 추향을 누가 밝히고 저하되어 가는 세상의 도의를 누가 높이겠는가를 생각할 때 높이고 밝히실 분은 오직 우리 선생이시기 때문입니다. 선생이 가신 후로는 이 세상에 그럴 만한 사람이 없으니 망천(望川) 사우(社宇)에 유풍만 방불합니다.
[주]정철(鄭澈) : 1536~1593.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이다. 저서에 시문집인 《송강집》과 시가작품집인 《송강가사》가 있다. 필사본으로는 《송강별집추록유사》와 《문청공유사(文淸公遺詞)》가 있으며, 한시를 주로 실은 《서하당유고(棲霞堂遺稿)》도 전한다. 창평의 송강서원, 연일의 오천서원(烏川書院) 별사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祭文[門人鄭澈松江]
小子之懷生夙矣。至于今日。懷之不已者。士趨之汚。孰能淑之。世道之卑。孰能升之升之淑之。在吾先生。先生去後。世無其人。望川祀宇。彷彿遺塵。
율곡(栗谷)에 대한 제문 /갑신년(1584, 선조17) 3월 성 혼(成渾)
모년 모월 모일에 창녕 성혼은 삼가 아들 문준(文濬)을 보내어 술과 과일과 쌀밥의 제수를 올려 망우(亡友) 율곡 선생의 영연(靈筵)에 삼가 제사합니다.
아, 형과 나는 정(情)은 형제간과 같고 의리(義理)는 사우(師友)처럼 중하였습니다. 약관 시절부터 서로 벗하여 이제 30년이 되었는데, 형은 몸이 건강하여 세도(世道)의 중임을 맡았고 나는 늘 병을 앓아 죽음과 이웃하여 지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형은 별세하고 나는 살아 있어서 나로 하여금 목 놓아 길이 울부짖어 하늘을 부르며 통곡하게 할 줄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아, 형의 뜻은 참으로 원대하고 학문은 깊고도 밝았으며, 재주는 영특하면서도 풍부하였고, 도량은 크고도 굳세었습니다. 하늘이 이처럼 훌륭한 인재를 낸 것은 깊은 뜻이 있는 듯하였습니다. 일찍 대도(大道)의 근원을 보고도 스스로 만족하게 여기지 않았고 백성을 구제하는 책임을 자임하여 자기 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일을 만나면 시원스레 해결하여 어려운 일로 고심함이 없었고, 남과 다투는 일이 없어 비루한 소인배들이 그 틈을 엿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와 같았던 것은 하늘이 과연 형에게 큰 임무를 맡겨서 천지가 만물을 낳아 주는 어진 마음을 우리 백성들에게 미루어 주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마침 좋은 때를 만나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마음이 맞으니,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기도 하고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반복하여 억제되었다가 드날렸던 것은 마치 북돋우고 심어 주어서 사업에 발휘하게 하려는 것인 듯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빼앗아 가서 조짐만 보여 주고 끝맺음을 하도록 해 주지 않으니, 하늘은 어찌 인자하지 못하여 형을 가지고 희롱하여 차마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끝내 곤궁한데도 구원받지 못하게 한단 말입니까.
아, 공명(孔明)과 희문(希文)이 앞에서 죽었고 백순(伯淳)과 군실(君實)이 뒤에서 죽었습니다. 국가의 치란(治亂)과 시운(時運)의 성쇠는 하늘이 반드시 현자(賢者)로써 번성하게 하기도 하고 쇠퇴하게 하기도 하여 그 사이에 사라지고 자라나게 하는 것이니, 그렇다면 하늘이 인자하지 못한 지가 이미 오래된 것입니다. 어찌 유독 오늘날만 그러하겠습니까.
아, 나는 실로 어리석고 혼몽하며 고질병까지 겹쳤습니다. 처음 형을 만나 다소 도(道)를 듣고는 스승으로 섬기려고까지 하였으니, 그렇다면 형에게서 얻은 것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근래에 늙어가면서 정의(情義)에 있어 서로 신뢰하여 더욱 깊어지고 강마(講磨)함에 있어 서로 도움이 되어 더욱 절실해졌으니, 내가 만약 형이 없었다면 자립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형도 나의 병을 걱정하고 나의 죽음을 두려워하였으며, 나도 내가 형보다 먼저 죽어 형으로 하여금 나의 전(傳)을 짓게 하리라고 생각하였는데, 지금 상도(常道)를 뒤집음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른바 하늘이란 것을 헤아릴 수 없고 이치란 것을 알 수 없습니다.
아, 세상의 길이 평탄하지 못하여 이욕(利欲)으로만 꽉 막혀 있는데, 형은 홀로 무슨 마음으로 나를 버리고 먼저 떠나가서 나로 하여금 홀로 인간 세상에 남아 여관방에서 방황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여 한밤중에 눈물을 삼키며 괴로운 마음을 갖게 한단 말입니까. 옛날 편지를 다시 꺼내어 펴 보니, 나에게 벼슬하는 의리에 대해 간곡하게 말씀해 주었는데, 그 말씀이 깊고 간절하여 나도 모르게 편지를 쥐고 울었습니다. 형은 그토록 나를 머무르도록 하였으면서 자신은 어찌 머물지 아니한 채 돌아보거나 연연해함이 없이 차마 군부(君父)를 버리고 떠나 간단 말입니까.
아, 큰 조화의 가운데에서 사생(死生)과 요수(夭壽)가 있는 것은 떳떳한 이치이니, 또다시 무엇을 한탄하겠습니까. 고향 산천에 산은 푸르고 물은 맑은데, 형은 진택(眞宅)으로 돌아가시어 마음이 순하고 편안할 것입니다. 드넓은 허공에 뜬구름처럼 마음대로 오가고 한가로이 흩어져서 종적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살아 있기 때문에 정(情)이 있고 지각(知覺)이 있어서 형을 보내며 이처럼 우는 것입니다. 나 또한 세상에 살아 있을 날이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니, 곧 지하에 있는 형을 따라갈 것입니다. 동리(東里)와 향양리(向陽里)는 산이 연하여 서로 바라다 보이니, 행여 떠도는 영혼이 천추에 서로 접할 것입니다.
아, 나는 지금 돌아갈 마음을 더욱 굳혀 고장(告狀)을 올리고 집에 있으므로 유택(幽宅)으로 돌아가시는 형을 가서 전송할 수 없으니, 목을 늘이고 슬피 부르짖어 창자가 갈가리 찢어지는 듯합니다. 이에 삼가 변변찮은 제수를 장만하여 자식을 보내 대신 고하오니, 내가 만약 집으로 돌아간다면 형의 묘소에 가서 곡할 것이며 그때 마땅히 제문을 지어 고하겠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영령은 이 슬픈 하소연을 살피소서. 부디 흠향하소서.
祭栗谷文 甲申三月
維年月日。昌寧成渾謹遣子文濬。奉酒果米食之奠。敬祭于亡友栗谷先生靈筵。
嗚呼。惟兄與我。情同兄弟。義重師友。弱冠相友。于今三十年。而兄則康強。任世道之重。我抱羸疾。與死亡而爲隣。孰謂今日兄亡而我存。使我失聲而長呼。號天而痛哭耶。嗚呼。兄之志大而遠。學遂邃而明。才英而富。量宏而毅。天之生材。若有意焉。早見於大道之原。而不自以爲足。自任以生民之責。而不愛其身。遇事沛然。而盤根錯節不足嬰其慮。與物無競。而小夫窶人不得窺其際。若是者天果使兄負荷其大。而推天地生物之心於吾民也。際遇明時。君臣相得。去而復還。跲而復奮。抑揚頓挫。似若培植發揮於事業。而一朝遽復奪之。示其兆而不畀其終。天何不仁。以兄爲戲。而忍使吾民終困而莫之捄耶。嗚呼。孔明,希文死於前。伯淳,君實亡於後。夫惟國家之治亂。時運之盛衰。天必以賢者爲之榮悴。而使之消長於其間。則天之爲不仁。其已久矣。何獨見於今日乎。嗚呼。渾實顓蒙。
加以癃疾。初遇兄而稍有所聞。至欲事之爲師則其有得於兄可知。邇來老大。情義相孚而益深。講磨相資而益切。我若無兄。則其不能自立明矣。兄且憂我之疾而懼我之死。我謂先兄而死。使兄作我之傳。而今焉反易常道。一至於此。所謂天者不可測而理者不知也。嗚呼。世路未平。利欲充塞。兄獨何心。棄我而先。使我獨留人世。彷徨旅舍。不知所之。飮泣中夜。抱玆苦心耶。展閱舊書。丁寧諭我以留仕之義。其言深切。不覺執書而泣。兄何苦留我而不自留。忍棄君父而去無顧戀耶。嗚呼。死生壽夭。往復屈伸於大化之中。理之常也。亦復何恨。舊山之阿。山靑水綠。兄返眞宅。旣順而安。浮雲大空。任其舒卷。悠然而散。無有蹤跡。我今猶在血肉軀殼之中。故有情而有知。送兄而號咷也。我亦在世寧復幾日。而不隨兄於地下乎。東里向陽。連山相望。庶幾游魂相接於千秋也。嗚呼。我今歸計益決。移告臥家。不得往送兄之歸。引領哀號。腸裂無寸。謹具薄奠。遣子代告。我若歸家。往哭兄墓。當具文以告之。伏惟英靈。鑑此哀訴。尙饗。
신 부제학(辛副提學) 응시(應時) 에 대한 제문/ 을유년(1585, 선조18) 3월 성혼(成渾)
모년 모월 모일에 창녕 성혼은 삼가 아들 문준을 보내어 술과 과일과 쌀밥을 가지고 근래에 작고한 부제학 신형(辛兄)의 영령에게 공경히 올립니다.
아, 돈후하고 성실한 자품과 효도하고 공경하며 진실하고 겸양하는 풍모를 지닌 사람을 말로만 들었을 뿐 직접 만나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말년에 이르러 잘못 세상의 길에 나가 온갖 험난함을 겪은 뒤에야 형이 이러한 덕을 지녔음을 알았습니다. 이에 형을 사랑하고 존경하였으며 장차 형께서 그러한 덕을 미루어 세도(世道)를 유지시키고 붕당(朋黨)의 화를 진정시키리라고 여겼는데 하늘이 갑자기 빼앗아 가시니, 나의 애통함이 어찌 다만 30년간 사귄 정 때문일 뿐이겠습니까.
지난해 서울에서 율곡(栗谷)의 상(喪)에 달려가 곡할 적에 형과 함께 조문하는 대열에 있으면서 서로 바라보며 슬퍼하였는데, 그런 지 1년 만에 형이 또 별세하였습니다. 하늘은 어쩌면 이리도 무심하여 이 세상에 해독을 끼침이 이처럼 혹독하단 말입니까. 덧없는 인생은 나그네와 같고 큰 조화는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이제 건장했던 이들은 별세하는데 나는 온갖 병을 앓는 남은 목숨으로 아침저녁으로 죽기를 기다리면서 홀로 인간 세상에 남아 있어 쓸쓸히 그림자만 따르고 짝이 없으니, 어찌 지하에서 서로 따라다녀 슬퍼하지 않는 참다운 경지에 나아가지 않겠습니까.
몸이 전야(田野)에 있으므로 병환 중에는 곁에서 문병하고 살피지 못하였으며, 죽어서는 영상(靈床)에 나아가 곡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또 영구가 나의 경내(境內)를 지나가는 줄 알면서도 질병으로 거의 죽게 된 상황이라 길가에 나가 한 번 절하고 통곡하여 영결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렇게 매번 뜻대로 하지 못하게 되니, 어떻게 나의 슬픔을 씻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변변찮은 제수를 장만하여 자식을 보내 술을 따르고 고하니, 유명(幽明)이 비록 막혀 있으나 성의는 감통(感通)하는 법입니다. 부디 영령은 이 마음을 굽어 살펴 흠향하소서.
祭辛副提學 應時 文 乙酉三月
維年月日。昌寧成渾謹遣子文濬。以酒果米食敬奠于近故副提學辛兄之靈。嗚呼。敦厚質實之資。孝敬信讓之風。吾聞其語。未見其人。及乎晩歲。誤出世路。經歷夷險。而後知兄之有是德也。愛之敬之。將謂推其有。足以維持世道。鎭服朋黨之禍。而天遽奪之而去。斯余之慟。豈但三十年故素之情而已耶。去歲京師。往哭栗谷之喪。與兄同在弔位。相顧而悲。今適期月而兄又亡矣。天何茫茫。毒痡斯世若是之酷耶。浮生如寄。大化無停。今以壯者強者而淪亡。余以百病餘生。待死朝夕。獨立人世。顧影無儔。幾何而不相隨於地下。亦就不悲之眞境耶。身在田野。病不得省問於傍。歿不得憑哭於床。又知靈車之過吾境。抱疾濱死。不得出拜道左。永訣於一慟。每負此心。其何以洩余哀乎。謹具菲薄。遣子酌酒而告之。幽明雖隔。誠意感通。庶幾英靈。垂鑑于玆。尙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