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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남산의 부장들-------------
김규평役: 각하 기억하십니까? 그날 새벽 각하를 모시고 한강 다리 중간쯤 건너는데~ 저기 헌병대 저지선이 보이는 겁니다. 각하를 따라서 지프에서 내려서 뚜벅 뚜벅 한강 다리를 건너는데~
박통役: 총알이 날아왔지~ 막 깜깜해서 보이지도 않는데 귓불에 총알이 날아오는 소리가 스쳐~
배우1: 그때 만약~
김규명役: 그 다리를 건너지 않았더라면~
--------1961년 5월 16일 새벽, 서울 도심에 탱크가 나타났다. 총과 탱크를 앞세운 군인들, 순식간에 서울시내 주요기관을 점령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KBS 방송: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오늘 아침 미명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해~
아나운서: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한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었다.
------------------------5.16 쿠데타 성공 미스터리----------------------------
최원정/KBS 아나운서: KBS 역사저널 그날 272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다룰 이야기는 방금 보셨던 남산의 부장들에서 등장한 인물들이 회상한 그날 5.16입니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흐름을 빠꿔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런 중요한 사건이죠.
박상영/작가: 5.16 같은 경우는 너무 유명한 사건이라 진짜 상식이 부족한 저 같은 사람도 익히 알고 있는 사건이 거든요.
박태균/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 박정희 소장이 중심이 되서 당시에 젊은 청년장교들과 함께 일으켰던 것이 바로 5.16 쿠데타 라고 할 수 있습니다.(5.16 쿠데타/1961년 5월 16일-박정희 소장과 육사 5기, 8기 젊은 장교들이 제2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
다니엘 린데만/방송인: 독일 말로 보통 militardiktatur=군부독재 라고 얘기하거든요. 어려운 단어인데 군인들에 의해 어떤 커다란 정치적 변동이 일어났다는 뜻인데 그게 군사독재정권이 이어졌던 거죠. 이런 말은 아마 또 찾기가 어려울 것에요.
이시원/배우: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것 중의 하나가 관객들이 다 짐작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존인물들의 이름이 다 다르게 나오잖아요. 박 대통령 같은 경우는 계속 박통이라고만 부르고 또 김재규 같은 경우는 김규평이라고 개명돼서 나오거든요.
허진모/작가: 5.16이 그만큼 민감하기 때문인데요. 항상 드라마 영화로 작품화될 때 마다 이름이 가명으로 처리가 되기도 하고 이 작품은 픽션이다 라는 자막이 들어가기도 합니다. 그만큼 이것은 아직까지도 정면에서 똑바로 응시하기 어려운 역사가 아닌가 싶습니다.
최원정: 그러면 오늘 우리 팩트로만 얘기를 하는데~괜찮은가요? 우리가 밖에서 얘기해야 되는게 아닌가요?
박상영: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요.
최원정: 우리 저 문 열고 나가야 되는 것 아녜요.
박상영: 우리 한번 내공으로 겨뤄보자~
이시원: 역사내공+깡이 필요하다.
최원정: 내공 테스트를 한번 해보겠습니다. 다같이 한번 맞추어보자구요. 5.16은 국군의 (?)가 참여한 쿠데타다.
이시원: 상당히 많은 수가 참여했을 것 같거든요. 한 반 정도는 참여하지 않았을까?
최원정: 최소 절반!
박상영: 정권을 무너뜨리는 거잖아요. 상당수의 병력이 동원되었을 것 같애서 저도 적어도 3분의 2, 70% 정도로~
다니엘: 그 정도~ 그러면 몇십만명이 되는 거잖아요. 저, 정답 국군의 20%~
최원정: 자, 정답 보여주세요, 국군의 0.5%가 참여한 쿠데타다. 50%가 아니라~
이시원: 도대체 0.5%라면 몇 명 정도가 되는 건가요?
최원정: 굉장히 지금 우리 답변에서 빗나갔습니다. 두번째 퀴즈 가볼께요. 5.16은 사전에 (?)되었다. 事典에 등재 되었다?
박상영: 사전에 계획되었다?
이시원: 계획이 없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혹시 취소가 많이 됐었나? 취소?
최원정: 정답 올려 주세요. 5.16은 사전에 누설되었다.
박상영: 아니, 누설되었는데 어떻게 성공할 수가 있어요?
최원정: 세번째 문제를 보겠습니다. 5.16 쿠데타의 지휘관은 (?)다. 지휘관이 누구였을까요?
박상영: 내가 아무리 역사를 몰라도 요 정도는 안다.
최원정: 자, 그럼 박정희다. 정답은 5.16 쿠데타군의 지휘관은 (박정희가 아니)다.
이시원: 우리가 5.16에 대해서 정말 잘 모르고 있는게 많네요.
박상영: 역사저널 6개월 경력에 하나도 못맞추었어요. 부끄러워요.
최원정: 내공이 오늘처럼 깊지 않으신 분 5.16에 관해서 오늘 함께 하시면 그날 사건들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시간이 되겠습니다.
박태균: 제가 사진을 하나 준비를 했습니다.(5.16을 대표하는 사진). 이 사진인데요.
이시원: 저 사진을 확대해 보는 거예요?
박태균: 네, 네, 저건 일부만 있구요. 이게 가장 많이 나오는 사진입니다.
최원정: 누가 박정희 소장인지 아세요?
다니엘: 이 정도는 알죠 (박정희 소장은 선글라스가 트레이드 마크!). 그건 독일 사람도 알아요.
박태균: 박정희 소장 옆 요분이 차지철 대위입니다.
-------------영화/남산의 부장들(2020): 이후 박정희 대통령 경호실장이 된 차지철----------
박태균: 요분이 박종규씨라고,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실 때에 경호실장직에서 물러났었죠.
-----------동영상/육영수 여사 저격사건 (1974년 8월 15일)---------박대통령 뒤에서 뛰어나와 범인을 향하여 권총을 발사하는 박종규 실장-------------
박태균: 피스톨 박이라고 해서 사격솜씨가 굉장히 뛰어난 그런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최원정: 사진 속에 아주 놀라운 비밀이 있다고 하는데요. 잠시 후에 공개하고요, 본격적으로 사건 속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5.16 추적 그날 이광용 아나운서 나와주세요.
----------------이광용/아나운서: 쿠데타를 하루 앞둔 5월 15일, 그날 구름이 확낀 아주 흐린 날이었습니다. 5월 15일 밤 11시 30분 박정희 소장이 신당동 자택을 나섭니다. 쿠데타 지도부의 첫지휘소인 영등포 6관구 사령부로 갑니다. 5월 16일 새벽 2시 제1공수단 본부에 들렸고, 염창교로 이동해 해병 제1여단을 만납니다.
박상영: 쿠데타 핵심세력이 육사출신들이잖아요. 그런데 해병까지 여기에 참여했다는 건가요?
이광용: 마침 해병의 몇몇 장교들도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박정희 소장이 타이밍 딱 맞게 손을 해병에게 내민 것이죠. 새벽 3시 20분, 염창교를 건넌 해병 1000명과 공수단 500명이 한강 인도교에 도착합니다. 이 다리를 넘어야 쿠데타군이 서울 도심에 진입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때 진압군이 등장합니다. 트럭을 이렇게 8자로 배치해 3중 바리케이드를 치는데요. 한강 다리가 봉쇄되었습니다. 무장한 헌병대의 군용트럭까지 이 진압군은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중장이 보낸 것입니다. 그리고 교전이 벌어졌습니다. 탕~탕~탕~
이시원: 5.16은 무혈입성이라고 해서 교전이 없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전투가 있긴 있었네요.
박태균: 그때 박정희 소장이 한강 다리를 건너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고민을 했고 아~ 이게 잘못되면 내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가족 걱정까지 했다는 거에요.
최원정: 육군참모총장까지 나섰는데 이광용 아나운서 상황이 어떻게 되나요? 이제 교전 끝났어요.
이광용: (은신처에서 나오면서) 총 다 쐈어요? 교전 끝에 박정희 소장이 이끄는 쿠데타군이 다리를 건너 서울 도심진입에 성공했습니다.
이시원: 쿠데타군이 쉽게 진입하네요.
허진모: 진압군으로 보낸 헌병대원이 고작 50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박상영: 지금 쿠데타 일으킨다고 난리가 났는데 50명을 보냈다구요?
이시원: 말은 쿠데타 인데 50명은 역부족 아닌가요?
이광용: 그 사이 쿠데타군 중 포천에서 출동한 6군단 포병단이 육군본부를 점령했습니다. 해병은 치안국 시청 중앙전신국을 장악했고요. 공수단은 박정희 소장을 앞세워 새벽 4시 30분 남산방송국으로 갑니다.
-----------------박종세 아나운서/KBS 남산 방송국: 친애하는 애국 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오늘 아침 미명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해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 삼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했습니다--------------------
이광용: 이렇게 혁명을 방송으로 5월 16일 새벽 전국민들에게 쿠데타의 사실을 알린 군부는 이렇게 긴 혁명공약도 준비했습니다. 여러분들께서 이후에 이야기를 이어나가는데 아주 중요한 자료가 되기 때문에 옮겨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최원정: KBS 아나운서인, 박종세 우리 대선배께서 읽으셨다는 거예요. 새벽 5시에~
이광용: 그럼 저는 이만~(꾸벅)
최원정: 하룻밤 사이에 엄청난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KBS 아나운서는 숙직 중에 들이닥친 쿠데타군에 얼마나 떨렸을까. 저 같으면 못읽었을 것 같애요. 아무튼 혁명공약~ 6개를 방송을 통해서 발표를 합니다.
-------------------혁명공약--------------------
1.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
2. 유엔 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3.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다시 바로 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시킨다.
4.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5. 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 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6. (군인)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업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
(민간)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을 조속히 성취하고 새로운 민주공화국의 굳건한 토대를 이룩하기 위하여 우리는 몸과 마음을 바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한다.
최원정: 여기서 보니까 1조 반공태세 재정비, 2조 자유 우방과의 유대, 6조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이양한다. 그런데 결국은 안정적인 국가를 만들고 군인들은 물러 나겠다~
박상영: 쿠데타 바로 직후에 발표한 건데 요정도로 사전에 공들여 준비했다는 얘기잖아요. 그런데 그런 거 치고는 쉽게 누설이 됐다고 그리고~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되는 건지?
박태균: 진압군을 보낸 육군참모총장 장도영만 하더라도 전날 이미 쿠데타 계획을 알았던 거예요. 육군본부 소속의 장교 20여명이 6관구에 모여 있다라는 보고를 받은 거예요. 그러니까 훈련도 없는데 왜 거기 모여있을까 뭔가 움직임이 있는 것이다 라고 해서 진압을 하기 위한 헌병들을 보내는데 보낼 때 그러면 중화기도 가지고 갈까요? 물으니까 중화기는 필요없다 고로 가지고 있었던 소총을 가지고 간 거에요.
박상영: 바주카포로도 시원찮을판에~
이시원: 너무 안일하게 대처한 거 같애요.
박태균: 방어를 할 때는 항상 상대방이 최고의 것을 가지고 온다 라고 생각하고 막아야 돼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최소한을 가지고 갔다라고 하는 건 기본적으로 막을 의지가 없었다. 거기서 하나 더 나아가면은요 쿠데타가 성공하기를 원했다. 그것도 안막으면 이게 또 육군참모총장으로서 임무방기잖아요. 그러니까 막기는 막는데 막는 척~
박상영: 면피할 정도의 진압군만 보냈다?
최원정: 많은 추측들이 나오는 상황이네요~
다니엘: 지금 이동시간을 보면 한강 인도교 도착 3:20분, 그 다음에 KBS 방송국 도착이 4:30분인데~
이시원: 1시간만에~
다니엘: 한 시간만에 교전부터 이동까지 완료~
박상영: 그냥 차 타고 통과했네요. 지금 내비게이션 찍어도 저 정도 걸려요~
이시원: 정말 쑥~쑥~ 들어갔네요. 만약에 중화기를 사용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쿠데타의 운명이 바뀌었을 것 같은데~
박태균: 그럼요~
이시원: 육군참모총장이 쿠데타 세력을 과소평가한게 아닌가?
-----------또 다시 나타난 이광용 아나운서, 패널들에게 전단지를 뿌리다----호외요! 호외~-----
이광용: 제가 정말 중요한 걸 잊고 갈뻔 했습니다. (1961년) 5월 16일 당일 쿠데타를 보도한 신문기사에 헤드 라인을 제가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오늘 未明 軍部 反共革命, 반공혁명이 바로 5.16 군사 쿠데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張都暎 中將이 總指揮~ 아까 한강 다리에 진압군을 보냈던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장군이 군사쿠데타를 총지휘했다?
이시원: 어떻게 된 거죠? 막을 사람이 왜 지휘했다고?
이광용: 여러분, 시작할 때 함께 했던 5.16 군사쿠데타의 상징이 된 사진, 그 비밀이 바로 이거 였습니다. 저는 물러갑니다.
이시원; 아니, 답도 제대로 안알려주시고 가버리시면 어떻게 해요? 그 비밀이 뭔데요?
-------------------그림을 그리는 한 작가 등장----------------------
최원정: 굉장히 유명한 김정기 작가이신데, 당시 상황을 그림으로 그리고~
------------------라이브 드로잉으로 재창조한 5.16 쿠데타 사진-----------------
일동: 와! 단번에 알아보네요! 아까 봤던 그 사진이다.
이시원; 박정희 소장 옆에 차지철~ 그 앞에다 뭔가 더 그리시네요.
박태균: 연설하는 모습이죠.
최원정 누구예요?
박태균: 장도영 이죠------------육군참모총장 장도영 중장-------
이시원: 뭔지 이상한데~
최원정: 사진 속의 비밀이라는 게 그거네요~ 박정희 소장 옆에 같은 현장에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이 연설을 했다~사실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었다고는 하는데 정면 사진이 없어서 저희가 라이브 드로잉으로~
박상영: 재구성을 하신거군요~
다니엘: 편집이 무섭네요~
박상영; 우리가 사진을 찍을 때 주인공을 가장 중심에 두기 마련이잖아요 쿠데타의 총사령관이 연설하고 있으면 당연히 거기에 포커스를 맞추어야 하는데~ 그 사진은 남아있지가 않고 이렇게 변방에 있는 다른 부하들이 크게 찍혔다는게 뭔가 일부러 편집된건가 아니면 없앤건가 하는 생각이 들긴 하거든요.
최원정: 지금 남아 있는 사진은 단상 아래에 있는 가장 유명한 5.16 쿠데타 사진의 주인공은 박정희 소장~
박태균: 전체가 나와 있는 사진도 굉장히 드물게 있습니다. 그게 선명도도 좀 떨어지고 해서 많이 공개가 안된 거죠.
이시원: 장도영 이란 인물의 본심이 진짜 궁금해져요. 망을 보았던 가요? 혹시 막을 수 있으면 막고 못막겠다 싶으면 합리화하고~?
박상영: 아님, 그냥 처음부터 쇼였던 거 아네요? 장도영이 쿠데타군에 스파이처럼 들어가서~
최원정: 장도영이란 육군참모총장 이분은 진압군인가요? 쿠데타군인가요? 굉장히 미스터리하게~
허진모: 쿠데타 당시에 총지휘관은 박정희 소장이 맞습니다. 그런데 쿠데타 직후에 쿠데타군이 내세웠던 공식적인 지휘관은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이었습니다. 정확히는 5월 16일 오후 4시30분에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은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겸 계엄사령관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뭐냐면 같은 사람이 정부군과 반란군의 수장을 동시에 맡는 희한한 상황이 벌어진 겁니다. 속된말로 양다리를 걸치게 되었는데 장도영의 속내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습니다. 박정희 소장 입장에서는 장도영 장군을 전면으로 내세운 이유는 충분하고도 남았습니다. 먼저 장도영은 친미파였고 미국과의 관계를 풀어가는데 굉장히 유리하였습니다. 두번째는 박정희 소장과 일부 청년장교들이 공산주의자 좌파의혹을 받고 있었어요 (銃殺刑 一名, 無期 四名, 박정희(朴正熙) 무기징역-1949년 남로당 전력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박정희 소장). 이것을 반공주의자였던 장도영이 풀 수가 있었던 거죠. 그리고 육군참모총장이 가세함으로써 어쩌면 일부 소장파 장교집단의 봉기에 지나지 않을 것을 전군이 지지하는 모양새가 된 거죠.
박상영; 어떻게 보면 쿠데타의 명분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그를 앞세운 거라고 볼 수 있군요.
허진모: 그렇죠, 쿠데타 세력의 입장에서는 장도영은 굉장히 쓸모있는 카드였습니다.
박태균: 내가 5.16 쿠데타에 대해서 연구를 하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1주일 전에 장면 총리한테 보고가 들어가요. 박정희를 중심으로 해서 쿠데타 음모가 진행이 되고 있다. 그런데 이게 네번째 보고예요. 한달전에 미국 CIA에서 나온 문서를 보면 그 문서에, 4월 21일 박정희 제2군 부사령관이 한국정부를 전복하려는 쿠데타 음모를 이끌고 있다 (1961년 CIA 한국지부의 보고). 이게 장면 한테 보고가 되었다. 장면 총리가 가서 조사해 봐라. 그러면 장도영 참모총장이 와 가지고서는 별거 아닙니다. 소문입니다 라는 식으로 처리를 하고 넘어갔어요.
박상영; 이쯤되면 장도영이 쿠데타의 중심적인 성공 핵심인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최원정: 몰라서 그런 건지? 저도 그게 궁금해요. 막아준 건지~
박태균; 나중에 장도영이 생존해 계실 때 이것에 대해서 질문이 갔는데 명확한 대답을 회피하셨어요. 본인도 얘기하기가 사실 좀 곤란한 부분들이 분명히 있었던 것 같애요.
최원정; 진실은 누구보다도 본인이 잘 알고 있을텐데~
박상영: 이런 역사적인 인물들을 돌아가시기 전에 사실은 이랬다~ 라고 밝혀 주었으면~
------------(동영상) 장도영/5.16쿠데타 당시 육군참모총장: 벌써 그때는요, 상황이 얼마나 복잡해졌는지 몰라요. 내통한 거 아니냐 또는 방조한 거 아니냐 하는데 그건 전혀 무관한 사실이 올시다---------------
이시원: 의도적이었던 아니었던 간에 장도영이 육군참모총장이었던게 굉장히 박정희 前대통령한테는 행운이었네요.
다니엘: 장도영이란 인물이 그건 아무리 의도적으로 감싸졌다 해도 어쨌거나 최종적으로 확인해야 되는 거 아닌가요?
박태균; 사실은 지금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래서 저는 가능성으로서 그냥 여러가지 쿠데타 소문 중에 하나일거다 라고 하고 넘어갔을 가능성~ 그리고 이후에 변신은 쿠데타 직후에 상황에 따라서 나타났던 그런 상황이었다 라고 추측하고 있는 거죠.
이시원: 얼마나 쿠데타에 대한 소문이 많았으면 이걸 이렇게 넘길 수가 있을까요.
허진모: 거기에 대해서는 이때 상황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때 제2공화국 장면 정권이었죠. 장면 정권은 다 아시다시피 4.19 혁명 (1960년 4월 19일)의 결과였습니다. 반독재 민주주의 혁명의 결과이고 역사상 최초로 국민의 손으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결과였는데 장면 정권은 필연적으로 맞닥들여야 할 현실이었습니다. 그게 뭐였냐면 혼란입니다. 혼란이란 것이 금방 생긴 것이 아니라 그 앞에 정권인 이승만 정권이 12년 동안 쌓였던 온갖 사회의 모순과 불만이었고요. 이 모든 것이 장면 정권 때 터져 나온 것인데요. 이 모든 혼란을 장면 정권의 무능으로 연결을 시켰구요. 이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 바로 쿠데타의 명분이었습니다.
최원정: 그런데 이 와중에 미국에서 굉장히 의미심장한 문서를 내놓는데 지금 이게 사상계에 실린 콜론 보고서인데요. “하층 경제계급 출신의 유망한 청년장교가 한국에 다수 생겼고 이들은 특권적 관리나 정치가에게 분노를 품게 된다. 이것이 폭발할 우려도 있다.” “하지만 현재 한국의 커다란 정치적 신망이나 조직력을 가진 군인은 없다.” 라고 적혀 있네요. 마치 이 보고서가 예언서 같구요. 여기서 지목한 유망한 청년장교가 실제로 쿠데타를 일으켰군요.
허진모: 그렇죠, 이 보고서가 상당한 파장을 일으킨 것은 사실 입니다. 5.16 주동자들의 증언을 모아보면 당시의 분위기가 4.19 혁명 이후에는 군인들 두세명만 모여도 나라 걱정을 했다고 합니다. 장군님, 사상계보셨습니까? 이렇게 얘기하는 거죠. 시국이 이렇게 어수선한데 군부가 가만히 있어도 되겠느냐. 구국을 위해서 궐기해야 되지 않겠느냐 라는 식의 쿠데타를 언급하는게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였다.
---------(장교들과 박정희 대화 동영상)---------------
중령1: 무너져 가는 나라를 구하려면 혁명을 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중령2: 4.19 이후에 달라진게 뭐가 있습니까?
중령3: 우리가 나서야 합니다.
중령4: 거사일을 결정합시다.
박정희役: 우리가 애국하는 심정으로 혁명을 일으킨다면 혁명은 거역할 수 없는 순리요.
박태균: 젊은 군인들이 미국에 유학을 갔다 왔어요. 굉장히 선진적인 부분들을 배우고 온 거죠. 그러니까 지금은 우리가 가장 선진적인 조직이다 하면 기업 이라고 얘기를 하지만 그 당시에는 군이 가장 선진적이었고, 또 가장 젊은 엘리트들이 많았고 이 사람들이 야망을 가지고 있는 이런 상황이었다고 볼 수가 있죠.
이시원: 젊은 장교 하면 나이 때가 어떻게 돼요?
박태균: 20대 30대요.
박상영; 진짜 어리다.
다니엘; 우리 나이 또래네~
최원정; 더 어리지~
허진모: 5.16 주도세력의 평균 연령은 35세 정도였다고 합니다.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 박정희 소장이었는데 44세, 가장 어린 사람이 27세 차지철 대위였습니다.
박태균: 특히 저희가 주목하는게 육사8기들이예요. 8기가 정규8기가 있고 특별 8기가 있어요. 특별 8기 같은 경우 대표적인 사람이 김종필씨, 실제로 5.16쿠데타의 계획을 만든 사람이 김종필씨인데~
박상영; 저도 기억나요. 어릴 적에 티브이에 국무총리, 국회의원으로 되게 여러 번 등장하셨어요.
박태균; 그때가 35살이었어요.
박상영; 그렇게 이른 나이에~
박태균: 특별 8기가 뭐냐면 그냥 사병으로 들어갔는데 지휘관이 너는 너무 똑똑해서 너는 사병으로 있을 애가 아니야 해 가지고 특별반으로 보냈다는 거예요. 8기에 들어와 있는 사람 중에는 김종필 처럼 굉장히 똑똑하고 자신에 대해 프라이드가 있는 이런 젊은 장교들이 많이 있었다고 볼 수 있겠구요. 그런데 이게 군 자체가 굉장히 부패해 있는 거예요. 특히 자기 선배들이라고 하는 예전의 일본군이나 만군 출신의 군인들이 정권과 결탁을 하면서 선거라든가 부정부패 라든가 이런데 연루가 되어 가지고 여러가지 문제들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8기생들이 벌이는 운동이 정군운동이에요. 군을 깨끗하게 하자. 4.19 혁명도 일어나고 했는데 우리가 사회도 정화를 하는데 군도 정화를 해야 되는게 아니냐. 그걸 통해서 뭔가 군을 대한민국의 희망으로 한번 바꿔보자. 그러니까 자기들의 능력과 희망과 또 하나 거기에 야망이 있는 거죠.
허진모: 여기에 좀 더 현실적이고 개인적인 불만이 섞였다고 보는 거죠. 그게 바로 자리입니다. 정군운동으로 군 최고위층이 제대로 되면 그 자리에는 누구의 것이 될 것인가? 바로 자신들의 것이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육사 8기는 심각한 승진적체상태에 빠져 있었던 겁니다.
다니엘; 상관이 퇴직하면 자연스럽게 올라가면 되는데~ 그게 안됐었나요?
허진모: 육사 5기까지는 그게 되썼죠. 그래서 이 사람들은 한국전쟁 이전에 다 별을 달았습니다. 한국전쟁에서 활약했던 참모총장만 봐도 대부분 30대 중반이었습니다. 군대에 가보시면 참모총장은 옥황상제급입니다. 얼마나 높은지 놀라요.
이시원: 진짜 나이 차이는 얼마 안되는데~ 누구는 장군까지 되고 있고~
박상영: 앞에서 꽉 막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 같애요.
허진모: 저 사진을 한번 보시면 참모총장 장도영 중장하고 육사 8기생 김종필 중령하고 나이 차이가 어느 정도 돼보이시는지요?
박상영; 별로 안나는 걸로 보이는데요.
이시원: 검은 옷을 입고 있어서 그런지 김종필 중령이 더 나이가 많은가요?
허진모: 장도영 중장이 많기는 한데 세 살 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심지어 박정희 소장 같은 경우는 상관인 장도영 중장 보다 6살이나 더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이거 전문 용어로 얘기하면 군번이 꼬인거예요.
이시원: 거기다 선배들 퇴직할 때 나도 같이 퇴직해야 됩니다. 계속 고인물이 안빠져요.
허진모: 그래서 사회혼란과 그리고 군 상위층의 부정부패 그리고 인사승진 적폐가 8기생으로 하여금 이 세상을 바꾸어야 되겠다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죠. 더불어서 자신의 인생도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박태균: 저 때가 바로 박정희 소장이 부각되기 시작한 때예요. 사실 박정희 소장은 군내에서 굉장히 비주류였어요. 원래 비주류는 아니었어요. 왜냐하면 만주군관 학교도 나오고 일본 육군사관학교도 나왔기 때문에 당시에 한국군의 주류에 편입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을 갖추었는데 문제는 공산당에 참여한 경력이 치명적인 부분이었고 4.19 혁명이 일어나던 시기에 부산군수기지 사령관으로 갑니다. 이것도 또 다른 한직으로 간 거죠. 거기에서 그 당시에 송요찬 육군참모총장이 부정선거에 관여가 되었다는 라는 비판을 하면서 퇴임할 것을 건의하는 서한을 보냅니다. 사실은 이게 젊은 장교들이 보면 대단한 거죠.
박정희/부산 군수기지 사령관이 송요찬/육군참모총장에게: “군의 최고 명령권자인 각하께서 부정선거에 대한 전 책임을 지시어 정화의 태풍이 군내에 파급되기 전에 자진 용퇴하신다면 얼마나 떳떳한 것이겠습니까.”
이시원: 어떻게 보면 정군운동을 하려는 사람들한테 리더로서 자질을 보여준 거네요.
박태균: 뿐만 아니라 8기의 핵심이었던 김종필씨와의 관계가 있는 거죠. 조카사위였으니까. 박정희 대통령의 돌아가신 형(박동희)의 따님의 남편이죠. 더 올라가면 너무 복잡합니다.
허진모: 박정희 소장은 단지 군인으로서 상당히 매력적인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젊은 장교들이 박정희 소장을 많이 따랐는데요. 일단 술을 아주 잘 했다고 합니다. 박정희 소장과 육사 8기생들은 술모임을 가지면서 아예 대한음주당이라는 모임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모임이 훗날 쿠데타의 핵심세력이 됩니다.
박상영: 술자리에서 역사가 벌어지네요.
허진모: 술이 역사를 만듭니다.
이시원: 정말 술자리에서 비밀공모하고 그러면 돈독해 지잖아요.
최원정: 절대 소문 안낼게~
이시원: 진짜 들어보니까 사회를 변화시켜야 되겠다. 내가 주도세력이 되어야 되겠다. 이런 야망이 있는 젊은이였는데 그 당시에 군대라는 것이 굉장히 매력적인 곳이었을 것 같애요.
박태균: 박정희 소장이 어릴 때 만주군관학교를 들어가는 것, 여기서부터 그게 시작이 된다 라고 저는 생각이 돼요. 만주군관학교 들어갈 때는 학교 선생님이었어요. 근데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기에는 그것도 나이가 지났는데 혈서를 쓰면서 까지 들어간 거죠. (‘한 목숨 다 바쳐 충성함 박정희’ 라는 혈서를 넣은 서류가 송부되어 담당자를 감격하게 했다). 그게 군인이라는 직업이 자기 한테도 맞을 수도 있고 또 하나는 군인이라는 직업을 통해서 뭔가 어떤 무언가를 해보고 싶다 라는 그런 생각을 분명히 가졌다 라고 충분히 저는 생각을 하고~ 특히 이 시대에 일본에서 쿠데타가 일어났어요 (2.26쿠데타 1936년 2월 26일-진급지연, 경제난 등에 불만을 가진 일본 청년장교들이 국가개조를 목표로 일으킨 군사반란). 2.26군부 쿠데타가 일어났는데 그런 젊은 군인들이 한번 일본 사회를 바꾸어 볼려고 하는 이런 부분들의 영향이 굉장히 컸다라고 저는 생각을 해요.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간 다음에 만주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 대부분 일본 쿠데타의 핵심에 있었던 분들이에요. 1930년대, 40년대 일본의 군국주의, 파시즘의 영향들이 당시 만주에 만연했었고 그런 것들을 보면서 내가 대한민국을 어떻게 만들어야 되겠다 라는 생각을 할 때 많은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봐요.
최원정 & 이시원: 군인정치를 꿈꾸었다.
최원정; 그런 야망들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충분히 역량이 있다고 생각을 한것 같애요. 인정을 하고~
박태균: 그렇죠, 1950년대부터 끊임없이 쿠데타 모의를 하기 시작을 한 거죠. 원래 생각을 했던 건 1961년 4월 19일 4.19 시위를 생각을 했다는 거예요.
최원정; 4.19 1주년 시위의 날에~
이시원: 4,19 1주년 시위와 맞추어서~
박태균; 시위가 굉장히 크게 일어나면 사회혼란을 안정되게 만들겠다 라는 명분을 가지고 할려고 했는데 그것도 학생들한테 누설이 된 거에요. 학생들이 빌미를 주면 안되겠다. 그래서 4.19 1주년이 생각보다 굉장히 조용하게 넘어갑니다. 이렇게 되니까 사실 그때는 제대로 쿠데타를 못하는 그런 상황이 온 거죠. 5월 12일에 한 장교가 통근버스에서 우리 쿠데타 같이 할래 하다가 또 발각된 사실도 있어요.
박상영: 은밀한 곳도 아니고~
최원정: 하필 통근버스에서 쿠데타 동기섭외를~
이시원: 허술했던 것 같애요.
박상영; 정말 통근버스에서 걸리고 학생들한테 걸리고~이 정도로 허술한데~ 이 쿠데타가 어떻게 성공할 수가 있었나요? 그게 미스터리이거든요.
허진모: 사실 쿠데타 당일 5월 16일 새벽에 방송국 점령하고 혁명방송을 하기는 합니다만 그때까지만 해도 이 쿠데타의 성공여부는 정말 안개 속이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군의 05%에 지나지 않는 소수였잖습니까. 그런데 국군전력의 70%가 집중되어 있는 1군이 진압에 나선다면 이것은 충분히 진압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구요. 그리고 실제로 1군은 진압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최원정: 진압의 기회가 또 있었다는 얘기잖아요. 이번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동영상) 1961년 5월 16일 오전 9시, 1군 사령부-----------------
1군 사령관役: 반란군에 가담한 포병단을 즉각 철수 시키시오. 그리고 전부대에 비상령을 하달하시오.
참모役: 네, 알겠습니다.
--------------------아나운서: 쿠데타군을 진압하기 위해 국군 1군 예하부대가 출동준비를 시작했다. 16일밤 9시 모든 준비를 마친 군인들, 하지만 하룻밤이 지나도록 출동명령은 내려오지 않았다.
사단장役: 출동분비 완료한지가 언제인데 여태까지 명령을 내리지 않습니까! 이 비상시국에 누군가 책임을 지고 진압명령을 내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박상영: 당연히 명령을 해야 되는데~ 왜 가만히 있는 거예요.
최원정: 이 진압의 공백이 생긴 이유, 핵심 인물들은, 장면 국무총리, 윤보선 대통령, 케네디 미국 대통령, 세분 핵심 인물들을 추려보았는데요.
박태균: 세분이 사실 굉장히 중요한 권한을 가진 분들인데~ 이분(장면)은 당시 우리가 내각책임제 였으니까 군통수권을 가지고 계시고, 이분(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가지고 있는 유엔군 사령관 겸 주한미군 시령관을 움직일 수 있는 분이고, 이분(윤보선)은 국무총리가 부재할 때 무언가 대타로서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분입니다.
최원정: 그렇다면 내각책임제에서 국무총리가 실세니까 장면 국무총리가 어떤 액션을 취했으면 영향이 있었을텐데~ 뭐 하셨어요?
허진모: 그런데 장면 총리는 잠적합니다.
이시원: 사라지셨어요?
허진모: 그렇죠, 김종필의 증언록에 따르면 쿠데타 당일 16일 새벽 4시 15분에 장면 총리는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보고 받아요. 그리고 나서는 숙소인 반도호텔을 나와서 혜화동에 있는 칼멜수도원으로 피신을 해 버립니다.
박상영: 종교지대라 치외법권 같은 효과를 노리고 수녀원으로 잠입하신거~?
이시원: 쿠데타의 척결 1호 대상으로 두려움 때문에 숨었을 수도 있을 것 같고~
박상영: 쿠데타 와중에 수녀원으로 피신을 해버렸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쿠데타군을 막을 수 있는 골든 타임을 완전히 놓쳐버렸다는 생각이 들어요.
박태균: 쿠데타 일어났는데 장면 총리가 부재한 거예요. 유엔군 사령관이 5월 16일 아침 윤보선 대통령을 만나러 가요. 유엔군 사령관은 대한민국의 가장 중요한 재산은 민주주의다. 도대체 북한하고 체제대결을 하고 있는데 이 민주주의라는 걸 지키고 나가는 가도 중요하다. 이런 얘기를 하면서 윤보선 대통령을 압박을 해요. 윤보선 대통령이 하는 얘기가 의외였던 거예요. “올 것이 왔구나” 라고 하면서 나는 만약에 진압을 해서 군 사이에 유혈충돌이 일어나는 걸 반대한다. 지금 북한하고 대치하고 있는데 유혈충돌이 일어나서 되겠느냐 그 당시에 매그루더 사령관과 그린 미국 대리대사 하고, 당연히 헌법체제가 무너졌으니까 대통령은 진압하는 거 찬성한다라고 애기할 줄 알았는데 반대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거죠.
박상영: 너무 이상한게 미국이 앞장서서 이걸 막아주고 저지하라고 말해주는데도 불구하고 국가 대통령이 그걸 반대한다는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돼요.
이시원: 한국전쟁의 후유증 때문이 아닐까요?
다니엘: 장면 총리보다 잘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지 안았을까요.
허진모: 거기에 대해서는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국무총리의 관계에 대해서 좀 알 필요가 있는데요. 4.19혁명으로 민주당이 집권여당이 되었지 않습니까. 그리고 난 다음에 그 안에서 내부분열이 있었고 갈등이 있게 됩니다. 이른바 신구파 대립인데요. 윤보선 대통령은 구파, 장면 총리는 신파였습니다. 그래서 윤보선 대통령은 쿠데타가 장면 총리를 겨냥하고 있다 라고 생각을 한 겁니다.
일동: 와!~~
다니엘: 그러면 진압명령을 안내렸는데 어떻게 보면 본인이 활용할려고 했었던 거네요. 자기한테 유리한 상황이니까~
최원정; 군이 정치인을 다시 찾을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기대감이 윤보선 대통령에게 있었어요.
이시원: 아까 혁명공약 있었잖아요. 6조에 시국이 안정되면은 그 권력을 이양한다 라는 말에 더 기대를 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애요.
허진모: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혁명공약 1조부터 5조까지는 김종필이 직접 썼다고 합니다. 그래서 쿠데타 전날 그 초안을 들고 박정희 소장을 만나러 갔는데 굉장히 만족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박정희 소장이 직접 6조를 넣어야겠다 라고 제안을 합니다. 그래서 넣게 되는데 아까 보았던 그 내용이죠. 그런데 그 내용이 박정희 소장의 순수한 의도였는지 아니면 윤보선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인들을 염두에 둔 정치적 수였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는 없습니다만 아마 그것이 영향을 미쳤을 거라 생각을 합니다.
이시원; 여러 정치인들의 이 수 싸움이 박정희 소장에게는 굉장히 유리한 환경인 것 같애요. 그렇다면 윤보선 대통령은 쿠데타를 막아주겠다는 유엔군 사령관을 말렸고 장면 국무총리는 숨었고, 그렇다면 딱 한명 남았네요. 케네디 대통령은 어땠나요?
박태균: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가지고 있는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은 주한미군 사령관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군통수권자인 미국 대통령이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가 굉장히 중요한 상황이었던 거죠. 그 당시에 나온 미국의 문서들을 보면 거기에 미국이 명확히 써놓은게 있습니다. Wait and see (지켜보자), 상황이 어떻게 되는지 보자. 사실 미국의 입장에서 곤란하였던게 케네디가 대통령이 된 다음에 피그스만 사건이란 게 있었어요 (피그스만 침공/1961년 4월 17일-쿠바의 카스트로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미국이 반정부 세력을 침투시켰다가 실패한 사건). 쿠바에 카스트로가 59년에 혁명을 한 다음에 쿠바에서 미국으로 도망온 쿠바인들이 있어요. 카스트로를 반대한 사람들인데 이 사람들을 CIA에서 훈련을 시켜 가지고 카스트로 정권을 무너뜨려 볼려고 하는 중에 한판 하자 했는데 피그스만 습격사건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말아요. 그런 사건이 한번 실패하고 나면 미국 정부의 위신이 뚝 떨어집니다. 외국에 잘못 개입하는게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하는 시점에서 사실은 5.16 쿠데타가 일어난 거예요.
최원정: 쿠바에서도 곤란했으니 한국 쿠데타에도 너무 개입하지 말자.
박상영; 이역 만리 쿠바의 영향이 우리나라 까지 영향을 미쳤다 고는 오늘까지 전혀 몰랐어요.
최원정: 나비효과 처럼~
박태균: 흥미로운 점은 사실 장면 총리가 완전히 사라져서 연락을 못취하고 있다 라고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사실 장면 총리가 수녀원에 가 있는 동안도 서로 연락선이 있었다는 거에요.
최원정; 미국이랑~
박태균: 정 총리도 처음에는 수녀원 가기 전에 미국 대사관에 가서 문을 두드렸는데 안열어주었다는 얘기예요.
최원정: 뭔가 피하고 있구나~
허진모: 사실 해방 이후부터 미국은 한국의 모든 정치세력에 대해서 모니터링을 하고 있었습니다. 군부도 예외는 아니었죠. 박정희 소장에 대해서도 파악을 하고 있었는데요. 그때까지만 해도 의심, 아직까지는 불신, 이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장면 총리를 파악하고 있는 것은 좀 더 안좋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능~ 허약한 지도력, 미국의 심중을 알 수 있는 발언이 있었는데요. 체스터 볼즈 미국무장관 대리: “한국의 혁명위원회 지도자들은 매우 반공적이고 친미적” (1961년 5월 19일 신문기사) 이다. 지금 군부가 집권해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미국정부의 목표인 것으로 간주된다.
박상영;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박정희가 마음에 들었다기 보다는 장면 총리에 대한 불만 때문에 때문에 너가 낫다 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애요.
이시원; 미국이 원했던 새로운 리더 상이 지금 떠올랐다. 거기다가 혁명공약 1조에는 반공, 2조에는 우방국가와 협력이 있었잖아요. 그것도 굉장히 미국에 어필을 크게 했을 것 같애요.
최원정: 민주주의 수호국가인 미국의 입장에서는 사실 불법적인 정권 찬탈인데 이것을 마냥 편들 수도 없고 반대하자니 분위기는 자기들에게 나쁘지는 않고~ 방관이 최고의 전략이다 그렇게 한 거예요.
이시원: 그리고 세분 다 끝까지 난 잘 몰랐다 책임없다 이런 식으로 나오고 있는 거네요.
최원정: 결론적으로 5.16은 한국의 지도자들도, 미국의 지도자들도, 그 누구도 막지 않았던 쿠데타 였네요.
-------------------------이광용/아나운서: 1961년 5월 18일 뉴스를 전해드리겠습니다. 쿠데타군 진압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1군 사령관 이한림 장군이 압송됐습니다. 쿠데타를 진압할 수 있는 마지막 가능성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 시간 육사생도 800명은 쿠데타 지지행진을 벌였습니다. 이 광경은 사람들의 민심을 바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육사생도들을 동원한 건 서울대 ROTC 교관으로 있던 육사 11기 출신 전두환 대위입니다. 잠깐만! 전두환! 육사생도 동원 육사생도 11기 전두한 대위가 주도.
허진모: 육사교장은 육사생도가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것에 대해서 강력히 반대를 했습니다. 쿠데타 세력은 이 분을 체포해 버립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육사생도들이 보시는 바와 같이 혁명지지 시가행진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전두환 대위는 이 참신한 아이디어로 박정희 소장의 눈에 들게 됩니다.
다니엘: 남산의 부장들을 보면은 전두환이 마지막으로 대통령 자리 보고 끝나거든요. 그 영화가~
최원정 맞아요~맞아요~
------------영화 <남산의 부장들> 2020: 대통령 암살로부터 47일 후 신군부 세력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또 다른 군사독재 시대의 서막이 올랐다------------
이광용: 마지막 소식입니다. 쿠데타 발생 50여시간만에 모습을 드러냈던 장면 총리가 사퇴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취임 9개월을 채우지 못한 사퇴였습니다 (장면/국무총리/1961년 5월 18일: 금번 군부 쿠데타 발생에 대해서 우리 일동은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통감하고 총사퇴하는 바이다.
최원정: 이렇게 우리 쿠데타가 성공을 했네요.
허진모: 쿠데타 이후에 실질적인 국가최고권력기관은 군사혁명위원회였습니다. 나흘 후인 5월 20일에 군사혁명 위원회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이름을 바꾸고 내각을 발표합니다. 이때 의장은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이었고 부의장은 쿠데타의 실세였던 박정희 소장이었습니다. 그리고 내각은 모두 군인으로 채워졌고 서울특별시장 도지사 군수 전부 다 군인으로 대체됩니다.
최원정: 이후에 정말 군인들의 세상이 펼쳐지는데~
허진모: 쿠데타가 일어나고 두 달도 되지 않았죠. 7월 3일에 장도영은 쿠데타 세력에 의해서 체포됩니다. 이때 죄목은 정부전복음모, 그러니까 한 마디로 이용 가치가 떨어졌다 이렇게 볼 수 있죠 (저기 사진에서 죄수복을 입은 장도영).
허진모: 장도영 뒤에 있는 사람은 누군가요?
허진모: 잘 아는 이름입니다. 전두환 대위의 동기, 노태우 대위입니다.
다니엘: 그러면 쿠데타 지지시위는 전두환, 장도영 체포는 노태우 이렇게 이루어지네. 5.16쿠데타 그 후-박정희 대통령-전두환 대통령-노태우 대통령,
박상영; 이 사건 하나에 지금 대한민국 대통령이 몇 명이 걸렸는지 모르겠어요.
이시원: 이게 어떻게 보면 군사독재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들인 것 같애요.
최원정: 예언사처럼 미래의 대통령을 슬며시 보여주는~ 말 그대로 소름끼치는~
허진모: (노태우와 장도영) 두분의 표정이 상반돼죠.
이시원;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 저게 있잖아요. 저 약속 혁명공약 6조는 어떻게 된 거죠?
박상영: 내가 볼 때 이거는 어폐가 있을 수도 있는 것 같애요.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이양한다는 말은~ 참신하지 않고 양심적이지 않으면 이양하지 않겠다 라는 말과 같잖아요.
박태균; 또 하나 있죠. 성취되면~? 한달만에 끝날 수도 있고 10년이 걸릴 수도 있는 겁니다.
--------(동영상) 박정희 의장(1962년 12월 27일): 민정이양시기는 62년 8월 중순이 되지않을까
--------(동영상) 박정희 의장(1963년 2월 8일): 본인은 민정에 참여하지 아니한다.
--------(동영상) 박정희 의장 (1963년 3월 16일): 국민투표결과에 따라 군정을 4년 연장할 것
--------(동영상) 군정연장을 반대하는 시민들/가두시위-
1963년 3월 26일/케네디 대통령: 미국정부는 순조로운 민정이양을 촉구한다
1963년 4월 8일/이후락 공보실장: 군정 연장을 철회한다 발표
1963년 8월 30일/박정희 의장 전역;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인이 없도록 합시다.
1963년 8월 30일/같은날/박의장 공화당 입당-공화당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도전
1963년 12월/박정희/제5대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 대통령으로서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최원정: 야, 결국 군인이 아닌 민간인 자격으로 대통령이 되신 거네요. 민정이양을 한 거네요.
박태균: 군복을 벗었으니까 저 사건은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에요. 미국이 나중에 한미관계를 평가하면서 한미관계가 가장 안좋았던 세번의 사건을 얘기하면 그 중의 두번째 사건이 민정이양을 번복하면서 케네디 대통령하고 갈등을 빚었어요. 저렇게 가능했던 부분들이 뭐냐하면 쿠데타 직후에 6월 6일에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이란 걸 만들어 가지고요 국가재건 최고회의를 최고 권력기관으로 만드는 거예요. 모든 권력을 다 장악을 하고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이 되고 두번째는 중앙정보부를 창설합니다. 이 사회에 있는 사람들의 정보를 독점을 한다. 어떤 기관을 통해서 그걸로 장기집권이나 독재를 할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진다고 볼 수 있는 거죠.
다니엘: 저도 독일에서 한국 현대사를 배웠을 때는 제일 신기했던 존재의 나라가 군사독재 정권의 시절이거든요. 이런 독재가 계속 있었기 때문에 아직 까지도 남자들에게 사회적인 군사문화가 유지되고 있는 것 같애요.
이시원: 저는 5.16일이 한국 현대사에 있어서 선악과를 따 먹은 날인 것 같애요. 박정희 대통령 이라는 강한 리더가 나옴으로서 발전도 있었지만 어떻게 보면 민주주의의 후퇴라는 큰 불행의 저주를 당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허진모: 5.16 쿠데타는 한국 현대사에 있어서 아픈 손가락이 되기도 하죠. 어느 손가락을 들든 한쪽은 아팠다. 그래서 두번 다시 생기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박태균: 저희가 그런 얘기를 하죠. 결과도 중요하지만 수단과 과정도 참 중요하다. 사실 쿠데타 라는 건 불법적인 수단과 방법과 과정을 통해서 정권을 잡은 거거든요. 한번 이런 사건이 발생하고 나니까 계속해서 이게 또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는 거예요. 그 대표적인 게 80년대 신군부에서 행했던 쿠데타들, 그런 불법적인 과정들이 그 결과에 의해서 합리화 되면 안된다는 거죠.
최원정; 자, 오늘은 우리 현대사의 흐름을 바꾼 그날, 5.16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여기서 마무리 하고요. 함께 하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272회 5.16 군사쿠데타 성공의 미스터리에서 정리).
① 1961년 5월 15일 밤 11시 30분 박정희 소장 신당동 자택에서 쿠데타 지도부 첫지휘소인 영등포 6관구 사령부로 간다. 5월 16일 새벽 2시 제1공수단 본부에 들렸고, 염창교로 이동해 해병 제1여단을 만난다. 새벽 3시 20분, 염창교를 건넌 해병 1000명과 공수단 500명이 한강 인도교에 도착, 이때 진압군이 등장, 트럭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한강 다리 봉쇄되었다. 무장한 헌병대 진압군 50명은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중장이 보낸 것, 교전 끝에 쿠데타군 다리 건너 도심진입성공,
② 포천에서 출동한 6군단 포병단 육군본부를 점령, 해병은 치안국 시청 중앙전신국을 장악, 공수단은 박정희 소장을 앞세워 새벽 4시 30분 남산방송국으로, KBS 남산 방송국: 친애하는 애국 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했습니다 라는 방송, 이때가 1961년 3월초 내가 중앙고등학교 1학년에 입학하고 6월부터 수업시간에 이 혁명공약을 외웠다.
③ 쿠데타 당시 총지휘관은 박정희 소장, 쿠데타 직후에 공식적인 지휘관은 장도영 육군참모총장 이었다. 5월 16일 오후 4시30분에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은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겸 계엄사령관이 되었다. 같은 사람이 정부군과 반란군의 수장을 맡았다. 장도영은 친미파였고 미국과의 관계를 풀어가는데 유리하였다. 두번째는 박정희 소장과 일부 청년장교들이 공산주의자 좌파의혹을 받고 있었는데 이것을 반공주의자였던 장도영이 풀 수가 있었다. 육군참모총장이 가세함으로써 전군이 지지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장도영은 쿠데타 세력에 굉장히 쓸모있는 카드였다.
④ 장면 총리는 쿠데타 음모가 진행하고 있다는 보고를 네번이나 받았는데도 장도영 참모총장이 매범 별거 아니라고 보고, 쿠데타의 성공 핵심인물, 제2공화국 장면 정권은 1960년 4월 19일 혁명의 결과였다. 역사상 최초로 국민의 손으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결과였다. 필연적으로 혼란이란 현실과 마주하였는데 이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 이게 정권의 무능으로 연결되어 쿠데타의 명분이 되었다.
⑤ 군에는 미국에 유학을 갔다 온 젊은 엘리트 군인들이 많았다. 이 사람들이 20대 30대 젊은 장교들로, 육사 특별 8기들, 대표적인 사람이 김종필씨로 5.16쿠데타의 계획을 만든 사람으로, 그때가 35살이었다. 5.16 주도세력의 평균 연령은 35세 정도,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 박정희 소장인데 44세, 가장 어린 사람이 27세 차지철 대위였다. 특별 8기는 사병으로 들어갔는데 지휘관이 너는 너무 똑똑해서 사병으로 있을 애가 아니야 장교반으로 보냈다. 굉장히 똑똑하고 자신감과 프라이드가 있는 젊은 장교들이 많았다,
⑥ 그런데 군 자체가 굉장히 부패해 일본군이나 만군 출신의 군인들이 정권과 결탁을 해 선거나 부정부패에 연루가 되어 문제들이 일어나기 시작, 8기생들이 정군운동을 벌인다. 4.19 혁명도 일어났고 사회도 정화를 하는데 군도 정화를 해야 된다. 군을 대한민국의 희망으로 한번 바꿔보자. 육사 8기는 심각한 승진적체상태에 빠져 있었다. 육사 5기까지는 한국전쟁 이전에 다 별을 달았다. 한국전쟁에서 활약했던 참모총장만 봐도 대부분 30대 중반, 나이 차이는 얼마 안되는데, 누구는 장군까지 되고, 참모총장 장도영 중장하고 육사 8기생 김종필 중령하고 나이가 세 살 차이라고, 박정희 소장은 상관인 장도영 중장 보다 6살이나 더 많았다.
⑦ 이 때 박정희 소장이 부각되기 시작한다. 박정희 소장은 군내에서 비주류였다. 원래 비주류는 아니었다. 만주군관 학교도 나오고 일본 육군사관학교도 나왔기 때문에 당시 한국군의 주류에 편입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을 갖추었는데 문제는 공산당에 참여한 경력이 치명적이었다. 4.19 혁명이 일어나던 시기에 부산군수기지 사령관인 한직으로 간다. 거기에서 송요찬 육군참모총장이 부정선거에 관여 되었다 라는 비판을 하면서 퇴임할 것을 건의한다. 이걸로 젊은 장교들의 존경을 받게 되었다. 정군운동을 하려는 사람들한테 리더로서 자질을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8기의 핵심이었던 김종필씨가 조카사위였다. 박정희 소장은 군인으로서 매력적인 인물, 젊은 장교들이 박 소장을 많이 따랐다. 일단 술을 아주 잘 했다고, 박 소장과 육사 8기생들은 술모임을 가지면서, 이 모임이 훗날 쿠데타의 핵심세력이 된다.
⑧ 박정희 소장은 만주군관학교 들어가기전에 학교 선생님이었다.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기에는 나이가 지났는데 혈서를 쓰면서 까지 들어갔다. 혈서가 담당자를 감격하게 했다. 군인이라는 직업이 맞을 수도 있고 군인이라는 직업을 통해서 무언가를 분명히 해보고 싶었다. 특히 이 시대에 1936년 2월 26일, 일본 청년장교들이 국가개조를 목표로 2.26군부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쿠데타의 핵심인물들이 대부분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1930년대, 40년대 일본의 군국주의, 파시즘의 영향들이 만주에 만연했고 박정희는 그런 것들을 보면서 박정의의 쿠데타는 만주군관학교를 들어가는 것에서부터 시작이 되었다.
⑨ 1950년대부터 끊임없이 쿠데타 모의를 시작, 원래 생각은 1961년 4월 19일 4.19 시위를 생각을 했는데 시위가 굉장히 크게 일어나면 사회혼란을 안정되게 만들겠다 라는 명분을 가지고 할려고 했는데 그게 학생들한테 누설이 되어서 학생들이 4.19 1주년을 생각보다 굉장히 조용하게 넘어갔다. 그때는 제대로 쿠데타를 못하였다. 5월 12일에는 한 장교가 통근버스에서 쿠데타를 발설하기도 하였다. 쿠데타 당일 5월 16일 새벽에 방송국 점령하고 혁명방송을 합니다만 그때까지만 해도 이 쿠데타의 성공여부는 정말 안개 속이었다. 군의 05%에 지나지 않았다. 국군전력의 70%가 집중되어 있는 1군이 진압에 나선다면 가능성이 있었다. 실제로 1군은 진압준비를 하고 있었다. 쿠데타군을 진압하기 위해 1군 예하부대가 출동준비를 시작했다. 16일밤 9시 모든 준비를 마친 군인들, 하지만 하룻밤이 지나도록 출동명령은 내려오지 않았다. 이 진압의 공백이 생긴 이유, 핵심 인물들, 장면 국무총리, 윤보선 대통령, 케네디 미국 대통령, 세분 핵심 인물들을 추려보았다. 장면은 군통수권을,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윤보선은 국무총리 부재시 대타로서 그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장면 국무총리가 사라졌다.
⑩ 쿠데타 일어났는데 장면 총리가 부재하고, 유엔군 사령관이 5월 16일 아침 윤보선 대통령을 만나서, 대한민국의 가장 중요한 재산은 민주주의다. 북한하고 체제대결을 하고 있는데 민주주의를 지키는게 중요하다. 윤보선 대통령은 의외로 “올 것이 왔구나” 라고 하면서 진압을 반대한다. 매그루더 사령관과 그린 미국 대리대사는 충격을 받았다고, 거기에 대해서 4.19혁명으로 민주당이 집권여당이 되었다. 그런데 내부분열과 갈등이 있었고, 신구파 대립으로 윤보선 대통령은 구파, 장면 총리는 신파였다. 윤보선 대통령은 쿠데타가 장면 총리를 겨냥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군이 정치인을 다시 찾을지도 모르겠다는 기대감이 윤보선 대통령에게 있었다.
⑪ 혁명공약 1조부터 5조까지는 김종필이 직접 썼다. 박정희 소장을 보여주었는데 굉장히 만족했다고, 박정희 소장은 직접 6조를 넣어야겠다 라고 제안, 그래서 넣게 되는데 그 내용이 박정희 소장의 순수한 의도였는지 아니면 윤보선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인들을 염두에 둔 정치적 수였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는 없다. 윤보선 대통령은 쿠데타를 막아주겠다는 유엔군 사령관을 말렸고 장면 국무총리는 숨었고, 딱 한명 케네디 대통령은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가지고 있는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은 주한미군 사령관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군통수권자인 미국 대통령이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가 중요한 상황이었다. 미국의 입장은 Wait and see (지켜보자), 케네디는 피그스만 사건에서 실패하여 곤경에 처해 있었다. 외국에 잘못 개입하는게 아니다 라는 시점에 5.16 쿠데타가 일어났다. 한국 쿠데타에도 너무 개입하지 말자. 이역 만리 쿠바의 영향이 한국까지 미쳤다. 결론, 5.16은 한국의 지도자들도, 미국의 지도자도, 그 누구도 막지 않았던 쿠데타였다.
⑫ 1961년 5월 18일 쿠데타군 진압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1군 사령관 이한림 장군이 압송됐다. 쿠데타를 진압할 수 있는 마지막 가능성이 사라졌다. 그 시간 육사생도 800명은 쿠데타 지지행진을 벌였다. 이 광경은 민심을 바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육사생도들을 동원한 건 서울대 ROTC 교관으로 있던 육사 11기 출신 전두환 대위다. 육사교장은 육사생도가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것에 대해서 강력히 반대를 했다. 쿠데타 세력은 이 분을 체포해 버린다. 그리고 육사생도들이 혁명지지 시가행진을 한다. 전두환 대위는 이 참신한 아이디어로 박정희 소장의 눈에 들었다.
⑬ 쿠데타 발생 50여시간만에 장면 총리가 사퇴성명을 발표했다. 취임 9개월을 채우지 못한 사퇴였다. 이렇게 우리 쿠데타는 성공을 했다. 쿠데타 이후에 실질적인 국가최고권력기관은 군사혁명위원회였다. 나흘 후인 5월 20일에 군사혁명 위원회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이름을 바꾸고 내각을 발표한다. 의장은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부의장은 쿠데타의 실세였던 박정희 소장, 내각은 모두 군인으로 채워졌고 서울특별시장 도지사 군수 전부 다 군인으로 대체되었다. 쿠데타가 일어나고 두 달도 되지 않은 7월 3일에 장도영은 쿠데타 세력에 의해서 체포된다. 죄목은 정부전복음모다.
⑭ 혁명공약 6조;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한다. 참신하지 않고 양심적이지 않으면 이양하지 않겠다 라는 말과 같다. 1963년 3월 26일, 케네디 대통령은 순조로운 민정이양을 촉구한다. 1963년 8월 30일, 박정희 의장 전역; 1963년 8월 30일, 박의장 공화당 입당-공화당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도전, 1963년 12월 박정희 제5대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 결국 민간인 자격으로 대통령이 되다.
⑮. 5.16 쿠데타는 한국 현대사에 있어서 아픈 손가락, 어느 손가락을 들든 한쪽은 아팠다. 그래서 두번 다시 생기지 말아야 한다. 결과도 중요하지만 수단과 과정도 중요하다. 사실 쿠데타 라는 건 불법적인 수단과 방법과 과정을 통해서 정권을 잡은 거다. 한번 이런 사건이 발생하고 나니까 계속해서 이게 또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그 대표가 80년대 신군부에서 행했던 쿠데타들이다, 불법적인 과정들이 그 결과에 의해서 합리화 되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