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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답전보(答田父)
1. 정치의 역할
모 일간지에서 국회의장 박관용씨와 인터뷰를 했다. 거기서 국회를 많이 칭찬했다. 국회를 인식할 때 정객들이 모여서 싸움질만 하는 곳이 안다.
국회는 국민들의 복지나 민권과 같은 보편적 가치를 위한 대화와 설득의 장이 되어야 한다.
@ 삼권분립의 개념은 몽테스키외(C.S.Montesquieu, 1689-1755)의 <법의 정신>으로부터 출발하였다. 국회의 독립된 기능은 헌법의 기본정신이다.
박의장이 말씀하기를 어떤 국회의원이 단상으로 올라와 의사봉을 빼앗고 하기에 ‘왜 그러느냐?’ 했더니 ‘좀 봐 주세요. 사진 찍혀 나가면 지역구에서 표가 쏟아집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국회의 수준은 우리 국민의 의식수준을 반영한다.
국회의 수준은 국민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 앞으로 국회에서 난동부리는 그런 국회의원은 싸그리 떨어뜨려 버려야 한다.
우리 역사는 조선왕조시대 때에는 왕조에 봉기하고, 식민지 시대 때에는 반식민지 운동을 했다. 반탁, 반공, 반독재 등 끊임없이 반대를 해온 역사를 갖고 있다. 지난 20세기의 역사는 그런 반대의 역사였다.
이제, 반대만 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지금은 화해하고 국민의 전체적인 복지를 위해 함께 노력하고, 대화하고,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국회는 대화와 설득의 장이지 투쟁의 장은 아니다. 근본적인 인식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국회는 투쟁의 장이 아니라 대화와 설득과 타협의 장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민주의 기본이다.
나는 어떤 국회의원들에게 불리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국민들이 바른 생각, 바른 기준을 세워 그 칼날에 어긋나는 놈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모조리 잘라버려야 한다.
2. 대화, 공민왕의 개혁
지금 유배문학을 읽고 있는데, 한영우 선생의 제자로서 여말선초의 변혁 시기에 관해서 공부를 많이 한 전문가를 모신다.
한영우(韓永愚 1938-) 서울대학교 사학과출신의 역사학자
서울대학교 인문대학장을 거쳐 현재 명예교수 <정도전 사상의 연구, 1973>로써 삼봉학을 개척
시립대에 계신 이익주 선생님이시다.
이익주(李益柱, 1962-)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졸
박사학위논문 <고려, 원 관계의 구조와 고려후기 정치체계>
현재 서울시립대학 국사학과 교수로서 정도전에 관한 논문 발표.
이 프로는 여러 학자와 학계의 후원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이 교수는 삼봉(三峰)에 관한 많은 연구를 했다.
도올 : 그 당시 상황이 궁금하다. 당시 많은 부패가 있었나?
이익주: 부패했기 때문에 훌륭한 혁명가가 많이 나왔다.
도 : 공민왕이 개혁을 시도하려고 했죠?
공민왕(恭愍王, 1351-74 재위) 고려말의 개혁을 시도한 제31대왕. 신돈을 등용하여 원나라를 배척하고 경제를 개혁. 성균관을 중심으로 유교를 진흥. 노국공주와의 로맨스로 유명.
이 : 시도를 했다.
도 : 공민왕의 개혁은 분위기가 어떻게 돌아갔나?
이 : 그 당시 문제가 된 것은 권세가들이 일반민들의 재산을 빼앗고, 억지로 노비로 만드는 것이었다. 당연히 빼앗은 재산을 돌려주고, 노비로 삼은 사람은 본래의 양인으로 돌리는 일을 했다.
도 : 그 당시 원나라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주체적으로 개혁을 못하는 굉장히 어려운 상황에 있었죠?
이 : 예, 공민왕이 개혁을 하려고 보니깐, 당시까지 원나라가 계속 간섭을 하면서 개혁을 못하게 했다. 먼저 원나라부터 몰아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고려는 원나라(몽고)의 지배하에 있었다.
1356년 공민왕은 정동행성(征東行省)을 폐지.
그리고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무력으로 철폐.
이때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이 맹활약했다.
그래서 1,356년에 원나라를 몰아내는 대대적인 작업을 진행한다. 아주 멋있게 성공을 하고, 곧이어 개혁에 착수했다. 이 개혁은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그 사이에 홍건적이 침범해 오고, 왜구가 극성을 부리는 일 때문에 상당히 오래 가다가, 신돈이라는 승려를 등용해서 전격적으로 개혁을 단행한다.
@신돈(辛旽, ?-1371) 승명은 편조(遍照). 공민왕 14년에 국사로 등용되어 토지와 노비를 돌려주는 등 과감한 개혁정책을 폈다. 그에 관한 항간의 나쁜 설화는 모두 그의 개혁을 왜곡하기 위하여 조작된 것이다. 정도전 개혁의 선구.
3. 대화, 개혁의 주인공
도 : 그 개혁을 단행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신진 관료, 신흥 유자들을 과거 시험을 통해 대거 등용했나?
이 : 그렇다. 개혁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개혁은 개혁담담의 주체세력이 확실해야 한다.
공민왕은 과거를 통하여 젊은 엘리트를 대거 진출시켰다.
임박, 정몽주, 김구용, 이승인, 윤소동, 박상충, 정도전 등.
개혁을 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있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개혁 주체세력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누구를 개혁주체로 할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였다.
이 때 공민왕은 과거에 급제한 사람을 등용한다. 그 당시 과거 시험에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이라는 사서(四書)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성리학을 공부한 사람이 과거에 급제했다. 이 사람들에게 정치를 맡겼다. 이 사람들을 기반으로 해서, 힘을 모아 개혁을 단행했다.
도 : 고려는 불교를 주축으로 문화를 이루고 있었는데, 신흥 관료들은 유교적인 소양을 갖춘 사람들이 등장하게 되었군요?
고려불교 조선유교
개인주의 관료체제
individualistic bureaucratic
이 : 그렇다. 유교 가운데서도, 좀 더 구체적으로 성리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결국 자기들의 목표한 바를 달성한 것이 조선 건국이었고, 그래서 조선을 성리학의 나라로 만든 것이었다.
성리학(性理學): 남송(南宋)에서 주자(1130-1200)가 외래사상인 불교를 배척하고 선진유교를 새롭게 해석한 철학사조.
4. 대화, 이색의 제자들
도 : 그 당시 유학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이색이라는 분이 떠오르는데, 정도전 등이 모두 이색의 제자입니까?
이색(李穡, 1328-1396) 고려말 성리학의 대학자. 본관은 한산. 원나라 국자감에서 공부. 한림원에까지 등용되었다. 고려말 개혁을 주도한 엘리트들의 큰 스승이었다.
이 : 그렇다. 제자였다. 그 당시 과거 시험에서는 성리학 시험을 봤지만, 성리학을 교육하는 기관은 국가에 아직 없었다. 과거 시험에 붙으려면 성리학 공부를 해야 했다. 그래서 공부를 위해서 개인적으로 성리학에 대해 학식이 높은 분을 찾아가야 했는데, 그 분이 바로 이색이었다.
도 : 그 당시 이색이라는 분을 통해, 새로운 학풍이 조성된 것이다. 거기서 많은 유생들이 올라오고, 공민왕이 개혁 의지가 있었으므로, 과거를 통해 많은 사람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토지를 갖고 있지 않았던 사람들이죠?
신진유생들은 상대적으로 고려사회에서 확고한 토지기반을 가진 계층이 아니었다. 그래서 개혁에 자유로울 수 있었다.
이 : 상대적으로 그렇다. 상대적으로 덜 가지고 있었다.
도 : 개혁하기가 편한 것이다. 항상 돈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은 개혁을 하지 못한다. 정몽주, 조준, 남은 등은 모두 고려 사회의 뿌리 깊은 지주 기반은 없었던 사람이라고 대개 보고 있죠?
이 : 네. 그래서 학계에서는 대지주와 중소 지주를 둘로 구분해서 사용한다.
개혁의 대상이 된 사람들은 대개 대지주였다. 성리학자들도 지방의 지주였다. 지주였기 때문에 공부를 하고, 관리가 된 것이다. 하지만 대지주는 아니었고, 중소 지수였다. 이렇게 구분을 한다.
5. 대화, 공민왕 시해와 정도전 유배
도 : 그런데 공민왕이 시해된 게 사실인가?
이 : 네, 그렇다. 참 아까운 일이었다. 저는 개혁을 시작한 사람은 개혁이 완성됨으로써 자기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민왕한테 그런 면이 있다. 아주 비극적인 최후라고 할 수 있지만, 역사적으로는 아주 의미 있는 일을 했다. 개혁의 결과는 보지 못하지만, 개혁을 시작하는, 그러니깐 커다란 수레바퀴를 먼저 굴리는 그런 일을 한 것이다.
도 : 그러니깐 조선왕조가 건국되기 이전에 이미 고려 말에 공민왕이라는 분이 고려 사회의 부패상을 구조적으로 조금 바꾸어 보려 노력했죠?
이 : 네.
도 : 그러면서 이 양반이 시해를 당하게 되니깐, 상대적으로 그때 등용되었던 관리들이 다시 박해를 받거나, 낙향하거나, 피를 보게 되는 거죠?
이 : 네. 그렇다.
도 : 그런데 정도전이 직접적으로 귀양을 가게 되는 계기는 어떻게 되나?
이 : 지금 말씀하신대로 공민왕이 시해를 당하니깐, 공민왕을 도왔던 관리들이 탄압을 받게 된다. 그런데 어떤 구실이 있어야, 이 사람들을 몰아낼 수가 있었다. 그 구실이 외교 문제에서 만들어진다.
공민왕의 정치 가운데 중요한 것 하나가 원과의 관계를 끊고 명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는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공민왕이 시해당한 후, 우왕을 옹립한 권세가들이 원과 다시 국교를 맺으려고 했다. 원나라와 국교를 재개한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국내 정치에서 개혁을 중단한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단순한 외교의 문제는 아니었다.
수구파 개혁파
친원정책 친명정책
도 :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원나라는 몽골 사람이었다. 고려 말에 우리나라를 쳐들어왔다. 그런데 중원에서는 몽골을 쳐부수고, 명나라가 수립되어 간다. 우리 나라에서 원나라와 가까이 하려는 사람은 보수 세력이었고, 개혁적인 사람들은 명나라와 친하려고 했다. 그래서 배원친명(排元親明)이라고 한다.
배원친명(排元親明)
원나라를 배격하고 명나라와 수교한다.
이런 배원친명에 가장 앞장 섰던 사람이 정도전이라고 말할 수 있나?
이 : 그 때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그런 주장을 한다. 그래서 모두 유배를 간다. 정도전은 나주로, 정몽주는 언양으로 유배를 간다. 아마 그때 가장 목소리가 높았고, 가장 앞장서서 반대한 사람이 정도전 같다. 왜냐하면 가장 오랫동안 유배를 가고, 풀리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다 돌아오는데, 정도전만 나주에서 오랫동안 유배생활을 한다.
정도전의 나주유배생활은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절망적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도 : 원나라 사신이 와서 맞이하라고 하니깐, 정도전은 사신을 맞이하러 가서 사신의 목을 베어버리겠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읽고 있는 답전보의 생활이 전개된다.
“내가 사신의 목을 베어오거나 아니면 체포하여 명나라로 보내겠다.”
-무왕 원년 정도전-
8. 대화, 정도전의 죽음
도올 : 그런데 이 양반이 억울하고 황당하게 돌아가시게 된다. 이방원이 이 양반을 죽인다. 그런데 이 양반을 죽인 죄목이 무엇이었나? 왜 이방원은 이 양반을 죽였나요? 참 아까운 분인데..
이 : 이렇게 생각하시면 어떨까요? 혁명이 성공했을 때, 혁명의 성공이 머리로 된 것이냐, 힘으로 된 것이냐, 이 두 가지는 사람마다 다 다르게 생각할 것이다. 정도전은 혁명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한 분이고, 이방원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혁명을 성공시켰다. 장기적으로 보면, 정도전이 혁명을 기획하고, 완수한 것이지만, 단기적으로 보면, 힘을 가진 사람이 혁명을 한 것이다.
그럼, 혁명이 끝난 후에, 이 혁명의 열매를 누가 차지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나올 수밖에 없다. 대개 역사적으로 볼 때, 그때 힘을 동원한 사람이 이기게 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보면, 개인적인 갈등관계라든지, 모함 등도 있을 것이지만 커다란 호흡으로 보면, 그렇게 이해하면 된다.
혁명의 목전의 열매는 힘을 가진 자가 따먹는다. 그러나 그 궁극적 가치는 머리를 쓴 자에게로 돌아간다.
-이익주-
도 : 구체적으로 보면, 정도전은 혁명 성공 직후 사병을 혁파한다는 명분에서 이방원이 갖고 있던 사병까지도 없애려 했다. 심지어 이방원의 사병을 데려다가 곤장을 치기도 했다. 그래서 이방원은 이건 더 이상 참을 수준이 아니라고 보고, 기습을 해서 죽여 버린다.
태조 7년(1398) 8월 26일 늦은밤 서울 송현(松峴)에서 피화(被禍)
그래서 역사에서 이런 훌륭한 인물이, 정치적 과정에서 희생은 되었지만, 오늘날까지 정도전이 세우려했던 조선의 비전은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도전은 지금의 민주사회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흐르고 있는 위대한 사상을 건설했다고 생각한다.
그가 추구했던 현실은 오늘 우리의 현실과도 결코 멀지 않다고 본다.
내 생각에 조선사상사를 지나치게 성리학 중심으로만, 성리학의 자질구레한 논쟁중심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정도전이라는 분을 잘 보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고려말엽에서 조선초기까지의 사상가들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사상적 폭과 깊이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생각하나?
이 : 그렇다. 고려라는 나라는 원래 굉장히 다양성을 추구하는 사회였다.
고려사회는 다양성을 추구했다. 유교, 불교, 도교 등 모든 사상에 대해 관용적이었다. 고려말 지식인들의 사상적 깊이는 조선왕조 성리학 일변도의 사상가들보다 더 심오할 수도 있었다.
그것은 조선하고 다르고, 지금하고도 다르다. 그런 가운데 태어나서 자란 사람은 다양한 사상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자연스레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우리 역사가 지금까지 제대로 발전해 왔더라면, 우리도 그런 다양한 사상과 문화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의 역사는 식민지를 경험했다고 하는 역사의 단절로 인해서, 과거의 풍부한 역사와 지금의 초라해진 모습과의 사이에 단절을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도 : 훌륭한 말씀이다. 고려말 사상가들의 스케일을 보면, 유교, 불교, 도교를 통달했다. 정도전이 <불씨잡변:佛氏雜辯>을 통해 불교를 비판했다고 하지만,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은 분이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이고, 노장(老莊)철학도 깊게 들어가 있다. 국제적 감각이 있고, 스케일이 컸다.
정도전과 같은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사상가들을 후대의 발전된 성리학에 비추어 봐가지고 초기단계의 미숙한 사상가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더 어떤 국가적 비전을 가지고 있었던 거대한 사상가라고 다시 고쳐 생각해야 된다고 본다. 이 강의를 통해 나는 그렇게 느끼고 있다.
삼봉 정도전은 조선왕조의 패러다임 밖에서 그 패러다임 자체를 창출한 거대한 사상가이다. -도올
젊은 교수분들도 우리 역사를 열심히 공부하고 계시다. 사실 우리가 역사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는 것은 일제식민지라고 하는 단절기를 통해, 우리 역사가 망각된 것이다.
일제식민지역사는 우리사회의 많은 근대적 변화가 이루어진 시기이지만 가치적으로 긍정될 수는 없다. 그것은 자기배반의 역사며, 단절이며, 반성되어야만 할 왜곡의 역사였다.
이것은 교과서적 망각이 아니라 우리 의식 속에서 단절이 깊은 것이다. 이 단절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본 강의가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 이 자리에 나와 주신 이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9. 답전보 전반부
지난 강의가 연속극처럼 ‘다음편을 기대하시라’하고 끝났다.
지난 시간을 정리하면, 정도전이 시골로 귀양을 가서 밭에서 어떤 나이 든 농부가 밭을 갈고 있는데, 가서 “노인장 수고하십니다.”라고 인사를 했더니, 쳐다보더니, “옷도 근사한 옷을 입고, 손발이 안 튼걸 보니깐, 편벽한 나주와 같은 부곡에 올 놈이 아닌데, 널 보니깐 분명히 중앙에서 벼슬이나 한 놈 같은데, 큰 죄를 짓지 않고서는 올 까닭이 없는데 너 같은 놈이 왜 왔느냐?” 하고 시골 노인이 야단을 친다.
朝士非得罪放逐者不至 子其負罪者歟?
처음에는 그렇다고 했다. 그러니깐 노인이 그 죄목을 나열하고 있다. 아주 처절한 말씀을 한다.
정도전의 유배지 : 나주 회진현 거평부곡
그래서 자리하나 얻으려고 비굴하게 사는 놈이 아니냐? 그리고 아파트 열쇠나 얻으려고 하고, 그러면서 徒食其祿, 不思其職이라고 했다. 녹은 항상 받아 처먹으면서, 항상 자기가 해야 할 직분은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徒食其祿, 不思其職
그리고 자기 처자를 보존하려고, 세월을 허비하면서 보내는 그런 놈이구나, 하고 야단을 친다. 오늘은 <답전보>의 나머지를 계속을 하겠다.
保妻子之計 偸延歲月
하지만 여기까지는 어떤 면에서 보면, 하급 공무원 이야기다. 그래도 하급 공무원의 부패는 봐줄 수가 있다.
그런데 정도전이 나는 그런 사람은 아니올시다라고 했다. 그러니깐 노인이 그러면 이런 놈이겠구나, 하면서 들어간다.
10. 답전보 후반부
▶ 然則豈爲將爲帥(연즉기위장위수), 廣樹黨與(광수당여), 前驅後擁(전구후옹),
장수(군대의 최고 사령관)가 되어가지고 널리 너의 패거리를 만들어서,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면서,
▶ 在平居無事之時(재평거무사지시), 大言恐喝(대언공갈),
평소에 아무 일 없을 때(국가의 전란이 없을 때), 큰소리로 공갈만 치고,
▶ 希望寵錫(희망총석), 官祿爵賞(관록작상), 惟意所恣(유의소자),
임금의 총애만 받길 희망하고, 관록과 작위를 자기 마음대로 하고,
(최씨 무단 정치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무인에 대한 굉장한 질타가 있다.)
▶ 志望氣盛(지망기성), 輕侮朝士(견모조사):
뜻만 높고 기만 성해가지고 벼슬하는 선비를 모멸하고,
▶ 及至見敵(급지견적), 虎皮雖蔚(호피수울),
그러면서 적이 보이는데 이르러, 호피가 울창하면,
(호피 : 전쟁 때 깃발을 내 거는데, 그 깃발을 호랑이 가죽으로 만든다.)
▶ 羊質易慄(양질이률), 不待交兵(부대교병), 望風先走(망풍선주),
속으로 본질은 양과 같아서 벌벌 떨고, 접전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바람이 불면 먼저 도망가서,
▶ 棄生靈於鋒刀(기생령어봉도), 誤國家之大事?(오국가지대사)
백성의 생명을 적의 칼날에 버리고 국가의 대사를 그르치는 놈이 아니냐?
▶ 否則豈爲卿爲相(부즉기위경위상), 狼愎自用(낭퍅자용), 不恤人言(불휼인언),
그렇지 않다면 재상이 되어가지고, 괴팍스럽게 자기 마음대로 하고, 남의 간언을 듣지도 않고,
▶ 佞己者悅之(영기자열지), 附己者進之(부기자진지)
자기에게 아첨하는 놈을 좋아하고, 자기에게 따라붙는 놈은 벼슬 시켜주고,
▶ 直士抗言則怒(직사항언즉노), 正士守道則排(정사수도즉배),
바른 선비가 바른 말을 하면 화를 내고, 바른 선비가 도를 지키려면 배척하고,
▶ 竊君上之爵祿(절군상지작록), 爲己私惠(위기사혜),
군상의 작록을 훔쳐서 자기 스스로의 은혜로 만들고,
▶ 弄國家之刑典(농국가지형전), 爲己私用(위기사용)
국가의 형전을 농단해서, 자기의 사용(私用)으로 삼고,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 惡稔而禍至(악임이화지), 坐此得罪歟?(좌차득죄여),
악이 무르익어 화(禍)가 이르게 되어, 앉아서 죄를 지은 놈이구나?
▶ 曰(왈):「否(부)」
(삼봉은)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다.”
국악에서 음악이 흐르다가, 뒤에서 탁 놓는 부분이 있다. 이걸 도습이라고 하는데, 이 글도 구성이 비슷하다.
@ 도습
가야금 산조의 후반부에 장단없이 혼자 타는 부분.
서양 교약곡의 카덴차(cadenza)에 해당.
▶ 然則吾子之罪(연즉오자지죄). 我知之矣(아지지의).
아하, 그렇다면 네가 어떤 놈인지 알겠구나.
▶ 不量其力之不足(부량기력지부족), 而好大言(이호대언),
네가 힘이 부족한 것도 헤아리지 못하고 큰소리만 치고,
▶ 不知其時之不可(부지기시불가), 而好直言(이호직언):
이 때가 어떤 때인지 모르고 바른 말 하기만 좋아하고,
▶ 生乎今而慕乎古(생호금이모호고),
지금의 세월에 태어나서 옛날만 숭상하고,
(나처럼 고전만 공부하고 앉았다는 말이다.)
▶ 處乎下而拂乎上(처호하이불호상), 此豈得罪之由歟(차기득죄지유여):
아래에 있으면서 윗사람을 들이박기만 좋아하니, 그래가지고 너는 죄를 아니 저지를 수 있겠는가?
▶ 昔賈誼好大(석가의호대), 屈原好直(굴원호직), 韓愈好古(한유호고), 關龍逢好拂上(관용봉호불상),
옛날 가의(賈誼)는 큰 소리 치기를 좋아하고, 굴원(屈原)은 바른 말 하기를 좋아하고, 한유(韓愈)는 옛것을 좋아하고, 관룡방은 윗사람을 들이박기 좋아했다.
한유는 당나라 때 대 문호로 고문 운동이라는 것을 한다.
@ 관룡방(關龍逢)
하나라의 마지막 충신. 걸임금의 장야지음(長夜之飮)을 간하다
죽임을 당함. <장자, 인간세>에 나온다.
앞에 나온 내용을 요약하면서, 뒤에는 출전을 말하고 있다. 앞은 일상 언어였는데, 뒤의 말을 들으면서 정도전은 이 할아버지가 초야에 있는 농부가 아니라 대단한 학자라는 걸 깨닫는다. 공부하지 않은 사람은 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 此四者(차사자) 皆有道之士(개유도지사), 或貶或死(혹퍔혹사), 不能自保(불능자보):
이 네 사람은 모두 도(道)가 있는 선비지만 전부 폄하당하거나 사약을 받아 죽어 자신의 생명을 온전하게 보존하지 못한 사람들인데,
▶ 今子以一身犯數忌(금자이일신범수기), 僅得竄逐(근득찬축), 以全首領(이전수령),
지금 너는 한 몸으로 이 네 사람의 죄를 다 범하고, 겨우 유배 죄를 얻어 목숨은 건졌으니,
▶ 吾雖野人(오수야인), 可知國家之典寬也(가지국가지전관야):
내 비록 야인이지만 우리 나라 국가의 법전이 얼마나 관용한지 알겠다.
▶ 子自今戒之(자자금계지), 庶乎免矣!(서호면의),
내가 지금 그대에게 훈계하노니, 지금부터라도 몸을 조심하면 화를 이제 면할 수 있을 것이다.
▶ 予聞其言(여문기언), 知其爲有道之士(지기위유도지사):
정도전이 그 말을 듣고서 이 사람이 대단한 도(道)가 있는 지식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 請曰(청왈): 「父隱君子也(부은군자야) 願館而受業焉(원관이수업언)」.
정도전이 “밭가는 할아버지! 당신이야 말로 숨어있는 위대한 선비로소이다. 그러니 내가 집에 모셔서 공부를 좀 배우겠다.” 하였다.
▶ 父曰(부왈):「子世農也(자세농야), 耕田輸公家之租(경전수공가지조), 餘以養妻子(여이양처자)」:
전보(田父)하는 말이, “나는 세세로 농부이다.(네가 생각하는 대단한 지식인이 아니다.) 단지 밭 갈고 나라에 세금을 열심히 내고, 남는 것으로 처자를 봉양하는 사람이다.”
▶ 過此以往(과차이왕), 非子之所知也(비자지소지야),
“여기서부터 더 지나가면, 그것은 내가 알 바가 아니다.”
형이하학적인 이야기를 하다가,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로 넘어가면 내가 알지 못한다는 의미가 過此以往에 담겨 있다.
이 말은 <주역, 계사>에 출전이 있다.
▶ 「子去矣(자거의) 무란아(毋亂我)」
가라. 나를 어지럽히지 말라.
▶ 「遂不復言(수불부언) 予退而歎之(여퇴이탄지)」
그러니 나는 무슨 말도 다시 할 수 없었다. 내가 물러나면서 탄식하는 말이
▶ 「若父者(약부자) 其沮溺之流乎(기저익지류호)」:
“저 할아버지는 장저(長沮), 걸익(桀溺)과 같은 도가의 사람일 것이다.”
沮溺之流에는 대단한 메타포가 담겨 있다. 대단한 문학이다.
장저(長沮)와 걸익(桀溺)은
<논어, 미자편>에 나오는 도가류의 은자들의 이름이다.
여기는 회진이라는 곳이다. 논어 미자편에 나오는 장저와 걸익의 이야기도 나루터에서 이루어진다.
깊은 은유를 느낄 수 있다.
회진(會津)
나주의 옛이름. 신라시대의 현(懸) 이름이다.
회진은 모든 것이 모여드는 나루라는 뜻이다.
11. 논어 미자편
長沮(장저), 桀溺(걸익) 耦而耕(우이경), 孔子過之(공자과지), 使子路問津焉(사자로문진언).
공자가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가, 어느 강에서 나루터를 찾는다. 장저, 걸익이라는 두 노인이 밭을 갈고 있었다. 그래서 공자가 자로라는 아주 충직한 제자에게 나루터를 물어보라고 한다. 공자는 언덕 위에 말고삐를 잡고 서 있었다.
長沮曰: 夫執輿者爲誰?
子路曰: 爲孔丘.
장저한테 처음 묻는다. 그러니깐 ‘저기 말고삐 잡고 있는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 ‘공구올시다.’라고 답한다. 공구는 자신의 스승을 낮추어 부른 말이다.
曰: 是魯孔丘與. 曰 是也.
曰: 是知津矣
“노나라의 공구냐?”
“네. 그렇습니다.”
“그럼 나루터는 저놈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쓸데없이 세상을 구하겠다고, 돌아다니는 놈이니깐, 저놈이 나루터는 다 알거라는 것이다. 주유천하를 한 사람이 있는데 나루터를 왜 나한테 묻냐는 것이다.
그래서 그 옆에 있는 걸익한테 또 물었다.
그러자 ‘너는 도대체 누구를 따라다니는 놈이냐?’ 라고 묻는다.
‘저는 공자를 모시고 다니는 자로올시다.’라고 한다.
且而與其從辟人之土也(차이여기종벽인지토지), 其若從辟世之士哉! (기약종벽세지사재)
‘그렇다면 그대는 왜 사람을 피해 다니는 놈을 따라 다니느냐? 나처럼 세상을 피해 다니는 사람이 옳다!’
공자는 삼환한테 당해서 노나라를 떠난 것이다.
耰而不輟(우이부철),
그러면서 계속해서 밭을 갈았다.
그래서 자로가 다시 공자한테 가서 사정 이야기를 다한다.
夫子憮然曰(부자무연왈),
공자가 얼굴을 울그락불그락하면서 말했다.
鳥獸不可與同群(조수불가여동군), 吾非斯人之徒與而誰與(오비사인도여이수여),
“새와 짐승이 한 무리되어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고 한다면, 내가 저 인간들과 더불어 살지 않으면 누구와 살 것인가?”(저 사람들처럼 세상을 피하고, 조수와 더불어 살고, 흙냄새 맡으며 산다고 이 세계가 돌아 가냐?)
天下有道 丘不與易也.
“천하에 도가 있었다면, 나는 이렇게 개혁하려고 돌아다니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공자의 메타포와 답전보라는 문학은 묘하게 얽혀 있다.
그러면서도 공자의 편에서 이야기한 것도 아니고, 장저, 걸익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담겨 있다.
12. 구정의 의미
설날에 귀향하는 것은 이런 전보를 만나러 가시는 것이다. 가서 어른들 뵙고, 지난 생활을 반성도 하고, 또 친구를 만나서 우리의 생활을 돌이켜 보기 바란다. 이것이 명절의 의미였다.
박정희 때 구정을 없애려 했다. 그러나 구정이 되살아났다는 것은 단순한 구정이라는 게 아니라, 구정에 담겨있는 문화가 변하지 않는 것이다. 구정이 살아났다는 것은 우리 문화가 후퇴했다기보다는 우리 것을 지키려는 민중의 의지가 승리한 것으로 본다.
많이 만나고 오라. 꾸지람 많이 듣고 오라! 정치인은 오래 귀양 가야 하지만 여러분은 3일간만 갔다 오라! 감사하다.
13. 논어 미자(微子)편
▶ 長沮桀溺耦而耕 孔子過之 使子路問津焉.
장저(長沮)와 걸닉(桀溺)이 나란히 밭을 갈고 있는데, 공자가 그들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이에 수레를 세우고 자로(子路)로 하여금 그들에게 나루터가 어디 있는지를 묻게 하였다.
▶ 長沮曰: 夫執輿者爲誰?
子路曰: 爲孔丘.
曰 是魯孔丘與.
曰 是也.
曰 是知津矣.
장저가 말하였다: "저기 저 수레 고삐를 잡고 있는 사람이 뉘시오?"
자로가 말하였다: "공구(孔丘)라는 분이외다."
장저가 말하였다: "저 사람이 바로 노나라의 공구(孔丘)인가?"
자로가 말하였다: "그렇소."
장저가 말하였다: "세상을 쏘다니는 사람인데 나루터라면 나보다는 그가 더 잘 알 것이오."
▶ 問於桀溺
桀溺曰 子爲誰.
曰 爲仲由.
曰 是魯孔丘之徒與.
對曰 然.
曰 滔滔者天下皆是也 而誰以易之.
且而與其從辟人之士也 豈若從辟世之士哉!
耰而不輟.
그래서 자로가 걸닉(桀溺)에게 다시 물었다.
걸닉이 말하였다: "댁은 뉘시오?"
자로가 말하였다: "중유(仲由)라 하오."
걸닉이 말하였다: "그대가 바로 노나라 공구(孔丘)의 무리인가?"
자로가 대하여 말하였다: "그러하오."
걸닉이 말하였다: "도도(滔滔)한 흙탕물에 휘덮이듯 천하(天下)가 다 그 모양인데 과연 누가 이것을 변혁시킨단 말인가?
사람을 피해 다니는 선비를 따르느니, 세상을 피하는 선비를 따르는 것이 더 낫지 않겠소!"
그리고는 묵묵히 씨알 덮는 일만 계속 하고 나루터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子路行以告
夫子憮然曰:
鳥獸不可與同群 吾非斯人之徒與而誰與?
天下有道 丘不與易也.
자로(子路)가 돌아와서 아뢰었다.
부자(夫子)는 한동안 멍하게 있다가 말하였다:
"조수(鳥獸)와 더불어 무리 지어 살 수는 없는 노릇. 내 이 인간의 무리와 더불어 하지 않는다면 과연 누구와 더불어 할까보냐?
천하에 도(道)가 있다면 변혁을 꾀할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다."
14. 답전보 후반부 해석
나는 그런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추궁이었다. 문득 이 노인은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 궁금했다. 하지만 또다시 추궁이 이어졌다.
“그렇다면 장수가 되어 패거리를 만들어 큰 소리로 공갈을 치면서 임금의 총애만 받으려 하고 정치를 마음대로 하려했는가. 마음에 들지 않은 선비들을 모멸하고, 적을 보면 호피깃발을 흔들지만 벌벌 떨면서 교전을 하는 척하고 도망갔는가. 그리고 백성들을 적의 칼날에 버리지 않았는가. 또는 국가의 대사를 엉망으로 만드는 그런 놈이더냐.”하고 야단을 쳤다. 나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아! 니가 그럼 경상 쯤 되더냐. 재상으로써 괴팍해서 온갖 정사를 마음대로 하고 선비나 벼슬아치가 간언을 하면 듣지 아니하고 자신에게 아첨하는 이들에게 기뻐하고 따르는 이에게 벼슬을 주었더냐. 또 선비가 바른 말을 하면 화를 내었고 도를 지키려면 배척을 했는가. 군상의 재물을 훔치어 스스로 은혜를 취하지 않았는가. 국가의 형전을 농락하여 자신에 사사로운 욕심을 채웠는가. 너는 사악함이 무르익어 화가 극에 달하고 앉아서 죄를 지은 자구나.”
노인의 말에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대답을 하였다. 나와 노인은 한참을 시선을 주고 받았다. 서로의 마음에 가야금 산조의 후반부에 장단없이 나오는 도습이 이어지는 듯했다. 노인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아하 그렇다면 니가 어떤 놈인지 알겠다. 힘이 부족한 것도 헤아리지 못하고 큰소리만 치고 지금 이 때가 어떤 때인지도 모르고 바른 말만 좋아하고, 현재보다는 옛날만 회상하고 밑에 있는 놈이 윗사람에게 대들면 좋아하는데 죄를 안 지을 수 있겠느냐. 옛말에 가희가 큰소리치기 좋아했고 구언은 바른 말하기 좋아하고, 한유가 옛 것을 좋아하고 관룡방은 윗사람 뒤 박는 것만 좋아하다 모두 죽임을 당한 것을 알고 있느냐. 이 네 사람이 모두 도가 있는 선비지만 전부 폄하 당하고 사약을 받아 죽거나 자신의 명을 온전히 보존하지 못한 사람들인데 너는 이 한 몸으로 네 사람의 죄를 범하였구나. 이제 겨우 근근히 살 유배지를 얻었으니 내가 비록 야인이지만 이 국가의 법전이 얼마나 관용한지 알겠다.”
나는 노인의 말을 듣고 순간 놀랐다. ‘아하, 이 사람 대단한 학자일지도 모르겠구나.’ 그리고 훈계가 이어졌다. 왠지 마지막일 것 같은 훈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너에게 훈계하노니, 지금부터 몸을 조심한다면 이제는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밭을 가는 농부야말로 은둔자요. 숨어 있는 선비였다. 내가 원관하여 노인이 수업을 해 주기를 부탁했다. 노인은 일어섰고 밭 한 가운데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호미를 들고 밭을 갈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서 다시 한 번 수업을 청했다. 자신은 농부일 뿐이지 당신이 생각하는 학식 높은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 단지 호미질을 하고 나라에 세금을 꼬박꼬박 내고 남은 돈으로 처자를 봉양하는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더 이상 형이상학적인 말을 하면 나는 알지도 못하고 알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농사짓는 이야기 아니면 묻지도 말라는 것이었다.
“가시오. 나를 더 이상 어지럽히지 마오.”
노인의 마지막 말은 단호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호미질을 하는 등이 굽은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았다.
‘저 노인은 장저(長沮)와 걸익(桀溺)에 비할 수 있는 인물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