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웬일인지 아직도 겨울비가 즐겁다. 가늘게 내리면서도 한 방울 한 방울 얼음 알갱이 맺히기 직전의 그 비가 빠짐없이 요란하게 따끔따끔 피부를 찌르는 그 차갑고 가녀린 전율스러움이라든가, 한참 달리다 보면 내 안의 열기에 의해 머리카락이나 어깨 또는 몸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김 서리 속으로 풍기는 해 묵은 내 본연의 체취를 바로 느낄 수 있을뿐더러, 싸늘하고 냉랭함 속으로 전해지는 조금의 뼈저림이라든가, 또는 맑음 속에서 저절로 추슬러지는 몸이며 머리가 바로 직감적으로 와 닿아서 좋다.
겨울비 까딱 잘못 맞으면 왼 겨울 내내 아주 감기 싸 짊어지고 살아야 한다고, 국민학교 일학년 다니다가 모진 백일해에 걸려 석 달 열흘 쿨룩거리던 끝에 이제 막 눈 뻐끔해진 채 간신히 미음이나마 먹기 시작한 나를 보고, 외할머님께서는 눈을 동그랗게 뜨시며 겁을 주셨지만, 나는 그저 외할머님 동그란 눈매에, 그저 작은 웃음만 보여드리고 이내 동네 골목이라든가 비 내리는 바다를 보러 바깥으로 나갔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나는 사실 어릴 때 매우 병약하였다. 무슨 돌림병 있다 소문나면 소문만으로도 그 병의 내역을 파악하여 그 동리서 내가 가장 먼저 앓았으며, 감기도 항상 그 동리서 일등을 도맡아 하였다. 요즘에사 개도 감기 걸리면 병원서 주사 맞는 형편이나, 사실 그 당시 내 주변 처지는 감기 걸려 약 먹는 걸 무슨 가문의 수치쯤으로 알아, 도무지 감기에 약을 먹어 본 기억은 한 번도 없다.
하긴 따져보자면 자연이 주는 그 천혜의 신통한 감기약 혜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고백하건대 그즈음 딸만 내리 셋 낳으시고, 그 후 외할아버님 주막 출입 후 화풀이 대상 제1호이셨다가, 내가 태어난 후 간신히 그것으로부터 해방되신 내 외할머님의 귀여운 첫 외손자로서, 외할머님의 감기약 특수처방 제1호이었던 '술지게미에 사카린 타서 밥 말아 먹인 후 이불로 돌돌 말아 뜨거운 아랫목에 놓아두기'의 실험대상으로써, 그 숭고한 의무를 한 번도 소홀히 해 본 적은 없었다.
아직도 그 기억은 매우 뜨겁고 화끈하고 선명하다. 감기의 고통 속으로 술지게미로부터 비롯되는 열기라든가 땀이며 숨 가쁨이 밀려 들어오면, 그 고통은 눈 녹듯 사라지고, 오오~ 세상에 학교에서 배운 바 지구가 돈다더니 정말로 돌긴 도는구나. 빙글빙글 어질어질. 이러다가 아주 죽어버리는 게 아닌가 싶다가도, 절대 죽어지지 않는 신묘하고 오묘하고 기묘한 그 위대한 현상ㅡ
온몸 흠뻑 적신 땀이 스르르 다 말라갈 즈음, 어디 숨어있던 오한이 또 지구 밑바닥에서 오슬거리며 온몸을 엄습해 오면, 내 귀에 선연하게 전해지는 외할아버님의 그 멋진 중저음 바리톤의 굵직한 목소리ㅡ 뭐시라? 아궁이에 장작개비 더 넣으라고? 이내 지글거리는 구들장 밑으로부터 다시 전해오는 뜨거운 화근내 나는 열기에, 다 식었던 몸이 다시 들끓고 땀이 샘 솟듯 솟고…….
그 실험대상이 한 번도 되어보지 못했던 사람들은, 다음 날 새벽에 이불을 헤치고 나올 때의 상쾌하면서도 이상야릇한 그런 기분이란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을 거다. 머릿속 울리던 통증과 귓속 왱왱거리던 그 열기는 어디로 싹 다 빠져나갔는지, 갑자기 우주에 나 혼자 던져진 듯한 훼엥함……. 여명이 물들어오는 땟국 줄줄 흐르던 봉창 너무나 애처로워 그런 마음 아닌데도 저절로 스르르 눈물 고이는데,
얘가 그래도 숨은 쉬고 있나 어쩌나, 밤새 호롱불 켜두고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들여다보시던 두 분은 내 양쪽에서 곤히 주무시고 계시고, 일어나 앉았다가 몸을 일으켜보면 아직 완전히 회복하지 않아 다리가 휘청거렸지만, 머릿속은 더 이상 맑을 수 없을 만큼 이 세상 저 먼 끝까지 맑았다. 그랬던 나의 상황이 지금도 뭐 그리 크게 변한 것 같지는 않다.
그 두 분 아직도 지하에서 다정하게 주무시고 계시다가 겨울비 내리는 소리만 들리면, 아흔셋에 돌아가신 외할머님께서는 쉰일곱에 돌아가신 외할아버님을 깨워, 또 그 큰 눈 동그랗게 뜨고 깜짝 놀라 일어나 앉아 일흔 넘은 나를 들여다보며 내 건강 걱정에 전전긍긍하고 계실 거고, 그러나 거기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난, 아직도 겨울비가 즐겁다. ㅡ 音 찰스 로이드 쿼텟 ‘물은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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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술지게미에 사카린 타서 먹고 뜨끈뜨끈한 온돌방에서 이불 푹뒤집어 쓰고 땀 푹내고 일어나면
감기 떨어질거 같아요.
술지게미에 사카린을 타서 먹으니 맛 있었을테고
술지게미 덕에 한숨 잘잤을테고.
감기치료엔 최고의 민간요법 같군요.ㅎ
그 땐 근처에 뱅원이란 게 눈 닦고봐도 없으니께
그거 말고 다른 대책이 뭐 있었것어? 그럭하다 살면 사는 거고 죽으면 죽는 거고.
요샌 내 외할매처럼 그라다가 며느리한테 잔소리 한 바가지 듣게 되니 쪼깨만 아퍼도 뱅원 가~ 실비 보험 든든한 거 들어놨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