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리놀 외방전교회 ∼外方傳敎會 (영)Maryknoll Fathers and Brothers, Missioners(M.M)
아시아 지역의 전교를 목적으로 1911년 6월 29일 월시(J.A. Walsh, 1867∼1936) 신부와 프라이스(T.F. Price) 신부의 발기에 의해 창설된 미국 최초의 외방 전교회. 창설 당시의 명칭은 ‘미국 외방전교회’(Catholic Foreign Misson Society of America)였으며, ‘메리놀 형제회’로도 널리 알려져 있고, ‘메리놀회’로 약칭하기도 한다. 교황청 인류 복음화성의 지시를 받으며 본부는 미국 뉴욕 주 오시낭(Ossining)에 있고, 한국 지부는 서울시 광진구 능동 85-1번지에 있다.
[창설] 메리놀 외방 전교회의 창설을 주도하였던 월시 신부는 1867년 2월 27일 미국 메사추세츠 주의 케임브리지(Cambridge)에서 태어나 성 요한 신학교(St. John’s Seminary)를 졸업하고 1892년 5월 20일 사제로 서품된 후, 메사추세츠의 보스톤(Boston) 교구에서 사목하였다. 이때 전교지(傳敎誌)《그 먼 땅에》(The Field Afar)의 간행을 담당하고 있던 그는 이 잡지를 통해서 미국의 가톨릭 신자들에게 아시아 전교의 중요성을 널리 전파하였다. 한편《진리》(The Truth)의 주필로 있던 노스 캐롤라이나(North Carolina) 롤리(Raleigh) 교구의 프라이스 신부는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외방 전교회를 조직하여 선교에 이바지하고 있는 반면, 미국에서는 외방 전교회에 대해 무관심한 것을 알고 매우 안타깝게 여기고 이었다. 외방 선교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던 이 두 사람은 1910년 9월,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개최된 제23차 세계 성체대회에서 우연히 만나 외방 전교회 창설을 계획하게 되었으며, 이듬해 4월 27일 전미 주교 회의(全美主敎會議)의 인가를 거쳐 같은 해 6월 29일 교황 비오 10세로부터 인준을 받았다.
‘메리놀’이라는 명칭은 메리놀의 본부의 위치에서 유래하였다. 원래 뉴욕에서 40㎞ 떨어진 호돈(Hawthorne)에임시 본부가 있었는데, 창설 1년 만인 1912년 10월에 오시닝의 작은 언덕 위로 이전하면서 이 건물을 마리아께 봉헌하였기 때문에 ‘마리아의 언덕’(Mart’s knoll), 즉 메리놀(Maryknoll)로 불리게 된 것이다. 메리놀회의 근본 정신은 “여러분은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여러분에게 명한 것을 모두 다 지키도록 그들을 가르치시오”(마태 28, 19∼20)라는 복음을 실천하는 데 있다.
메리놀회가 《그 먼 땅에》를 구독하는 독자들을 통해 널리 알려지자,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 복음화성)에서는 메리놀회가 인적 구성은 물론, 사업의 규모 면에서 충분히 선교 사업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라 파악하고, 동양의 첫 전교지로 중국의 광동(廣東) 교구와 광서(廣西)교구를 위임하였다. 그리하여 1918년 9월 프라이스 신부의 주도하에 4명의 신부가 중국에 파견되어 사목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진출 1년 만에 프리이스 신부가 사망함에 따라 월시(1891∼1981) 신부가 중국 메리놀회의 책임자로 되어 광서 동북부 지역과 광동 남부 지역에서 본격적인 사목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메리놀회 본부에서는 1932년 만주 무순(無順0 지역, 그리고 1935년에는 일본의 토쿄(京都) 지역으로 선교사들을 파견하였다.
한편 메리놀회 창설에 크게 기여하고 초대 총장까지 역임하였던 월시 주교(J.A. Walsh, 1933년 주교 서품)의 사망으로 인해 1936년 7월 홍콩에서 개최된 메리놀회 총회에서 월시(J.E. Walsh) 주교가 메리놀회의 후임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그가 총장으로 재임하고 있던 기간(1936∼1946) 동안 메리놀회는 2명의 주교, 204명의 신부, 90명의 신학생, 74명의 평신도 선교사들이 미국을 비롯한 동양의 선교지에서 활동할 정도로 창설이래 30여 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큰 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극동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메리놀회의 회원 203명 가운데 107명의 회원이 일제에 의해 적으로 간주되어 억류되는 고초를 겪어야만 하였고, 이 가운데 67명은 본국으로 송환된 후 또 다른 포교지로 파견되기만 기다려야 했다. 또 1949년 중국의 공산화로 그곳에서 활동하던 99명의 선교사들이 정신적·육체적으로 많은 박해를 당한 후 중국 본토에서 철수하였다. 총장 재임 후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월시 주교는 유일하게 그곳에 남아 있다가 공산 정권에 의해 13년 간(1958∼1970) 상해 감옥에 투옥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아시아 지역 선교에 많은 제약을 받자 창설 당시 계획에도 없던 새로운 선교지로의 진출이 시도되었다. 1942년 볼리비아를 시작으로, 1년 만에 멕시코, 과테말라, 페루, 칠레를 비롯한 13개 국에 120여 명의 선교사들이 파견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탄자니아를 비롯하여 케냐, 우간다, 스리랑카 등 아프리카 지역에도 진출 하였다. 1996년 9월 현재 27개국에서 800여 명의 메리놀회 소속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다.
[한국 진출] 삼남(三南) 지방보다 늦게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한 평안도 지방은, 1920년경 5개 본당과 50여 곳의 공소를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 3명과 한국인 신부 2명만이 전담하고 있을 뿐이었으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프로테스탄트는 교육 및 의료 사업을 활발히 전개하여 급속하게 교세를 확장하고 있었다.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사 부족으로 고심하여 있던 서울 대목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주교는 사우어(B. Sauer, 辛上院) 대수도원장에게 상트 오틸리엔의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평안도 지역을 담당해 달라고 지원하였다. 그러나 이미 평안도 지방으로 진출하여 나름대로 큰 성과를 거두고 있는 프로테스탄트와 경쟁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한 상트 오틸리엔의 베네딕도 수도회는 평안도를 포기하고 함경도 지방의 선교를 택하였다. 이에 뭬텔 주교는 1922년 평안도 지방의 전교 문제를 교황청 포교성성에 의뢰하면서 이 지역의 사목을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과 국적이 같은 메리놀회에 위임해 줄 것을 건의하였다.
한편, 중국에 진출해 활동하고 있던 메리놀회는 초대 총장인 윌쉬 신부가 이미 1916년경 한국 진출을 위해 직접 내한하여 현지 상황을 시찰한 바 있었는데, 1922년 11월 포교성성으로부터 평안도 지방의 포교권을 위임받자 그 해 11월 27일 번(P.J. Byrne, 方溢恩) 신부를 지부장으로 선출하였다. 1923년 5월 10일 번 신부가 평양 지목구 설정 준비 책임자로 입국하였고, 10월 22일에는 클리어리(P.Clerry, 吉) 신부가, 11월 24일에는 모리스(J. Morris, 睦怡世) 신부가 도착함으로써 한국 지부가 공식적으로 출범되었다. 이듬해 10월 19일에는 캐시디(Cassidy, 姜), 뒤피(P. Duffy, 都), 스위니(J. Sweeney,徐) 신부가 메리놀회 수녀 6명과 함께 입국하여 의주(義州)에 정착하였고, 1926년 5월부터는 은산(殷山), 마산(馬山), 비현(枇峴), 중화(中和) 등에 본당을 신설하였다. 번 신부는 지목구 설정을 위해 본부를 비현에 설치하고 본당 신설을 추진하는 한편, 입국하는 선교사들을 위해 영유(永柔) 본당에 ‘조선어 어학 학교’를 마련하여 장면(張勉, 요한)에게 조선의 언어와 풍습을 익히게 한 다음, 1928년부터 메리놀의 신부들에 의해 시약소가 운영되었는데, 간이 진료소의 역할까지 담당하였다.
1924년 8월 영유 본당에 번 신부 후임으로 모리스 신부, 같은 해 5월 은산 본당에 크레이크(H. Craig, 奇厚根) 신부, 1926년 8월 마산 본당에 부스(W. Booth, 夫文化) 신부, 1927년 9월에는 중화 본당에 치섬(D. Chisholm, 池) 신부가 본당 신설과 함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였고, 1926년에는 10여 년 간 본당 신부 부재로 의주 및 신의주 본당 소속 공소였던 비현 본당에 스위니 신부가 3대 주임으로 임명되었으며, 이때 총 신자수는 5,890명에 이르렀다. 또 1926년 10월에 스위프트(J. Swift, 蘇), 스위니(L. Sweeney, 徐) 신부가 입국하는 등 인적 확보가 이루어지자, 평양 본당에 클리어리 신부, 진남포 본당에 뒤피 신부를 임명하여 메리놀회 지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평양 지목구 및 대목구 시기] 교황청 포교성성에서는 1927년 3월 17일 평양 지목구를 설정하고 초대 지목구장에 번 신부를 임명하였다. 이에 번 지목구장은 한국 메리놀회 임시 본부를 비현에서 신의주 진사동(眞砂洞)으로 이전하고 한양 절충식 연와제(煉瓦製) 성당을 신축하였다. 아시아 지역의 선교를 목적으로 창설된 메리놀회는 오시녕에 있는 본부 건물을 중국식과 서양식을 절충하여 건립하였는데, 메리놀회는 이 본부 건물을 모델로 하여 포교지에서 건물이나 성당을 신축할 경우에는 항상 절충식을 택하였다. 마찬가지로 평안도 지방에서도 이 시기 신설된 성당 건축 양식은 유럽의 전형적인 고딕 양식이 아닌 절충식이었다.
번 지목구장은 제4대 조선교구장 파리 외방선교회의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순회하며 전교했던 곳과 오래 전부터 교우촌이었던 곳, 그리고 새로 입교한 교우들이 많은 지방에 우선적으로 본당 신설을 추진하였다. 또한 평양 지목구의 새로운 중심지를 관서 지방의 중심 도시인 평양으로 이전할 것을 결심하고, 평양에서 북쪽으로 10㎞ 떨어진 서포(西浦)에 본부를 설치하고자 추진하던 중 1926년 8월 메리놀 외방전교회 부총장으로 피선됨으로써 1930년 4월 평양 지목구장을 사임하였다.
그 후임으로 모리스 신부가 제2대 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 모리스 신부 재임 기간 중 평양 지목구에서는 36명의 선교사가 일선 사목에 임하였는데, 안주(安州)·중강진(中江鎭)·숙천(肅川)·강계(江界)·대신리(大新里) 본당 등이 신설되어 19개 본당에 134개 공소로 늘어났으며, 놀라운 교세 증가를 거듭하여 총 신자수도 17,738명에 이르렀다.
메리놀회는 한국 교회가 자립을 위하여 무엇보다도 방인 사제와 수녀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평양 지목구 설정 당시 불과 3명이었던 신학생은, 1930년에 양기섭(梁基涉, 베드로), 1931년에 장영걸(張永杰, 바오로), 1933년에 홍용호(洪龍浩, 프란치스코) 부제가 사제로 서품됨으로써 1936년에는 방인 사제가 11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리고 김필현(金必現, 루도비코), 박용옥(朴瓏玉, 디모테오) 등 2명을 로마 우르바노(Urbano) 대학에, 강현홍(姜賢洪, 사도 요한)을 일본 토쿄의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학교에 유학 보냈는데, 이들은 훗날 유학지에서 처음으로 신품을 받는 방인 사제가 되었다. 또한 방인 사제 양성 못지않게 한국 교회에 있어서 방인 수녀회의 설립이 시급함을 강조한 모리스 신부는 1932년에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를 설립하여 초창기의 이 수녀회의 양성을 메리놀 수녀회가 담당하도록 하였다.
일제 치하의 민족 부흥과 가톨릭 진흥을 위해 ‘가톨릭 운동 연맹’을 조직하였으며, 이 가톨릭 연맹의 주체로 1935년 10월에는 천주교 한국 전래 150주년 기념 행사를 평양에서 성공적으로 개최하였다. 또 예비자 교육을 전담할 전교 회장 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1933년부터 해마다 ‘평양 지목구 전교 회장 강습회’를 개최하였으며, ‘하기 가톨릭 대학’도 개설하여 가톨릭 청년 지도자를 양성하였는데, 이들은 전교 최일선에 파견되어 문명 퇴치 사업과 복음 전파에 전력하였다. 한편 선교 활동과 함께 언론·출판 사업에도 힘써 1934년 1월 종교 교양 월간지로 《가톨릭 연구 강좌》를 간행하였다. 그 해 7월 《가톨릭 연구》로 제호를 변경하였고, 다시 1937년 1월에 《가톨릭 조선》으로 개칭한 이 잡지는, 다양한 내용과 구성으로 창간 초기부터 평안도 지역은 물론 전국적으로도 큰 호응을 얻었으나 재정난과 일제의 조선어 사용 폐지 및 군비 물자 마련이라는 명목 때문에 1938년 12월호를 마지막으로 강제 폐간되었다. 1938년 4월 21일에는 신자들의 신앙 생활 강화를 위해 《성등》(聖登)도 간행하였으나 현재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그 성격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그 해 12월 《가톨릭 조선》과 함께 폐간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1936년 9월 모리스 지목구장의 사임으로 평양 지목구장 서리로 임명된 부스 신부는 신자들의 신심과 교회에 대한 열성을 신앙의 생활화로 이끌어 가기 위해 교리 경시대회를 해마다 개최하였는데, 평양 지목구 설정 10주년이었던 1937년에 가장 열기를 더해 신자들에게 교리에 대한 인식을 고조시키고 공동 참여 의식을 높여 주었다. 이어 1938년 10월 오세아(W. O’Shea, 吳) 신부가 제3대 평양 지목구장으로 임명되었고, 1937년 7월 11일 평양 대목구로 승격함에 따라 그 해 10월 29일 주교로 착좌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의 확대로 1942년 6월 1일 오세아 주교를 비롯한 메리놀회 선교사 전원이 마국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메리놀회는 평안도 지방에 총 51명의 선교사를 파견하여 21개 본당을 설립하였으며, 방인 신부 8명과 방인 수녀 39명을 배출하였으며, 신자수가 26,424명에 달하는 등 교세 증가에 크게 기여하였다.
[발전 및 변모] 해방 후 남북한 분단으로 북한 지역의 선교지를 잃은 메리놀회는 1947년 1월, 3명의 신부가 입국하여 명동 성당을 체재하였다. 뒤이어 2월과 4월 메리놀회 신부들이 속속 입국하면서 본격적인 사목 활동을 전개하였다.
해방과 더불어 한국 교회가 양적·질적 측면에서 큰 성장을 이루자 1947년 8월 12일 교황 비로 12세는 초대 지목구장이었던 번 신부를 초대 교황 사절로 임명하였다. 번 신부는 같은 해 10월 6일 입국하여 1949년 6월 주교로 성성되었으나, 이듬해 서울을 점령한 공산군에 납치되어 만포에서 중강진에 이르는 250리 ‘죽음의 행진’ 끝에 그 해 11월 25일 중강진 하창리(下昌里)에서 병사 순직하였다. 한편, 1948년 11월경 크레에그 신부는 교황 사절 번 신부로부터 전국적인 차원의 교회 사업 협의체를 설립하도록 위촉받고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를 구성하여 사묵구장을 역임했는데, 이후 이 협의체는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Catholic Conference of Korea)로 확대 개편되었다.
1950년 9월, 당시 미 8군 군종으로 미국 부대와 포로 수용소에서 사목하던 평양 대목구장 서리 캐롤(G. Carroll, 安) 몬시뇰은 감리교 선교사 쇼우(W. Show) 박사, 극동 사령부 군목과장 베넷(lvan L. Bennett)과 함께 군종제도의 창설을 제의함으로써 1951년 2월 7일 군종 제도가 창설되었다. 그는 또 가톨릭 구제회(N.C.W.C) 한국 지부장을 수행하는 것 외에도 1950년에는 나환자들의 구호 및 의료 사업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성 나자로 마을의 설립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교세가 점차 확장됨에 따라 1952년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주교는 충북 지역의 사목을 메리놀회에 위임하여 5명의 선교사들을 청주에 파견하였다. 1958년 6월 23일 충청북도 감목 대리구가 청주 대목구로 독립하여 단양군과 제천군을 제외한 충청북도 일원이 사목 구역으로 설정되었으며, 파디(J. Pardy,巴智) 신부가 초대 청주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어 같은 해 9월 주교로 착좌하였다. 또 1961년 6월 6일에는 인천대목구 설정과 함께 맥노튼(W. McNaughton, 羅吉模) 신부가 주교로 서품되어 초대 인천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3월 10일에는 인천시, 부천시 및 강화군, 김포군, 옹진군 지역을 사목 구역으로 하는 인천교구로 승격되었다. 1923년부터 1933년까지 한국에서 사목을 담당한 메리놀회 선교사들은 150명의 사제, 11명의 수사, 30명의 평신도 선교사, 16명의 신학생 등 총 207명에 달한다.
[사도직 활동]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후 현실에 맞는 사목 활동을 지향한 메리놀회는 1980년에 접어들면서 38명의 선교사들이 8개 교구에서 본당 사목뿐만 아니라 특수 사목에도 주력하였다. 1981년에는 메리놀 수녀회와 함께 경기도 성남에서 노동자·도시 빈민 등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기초 공동체 활동을 시작하여 1989년까지 영적 지도·피정 등을 담당하였고, 플람(B. Fullam, 원일엽) 신부는 경로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충북 청주의 성심원에서 1996년 3월 20일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까지 영성 지도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메스컴 사도직으로 오거스틴(R. Agustine, 안구열) 신부가 <평화방송> 케이블 TV에서 편성 위원을 맡고 있으며,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 본당(1987) 및 가락시장 본당(1991) 등 준본당 사목을 담당하여 본당의 외적인 비대화와 성전의 대형화가 가져오는 결점을 보완하는 효과적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설립 초기에 의도했던 특수 사목으로서의 효과는 거두었지만, 점차 신자수가 감소됨에 따라 활성화되지 못하여 본당 운영에 있어서는 상당히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정이다. 이외에도 병원 사목, 마리아 사제 운동 등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5명의 회원을 포함하여 1996년 9월 현재 25명의 메리놀회 선교사가 사목하고 있다.
출처 가톨릭 대사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