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청소년기를 지나 청년기에 접어들던 60년대 말 70년대 초에는 겨울이 지금과 같지 않고 내가 살던 경상도 지역에 대구 밑에 위천에서 고령으로 가는 도로길이 6,25전쟁으로 경북 고령교가 파괴되어 평소는 버스나 추럭을 실을 수 있는 나룻배에 차를 실어서 건너 주다가 겨울이 되면 낙동강강물이 얼어서 배를 관리하던 사공이 배는 제쳐두고 순구루마로 백사장의 모래를 파서 얼음 위에 차량이 미끄러지지 않게 뿌려주면 우마차(구루마)가 얼음 위로 지나다녔고 대구에서 해인사 거창 남원 전주 방면으로 다니던 버스나 도락구(트럭)들이 얼음위로 다닐때였으니 그때 겨울이 얼마나 추웠는지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던 그곳이 지금은 얼음은커녕 강가에 잡초도 얼어죽기 않고 파랗게 살아있는 것을 보면 세월이 흐르면서 기후도 정말 많이 변했다 느껴진다.
당시에 옷이라고는 얇은 목내의 하나에 무명으로 만든 골덴바지와 무명천으로 만든 윗도리가 전부였으니 겨울만 되면 추위와 전쟁이었다.
지금과 같은 보일러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구들방에 군불을 조금 때고 잠을 자는데 초저녁에는 훈기라도 있지만 새벽녁에 구들장방이 다 식어 오들오들 떨면서 추워도 억지로 무명베에 솜을 놓은 겨울 이불을 덮고 잠을 자지만 머리맡에 떠놓은 물 그릇은 새벽이면 꽁꽁얼어 있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래도 그 때는 하늘의 뜻으로 생각하고 절기가 바뀌기를 기다릴 뿐이다.
농촌에서는 24절기 중에 입동이면 가을걷이 대충 끝난다. 여자들은 겨우네 먹을 김장김치담그고 남자들은 짚으로 마람을 엮어 초가지붕을 새단장하고 나면 크게 바쁜 일이 없어 낮이면 마을어귀 양지쪽에 모여 도란도란 귀신씨나락 까먹는 이야기를 하며 시간 소일할 뿐이다. 일을 하고 싶어도 할 데가 없어 간혹 이동네 저동네 불량한 사람들이 이름도 성도모르는뜨네기 전문 놀음꾼들에 홀려 “도리짓고땡” “구삐이”같은 하투판으로 하루저녁에 논 한도가리를 잃어다느니 쌀 한섬 값을 잃었다느니 하며 동네가 매년 년례행사로 시끄러워 질 때가 많았다.
그때 열칠팔살 사춘기 지나 청년기에 접어들 때인데 학교에다 오면 가정형편상 학교가지 못하는 동네친구들은 어디가서 들은 정보인지 온갖 잡다구레하고 꼬리꼬리한 우스게소리에 공부는 뒷전이고 음험한 남녀교잡이야기 아니면 면소앞 양장점 미스김이 바람이 났다는느 그 옆에 미장원 미스 박은 남자가 하나둘이 아니라고 하더라는 등의 요즈음 세상 같으면 구속이 되어도 몇 번이나 구속이 될 거짓말을 괜히 하는데 대부분 그렇게 헛소문을 내는 그놈이 그아가씨를 좋아하기 때문에 남들이 눈독 들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거짓말로 멀쩡한 아가씨를 망가진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다반사였다.
당시에 TV라는 요술상자는 그런 물건이 있으이라 상상도 하지 못했고 라디오도 한동네 한두개 있을 동 말똥 할때라 볼 것도 들을 것도 없고 아무런 놀잇감도 없기 때문에 주막집 아니면 갈 데가 없었다. 그래서 아이고 어른이고 밤이 너무 길었다.
밤이면 석유 등잔불을 켜놓고 이야기하다가 아까운 석유만 태운다고 일찍 불을 끄고 기나긴 겨울에 초저녁부터 잠을 잤으니 잠이 그렇게 올 수가 없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피임도 할줄 모르고 아이는 제먹을 것 갖고 태어난다면서 생기는 대로 애를 낳아서 집집마다 애가 적으면 4~5명이고 보통 6명 많으면 9~10도 한배에 낳아 형제간 끼리 부딪치며 살았다. 그래도 그때는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이 살아도 형제간에 우애나 집안에 화목한 분위기는 정겹고 웃음을 잃지 않은 콩한쪽이라고 나눠 먹던 그때 그시절이 그립다.
그러다 5,16혁명이 일어나고 1970,4월 “하면된다, 잘살아보자”라는 구호아래 새마을 운동이 벌어지면서 농촌마을도 문화혜택이 골고루 받아야 한다며 박정희 대통령이 제일 먼저 국민들 피부에 와닿게 한 정책이 새마을 스피크를 보급하였다.
동네사람들은 스피커가 있는 집 처마 밑에 둘러앉으면 새마을 스피커에 아침부터 밤까지 쉼 없이 흘러나오는 노래소리와 동네 이장님의 마을 부역 나오세요, 비료 타가세요. 공지사항을 알려주는 소리나 듣고 살 때라 극장도 커피집도 없을 당시니까 지금 60살 이전 사람들은 무슨 날라가는 새방귀뀌는 소리하느냐고 하겠지만 그때는 다 그렇게 살던 시절이었다.
당시에 유일한 낙이 있다면 겨울내 두서너번 동네밖 아랫마을에 있는 버스정류소와 경찰지서가 있어 오가는 사람이 많은 그곳 마을빈터에 지금으로 말하면 겨울에만 장사하는 포장마차가 있었는데 추운 겨울날 그혹독한 추위에도 초저녁에 또래들끼리 어른들 몰래만나 먼산에 눈이 내려 혹독하게 차디찬 눈바람을 맞으며 포장마차에서 팔던 오뎅과 탁주 한주전자 시켜놓고 오뎅을 끓이는 가마솥 아궁이에 장작불에 손을 쬐면서 오뎅꼬지 몇개에 펄펄끓는 국물과 서비스로 넣어 주는 무우한토막을 먹는 그 때 그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는 맛이고 추억이다.
당시에 포장마차에서 막걸리 한주전자는 30원 어묵 한사발도 30원 할 때니까 당시로서는 비싼편이었다. 그 때 그시절 용돈이라고는 나올 구멍이 없었다, 어쩌다 쌀이라도 한말 팔면 그돈으로 조금씩 용돈을 받아 꼭 필요한 것만 사고 아끼고 또 아낄 때이다. 그러다 도회지에는 일가친척이 집으로 다니러 왔을 때 한푼두푼 주는 것이 돈의 전부이고 여름날 避暑가는 것이 아니라 외갓집에 가서 참외 얻어먹고 성주 이모집에 사과 얻어 먹으로 갔다가 올 때 외할머니와 이모가 꼬깃꼬깃 주머니돈을 아무도 몰래 슬적 집어주고 외삼촌, 이모부가 차비 하라고 돈주는 그것이 큰 부자가 된 기분일 때다.
나는 그래도 맏집에 맏손이라 마산에 사시는 종조부가 자식 없이 딸만 둘 데리고 당시만 해도 마산에서 가장 번화가인 창동 4거리에 대구가구점을 운영하셨는데 언제든지 종조부집에 놀러 가면 할아버지는 할아버지 대로 할머니는 할머니대로 용돈을 두둑하게 넣어 주시기 때문에 그 때 마산 할아버지는 구세주였었고 요즈음으로 말하면 현금카드였다.
당시는 은행도 없었고 농협은 5.16혁명 이후 61년8월에 농협이 발족하였으나 당시는 금융업무는 취급하지 않았고 1969년 7월에 상호금융업무 시작하였으나 정작 농민을 위한 농협이 농민들이 살고 있는 농촌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주변으로 군단위에서 생기다 보니 지금처럼 금융업무를 보는 곳이 없어 저금통장도 없었고 지금처럼 카드는 생각도 못할 시절이라 집안에다 감춰두고 써야 하는데 돈을 보관할데가 마땅치 않아 오래된 책갈피에 돈을 넣고 부피가 많으면 다른 책에도 넣어두고 조금씩 꺼내서 쓰던 그시절이 돈 가치가 있었고 돈의 위력이 대단했다.
겨울이 되면 추워서 길거리 사람이 거의 없다. 그 때를 노려서 가끔씩 친구들 만나서 부모님 몰래 포장마차에 가서 따끈따끈한 오뎅꼬지를 시키면 따끈한 국물한쪽대에 무 한조각을 넣어 준다 그 때 그맛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맛이고 아름다운 추억이다.
그리고 나서 따끈한 국물의 오뎅꼬지는 겨울철의 별미로 천상의 맛이라 할 것이다. 얼마전 그때 그맛이 그리워 먼저 “멸치, 다시마, 양파, 파” 등을 넣고 함께 끓여 우려낸 육수에 무를 크게 조각을 내어 넣고 1시간 푹끓이는 동안 부산어묵을 먹기 좋게 썰어서 넣고 30분 정도 끓이고 나서 삶은 달걀 2개를 반토막을 내서 넣어 따끈하게 끓여 아들과 소주한잔 해보니 그 때 그맛은 찾을 길이 없고 그 맛은 지금 어디를 가나 찾을 수가 없을 것 같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 옛날 포장마차에서 삶아놓은 각기우동을 얼기미에 넣고 오뎅 끓이는 물에 면을 건졌다 넣었다를 반복하면 맛이 좋아지고 쫄깃쫄깃한 면발이 정말 맛이 있었는데 요즈음 칼국수전문 집에는 바지락, 백합, 해물칼국수 등 다양한 칼국수가 많지만 그 옛날 포장마차 각기우동의 맛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 때 천막속의 포장마차는 바람막이도 제대로 되지 않아 겨울철 포장마차는 정말 추웠는데 그래도 그 따끈한 우동국물 한모금은 전신을 녹였으며 추워서 아래잇빨과 위잇빨이 맛닿아으면서 딱딱띡 잇빨 맞닿는 소리가 요란하다가도 우동국물 한모금만 머금기만 해도 몸이 녹았으니 그 따뜻한 그맛은 지금은 어디를 가나 그런맛을 찾아 볼수가 없다.
지금 돌이켜 옛날을 생각해보면 천으로 얼기설기 만든 포장마차에 눈바람이 몰아쳐도 왜그리 포근하고 좋았든지 정말 그리운 추억이다.
미국에는 스텐드바, 영국에는 펍, 일본에는 스낵바가 있지만 우리나라는 정겨운 포장마차가 있다. 각국의 음주풍습을 대표하는 곳이라면, 우리나라는 단연 포장마차를 떠올리지 않을수 없다.
우리나라 허름한 포장마차는 출입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웃사람이고 일면식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서로 만나면 먹든 술한잔 권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고 혼자 가더라도 빈자리 아무데나 비집고 앉아 서로가 안부를 묻고 정담을 나누다 보면 친구가 되고 선배가 되는 것이 우리나라 포장마차이다. 그러니 포장마차에 가면 정을 나누고 동네의 길흉사부터 정치문제까지 온갖 정보가 쏟아지는 사랑방이고 정보교환 장소이다.
그런데 미국의 스텐드 빠나 영국의 펍, 일본의 스낵바는 혼자서 혼술이 많고 그저 자신에 대한 고독, 외로움을 삭이기 위해 찾는 곳이지만 우리나라 포장마차는 동네 사랑방이라기 때문에 확실히 우리나라는 정이 많고 이웃을 사랑하는 인심 넉넉한 사람들이 사는 세상임을 다시한번 생각하게 한다.
뿐만아니다, 벽돌담 모퉁이에 기대서있는 허름한 포장마차를 들추고 들어가면 그냥 너도 나도 친구가 될수있는 그런 정감 어린 곳이 포장마차이다.
아마 포장마차를 즐겨 찾는 사람들은 아마 한 두 번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억세게 운이 좋은 날에는 고독을 씹으며 혼자 혼술하며 한숨쉬는 여성을 만난다면 분명 재수가 넝쿨채로 굴러들어온 날로 즉석에서 이성과의 짜릿한 만남도 가끔씩 수월찮게 성사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서로 술잔을 주고받을 수 있는 구역이 명확하게 구분 지어진 지금의 주점 문화와 달리 그 때 그 시절은 처음 만났어도 합석을 하는 여유로움이 있었고 술을 먹다 돈이 모자라도 포장마차 주인이 다음에 꼭 갚으세요, 라고 할 뿐 요즈음처럼 경찰에 신고해서 무전취식했다고 고소하는 사례는 거의 볼 수가 없었다. 그때는 사람사는 세상이었고 지금은 돈 없으면 사람 노릇도 하지 못하는 친구도 잡아먹는 다는 사마귀가 사는 악마 같은 세상에서 사는 것 같다.
특히 요즈음의 주점은 분명이 프라이버시 존중이라는 차원에 칸막이를 해놓고 벽을 쳐서 서로가 침범해서는 안되는 경계선으로 담장을 싸놓고 있지만 옛날의 포장마차는 엉덩이만 걸칠수있는 긴의자에 앉아, 어깨를 부딪쳐가며 한잔씩 하다보면 묘하게 한지붕밑에 있다는 동료의식같은 것도 생기고, 동질감도 생겨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며 서로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허물 수있는 그곳, 지금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포장마차의 풍경이다.
아 그립다. 그 때 그시절, 포장마차 오뎅꼬지와 따끈한 각끼우동 한그릇. 어디를 가나 찾아 볼수도 만나 볼 수도 없다.
나의 순수한 첫사랑 포장마차는 어디가서 뭘 하는지? 정말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