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이호영 베드로(1803〜1838)
o 1839년의 순교 성 인 이조이 아가타의 동생
o 1803년 : 인천 구월(혹은 경기도 이천)에서 출생. 이후 서울 마포로 이주
o 1838년 : 전옥서에서 병사로 순교
한국 103위 성인은 대부분 1839년의 기해박해 이후에 순교하였다. 그러나 기해박해 이전에 서울에서 체포되어 오랫동안 옥살이를 한 끝에 1838년 11월 24일(음력 10월 8일) 형조의 전옥서(典獄署)에서 병사하 여 순교의 화관을 쓴 이가 있었으니, 그가 곧 이호영 베드로이다. 그런 까닭에 베드로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기해 • 병오박 해 순교자 79위가 시복될 때 그 이 름이 가장 먼저 호칭되 었고, 103위 성 인 중에서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성 정하상 바오로에 이어 세 번 째 자리에 오르게 된다.
경기도 이천239> 혹은 인천 구월_에서 비신자 아버지와 신자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베드로는 어릴 때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누님 아래에 서 성장하였다. 기해박해 때 서소문 밖 현장에서 순교한 성녀 이조이(李 3史) 아가타가 바로 그의 누님으로,그녀는 16세 때 비신자 가정에 출 가했으나 아이도 얻지 못한 채 살다가 3년 만에 남편과 사별하고 친정으 로 돌아와야만 하였다. 이때부터 그의 가족은 어려운 살림살이 속에서도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고, 베드로도 어머니와 누님의 영향을 받아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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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9) 『기해일기』,93쪽.
240) 『기해 • 병오 재판록』회차 36, 변 아나스타시아의 증언. 증언자 변 아나 스타시아는 베드로가 '시어머니의 8촌 오라버니’ 였다고 한다. 구월은 현 인천시 남동구 구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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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칭찬한 만한 청년이 되었다.
어느 해부터인가 베드로의 가족은 서울 마포로 이주하여 무쇠막241세 집을 얻어 살았다. 이후 베드로는 1827년 전주에서 순교한 복자 이경언(李景衰, 바오로)을 스승으로 모시고 열심히 교리를 배웠다.24” 그러던 어느 날 교우들이 마귀 들린 비신자 처녀 한 명을 그에게 데려왔다. 이에 베드로는 그녀에게 교리를 가르쳐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였고,이로 인해 마귀가 떨어지자 그 처녀는 감격하여 베드로에게 청혼을 하였다. 이렇게 하여 베드로는 뒤늦은 나이 에 그녀와 혼인하게 되 었다?43>
베드로는 1834년 초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2에 신부가 서 울에 도착하자 그를 만나 성사를 받는 은총을 누릴 수 있었다. 이후 유 신부는 베드로의 성실함을 보고는 교회 일에 봉사하도록 하였고, 베드로 는 언어와 행동을 절제 있게 하면서 집안사람들과 여러 교우들을 깨우쳐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도록 이끌었으니, 그를 아는 많은 이들이 그의 성 품과 열심 에 탄복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1835년 정월,이호영 베드로는 누님인 아가타와 함께 소문을 듣고 그의 집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이에 앞서 베드로는 자신이 과거에 합격하는 꿈을 꾸었는데,그 꿈을 이상하게 여겨 한 교우에게 꿈 이야기를 했더니, 그 교우는 "아마도 순교할 꿈인가 보다”라고 일러주었다 한다.
포도청으로 압송된 베드로는 누님과 함께 배교를 강요하는 포도대장 앞에서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때 그들 남매는 한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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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위의 증언 참조. 무쇠막은 현 서울시 마포구 신수동으로 일명 수철막(水 鐵幕). 다른 증언에는 베드로가 ‘강교(서강교?)에서 살다가 혹은 ‘서강 토정이(현 마초구 토정동)에서’ 체포되었다고 나온다(『기해 • 병오 재판 록』회차 23, 김 루치아의 증언 : 회차 71. 김 요아킴의 증언).
242)〈모방 신부가 파리외방전교회에 보낸 1837년 말의 서한〉, 파리외방전교 회 고문서 , Vol. 577, pp. 493〜494.
243)『기해 • 병오 재판록』, 변 아나스타시아의 증언.
244)유방제 신부의 본명은 여항덕(余E德)이었으나,조선에 입국하면서 유방 제로개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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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천주는 우리들의 대군대부(大君大父)이시니 배반할 수 없으며, 교 우들의 이름도 댈 수 없습니다.” 라고 하면서 굳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또 포도대장이 "내가 쓴 커다란 글자에 점을 찍거나 침을 뱉는다면 배교하 는 표시로 알고 놓아 주겠다.”고 하자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이어 포 도대장이 갖가지 형벌을 가하도록 하면서 "너희들이 만일 아프다는 소리 를 하면 배주(背主)하는 것으로 알 것이다.”라고 하자, 고양(쏨羊)처럼 형벌을 받으면서 신음소리조차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결국 포도대장은 베드로와 아가타 남매의 신심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유혈이 낭자하고 혼자서는 움직일 수조차 없게 된 그들을 형조로 이송토록 하였다. 이곳에서도 그들 남매는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자 형관은 멋대로 사형 판결을 내린 뒤 전 옥서로 이송하여 가두도록 하였다. 이후 베드로는 자신이 받은 문초와 형벌 내용을 적어 교우들에게 전했는데, 그 내용의 일부는 지금까지 전 해지고 있다.
베드로와 아가타 남매는 이후 오랫동안 고통의 옥살이를 겪어야만 하 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항상 대재를 지키면서 고통을 달게 받 았고, 언제나 순수하고 양선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에 옥졸들도 모두 남매를 칭찬하였고,옥에 갇혀 있던 죄수 한 사람은 여기에 감동하여 교 리를 배워 영세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베드로는 병이 들어 죽 음에 이르자,타당하게 임종을 준비하면서 “칼 아래 죽는 것이 소원이었 는데, 모든 것이 주님의 명이로다.”라고 말한 뒤 하느님의 품에 안겼으 니,이때 그의 나이 35세였다._ 순교 후 그의 시신은 아내가 찾아와 노 고산에 안장하였다.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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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5)〈 모 방 신 부 가 파 리 외 방 전 교 회 에 보 낸 1 8 3 7 년 말 의 서 한 〉 , p p . 493〜494.
246)『기해일기』, 93〜95쪽 :『순교사 비망기』, p. 359.
247)『기해 • 병오 재판록』, 변 아나스타시아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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