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오면 집안에서 제일 쓰임새가 많아지는 것이 아궁이였다. 춥고 긴 겨울내내 아궁이는 온돌방을 따뜻하게 덥히고, 가마솥을 얹어 밥을 짓고 소 여물을 끓이며 물을 데우느라 쉴 틈이 없었다.
가마솥의 밥이 익을 때쯤 솥뚜껑 꼭지를 행주로 감아 열고 밥 위에 하얀 보시기를 깔아 호박잎을 얹어 쪄내기도 했다. 밥 짓고 난 후에 잔잔하게 남아 있는 아궁이의 불씨 덕분에 가마솥 안은 언제나 미지근히 데워져 있어 식은 밥을 넣어 두었다가 점심상에 따뜻한 밥을 올렸다. 아궁이 군불을 지피면서 불씨속에 파묻었다가 꺼내 입으로 호호 불어가며 먹던 고구마 감자의 맛은 잊지못할 추억이다.
아궁이는 불 하나로 밥을 하고 방을 덥힌다. 반면 요즘의 보일러는 취사 따로 난방 따로다.
[경남 산청군 금서면 방곡마을 강명님 할머니가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고들빼기 나물 씻을 물을 데우고 있다.]
아궁이에는 땔감이 만만찮게 들어갔다. 그래서 가장 큰 겨울준비가 땔감장만이었다. 집집마다 야산에서 채취한 잡목을 패 장작으로 만든뒤 뒷마당에 쌓아두었고 그것도 모자라 대청마루밑에까지 차곡차곡 쟁여 놓아야 마음이 든든했다. 나무하러 가지 못하는 집에서는 장에 가거나 한번씩 들르는 나무꾼으로부터 장작이나 갈비(마른 소나무 잎)를 한짐씩 사모았다.
아궁이가 있는 부엌은 오늘날처럼 단순히 밥을 하는 공간이 아니라 생활의 중심이었다. 대개의 부엌 부뚜막위 작은 선반에는 부엌신인 조왕신을 모신 하얀 사발 하나가 얹혀졌다. 우리 어머니들은 이른 새벽 우물에서 그날 처음 퍼 올린 깨끗한 물을 사발에 떠 놓고 조왕신에게 가족의 건강과 안녕을 빈뒤 하루를 시작했다.
아궁이는 재래식 부엌과 함께 70년대이후 새마을운동과 주거환경개선사업으로 대부분 사라졌지만 산청군 금서면 방곡리 방곡 가현마을과 금서면 오봉리 오봉마을 등 3개마을 10여가구는 아직도 아궁이를 사용한다.
방곡마을 강명님(68)할머니는 “스무살에 시집와서 이날까지 불을 땐다”며 “나는 잘 모르겠는데 며느리나 딸은 명절때 와서 부엌일을 하면 특히 허리를 굽혀 무거운 가마솥 뚜껑을 열고 닫는 것을 힘들어한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남편 우동수(69) 할아버지는 외양간 옆 헛간과 뒷마당에 가득 쌓아놓은 장작을 가리키며 “이 정도 땔감이면 올 겨울 추위걱정은 없다”며 “군불 때 줄테니 뜨끈뜨끈한 아랫목에서 한숨 자고 가라”고 권했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IMF후 방곡마을로 돌아온 차승근(40)씨는 빈집을 수리해 살고 있지만 아궁이만은 그대로다.
차씨는 “겨울 한철 기름보일러를 사용하면 70만원의 유지비가 드는데 이곳은 주변 야산에 잡목이나 고사목 등 땔감이 많아 난방비 걱정이 없다”며 “추운데 나가서 아궁이에 불 피우고 불 조절하는 것이 때론 귀찮기도 하지만 집에서 나오는 허섭쓰레기를 태우고 쇠죽도 끓일 수 있어 여러모로 편하다”고 말했다.
아궁이의 부산물인 재도 요긴하게 쓰였다. 한방에서는 아궁이 재를 복용간(伏龍肝)이라 하여 상처에 뿌리고 감싸주면 방부작용과 함께 상처를 낫게 했다고 한다. 또 재를 물에 우려내고 걸러서 만든 잿물은 삭은 오줌과 함께 주로 면이나 마로 된 옷감을 빨 때 세제로 사용됐다. 조선시대 여인들의 생활 지식을 수록한 ‘규합총서’(1869)에도 오줌과 잿물로 빨래를 했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아궁이에서 온돌로 이어진 우리의 주거문화는 아랫목과 윗목의 문화를 만들고 자동적으로 장유유서의 유교문화를 정착시키는데도 한몫했다. 어른은 아랫목, 아이들은 윗목으로 자리가 정해져 있었고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위해 할머니와 어머니는 뚜껑을 덮은 밥주발을 이불로 감싸 아랫목에 묻어놓았다.
요즘은 보일러를 사용하기 때문에 아랫못 윗목 구별이 별 의미가 없지만 대부분 아이들이 좀더 따뜻한 쪽을 차지하고 따뜻한 밥도 먼저 아이들 몫이다. 아궁이가 사리지면서 어른들도 ‘찬밥신세’가 됐다면 지나친 과장일까.아궁이의 참맛은 은근함에 있을 것이다. 은근함이 우리의 본래 성정이었을터인데 지금 우리는 모두 ‘빨리빨리’에 묻혀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