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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왕가의 발상지는 지금의 스위스 아르가우주(州)에 있는 슐로스 합스부르크이다. 슐로스는 독일어로 성(城), 궁전인데 빈의 슐로스 쇤브룬, 슐로스 벨베데레 등에서 찾을 수 있다. 지금은 작은 마을에 불과한 슐로스 합스부르크는 라드보트(Radbot)백작이 1020~1030년쯤 지은 성이었다. 합스부르크 가문 선조는 브라이스가우백작 군트람으로 보는 게 정설인데 라드보트는 손자였다.
그렇다면 ‘합스부르크’라는 이름은 무슨 뜻일까? 라드보트백작이 성을 짓고 이름을 지으려 할 때 매 한 마리가 성벽에 앉았다. “오, 합스부르크성이라고 부르면 좋겠구나.” 독일어로 매는 ‘하비흐트(Habicht)’인데 이걸 줄이면 ‘합(Hab)’이 되고 ‘부르크’는 중세 자치도시에 부여된 명사였다. 매는 실제론 독수리보다 강하다는데 이 작명이 유효했는지 합스부르크는 명성을 날리게 된다.
합스부르크성은 1415년까지 가문 소유였으나 이 지방이 스위스연방에 병합되자 시골 마을로 남는다. 이미 합스부르크왕가는 자신들의 중심지를 오스트리아 빈으로 옮긴 뒤였다. 합스부르크왕가를 중흥시킨 것은 라드보트백작의 7대손 루돌프 본 합스부르크(루돌프1세ㆍ1218~1291년)이다. 1276년 그는 독일왕이 되는데 이유는 자기들이 조종하기 쉬운 왕을 바라는 제후들의 계산 때문이었다. 루돌프를 독일왕으로 만든 1등 공신이 호엔촐레른 가문이다. 역사는 미묘해서 1866년 보오(普奧)전쟁 때 오스트리아가 져 합스부르크가는 치명상을 입는다. 그 프로이센을 세운 가문이 바로 호엔촐레른가였다.
처음 독일왕이 된 루돌프1세는 알브레히트4세 백작의 장남이었다. 그가 18살 때 아버지가 죽자 영지를 물려받았다. 1254년 호엔베르크백작의 딸 게르트루드와 결혼하며 슈바벤지방의 유력한 귀족으로 떠오른다. 이 무렵 독일을 지배하던 호엔슈타우펜왕조가 몰락한다. 호엔슈타우펜왕조는 독일제후로, 1138년부터 1254년까지 독일왕, 신성로마제국황제를 합스부르크왕가에 앞서 배출한 명문이다. 당시 상황은 이랬다.
붉은 수염왕, 즉 바르바로사로 불린 프리드리히1세(1122~1190년)부터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시작됐다. 호엔슈타우펜은 지금의 독일 남서부로, 그 이전에 오토왕조→잘리어왕조를 이은 세 번째 왕조였다. 작센왕조라고도 불리는 오토왕조는 하인리히1세(919~936년)→오토1세(962~973년)→오토2세(967~983년)→오토3세(996~1002년)→하인리히2세로 내려오다 5대 만에 망한다. 뒤를 이은 잘리어왕조는 지방의 이름이다. 잘리어왕조는 콘라트1세→콘라트2세(1024~1039년)→하인리히3세(1046~1056년)→하인리히4세(1056~1106년)→하인리히5세(1111~1125년)까지, 역시 5대 만에 망하는데 이 순서는 독일사의 왕조 흐름과 맥을 같이한다.
하인리히4세 직후 콘라트3세(1138~1152년)가 호엔슈타우펜 왕조를 세우지만 후계자가 너무 어려 조카 프리드리히1세(1152~1190년)로 왕권이 넘어간다. 그는 이슬람세력마저 무서워할 만큼 무서운 인물이었다. 그가 1188년 십자군 전쟁에 나서겠다고 하자 이슬람의 유명한 살라딘마저 겁만을 잔뜩 집어먹고 후퇴했을 정도였다. 호엔슈타우펜 왕조는 이후 하인리히6세(1190~1197년)→오토4세(1198~1215년)→프리드리히2세(1215~1250년)→콘라트4세(1228~1254년)를 끝으로, 모두 6대로 마감을 한다. 학자들은 콘라트4세의 아버지 프리드리히2세(1194~1250년)가 사망한 1250년부터 합스부르크 왕조의 문을 연 루돌프1세가 독일왕이 된 1273년까지를 대공위(大空位)시대라 부른다. 왕좌가 비었다는 뜻이다.
1273년 7명의 제후가 모였다. 독일왕을 뽑을 수 있는 투표권을 가진 이들을 선제후(選諸侯)라 한다. 쾰른-마인츠-트리어의 대주교와 라인왕령지 백작-작센 대공-브란덴부르크 변경백-보헤미아왕이었다. 루돌프는 아버지와 함께 호엔슈타우펜왕가를 정성껏 섬겼다. 너무도 어수룩해 보여서 가난한 루돌프라는 별명을 지녔기에 7명의 선제후는 그를 허수아비 왕으로 앉히지만 그것은 커다란 착각이었다. 루돌프1세를 왕으로 추대한 것이 앞서 말한 호엔촐레른가문의 뉘렌베르크 성주 프리드리히3세 폰 호엔촐레른이었다. 루돌프1세는 반대파 작센 공작 등에겐 딸을 배우자로 보냈다. 미인계를 쓴 것이다.
1273년 9월29일 독일왕이 된 루돌프1세는 아내 게르트루트와 함께 빈의 말뿐인 왕궁으로 온다. 그때 만해도 루돌프는 이곳에 자기 후손들이 640년간 거주하며 유럽을 호령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왜 말뿐인 왕궁이라는 말을 썼을까. 당시 유럽왕은 고정된 왕궁이 없이 전국을 떠돌았다. 제후들의 성에 머물다가 옮기는 식이었다. 당시 빈 왕궁은 4개의 수비탑에 담벼락만 있는 초라한 모습이었다.
지금처럼 화려한 모습으로 탈바꿈한 것은 1275년부터 시작된 공사 때부터였다. 독일왕이 된 루돌프의 마지막 경쟁자는 보헤미아왕 벤첼1세의 둘째아들로 야심가였던 오토카르2세(1232~1278년) 뿐이었다. 독일왕이 된 후 루돌프는 야심을 드러낸다. 불안정한 독일왕이라는 지위를 교황의 승인으로 안정시키려 한 것이다. 루돌프는 교황에게 로마를 포함한 교황령과 시칠리아섬을 넘기면서 십자군원정까지 약속했다.
뜻밖의 선물에 넘어간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루돌프1세를 승인하는 것은 물론 루돌프1세의 잠재적 경쟁자들에게 그를 승인할 것을 강요했다. 변방의 무명 루돌프는 바야흐로 반석 같은 기반을 지닌 독일왕이 된다. 루돌프1세는 독일왕에 오른 뒤 오토카르2세를 1278년 뒤른크루트전투에서 이긴 뒤 처형한다. 그가 갖고 있던 오스트리아를 자기 가문 것으로 만들고 두 아들에게 상속시키는데 이 성장이 다른 가문의 시기를 낳는다.
오토카르2세가 루돌프에게는 원수일 것 같지만 실제로 오토카르2세는 루돌프에게 많은 땅을 남겼다. 오토카르2세는 보헤미아왕국의 왕일뿐 아니라 오스트리아 공작 영지까지 교묘하게 차지했다. 원래 오스트리아공작 영지는 바벤베르크라는 집안 소유였는데 이 가문엔 딸 하나만 있었다. 마르가레테라는 여성인데 당시 22살의 오토카르2세는 46살인 마르가레테와 결혼해 오스트리아공작 영지를 손에 넣는다.
그 뒤 “내 색시가 과거에 수녀였다”며 이혼을 하지만 그녀가 지참금으로 가져온 오스트리아 공작 영지는 꿀꺽하고 만다. 이렇게 부자가 된 오토카르2세의 땅을 다시 루돌프가 차지한 것이다. 오죽했으면 루돌프가 독일왕이 됐을 때 바젤의 주교는 앞날을 내다본 듯 이렇게 한탄했다고 한다. “주여. 가만히 그 자리에 앉아 계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루돌프 그 녀석이 주님의 옥좌마저 빼앗고 말 겁니다.”
루돌프는 1291년 아들 알브레히트를 독일왕에 즉위시키려 했지만 선제후들의 반대로 무산된다. 알브레히트는 나사우 백작 아돌프에게 왕위를 빼앗기지만 1298년 전투에서 아돌프를 죽인 후 독일왕 자리를 되찾는다. 루돌프1세 이후의 후계자를 보자면 루돌프2세(1282~1283년ㆍ루돌프1세의 아들)→알브레히트1세 (1282~1308년ㆍ루돌프1세의 또 다른 아들로 1298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명목상 신성로마제국 황제)→루돌프3세(1298~1307년ㆍ알브레히트1세의장남)→‘미남왕’프리드리히(1308~1330년ㆍ루돌프3세의 형제로 1325년부터 신성로마제국 공동황제에 올랐지만 명목뿐)→레오폴트1세( 1308~1326년)→알브레히트2세(1330~1358년)→‘즐거운’ 오토(1330~1339년)→루돌프4세(1358~1365년ㆍ알브레히트2세의 장남)으로 이어졌지만 아들을 남기지 못한 루돌프4세 사후 가문이 갈라지고 만다.
즉 루돌프4세가 사망한 뒤 그의 형제인 알브레히트3세와 레오폴트3세가 1365년부터 1379년까지 14년 동안 합스부르크왕조가 누려온 지위를 공동으로 통치하지만 어디서나 동업은 오래가지 못하는 법이다. 1379년 두 사람은 영토를 나누는데 이때부터 합스부르크왕가는 알브레히트계열(오스트리아공작)과 레오폴트계열(슈타이어마르크-케른텐-티롤의 공작)로 분리된다.
알브레히트계열은 알브레히트3세(1386~1395년)→알브레히트4세(1395~1404년)→알브레히트5세(1404~1439년ㆍ1438년부터 1439년까지 신성로마제국황제 겸함)→‘유복자왕(遺腹子王) 라디슬라우(1440~1457년ㆍ알브레히트5세의 아들)까지로 이어진다. 레오폴트계열을 보면 레오폴트3세(1386년 사망)→빌헬름(1386~1406년)→레오폴트4세(1395~1402년)를 끝으로 방계혈통으로 다시 분화된다. 레오폴트가문쪽의 인너 오스트리아공작위, 즉 슈타이어마르크-케른텐쪽은 에른스트(1406~1424년)→프리드리히5세(1424~1493년ㆍ1452년부터 프리드리히3세로 신성로마제국황제에 오름)→알브레히트6세(1446~1463년)까지 이어진다.
여기서 인너(Inner)오스트리아란 오스트리아 중앙부를 말한다. 오스트리아는 어퍼(upper)-로어(Lower)-인너로 나눠진다. 말 그대로 북부-남부-중부인데 인너 오스트리아는 지금의 크로아티아까지 합친 땅이었다. 레오폴트 가문 쪽 티롤공작위는 프리드리히4세(1402~1439년)→지기스문트(1439~1446년)로 내려오다 지기스문트가 알브레히트계열의 프리드리히5세(프리드리히3세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동일인물)의 아들 막시밀리안을 양자로 삼는다. 이 막시밀리안에 의해 합스부르크왕가는 다시 하나로 합쳐진다.
합스부르크왕가의 역사를 살펴보면 중요한 인물이 다섯명이 있다. 맨 먼저 비조(鼻祖)라 할 수 있는 라드보트백작, 두 번째가 최초로 독일왕이 된 루돌프1세, 세 번째가 중흥의 기수 막시밀리안1세(1459~1519년)지요. 네 번째와 다섯 번째가 이미 소개한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요제프1세 황제이다.
막시밀리안1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재위 1493~1519년)까지 겸하는데 그의 인생은 고려 건국자 왕건을 연상케 한다. 우유부단한 아버지와 달리 인내심이 강했고 절묘한 혼인정책으로 번영의 기초를 닦았다. 그의 첫 아내는 마리아 폰 부르군트였다. 카를공작의 무남독녀 외동딸인데 부르군트는 지금의 네덜란드지방이다. 당시 프랑스왕 루이11세는 카를 공작을 죽인 후 자기 아들 샤를8세와 마리아를 결혼시키려 했다.
공주는 생전 보지도 못한 막시밀리안1세에게 시녀 몇명을 보석과 함께 보낸다. 구출해달라는 뜻이었다. 보석 판 돈으로 용병을 구한 막시밀리안은 부르군트에 도착해 그녀와 결혼한다. 마리아는 아들과 딸 하나를 낳지만 왜가리사냥에 나서던 중 변을 당한다. 낙마했는데 하필 말이 임신한 그녀의 하복부를 짓밟은 것이다. 막시밀리안1세와 마리아의 결혼생활은 5년도 되지 않아 막을 내린다.
막시밀리안1세의 두 번째 결혼상대는 안네 드 브르타뉴였다. 당시 브르타뉴는 프랑스에서 독립된 마지막 공국(公國)이었다. 그런데 막시밀리안의 재혼계획을 짓밟은 게 바로 자기 사위인 프랑스왕 샤를8세였다. 부르군트를 손에 넣을 때 막시밀리안1세는 자기 딸 마르가레테 폰 오스트리아를 샤를8세와 결혼시켰다. 그런데 이 엉뚱한 사위가 장인의 재혼상대와 결혼하겠다며 9살 된 아내를 버리는 파렴치한 짓을 벌인 것이다. 애가 탄 막시밀리안1세는 대리결혼을 할 기사를 브르타뉴로 보낸다. 제후들은 약혼에 해당하는 대리결혼을 하는 관례가 있었다. 막시밀리안1세가 파견한 기사는 칼을 중간에 놓고 안네와 잠을 잤다. 기사는 예복차림의 안네가 누운 이불 밑으로 오른발을 집어넣었다. 하객들은 그걸 증인으로 지켜봤다. 관습을 철석같이 믿은 막시밀리안은 안심했지만 샤를8세는 1491년 브르타뉴를 침공해 안네를 강탈해간다.
샤를8세는 이후 법률가-성직자를 동원한다. 프랑스왕의 입김에 이들은 막시밀리안1세와 안네의 행동은 정당한 결혼이 아니었다고 선언한다. 막시밀리안1세는 두 번째 아내를 빼앗기고 딸만 이혼녀를 만든다. 1493년 막시밀리안1세는 밀라노를 지배했던 스포르차가문의 장녀 비앙카 마리아 스포르차와 결혼한다. 많은 지참금을 받았지만 결혼은 행복하진 않았다. 비앙카의 무식과 돈 낭비, 체통 없는 행동 때문이었다. 막시밀리안1세는 자식들도 활용했다. 장남 필립을 스페인 왕녀 후아나와, 장녀 마르가레트는 스페인 황태자 후안과 결혼시켰다. 그러면서 한쪽 집안의 대가 끊기면 다른 쪽이 영지를 갖자는 계약을 맺었다.
운명의 여신은 합스부르크왕가를 향해 미소지었다. 스페인 왕녀 후아나는 정신이상을 일으킨 대신 합스부르크왕가에 2남4녀를 선물한다. 황제의 가문에서는 많은 자식이 곧 힘, 무자식은 멸문의 전 단계였다. 막시밀리안1세의 아들 미남공 필립은 훗날 스페인왕이 된다. 당시 스페인은 남미에 엄청나게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그 넓은 땅이 합스부르크왕가의 소유가 된 것은 결국 결혼정책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독일 최후의 기사로 불린 막시밀리안1세는 아버지 프리드리히5세를 보며 강력한 군주가 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평생 돈도 권력도 군사도 없이 제후들에게 조롱을 당하며 떠돌아다녔다. 자신의 결혼으로 영토를 넓히고 아들 딸의 결혼으로 스페인과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남아메리카의 광대한 땅까지 손에 넣은 막시밀리안1세는 손자와 손녀를 이용해 헝가리까지 노렸다.
헝가리의 라디슬라스2세와 결혼 동맹을 맺어 헝가리 지배권을 차지하는데 손자 페르디난드와 라디슬라스의 딸을 결혼시킨 것이다. 이번에도 곧 라디슬라스가 죽으면서 이 지역의 영지가 막시밀리안의 품에 들어왔다. 그의 생애는 책 한권 분량이 충분한데 한마디로 요약하면 ‘결혼과 전쟁과 외교로 평생을 산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얼마나 야망이 컸던지 교황 율리오 2세가 병상에 눕자 자신이 교황이 되려는 생각까지 품었다.
합스부르크왕가의 결혼정책을 당시 유럽에서는 이렇게 비꼬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전쟁을 시키고 오스트리아여, 너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해라!” 이렇게 확장된 합스부르크왕가의 영토는 규모가 줄어든 19세기까지도 3750만 주민이 거주하는 25만7478㎡의 영지를 보유, 유럽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넓었다. 합스부르크 제국 내에 사는 인종도 상상을 초월했다. 550만 독일인-500만 마자르족-400만 이탈리아인-300만 체코인-200만 루마니아인-200만 폴란드인-150만 슬로바키아인-150만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100만 슬로베니아인-75만 유태인-50만 집시와 아르메니아인, 불가리아인, 그리스인들로 구성된 인종의 용광로였다.
합스부르크왕가는 스페인 왕위를 차지한 뒤 시니어 합스부르크(스페인), 주니어 합스부르크(오스트리아)로 재분화된다. 앞서 기술한 1379년 알브레히트-레오폴트계열로 나뉜 것의 재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서로 내가 정통이라고 주장하면서 경쟁했는데 18세기 스페인 샤를르2세가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뜬 뒤 스페인 왕위를 프랑스 부르봉왕조가 차지하면서 시니어 합스부르크(스페인)는 막을 내리게 된다. 주니어 합스부르크(오스트리아) 역시 아들이 대를 잇다 1740년에 샤를6세가 아들 대신 큰딸 마리아 테레지아만 남기고 죽으면서 위기를 맞는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편을 데릴사위삼아 합스부르크-로레인(남편)으로 가문의 이름을 바꿔 명맥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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