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씀 요약 및 후기 (신명기 10장 12~20절)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명령과 규례를 따르는 것이라고만 말한다면 너무도 딱딱하고 거부감이 들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요즘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프랑스 혁명의 주역 로베스피에르를 통해서 이야기 해주시니 보다 구체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사랑은 이론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닌 '정념'의 문제라는 것.
사랑은 무조건적인 헌신이며, 프랑스 혁명의 이념처럼 자유,평등,박애와 같은 대의 혹은 이념에 대한 헌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내가 가진 것을 내어놓고 보다 숭고하고 값진 것을 얻겠다는 욕망의 실현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1792년 로베스피에르의 일기를 통해, 우리는 개인의 이익을 가지고 타협할 수 있는 순간에 혁명의 대의에 따르는 그의 신앙과 믿음의 태도를 알게됩니다. 그는 현재를 유지하고자 하는 '조화'를 넘어 끝까지 갑니다. 이것은 일종의 광기로서 생물학적 삶 너머, 하느님과 같은 시선의 위치로 인간을 끌어올립니다.
그의 수려한 일기문은 혁명의 시기에 인간이 구사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언어인 듯 합니다.
진리가 자신을 드러내는 시기, 혁명의 순간에 인간은 뻔뻔스런 생명에의 의지를 넘어섭니다.
그렇기에 로베스피에르의 죽음은 결코 비극적이지 않습니다. 그의 삶은 희열로 가득찬 것이었으며 공자도 말했듯이 '오늘 진리를 만나면 오늘 죽어도 좋다'와 같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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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랑, 이런 인물의 모습은 쉽게 만날 수 없는 것이기에 그저 멋있기만 한 것이고,
나는 할 수 없는 것, 혹은 나는 그저 살던대로 살래..이렇게 포기해버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흔히들 말하는 '인생 뭐 있어?'에는 이런 체념과 자조가 있습니다. 그러니 걍 '누려~'라고도 합니다.
우리에게 신앙이 없다면, 믿음이 없다면 이러한 세상 풍조를 쉽게 따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확실히 하느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윤리적 결단을 필요로 하는 것 같습니다.
혁명은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도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혁명은 진리가 그 모습을 드러내는 시간이며,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혁명이라고 이야기되는 그 시기에 여러 결의 사람들을 봅니다.
오늘 목사님께서 하느님 사랑의 한 표본으로 이야기한 로베스피에르와 같이, 사적인 이익이 아니라
대의와 이념에 대한 정념, 즉 하느님 사랑을 통해 지복과 기쁨의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이 참 인간됨의 길이라는 것을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