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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단대상 |
결사대장 |
결사대원 |
參政大臣 朴齊純 |
吳 基 鎬 |
10명 내외 |
內部大臣 李址鎔 |
金 東 弼 |
10명 내외 |
軍部大臣 權重顯 |
李 鴻 來 |
10명 내외 |
學部大臣 李完用 |
朴 大 夏 |
10명 내외 |
法部大臣 李載克 |
徐 泰 運 |
10명 내외 |
前軍部大臣 李根澤 |
李 容 彩 |
10명 내외 |
나철은 을사오적 처단의거 하루 전날인 3월 24일 동지들을 모아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로 격려하였다.39)
여러분, 오늘의 이 일은 한국의 독립을 유지하는 둘도 없는 바른 길이요, 우리 2천만 민중의 살고 죽는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자유를 사랑한다면 決死의 각오로 힘써 주 시오. 이 5적을 베어서 내부의 병통을 제거한다면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은 길이 독립된 나라에서 살 수 있습니다. 그 성공하느냐가 오늘에 있고 그 실패하느냐가 오늘에 있습니 다. 사느냐가 여러분에게 있고 죽느냐가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인영이 부족한 몸으로 이 의거를 주창하면서 오늘 줄줄이 흐르는 눈물을 거두고 방울방 울 떨어지는 피를 씻으며 心膽을 기울이고 엎디어, 이 의거를 우리 血性있고 智勇있는 여 러분의 가슴 앞에 제출합니다. 여러분 각기 순결한 애국심을 격려하여 빨리 흉악한 매국 적을 베어서 우리나라를 높이 이 세계상에 독립하게 하여 주시오. 그런다면 인영은 18지 옥에 들어가서 恒河沙의 온갖 고통을 당하더라도 한량없이 기쁘겠습니다. 부디 부디 힘써 주시오.
1907년 3월 25일 결사대원들은 각자 정해진 장소에 분산 배치되어 거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참정대신 박제순이 광화문 앞을 지날 때 오기호가 지휘를 잘못하여 기회를 놓쳐 실패하고 말았으며, 법부대신 이재극이 서대문을 통과하기를 기다렸으나 워낙 경비가 삼엄하여 결행하지 못하였다. 또한 군부대신 권중현이 中署寺로 통과할 때 저격하였으나 실패하고 결사대원 康相元이 체포되고 말았다. 내부대신 이지용을 남대문부근에서 처단하려 하였으나 강상원의 체포로 경계가 삼엄하여 일단 해산하였다.40) 을사오적 처단의거가 실패하자 나철․오기호․金憲植 등은 박제순과 이지용을 처단하기 위해 재차 폭탄을 넣은 상자와 편지를 외국인이 보낸 것처럼 가장하여 집으로 배달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41)
을사5적 처단의거가 실패로 끝나자 대한제국 정부는 이 사건을 정부전복을 위한 내란사건으로 규정하고 체포된 자들을 평리원으로 이송하고 진상파악을 위해 조사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나철은 재거사를 위해 박대하를 지방으로 파견하여 결사대원을 다시 모집하였다. 그러던 중 서창보가 체포되어 거사전모가 사전에 밝혀지자 1907년 4월 1일 나철․오기호․김동식․이기․이광수 등 지도부가 자수하였다. 재판과정에서 나철은 매국역적을 처단하여한 의거를 내란죄로 규정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항변하였으나 같은 해 7월 6일 나철을 비롯한 18명이 실형을 선고받았다.42) 이용태와 민형식은 교수형, 나철은 流刑 10년, 오기호는 5년형을 각각 구형하였다. 그후 민형식외 1명은 黃州郡 鐵島로, 나철외 11명은 智島로, 李承大외 12명은 珍島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나철과 오기호는 1907년 12월 7일 고종황제의 특사로 석방되었다.43)
3. 동양평화론의 계승․발전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에 관한 국제적 논의는 동양평화 더나아가 세계평화를 전제로 전개되었다. 일본은 제국주의 영토확장을 추진하면서 내세운 동양평화론은 1905년 전후에는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러나 일제가 내세운 동양평화론은 일본이 맹주가 되어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지배를 통해 동양평화를 실현하겠다는 제국주의 침략론이었다.44)
나철은 한국의 주권을 지키기 위한 최선책을 만국공법과 국제조약에 입각하여 구국외교항쟁을 전개하였다. 1902년 이기․홍필주․이건 등과 함께 연명하여 의정 윤용선에게 보낸 일본인 이민반대 서한에 일제에게 공법과 약장을 지킬 것을 강조하고 있다. 서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45)
지금 일본이 꺼리고 돌아보는 바는 오직 공법과 약장이다, 우리가 반드시 이것을 가지 고 그들에게 따지면 그 말이 바르고 그 뜻이 곧아서 장차 천하에 소소하더라도 부끄러움 이 없을 것이다....(중략) 지난 백년 이래 열방의 변화는 참으로 지극히 놀라운 지경에 이르렀다. 작은 나라는 큰 나라에게 먹히고 약한 나라가 강한 나라에게 병탄을 당하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 이유를 캐보면 반드시 약소한 나라가 먼저 실례를 저지르고 강대한 나라가 그것을 문죄했을 뿐이었다. 무엇을 일러 예의라고 하는가 하면 능히 공법 과 약장을 지키는 것을 말하며, 무엇을 죄라고 하느냐 하면 공법과 약장을 지키지 않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과연 실수가 없으면 저들이 또한 구실이 없는 전쟁은 천하가 모두 함께 비난하는 바이다.
나철은 만국공법과 국제조약에 의거하여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고 동양평화는 물론 더나아가 만민평등과 세계평화를 추구하였다.46) 그의 사상과 이념은 이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이념과 사상에도 큰 영향을 주었고 계승․발전되었다. 한국의 독립이 아시아의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것임을 주장한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동양평화론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대표적으로 安重根의 동양평화론47)과 呂運亨의 아시아평화론48) 그리고 趙素昻의 三均主義49)를 들 수 있다.
①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안중근은 1909년 이등박문이 ‘동양평화 파괴의 주범’이기 때문에 처단하였다고 의거 이유를 밝혔다. 그리고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여 일제의 동양평화론의 기만성을 폭로하였다. 안중근은 의거후 체포되어 사형집행 직전까지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였다.50)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에 대한 구상은 1905년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면서 러일전쟁을 명분으로 내세워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고 한국의 독립을 굳건히 하겠다’는 점에 주목하여 일제의 한국강점은 일본이 약속을 저버리고 배신행위를 하였다고 비판하였다. 안중근은 특히 일본이 대의를 저버리고 동양평화를 깨뜨린 장본인으로 이등박문을 지목하고 처단하였다.51) 또한 일본에 대한 배신감과 이등박문에 대한 적대감은 안중근이 1907년 러시아에서 의병전쟁을 촉구하면서 일본이 러일전쟁 당시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고 한국독립을 굳건히 한다’고 한 약속을 어기고 한국의 주권과 재산을 침탈한 행위를 지적하고 이러한 불의에 대한 책임자가 이등박문임을 강조하였다.52)
안중근은 그의 의병전쟁론을 단지 한국과 일본 양국간의 전쟁이 아니라 외교전 또는 국제전으로 발전할 것으로 전망하고, 그의 의병전쟁이 국제공론을 환기시키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았다. 한국의 힘만으로 한국의 독립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현실을 직시하였던 것이다. 안중근의 의병전쟁 계획은 국제사회를 고려한 것이었다. 그는 군사력의 한계를 인식하고 가능한 외교적 방안을 강구하였다. 한국의 독립방안을 국제적 상황을 파악하고, 국제공론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점이 바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이었다. 이러한 점은 안중근이 1908년 일본군 포로에게 ‘대한독립’과 ‘동양평화’를 약속한 천황의 뜻을 지킬 것을 다짐받고 석방한 사실로도 알수 있다.53) 안중근은 자신의 의거가 한민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러 민족이 공존할 수 있는 동양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것임을 강조하였다. 안중근은 자신의 ‘동양평화론’을 저술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54)
지금 서양세력이 동양으로 뻗쳐오는 화난을 동양 인종이 일치단결해서 극력 방어해야 함이 제일의 상책임은 비록 어린아이일지라도 익히 하는 일이다. 그런데도 무슨 이유로 일본은 이러한 順然한 형세를 돌아보지 않고 같은 인종인 이웃나라를 깍고 우의를 끊어 스스로 蚌鷸의 형세를 만들어 어부를 기다리는 듯이 하는가. 한․청 양국인의 소망이 크게 절단되어 버렸다. 만약 정략을 고치지 않고 핍박이 날로 심해진다면 부득이 차라리 다른 인종에게 망할지언정 차마 같은 인종에게 욕을 당하지 않겠다는 의론이 한․청 양국인의 肺腑에서 용솟음쳐서 상하 일체가 되어 스스로 백인의 앞잡이가 될 것이 명약관화한 형세 이다. ...(중략) 그래서 동양평화를 위한 義戰을 하얼빈에서 개전하고 담판하는 자리를 旅順口에 정했으며 이어 동양평화 문제에 관한 의견을 제출하는 바이다.
안중근은 한국의 독립을 기초로 한 바람직한 동양평화 실현방안으로 한국․중국․일본 3개국이 참가하는 동양평화회의를 대안으로 제시하였다.55) 먼저 일본이 여순을 개방하여 한국․중국․일본 3개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군항을 만들고, 그곳에 3개국 대표로 구성된 평화회의를 조직할 것을 제안하였다. 또한 이 회의체는 독자적인 재정을 갖추어 3개국 공통화폐를 발행하며 독자적인 평화 군대를 구비하는 것으로 구상하였다.56) 안중근은 3개국의 독립국임을 전제로 하되 현실적인 국력차이를 인정하여 일본을 맹주로 한국과 중국이 정립하여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57)
② 여운형의 아시아평화론
여운형은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고 국제사회에서 전후처리 문제를 논의하던 1918년 8월 신한청년단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1918년 11월 미국 대통령 특사 크레인이 중국 상해 방문시 환영식상에서 파리강화회의 내용을 전해 듣고 크레인을 만나 파리강화회의를 통한 한국의 독립외교 가능성을 확인하였다. 이에 미국 윌슨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청원서 2통을 작성하여 한국독립 지원을 국제사회에 요청하는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외교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신한청년당 조직을 확대하고 활동을 강화하였다.58)
여운형은 한국의 독립이 동양평화와 세계평화를 위한 것임을 강조하고, 동양평화의 관점에서 보면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는 양국간의 분쟁뿐만아니라 중국도 일본을 배척할 것이다. 일제의 한국강점은 동양3국의 분열을 조장하기 때문에 한국독립이 동양평화를 보장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세계평화의 관점에서 보면 동양의 평화와 혼란은 세계평화와 직결된다고 하였다. 여운형의 아시아평화론은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에 비하여 세계평화 개념으로 확대되었다.
일본이 주장하는 동서양의 대립구도는 이미 깨졌고,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세계는 대립의 시대가 아니라 세계평화를 추구하는 인도와 정의의 시대이다. 그러므로 일본을 맹주로 단결하자는 일본의 동양평화론은 시대착오적인 제국주의 침략이론 임을 지적하였다.59) 여운형은 일본이 내세우는 동양평화론의 허구성을 논박하면서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1925년 이후에는 피압박민족연합회를 조직하였고 원동피압박민족대회 개최를 위한 활동을 전개하는 등 한국․중국․인도․안남․필리핀 등 아시아 피압박민족의 단결을 통해 아시아 평화 실현을 위한 모색을 하기도 하였다.60)
③ 조소앙의 삼균주의
조소앙61)은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국망을 세계 국제분쟁의 한 현상으로 진단하고 국제적 차원의 대립과 갈등을 치유할 방안을 모색하다가 1914년 국내외 동포의 단결과 민족의 종교적 단결을 목적으로 ‘六聖敎’라는 구국종교를 창안하였다. 육성교는 단군의 독립사상, 석가의 慈悲濟衆, 공자의 忠恕一貫, 소크라테스의 知德合致, 예수 그리스도의 愛人如己, 마호메트의 信行必勇을 연결하여 육성일체화를 시키고자 하였다. 조소앙은 육성교를 통해 세계인류가 종교적 통합을 이룩한다면, 국가와 민족간의 갈등이 해소될 것이라고 보았다.
조소앙이 창안한 육성교는 나철의 사상과 대종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생각되는데 조소앙이 1913년 상해로 망명하게 된 것도 당시 대종교서도본사 총책임자였던 신규식과의 인연때문이었다. 또한 그가 활동한 同濟社62)의 구성원들도 대종교 중심인물들이었고, 博達學園도 신규식이 중심이된 대종교 계통의 학교였다.63)
1917년 7월 대종교 중심인물인 박은식․윤세복․신채호․조소앙 등 14명의 명의로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대동단결선은 조소앙이 기초하였고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기반이 되었다. 또한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개최하는 국제사회당대회에 한국독립 문제를 의제로 상정하여 이를 통과시켰다. 이를 시발로 한국의 독립문제가 국제기구에서 논의되기 시작하였으며, 전세계의 관심을 모았다. 1919년 2월에는 대한독립선언서64)를 기초하여 공표하였는데 그 이념과 사상은 이후 2․8독립선언서와 3․1독립선언서에 그대로 계승되어 반영되었다. 같은 해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헌장과 임시의정원법을 기초하였는데 이 헌장은 대한민국 최초의 헌법이라 할 수 있다.
1920년대 후반 조소앙은 삼균주의를 창안하여 독립운동의 대동단결 이념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도이념으로 정립시켰다. 그가 제창한 삼균주의는 대한민국건국강령에 반영되는 등 중국관내 민족운동의 지도이념이 되었으며, 해방과 분단 이후에는 평화통일운동의 바탕이 되기도 하였다. 삼균주의는 ‘균등’을 핵심 원리로 삼으면서 개인․민족․국가 세가지 수준에서의 실현을 통해 민족독립과 세계평화를 추구하는 이념체계이다. 또한 조소앙은 한국을 ‘세계평화의 등대이며 사령탑’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한국의 국권을 침탈한 뒤로 제국주의 침략전쟁은 계속되었고, 그 결과 동양평화와 세계평화가 깨진 역사적 사실 그 증거이다. 한국의 독립이 세계평화의 기본조건이며 한국 독립없이는 세계평화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삼균주의는 아시아 평화, 더나아가서는 세계평화 실현을 지향하는 사상이다.65)
4. 대종교 중광과 사상
나철은 국권수호를 위해 다방면에 걸쳐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고민하던 중 민족주체성을 확립하고 주권을 수호하기 위해 1909년 단군교를 중광하였다. 다음해인 1910년 8월 5일 대종교로 교명을 바꾸고66) 포교활동을 통한 구국운동에 매진하였다. 나철은 국권회복을 위한 새로운 방략으로 한국 고유의 민족종교를 창시하고, 자주 독립 사상을 고취하여 이를 통해 구국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우리 민족종교는 그 원류가 단군조선에서 계승되어 부여에서 代天敎, 신라에서 崇天敎, 고구려에서 敬天敎, 발해에서 眞倧敎, 고려에서 王儉敎로 전승되어 오다가 몽고의 침략으로 고려 원종때부터 단절되었다. 나철은 단절된 한국 고유의 민족종교 ‘중광’을 통해 자주 독립 사상을 고취하고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단군교를 중광하였다. 檀君敎佈明書에 단군교 ‘중광’의 의미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국조 단군이 창립했던 단군교가 고려때 몽고 침입 이후 약 700년간 단절되었던 것을 한말에 다시 계승하였다”고 하였다. 단군교포명서에는 단군교 교리, 단군교 중광의 동기, 단군교 성격 등에 대해 자세하게 명시하고 있다.
1909년 1월 15일(음력) 나철·오기호·이기 등이 중심이 되어 서울 齋洞에 모여 단군교를 ‘중광’하였다.67) 단군교 중광에 참여한 인사로는 姜虞·崔顓·柳瑾·정훈모·金寅植 ·金春植․金允植 등 수십명으로 주로 나철과 함께 대일외교항쟁을 전개한 인사와 을사오적 처단의거에 참가했던 인사들이 대부분이다. 단군교 중광을 위해 모인 인사들은 翠雲亭아래 6間 草屋 北壁에 ‘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단군교포명서’를 공포하였다. 단군교포명서의 주요내용은 ① 단군의 교화가 멀리 중국에까지 미쳐 알려졌고 ② 그 전통이 역대로 계승되어 왔으며 ③ 근세조선에 와서 그 전통이 쇠미해지고 ④ 따라서 국가도 미약하게 되었는데 그 원인은 유자들이 단군의 신성한 교는 연구하지 아니하고 孔孟程朱의 글에 치우쳤기 때문이며 ⑤ 모든 동포는 모두 단군교를 숭봉하여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여 영원한 복록을 받고 이 세상 인류를 구제해야 한다는 요지이다. 단군교포명서에서 天地人 즉, 신과 물질과 인간의 조화라는 새로운 가치를 제시함으로써 弘益人間 구현을 위한 이론적 지향점을 제시하고 있다. 홍익인간 사상은 인류평등과 세계 평화를 위한 평화주의 사상이라 할 수 있다.
대종교 교조 홍암 나철의 사상은 ‘대종교 8대경전’인 천부경(天符經) ·삼일신고(三一神誥)·신리대전(神理大全)·신사기(神事記)·회삼경(會三經)·팔리훈(八理訓)·진리도설(眞理圖說)·삼법회통(三法會通) 등에 잘 나타나 있다. 대종교 8대경전을 통해 나철의 단군관·본체관·인류관·주체관·종교관·우주관·세계관· 인생관·구세관 등 대종교의 심오한 사상을 이해할 수 있다.
일제강점하 구국을 위한 대종교의 항일운동은 대종교 중광의 주체인 나철의 ‘國雖亡而道可存(나라는 비록 망했으나 정신은 가히 존재한다)’라는 정신적인 각성이 구심점이 되었다.68) 대종교인 중심이 되어 수많은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는데 1911년 重光團을 효시로 正義團․北路軍政署․新民府․西路軍政署 등을 들수 있다. 대종교는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피해 1914년 중국 길림성 화룡현 청파호로 대종교총본사를 이전한 후 포교활동을 통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아울러 서간도 일대에 시교당을 설립하고 박달학원․東昌學校․白山學校․大倧學院 등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69) 나철은 교단을 정비하고 서울로 돌아와 남도교구에서 교단조직과 포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15년 조선총독부는 대종교를 종교가 아닌 항일독립운동단체로 규정하고 남도본사를 강제 해산하였다. 이에 나철은 일제의 간악한 탄압과 만행을 보고 견딜 수가 없어서 서울에 있는 남도본사 천진전을 떠나 1916년 8월 15일 구월산 삼성사에서 유서70)를 남기고 순국하였다.71)
5. 맺음말
나철은 일제 침략으로부터 주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관직을 버리고 구국운동에 투신하였다. 국운이 기울어 가는 암울한 시대상황에 처하여 오로지 구국을 위한 우국적인 삶을 살았으며, 다양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먼저 만국공법과 국제조약에 입각한 구국외교항쟁을 전개하였다. 1905년 7월부터 1909년 1월까지 4차례에 걸쳐 침략 당사국인 일본으로 건너가 대일외교항쟁을 벌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평화적인 외교항쟁에 한계를 느낀 나철은 방략을 전환하여 국내 친일정권을 타도하고자 ‘을사오적 처단의거’를 결행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외에도 나철은 대한자강회․호남학회 등에서 활동하였으며,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참여하는 등 다방면에 걸쳐 주권수호를 위한 구국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나철의 구국운동은 일제의 침략정책에 따른 대응책으로 전개되었으며 방략과 성격도 변화․발전하였다.
나철의 구국운동과 사상은 자주독립을 표방한 민족주의에 머물지 않고 동양평화론에 입각한 구국외교항쟁과 을사오적 처단의거, 대종교 중광을 통해 인류평등을 추구한 보편주의 사상인 세계평화주의로 발전하였다. 나철은 일제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우국적 삶을 살며 구국운동을 전개하여 한민족 독립운동의 초석을 다진 종교가요, 동양평화를 위한 사상가요, 더나아가 만민평등과 세계평화를 추구한 평화주의자였다. 그의 사상과 이념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지도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계승․발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