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에도 종부(宗婦)는 스스로가 자유분방한 성격이라고 했다. 조선 중기 문인 고산 윤선도(1587~1671)의 14대 종부 김은수(70)씨 이야기다. 종손(宗孫)인 남편 윤형식(75)씨와 전남 해남군 윤선도 고택 '녹우당(綠雨堂)'에서 40년 넘게 살아오고 있다. 종갓집 며느리는 "그래도 자식된 도리로서 지켜야 할 원칙은 원칙"이라며 "종부의 직함은 아무나 갖는 게 아닌 것 같다"고 했다.
"못살겠네 진짜, 밤낮으로 손님 때문에…."
말은 그렇게 했지만 김씨는 찻물을 끓이고 몸단장을 했다. 지난 21일, 아침부터 남편의 광주서중 동창 5명이 찾아왔다. 종부는 "평생 손님 받는 게 일"이라고 했다. 다과상을 들고 와 한 쪽에 앉았다. 비자강정, 감단자, 다식과 곶감 등 윤씨 가문의 전통 음식과 잘 우려낸 녹차다.
해남 윤씨 일가가 20대째 살고 있는 윤선도 고택 녹우당. 3만3000㎡(1만평)의 55칸짜리 녹우당에는 국보 제240호인 공재 윤두서(1668~1715)의 자화상 등 일가 유물 4600여점이 전시돼 있다. 1968년 사적(史跡)으로 지정된 이후 남도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관광 명소가 됐다.
이곳 안채에 14대 종손 윤형식씨 부부가 산다. 관광객에게 공개되지 않은 유일한 장소다. 하루 평균 200~300명, 휴가철에는 하루 최대 1000명까지 찾는다. 사랑채 바로 앞까지 몰려와 "누구 없느냐"고 묻는 통에 종부는 "우리에 갇힌 동물이 따로 없다"고 했다.
종부는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자랐다. 김해 김씨 김수로왕의 18대손 방계(傍系) 집안으로 분위기가 엄했다. 하이힐을 신으면 아버지가 "톱으로 뒷굽을 자르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김씨는 "내가 38년생 호랑이 띠인데 기가 세다고 호적을 늦게 올려 토끼띠가 됐을 정도"라고 했다.
김씨는 "엄한 집안 분위기에 대한 반발 심리 탓에 성격은 오히려 자유분방했다"며 "4·19 때도 앞장섰을 정도"라고 했다. 그는 세종대의 전신(前身)인 수도여자사범대학 가정교육과를 나왔다. 수도여중에서 1년간 교편을 잡았다.
26세 되던 해 친오빠의 친구였던 종손 윤씨와 선을 봤다. 종손이라는 사실이 내키지 않았지만 집안의 성화를 이길 수 없어 만난 지 20일 만에 결혼했다.
"시골에 산다는 말은 하지 않았어. 근데 온양 온천, 경주로 신혼여행을 갔다가 부산 친정에 하루 들르고는 해남으로 내려가는 거야. 눈앞이 깜깜했지."
해남읍 연동리에는 지금도 버스가 하루 5번밖에 없다. 김씨는 "가도 가도 끝없는 첩첩산중에 눈물이 났다"고 했다. 당시 집안에는 소작인만 19세대였다. 김씨는 "서울까지 우리 땅을 안 밟고는 못 간다는 말이 있었다"며 "논밭만 수백만평인데 일꾼들 밥 해주는 게 모두 내 일이었다"고 했다.
한복 입고 앉고 서는 법, 절하는 법만 100일 동안 배웠다. 각종 제사만 1년에 30여 차례였다. 큰 제사 때는 일가 어른만 150여명이 왔다. 지금도 안채 부엌에는 대형 냉장고가 4개, 전기밥솥이 2개, 커피포트가 5개 있다. 밥그릇과 접시는 음식점을 방불케 하는 수준이다.
집성촌인 해남읍 연동리에는 윤씨 친인척 50여명이 산다. 종부의 낙은 저녁마다 아낙끼리 모여 마을 한바퀴를 산책하는 것이다. 김씨는 "자유가 없는 것이 종부의 삶 중 가장 힘든 점"이라며 "알게 모르게 억눌려 왔던 답답한 것들을 하루 한 시간의 산책으로 풀어왔다"고 했다. 채마밭에 풀 매러 나갈 때도 사람들이 "종부 아니냐"고 물어온다. 그럴 때마다 김씨는 "그냥 여기서 일하는 사람이라고 둘러댄다"고 했다.
김씨는 제사상을 간소화하고 따로 지내왔던 부부의 제사를 합쳐 횟수를 줄이는 등 15대 종부가 될 며느리의 '앞길'을 위해 노력했다. 아들이 종손인 걸 알면서도 연애결혼을 한 며느리가 기특하다.
"딸한테도 못하는 비밀 얘기를 며느리하고는 해. 종손은 다시 태어나도 나랑 결혼한다고 하지만 에이, 난 다시는 안 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