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안대군묘(懷安大君墓)는 전주시 금상동 법사산에 위치한 조선 태조 이성계의 넷째아들 이방간의 묘이다. 전라북도 기념물 제123호로 지정되었다. 묘의 형태는 조선시대의 일반적 형태와 달리, 태인의 정극인 묘처럼 부부묘가 세로로 되어 있는데, 아래의 묘가 부인의 묘이며, 위의 묘가 회안대군의 묘이다. 이 묘자리가 군왕지지(君王之地)라 하여 지기가 흐르는 곳에 뜸을 떠버렸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지금도 뜸을 뜬 자리가 남아 있으며 "뜸터"라고 부르고 있다. 이곳의 산세는 호남정맥의 만덕산(763m)에서 북서쪽으로 하나의 지맥을 뻗어 묵방산(527.4m)을 일으키고 다시 두리봉(436.3m)을 지나 서쪽 그리고 북쪽으로 행룡하다 혈장 뒤편에서 과협을 하고 마지막 용진처에 그의 묘소가 있다. 혈장 좌우에는 청룡백호가 잘 감싸주니 장풍국(藏風局)을 이루고 혈장뒤편에 과협처가 있으니 혈장에는 생기가 충만한 장소다. 풍수가에선 이곳의 형국을 늙은 쥐가 먹이를 구하기 위해 밭으로 내려오는 모양인 노서하전형(老鼠下田形)의 명당자리라 한다.
이방간은 1392년 아버지가 조선을 건국할 때 힘껏 도와 개국익찬공신 1등에 책록되고 현록대부의 벼슬을 받았으며 건국과 동시에 회안대군(懷安大君)에 봉해졌다. 1398년(태조 7년)에 동생 이방원이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 등을 제거할 때 가담하여 정사공신 1등에 책록되었고 이듬해에는 의흥삼군부좌군절제사가 되어 황해도와 평안도의 병권을 관할하였다. 그는 1차 왕자의 난 때 동생 방원과 함께 손잡고 난을 성공으로 이끌었지만 용상의 자리는 하나뿐이었고 형 정종(방과)에게 적장자가 없자 내심 왕위계승에 야심을 품고 있었다. 그런 후 지중추부사인 박포의 회유에 넘어가 동생 정안군(방원)과의 왕권찬탈 싸움에서 패하게 되자 오히려 역적이 되어 평생 유배생활을 한다. 그러나 동생 정안군은 형을 석방하려 하였지만 신하들이 극구 반대를 하는 바람에 하는 수없이 황해도 토산으로 유배를 보냈다. 그러나 의정부와 양사에서는 계속해서 회안대군이 예우를 받는다며 줄기차게 탄핵하였고, 태종 즉위 후에도 계속 회안대군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탄핵이 빗발쳤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401년(태종 1년) 유배 중에 태종은 그를 다시 한양으로 소환하려 했지만 신료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그 후 그는 스스로 본관지인 전주로 내려갈 것을 청하여 조정에 허락을 받고 전주부 동용진면으로 내려와 20년간 거주하였다. 1418년 태종이 아들 세종에게 양위한 뒤 한양으로 올라올 것을 주문했지만 거절하였다. 이후 심종(沈宗) 등과 연락하며 모종의 거사를 계획하였지만 실패를 하고 1421년(세종 3년) 4월 10일 홍주(洪州)에서 병사하였다.
전북 전주시 덕진구 금상동 금상교회.
광감재 쌍사자석등, 거북이석등.
일렬로 되어있는 묘.
아랫쪽이 부인인 김포금씨 묘, 윗쪽이 회안대군 묘.
회안대군 묘의 석상들.
묘터가 쥐와 관련이 있어서인지 석상에 쥐 형상이 있다.
문인상(문신상). 문신은 관복에 홀(관위(官位)에 있는 자가 관복을 하였을 때 손에 가지는 수판(手板))을 들고 있으며 무신은 갑옷에 칼을 들고 있다.
웃고 있는 동자상.
회안대군 묘 자리에 혈맥을 끊은 흔적(일명 뜸터). 후손이 왕에 오르지 못하도록 혈자리에 커다란 구멍을 팠다. 이 묘자리가 군왕지지(君王之地)라 하여 지기가 흐르는 곳에 뜸을 떠버렸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지금도 뜸을 뜬 자리가 남아 있으며 "뜸터"라고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