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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山)
황 순 원
오늘도 덫에는 아무것도 걸린 게 없었다. 이런 가을철에는 으레 토끼 한두 마리와 꿩 몇 마리는 갈데없었는데 웬일인지 올가을에는 그렇지가 못한 것이었다. 그동안 짐승 종자가 다 없어졌단 말인가. 바우는 올가미와 덮치기를 다른 목으로 옮겨놓았다.
이 길로 바우는 도토리를 주우러 가는 참이었다. 가까운 곳에 떡갈나무가 없는 것은 아니나 도토릿골로 가야만 떡갈나무숲이 있어서 알 굵은 도토리를 힘 안 들이고 주워올 수가 있는 것이었다.
산에는 단풍이 들어 있었다. 산 중턱까지는 검푸른 전나무와 잣나무 소나무로 둘리고, 그 위로는 하아얀 자작나무와 엄나무 피나무 느릅나무숲인데, 그 사이에 단풍나무가 타는 듯이 물들어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검푸르고 하얗고 누렇고 붉은 빛깔은 가까운 산에서 먼 산으로 멀어짐에 따라 그 선명한 빛깔을 잃어가다가 나중에는 저쪽 하늘가에 뽀오야니 풀려버 리고 마는 것이었다. 어디를 보나 마찬가지 산이요 또 산이었다.
길이란 게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나 길 없는 길만 걸어 버릇한 바우에게는 조금도 불편스럽지가 않았다. 외로운 줄도 몰랐다. 본시 사람들과는 아무 교섭 없이 살아온 바우였다.
바우가 부모 아닌 딴 사람을 본 것은 일곱 살엔가 나서 처음이었다. 부모를 따라 부대 앞에 나가 있느라니까, 어디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니 저 아래에 웬 사람이 하나 서서 이리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이었다. 흰 두루마기에 검정 갓을 쓴 사람이었다. 아마 그 앞을 지나가다가 길을 묻는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일손을 멈추고 돌아섰으나 미처 무어라고 대답을 못했다. 오랫동안 누구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 없이 살아왔기 때문에 갑자기 말문이 열리지 않는가 보았다. 지나가던 사람 편에서 더 소리를 지르지 않고 그냥 가버렸다. 그 걸음이 무척 빨랐다. 왜 그런지 이쪽을 무서워하는 눈치 같았다. 바우는 아버지 어머니와 같이 그 사람이 저쪽 산굽이로 희끗거리며 사라질 때까지 서서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림자가 아주 뵈지 않게 되자 별안간 아버지가 그쪽을 향해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어어이. 어디선가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어어이 이. 이 어어이이 소리를 다시 어디서 받고 그 다음에 또 어디서 받고 하면서 멀 리 꼬리를 감추어버렸다.
홋날 바우는 아버지의 시체를 묻고 나서 어린 마음에도 가슴이 답답해 목청껏 소리를 질러보았다. 어어 이. 어어 이 이.
바우의 아버지가 죽은 것은 산돼지한테 받힌 것이 덧나서 였다. 바우가 열세 살인가 났을 때의 일이었다. 아침 에 나간 아버지가 돌아올 때가 지났는데도 안 돌아왔다. 덫을 들고 나간 것으로 보아 어디 무엇 하러 갔는지는 알 수 있었다. 그날 바우도 따라나갔을 것인데 전날 밤부터 배탈이 나서 못 따라나간 것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찾아나섰다. 아버지는 앞산 벼랑 한중턱에 떨어져 있었다. 산돼지한테 빗받혀 굴러떨어지다가 거기 벋어나온 소나무에 걸린 것이었다. 피나무 밧줄을 가져다 간신히 끌어올렸다. 상처는 오른쪽 옆구리가 약간 찢어졌을 뿐 대단지 않았다. 그 상처가 날이 갈수록 아물지 않고 썩기 시작한 것이다. 느릅나무 뿌리를 캐어다 짓이겨 붙여도 별 효험 이 없었다. 아버지는 자리에 눕자 같은 말을 되뇌었다. 내가 실수를 하느라고 그날 산돼지 길목이 바뀐 줄 모르고 어름거리다가 새끼 샘하는 어미돼지한테 이 봉변을 당했다, 앞으로 산에 사는 동안은 큰짐승을 조심해라, 그리고 아예 이편에서 먼저 큰짐승을 건드릴 생각을 마라. 사실 아버지는 평상시에 큰짐승이 걸릴 허방다리 같은 덫은 놓지부터 않았다. 겨울 아침에 집 앞을 지나간 호랑이 발자국이 눈 위에 나 있을 적도 있었지만 호랑이가 집 앞에서 어정거렸거나 집 안을 엿본 흔적은 없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다시 말했다. 산에서 살려면 큰짐승을 한식구로 생각해라. 이러한 아버지가 죽기 며칠 전에는, 이제 자기가 죽거들랑 이곳을 떠나 큰짐승이 덜한 곳으로 가 살라고 했다. 끝내 산을 떠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 아버지의 말을 좇아 바우네는 지금 사는 싸릿골로 옮겨 앉은 것이었다.
전나무숲 사이에서 노루가 일어 거불거불 달아났다. 그때 풀섶에서 푸드득 꿩이 날아났다. 그러면 그렇지, 꿩 종자가 없어질리야 있나. 이제 덫에도 와 붙을 테지.
높고 낮은 등성이를 몇 넘어 귀룽나무가 서 있는 고개에 올라섰다. 그 밑이 돌자갈물이 흐르는 졸졸잇골이요, 그곳을 지나 오리나무숲을 돌아서 면 바로 도토릿골인 것이다.
바우는 고개 밑으로 내려가 손으로 물을 움켜 마셨다. 그리고 손등으로 입술을 훔치다 말고 물속을 들여다보았다. 오늘 아침 어머니가 한 말이 생각난 것이다. 하루 종일 가도 별로 말이라곤 주고받는 법 없이 살아오는 어머니와 아들이었다. 그것은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연장을 들면 부대앝으로 나가자는 말이 됐고, 어느 편에서고 일손을 멈추면 좀 쉬자는 말이 됐고, 해를 보아 연장을 둘러메면 그만 돌아가자는 말이 되곤 했다. 그러던 것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와 아들은 더 말이 없는 사람들이 됐다. 그 어머니가 오늘 아침 아들의 머리를 가위로 깎아주며 불쑥, 너 아버지 닮았다, 한 것이었다. 그때 바우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지금 물속에 비친 제 얼굴을 들여다보며 바우는 머리의 수건을 벗겼다. 아버지의 머리는 상투였는데 자기 머리는 이렇게 깎아버린 게 다르다. 그뿐 아니고 아버지는 검은 턱수염이 있었는데 자기는 없다. 바우는 도시 어머니의 말뜻을 알 수가 없었다.
바우가 도토리 한 광우리는 손쉽게 주워 담아가지고 벗어놓은 지게를 가지러 가는데, 퍼뜩 대여섯 간 저 앞에 이상한 것이 눈에 띄었다. 처음에는 무슨 짐승이나 아닌가 했으나 자세히 보니 사람인 것이다. 이쪽을 바라보며 서 있다. 그리고 이 사람이 한 손을 등 뒤로 돌려 흔들자 불쑥불쑥 사람들이 몇 일어서는 것이다. 모두 다섯 명 이었다.
바우는 산속에서 처음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을 대하는 것이었다. 싸릿골로 온 뒤에도 고작해야 일 년에 한두 사람의 그림자를 보나마나했다. 그것도 가까이서가 아니고 먼 산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사람의 그림자인 경우가 대개였다. 그저 바우로서 사람을 제일 많이 대해 보는 건 봄철에 한 번씩 벌마을에 갔을 때뿐이었다. 사십 리가 넘는 길을 복령, 고사리, 도라지, 송이버섯, 느타리 같은 것을 갖고 가서 소금 등속과 바꿔오는 것이었다. 마을이래야 네 집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바우로서는 사람을 가장 많이 만나보는 즐거운 한때 였다. 혼자서도 외로운 줄 모르고 자란 바우였으나 역시 여러 사람을 대한다는 건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섯 사람이 바우를 와 둘러쌌다. 똑같이 흙투성이가 된 푸르딕딕한 옷을 입고 양쪽 어깨와 등허리에다가는 마른 풀과 나뭇가지를 꽂고 있었다.
처음에 이쪽을 향해 섰던 사내가 바우 앞으로 다가서며 구멍 뚫린 쇠몽치 같은 것을 들이대면서 딱딱하게 말했다.
―뭣 하는 사람아?
바우는 사내가 들이댄 것이 언젠가 아버지와 함께 만난 사냥꾼이 갖고 있었던, 한 방이면 곰이고 호랑이고 단박에 눕혀놓는다는 그 총이라는 걸 알자 몸이 후들거렸다.
바우가 미처 대답을 못하고 있으려니까,
― 어 디 살지 ?
이번에도 바우는 얼른 대답이 안 나왔다.
― 이게 벙어리 아냐?
이 때 누가,
― 저 도토리 봐라,
하고 광우리 쪽으로 달려가며 소리 질 렀다.
― 어 밤도토리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리 몰려갔다.
바우는 총대가 치워져 비로소 숨을 돌려쉴 수 있었다.
다섯 사람이 광우리 둘레에 펄썩 주저앉더니 제각기 도토리를 집어 까먹기 시작했다.
바우는 바삐들 입놀림을 하고 있는 그들의 행색을 새로이 살펴보았다. 그 무서운 총대를 든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그중의 한 사람이 자루주머니 같은 것을 짊어졌을 뿐 모두 빈손이었다. 얼굴의 수염들이 거칠 대로 거칠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머리는 긴데 전혀 수염이 없었다. 몸집이 제일 작았다. 나이도 그중 어려보였다.
한참 도토리를 먹고 나더니, 송곳니 덧니 난 사내가 바우더러,
一이봐, 샘물이 어디 있지?
했다.
바우는 이번에는 왜 그런 것까지 묻는지 몰라 잠자코 있으려니까,
一지게 아무래도 벙어리야,
하면서 총잡이 사내가 손으로 물을 떠 마시는 시늉을 해 보이며,
― 이거 몰라?
그제야 바우는 그들이 무엇을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 졸졸잇골루 가야…….
― 벙어린 아니군. 그래 거기가 어디야?
― 바루 요기 돌아가믄…….
바우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들을 거기까지 데려다주려고 광우리를 지게 에 올려놓는데,
― 지게는 여기 놔두구 가.
덧니박이 사내가 말했다.
졸졸잇골 돌물 소리가 들리자 제각기 달려가 엎드리더니 꿀꺽꿀꺽 소리를 내며 물들을 마셨다. 수염 없는 젊은 사람만이 손으로 움켜 마셨다. 한차례 물을 먹고는 얼굴과 발을 씻었다.
덧니박이 사내가 오리나무 뒤로 돌아가 오줌을 누고 돌아왔다. 그때 바우는 이 사람 허리에 손바닥만 한 가죽 주머니가 달려있는 것을 보았다.
덧니박이 사내가 돌아오더니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무릎 위에 폈다.
총잡이 사내가 마주 와 앉으며,
― 소대장님, 여기가 어디쯤 될까요?
하고 물었다.
그 말에는 대답 없이 종이만 들여다보던 덧니박이 사내가 바우에게로 고개를 들며 ,
― 이봐, 여기가 무슨 군 무슨 면이지?
했다.
바우는 또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총잡이 사내가 갑갑한 듯 이 ,
― 허 참, 어디 말이 통해야지. 자네 사는 동네 이름이 뭐냐 말야?
― 싸릿골이란 데유.
― 게가 어디야?
― 예서 한 십 리 되는데유.
― 허, 그래 멫 집이나 사나?
一 우리집 하난데유.
― 자네네 집 하나뿐야? 그래 이 근방에 사람 사는 동네가 없단 말야?
바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한 말을 듣고 있던 일행은 일시에 맥이 풀렸다. 처음 바우를 만났을 때는 그래도 여기 어디에 부락이 있는 줄만 알았다. 지금 자기네에게는 소총 한 자루와 권총 한 자루가 있다. 그것이면 자기네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들피진 몸에 그래도 희망이란 걸 붙일 수 있었다. 그랬는데 그 희망마저 끊어지고 만 것이다. 이 산골내기가 산다는 곳이 여기사 십 리나 떨어져 있는 단 한 집뿐인 데다가 이렇게 도토리를 주우러 여기까지 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살림 형편이 그들로 하여금 절망감을 느끼게 한 것이다.
― 소대장님, 이만큼에서 좀 쉬어가는 게 어떨까요? 모두 녹초가 된 모양이니.
총잡이 사내의 말에 덧니박이 사내가 폈던 종이를 접으면서,
― 그러면 산으루 올라가보지. 그놈의 쌕쌕이한테 잘못 걸렸단 큰일이니까.
― 여기두 전투기가 오나?
총잡이 사내가 바우에게 물었다. 바우는 또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다.
― 쌔액, 쌔액…….
하고 총잡이 사내가 오른쪽 손바닥을 펴가지고 자기 이마 앞 허공을 두어 번 찌르고 나서,
― 이런 거 오지 않나?
그제야 바우도 알아채고,
― 봤어유.
벌써 작년 여름철 부대앝에서 풀을 뜯어주다였다. 난데없는 세찬 바람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드니 크나큰 날개를 가진 물건이 걸핏 머리 위를 지나가 저도 모르게 밭고랑에 머리를 틀어박고 말았다. 그 뒤에도 이 세찬 바람 소리를 들을 적마다 어디다 고개를 묻곤 했는데, 그 놀라운 것을 자기도 보았다는 생각에 바우는 한 번 벌씬 웃었다.
― 허, 이게 웃어, 멋두 모르구. 아직 맛을 못봤구나.
누웠던 사람들이 부시시 일어났다.
수염 없는 젊은 사람은 아까부터 혼자 떨어져 앉아 앞 고개허리만 바라보고 있다가 맨 나중에 일어섰다.
다시 물을 한 차례씩 마셨다.
― 물을 좀 떠가지구 가지.
자루 주머니 같은 것을 메고 있던 사내가 그 속에서 뚜껑 달린 쇠통을 꺼내어 물을 담았다. 그것을 수염 없는 젊은 사람이 들었다.
도토릿골로 돌아와서도 그들은 바우를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들은 광우리를 지게에 지운 바우를 앞세우고 산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소대장은 앞으로 바우를 길잡이로 삼을 참인 것이었다.
전나무숲과 자작나무숲이 잇닿은 어름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자루 주머니 같은 것에서 자그마한 삽을 하나 꺼내었다.
바우는 그 주머니 속에 별게 다 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바우더러 굴을 파라고 했다. 그리고 자기네들은 다시 도토리를 까먹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한 사람 두 사람 드러누웠다. 수염 없는 젊은 사람만이 나무에다 등을 기대고 앉아 깍지 낀 무릎 위에 이마를 얹고 있었다.
소대장은 다시 지도를 꺼내어 무릎 위에 펴놓고 손가락 끝으로 태백 산맥 줄기를 더듬으며 ,
―- 여기가 아마 오대산일꺼야.
혼잣말을 중얼거리고는 주머니에서 꽁초를 꺼내었다.
꽁초에 불을 붙여 한 모금 빨아 내뿜기가 무섭게 누웠던 사람이 번쩍 정신이 드는 듯 일시에 윗몸을 일으켰다. 소대장은 아차 실수를 했다고 생각했다.
― 소대장님은 예비심두 많으셔.
총잡이가 목줄띠뼈를 움직이며 말했다.
― 이게 마지막이야.
― 그렇다면 더 더구나 한 모금 빨아봅시다.
소대장은 마지못해 담배를 건네었다.
먼저 총잡이가 빨고, 다음에 노랑수염이, 끝으로 배낭메기에게로 건네어갔다. 수염 없는 젊은 사람만이 빠졌다.
배낭메기가 빨자 이제는 빨간 불꽃만 남은 담배꽁다리를 노랑수염이 냉큼 빼앗아다 입술이 탈 만큼 한 모금 더 빨아 삼켰다.
그러고는 머리가 핑 도는 듯 눈을 감고 드러누워버렸다. 몸을 모로 뒤치면서 눈을 떠보았다. 바우가 굴 파던 손을 쉬며 머리의 수건을 벗겨 얼굴을 닦는 게 보였다. 그게 우스웠다. 저놈의 머리 깎은 꼴 좀 보라고 곁의 사람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까마귀가 뜯어먹다 남긴 꼴이 아닌가.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그저 째릿하니 행복스러워 다시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바우는 날이 저물기 전에 마른 풀 한 점과 삭정이 한 짐을 해왔다. 삭정이에 불을 피운 후 마른 풀잎 속에 다시금 몸들을 눕혔다.
소대장이 몇 번 고개를 들고 화광이 너무 멀리 비치지 않게끔 조심하라고 일렀다. 수염 없는 젊은 사람만이 불가에 웅크리고 앉아 깍지 낀 무릎에 이마를 얹고 있다가 어느새 이 사람마저 허리를 구부리고 누워버렸다. 자꾸들 불 곁으로 다가들었다. 이제는 누구 한 사람, 화광이 너무 멀리 비치지 않게 조심하라는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튿날 아침은 바우가 구워주는 도토리로 요기들을 했다. 날것보다 더 떫었으나 연한 맛에 많이 먹혔다.
바우는 이렇게 산속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난 게 그지 반가웠다. 그리고 이 사람들을 위해 자기가 무엇이고 도와줄 수 있다는 게 즐거웠다. 집에서 기다릴 어머니 생각도 잊을 정도였다. 바우는 어제 다 못 판 굴을 어서 파야겠다고 잽싸게 삽을 놀렸다.
노랑수염이 허리춤을 여미며 돌아와,
― 이거야 밑구멍꺼지 메서 살 수 있나,
하니 총잡이가
― 그런 말 말어. 먹는 것 없이 자꾸 싸내기만 하며 어떡허게. 난 허연 쌀밥에 고깃국을 한번 잔뜩 먹구서 아예 밑구명에다 콩쿠리를 해버렸으면 좋겠어. 다시는 영 배가 고프지 않게 말이야. 정말이지 난 요새 아무것도 뵈는 게 없어. 예펜네와 애새끼의 상판대기두 잊어버렸어. 그저 눈앞에 뵈는 건 김이 물물 오르는 밥그릇 뿐이야. 쌀밥이 아니래두 좋아. 보리밥이래두 고봉으루 담은 거면 돼.
그러다가 소대장이 지도를 꺼내어 펴자 그리로 목을 뽑으며,
― 어디쯤 인가가 있음직한 곳이 없습니까?
했다.
― 에에, 이 서남쪽으루 가야 마을이 있을 것 같은데.
一 그럼 좌우지간 어서 가서 찾아봐야지요. 정말 이러다간 허리춤의 이 굶겨 죽이기 꼭 알맞겠어요.
소대장이 지도에서 눈을 들며,
― 저어 이봐,
하고 노랑수염에게,
一 자네가 오늘 이쪽으루 가서 마을이 있는가 보구 오게. 두서너 집만 봬두 곧 돌아와 알리게.
길잡이로 바우가 같이 가기로 되었다.
이따끔 짐승의 똥까지 섞여 있는 습기 찬 썩은 낙엽에 폭푹 발목이 빠지는 나무숲 속은 대낮에도 오히려 어두컴컴했다. 밑은 잔잔하고 고즈넉한데도 나무숲 꼭대기는 오옥오옥 바람 소리가 설레었다. 혹 나무숲이 그쳤는가 하면 벼랑이어서, 곧장 가면 얼마 안 될 곳을 한참씩 돌아가야만 했다. 이런 산속에서 노랑수염은 바우한테 뒤처지기가 일쑤였다.
한 이십 리 남짓 걸었다.
어느 산굽이를 돌며 노랑수염은,
― 여보게 좀 천천히 가세,
하고 이런 때 서로 말이라도 주고받아야 심심파적도 되고 다리 아픈 것도 좀 잊을 것 같아,
― 자네 이름이 뭐지?
하고 말을 붙였다.
― 바우에유.
― 바우? 응, 바우. 그래 식구는 멫이나 되나?
― 어머니와 단 둘뿐이 에유.
그러나 되도록이면 말수를 늘이고자,
― 그럼 아버진 세상을 떠났나?
― 그래유.
― 동생두 없구?
― 네.
그러다가 노랑수염은,
― 그런데 참, 자네 나이가 멫 인가?
바우는 얼른 대답지 못했다.
― 올해 및 살이냐 말야?
바우는 그것 이 알쏭달쏭해서 잘 모르겠는 것이다. 싸리순이 돋을 무렵 어머니가, 너도 이젠 스물두 살이 됐다는 말을 한 일이 있는데, 그것이 작년 일인지 올봄의 일인지 분명치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잠자코 있을 수만도 없어서 그지 스물둘이라고 해두려는데,
― 이게!
하고 노랑수염이 픽 웃고 나서, 새삼스럽게 바우를 한번 훑어보는 것이다. 그 눈이 아랫도리에 가 머물렀다. 정강이 위까지 걷어올린 잠방이 밑으로 드러난 구릿빛 다리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장딴지의 핏대가 꿈틀거렸다. 다 클 대로 큰 장정인 것이다.
― 그래 세 군데 털 난 녀석이 제 나이두 몰라?
노랑수염은 어이가 없어 이번에는 소리까지 내어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외진 두메에 별나게 크게, 그리고 공허스럽게 울렸다. 그것을 느끼자 그는 퍼뜩 웃음을 끊고 말았다.
다시 말없이 길을 걷는 동안, 그는 전쟁마당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난 자기가 이 제 나이도 모르는 바보가 살고 있는 산속을 벗어나지 못하고 죽고 말 것만 같은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이었다.
그럭저럭 한 삼십 리는 족히 걸었을 즈음이었다. 이대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고 마음속으로 뇌까리기 여러 번, 어느 고갯마루에 올라서니 저쪽 맞은편 언덕 기슭에 인가가 보였다. 모두 세 집이었다. 노랑수염은 한숨을 후우 내쉬고 나서,
― 자, 여기를 다시 찾아올 수 있지?
바우는 말없이 사면을 한번 둘러보았다.
굴 있는 데로 돌아오니 그새 굴을 다 파놓았다.
도토리를 구워 나눠들 먹고 곧 길을 떠났다. 수염 없는 젊은 사람만이 남아 굴을 지키게 되었다. 노랑수염이 자기도 몸이 고달파 못 견디겠다고 했으나, 소대장이 지금이 어느 때라고 그런 호사스런 소리를 하느냐고 앞세우고 나섰다. 바우더러는 빈 지게를 가지고 가도록 했다.
십 리 가량 가니 날이 저물었다. 그러지 않아도 침침한 산속에서 걸핏하면 나뭇가지에 면상을 찢기우고 벼랑에 발부리를 미끄러치곤 했다. 노랑수염이 이쪽으로 가야 한다고 해서 한참씩 헤매다가 결국은 바우의 말을 좆아 바로 들어서곤 했다. 그래도 스무날께 달이 떠주어서 길 찾기에 적이 도움이 되었다.
가까스로 낮에 왔던 고개턱이라고 생각되는 데까지 이르렀다. 맞은편 언덕 기슭에 반딧불 같은 불빛이 보였다. 그런데 불빛이 하나뿐이었다. 혹시 딴 곳으로 잘못 오지나 않았나 하면서 가까이 가 보니 역시 낮에 보아두었던 그곳이었다. 관솔불이 한 집에만 켜져 있었던 것이다.
바우는 같이 온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벌려 서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덧니박이 사내가 허리에 찬 가죽주머니에서 무엇인가 빼어들었다고 생각됐다. 그러자 거기서 불꽃과 함께 탕 하고 밤하늘을 울리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뒤이어 총잡이 사내의 손에서도 불꽃과 함께 요란한 소리가 터져나왔다. 그것은 덧니박이 사내의 것보다 더 요란한 소리였다.
커졌던 관솔불이 놀란 듯이 꺼졌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놀란 것은 바우였다. 사지가 떨리고 눈앞이 어지러워 어둠 속에 벌어진 난장판을 도시 뭐가 뭔지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왈칵왈칵 문을 잡아젖히는 소리. 꼼짝 말어, 쏜다! 쌀은 어디에 있니? 강냉 이와 감자뿐이라구? 그거라두 내라, 쓴다, 쏜다! 아이구 사람 살리슈! 어둠 속에 뒤범벅이 된 사람들의 그림자. 지게는 어디 있느냐 지게는? 누가 달려오더니 바우의 볼때기를 쥐어박는다. 이 바보야! 어서 지게에다 싣지 못해? 솥두 하나 빼내라! 식칼두 잊어버리지 말구 가지구 가자! 소금은 어디 있냐? 힘센 놈을 한 놈 끌어다가 이걸 지워라! 어느 집에선가 입을 틀어막히운 애 울음소리.
성기게 타갠 강냉이에 감자를 썰어 넣고 한 밥이었으나 맛이 대단했다. 솥째 내려놓고 나뭇가지로 만든 젓가락으로 아구아구 먹어댔다. 반찬은 소금이 었다.
― 야, 소금 맛이 이렇게 달았었나?
좀 전까지만 해도 제일 맥을 못 추고 쓰러져 있던 노랑수염이 이제는 기운을 좀 차린 듯이 한마디 했다.
― 소금이 달구 쓰건 간에 자네는 그만 먹어두지.
총잡이가 농말을 건네자,
― 내 걱정은 말구 너나 작작 처먹어. 공연히 빈속에 지나치게 처먹구서 배탈이 나면 어쩔려구?
― 허, 배탈이 나? 어디 실컷 먹구 배탈이 나 죽어봤으면 한이 없겠다. 그러면 내 무덤 푯말에다 이렇게 쓸 수 있거든. 일천구백오십일 년 시윌…… 참, 오늘이 메칟날이야?
누구 날짜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 허 이거 참, 세월 가는 것두 모르구 사는군. 하여튼 구월달은 아닐 거구, 일천구백오십 일 년 시월 아무 날 아무 곳에서 윤 아무개는 밥을 너무 많이 먹구 배탈이 나 죽었느니라. 어때?
― 그 머저리 같은 소리 작작해.
소대장이 힐끗 총잡이를 노려보았다. 강냉이밥이나마 오랜만에 배불리 먹고 나니까 기운이 좀 나는 것이다. 아무리 낙오병이라 규율이 해이해졌다고 하더라도 명색이 소대장인 자기 앞에서 너무 말을 함부로 하는 게 못마땅했다. 그는 자기의 위신을 갖추기 위해서라도 다시 한번,
― 이런 땔수록 정신무장을 단단히 해야 해,
하고는 먼저 젓가락을 놓고 자리를 떴다.
소대장이 저쪽으로 사라지는 것을 기다려 노랑수염이,
― 정말 이런 산골에서 살다간 세월 가는 줄두 모르구 있다가 죽구 말겠어. 글쎄 저 친구는 자기 나이꺼정두 모르지 않어?
어제 일이 생각나 바우를 가리키며 우스갯소리로 한 말이었다. 그만큼 배가 부른 것만으로도 살아났다는 기분들인 것이다.
바우와 어젯밤 짐을 지고 온 장정 먹으라고 솥 밑에 붙은 밥을 남겨두고 모두 물러앉은 뒤, 바우는 누룽지를 씹으면서도 자꾸 한곳에만 눈이 갔다. 총이었다. 대체 저 쇠뭉지 어디에서 그처럼 요란한 소리가 터져나올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큰짐승도 픽퍽 넘어간다니. 생각할수록 신기하고 무서운 물건으로만 보였다.
장정은 통 아무것도 먹을 생각을 않고 웅크리고 앉아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다.
솥에서 물러나 앉았던 총잡이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훌 일어나 좀 전에 소대장이 사라진 쪽으로 빠른 걸음을 놓더니 좀 만에 돌아와,
― 허, 사람의 욕망이란 건 더럽구 치사한 거야. 글쎄 오래간만에 음식이라구 뱃속에 집어넣었드니 담배생각이 나드라구. 그러구보니까 소대장이 지금 우릴 피해 어디루 간 것도 혼자 몰래 담밸 먹으려구 그랬구나 하는 생각이 나지 않겠어? 그래 쫓아가 봤드니 아니나 다를까 담밸 피구 있는 거야. 그런데 내 지사해서. 내 발소릴 듣구선 어느 틈에 담배꽁다릴 감춰버렸는지 깜쪽같이 없는 거야. 그리구는 어제루 담배는 아주 떨어졌다나. 글쎄 내가 이 눈으루 금방 피우는 걸 봤는데두. 에이 참, 이런 때 그놈을 한 모금 빨아봤으면 죽어두 한이 없겠다.
모두 그렇다는 듯이 목줄띠뼈가 한번 오르내렸다.
그러나 그들은 곧 양지바른 곳에 몸을 눕혔는가 하자 대번 코를 골기 시작했다.
뒷설거지는 젊은 사람이 맡아서 했다.
바우도 나무 한 짐과 물 한 솥을 길어다 놓고는 아무 데고 쓰러져 잠이 들어버렸다. 얼마쯤 자다가 귀를 째는 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잠결에도 그 소리가 어젯밤에 들은 그 소리임에 틀림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 소리에 깬 듯이 두리번거리다가 소리난 곳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바우도 뒤따라갔다.
덧니박이 사내가 이쪽을 등지고 서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어젯밤 짐을 지고 온 장정이 거꾸러져 있었다.
― 화근이 된 건 일찌거니 없애버리는 게 상책야. 달아나두 재미없구, 살려두면 괘니 양식만 축낼 거구.
거꾸러진 장정의 팔다리가 후들거리다가 잠잠해지고 말았다. 흙물이 오른 적 삼 잔등에 피가 괴어 흘렀다.
바우는 덧니박이 사내의 손에 들려 있는 조그마한 쇳덩이를 바라보며 자꾸만 사지가 떨려 어쩔 수가 없었다. 기다란 총 못잖게 무서운 물건 같았다. 바우의 떨림은 덧니박이 사내의 분부를 받아 시체를 묻는 동안에도 그칠 줄을 몰랐다.
저녁에 굴속에다 마른 풀을 깔고, 한옆에 불씨도 들여다 묻어놓았다. 성냥도 아낄 겸 굴 안의 냉기를 덜려는 것이었다.
이날 밤 굴 한구석에 박혀 잠이 들었던 바우는 무슨 소리에 또 잠이 깨었다. 어젯밤 일이 있고 오늘 낮의 일이 있는 뒤라 그런지 절로 잠귀가 밝아진 것이었다. 누가 부스럭거리며 일어나는 모양이었다. 조금 뒤로 굴아가리로 나가는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두 사람이었다. 굴 밖 어룽진 달빛으로도 한 사람은 덧니박이 사내요, 다른 한 사람은 언제나 말없이 있는 젊은 사람이란 걸 알아볼 수 있었다. 순간 바우는 가슴이 철렁해짐을 느꼈다. 덧니박이 사내가 한 손으로는 젊은 사람의 손목을 잡고 한 손에다는 그 작은 총을 꺼내들고 있지 않은가.
바우는 이제 그 무서운 소리가 들려오거니 했다. 그러나 밖은 나무숲 지나는 바람 소리와 그 사이로 벌레 우는 소리만이 끊일락 이일락 들려올 뿐이었다.
한참 만에야 나갔던 두 사람이 돌아왔다. 바우는 그들이 무사히 돌아온 게 여간 반갑지가 않았다.
이튿날 밤에도 바우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뜨니 어젯밤처럼 덧니박이 사내가 한 손으로는 젊은 사람의 손목을 잡고 한손에다는 작은 총을 빼들고 굴 밖으로 나가는 것 이었다.
이날은 굴 안의 다른 사람들도 잠이 깬 듯 총잡이 사내의 목소리로,
― 이런 땔수록 정신무장을 단단히 하라구? 흥, 누가 할 소린지 되지 못하게스리. 어차피 이 산속을 벗어나지 못할 바엔 마지막으루 무슨 짓이라두 다 해보자는 거지?
어둠 속에서 두덜거리는 소리였다.
바우는 이 사람들이 무엇을 가지고 그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갔던 두 사람은 한참 만에 또 무사히 돌아왔다.
바우가 이 밤마다 끌려나갔다 돌아오는 젊은 사람이 실은 사내가 아니고 여자라는 것을 안 것은 그 다음 날이었다. 물을 길러 졸졸잇골로 내려가다가었다. 졸졸잇골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기에 보니 젊은 사람이 팔다리가 다 드러난, 몸에 착 달라붙은 옷만 입고 앉아 모닥불을 쬐고 있는 것이었다. 그 옆에는 옷을 빨아 널어놓은 게 보였다.
바우는 사내의 몸이 저렇게야 횔 수 있을까 했다. 그러면서 젊은 사람의 가슴패기에 눈이 갔다. 불룩 솟아오른 젖퉁이가 아무래도 사내의 것은 아닌 것이었다. 머리를 어깨 위에서 싹뚝 잘라버리긴 했으나 사내가 아니고 여자임에 틀림없었다. 바우는 못 볼 것이나 본 것처럼 발걸음을 돌리고 말았다.
이곳에 그냥 있느냐 그렇지 않으면 달리 행동을 취해 보느냐 하는 것이 문제 였다. 총잡이는 여기를 떠나자고 했다. 이제는 피로도 얼마쯤 회복되었으니 한 발자국이라도 더 본부대를 찾아 나서자는 것이었다. 더구나 식량이 좀 남았을 때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가는 이 산속이거나 어느 사람 모를 고장에서 굶어 죽지 않으면 얼어 죽고 말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대장의 의견은 그렇지가 않았다. 찾아나서보았댔자 소용없다는 것 이다. 이미 자기네와 본부대 사이는 적에게 점령을 당하고 있는 터이니 섣불리 찾아나선다는 것은 도리어 화약을 지고 불로 들어가는 격 이라는 것이다. 그보다는 이만큼 깊은 산속에서 형편을 좀 보고 있는 게 상책이라는 것이었다.
― 그럼 앞으루 닥처올 추위와 굶주림은 어떡헙니까?
― 자네구 참 딱하군 그래. 부대를 찾아나선다구 하루 이틀에 만난다는 보장이 있어? 양식만 해두 그렇지. 그동안은 뭘 먹구 사나? 그러지 말구 여기서 마을이나 뒤지는 게 실속 있는 일이야. 그러면서 아군이 반격해 오는 걸 기다리는 게.
소대장은 그 문제를 더 토론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자리를 떠 저쪽으로 가버 렸다.
자기네끼리만 되자 총잡이는,
― 마음속 편한 소릴 하구 있군. 이러다가 적의 수색대라두 만나는 날이 면 (둘째 손가락으로 방아쇠 잡아당기는 시늉을 해 보이며) 모두 이건 줄 모르구. 내 다 알지. 그저 그놈의 엉뎅이에 붙어서 사는 날까지 예서 살아보자 이 심뽀지.
그러고는 무엇에 울화가 치민 사람처럼 휙 총을 들고 일어나는 것이었다.
이날 총잡이는 노루 한 마리를 쏘았다. 그는 요 며칠째 걸핏하면 산을 싸돌아다니기가 일쑤였다. 어떤 육체의 욕망을 주체할 수 없어서 그것을 삭이기 위해서라도 무엇이고 딴 짓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모양이었다. 이날도 이렇게 산속을 싸돌아다니다 우연히 지나가는 노루 한 마리를 쏜 것이었다.
수노루였다. 바우가 지게로 져다가 가죽을 벗기고 각을 떴다. 허리 한가운데 살과 내장이 으깨어져 있었다. 바우는 며칠 전에 죽은 장정 생각이 났다.
저녁은 아주 성찬이었다.
노랑수염이 생각난 듯이 ,
― 이런 때 술이라두 한잔 있었으면 제격이다,
하니 총잡이가
― 허, 참 술 맛이 어땠지? 그게 쓰든가 달든가 맵든가? 난 술 맛뿐 아니구 맛이란 맛은 다 잊어버린지 오랬어.
그러고는 슬쩍 추잡스런 눈초리로 젊은 여자 쪽을 훔쳐보았다.
그날 밤도 소대장은 젊은 여자와 같이 굴을 빠져나갔다. 이날 젊은 여자는 소대장에게 손목을 잡히지 않고 스스로 앞장을 섰다. 이제 와서 일일이 손목을 잡힐 필요가 뭐냐는 단념한 태도였다. 그런데 두 사람이 굴아가리를 나서자 마자 총소리가 들렸다.
어찌된 일인지 몰라 모두 기어나갔다.
소대장과 젊은 여자가 거기 서 있었다.
― 뭡니까?
총잡이가 묻는 말에 소대장은
― 저게,
하며 권총 든 손으로 앞 나무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아까 낮에 걸어놓은 노루 대가리가 걸려 있었다.
소대장의 말이, 굴을 나서자 무엇이 눈앞에서 번쩍 하기에 봤더니 노루 눈알이 이쪽을 노려보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금방 뿔을 이리 향하고 달려들 것만 같더라는 것이다.
― 저게, 사람을 놀라게 해!
소대장이 다시 투덜거렸다.
이튿날 그는 남은 다른 고기는 나중에 먹기로 하고 우선 대가리부터 삶게 했다.
오래간만에 기름것을 먹어서 그런지 설사들이 났다.
총잡이만이 예사로웠다. 조반이 끝나자 그는 총 분해소제를 시작했다.
바우가 그 구경을 했다. 볼수록 신기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조각이 난 이 쇠붙이 어디서 그런 요란한 소리가 나고 사람이나 노루를 단번에 죽일 만한 힘을 가졌단 말인가.
총구 소제를 하던 총잡이가 중얼거렸다.
― 이젠 총알이 한 알밖에 안 남았는데…… 이걸 어디 요긴히 써야 할 텐데…….
뒤를 보러 갔던 노랑수염이 돌아왔다.
총잡이 사내가 바우 쪽을 힐끗 쳐다보면서,
― 뭣을 구렇게 들여다보는 거야? 보면 알겠어? 저리 물러나.
바우는 좀 더 앉아서 조각난 쇠붙이를 도로 맞추는 걸 구경하고 싶었으나 하는 수 없었다.
바우가 자리를 뜨자 총잡이는 새삼스레 주위를 한번 살피고 나서,
― 저 이봐, 자네는 어떻게 생각해? 죽은 노루 대가리가 눈깔을 부릅뜨고 사람한테 대들 수 있다구 봐? 그저 뭣이 달빛에 한번 번뜩한 걸 가지구 괘니.
노랑수염은 이 친구가 어젯밤 이야기를 하는 모양인 데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 글쎄 겉으루만 큰소리를 하면서 이만저만 겁쟁이가 아니거든. 그렇잖어?
노랑수염은 총잡이의 흰자위 많은 눈과 마주지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 거렸다.
― 그러니 그런 겁쟁일 믿구 어떻게 따라다닌단 말야?
문득 노랑수염은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나는구나 했다.
노랑수염이 생각한 대로 그날 저녁때 일은 일어나고야 말았다. 전나무숲 사이에서 총소리가 나 달려가 보았더니 소대장이 쓰러져 있는 것이었다.
총잡이가, 쓰러진 소대장이 찼던 권총을 풀어 자기 허리에 차고 주머니에서 지도를 꺼내어 제 주머니에 넣으면서 혼잣말처럼,
― 노루새낀 줄 알구 쐈드니 그만.
그러다가 죽은 소대장 주머니 속에서 꽁초가 나오자,
― 이것 보지, 예비심이 오죽 많은가.
그러고는 주머니 밑 담배가루까지 샅샅이 긁어모아 종이에 말아가지고 노랑수염과 배낭메기와 더불어 맛있게 나눠 피웠다.
이번에도 송장은 바우가 묻었다.
날이 어둡자 노랑수염은 굴 안에 묻어놓은 불씨 에서 관솔불을 댕겨놓고서 나뭇가지 셋을 총잡이 앞에 내밀었다.
― 이게 뭐냐?
― 제비.
― 제비? 제비는 무슨 제비?
노랑수염이 다 알면서 뭐 그러느냐는 듯이 젊은 여자 쪽을 눈짓해 보였다.
― 허, 이거 왜 이래?
총잡이는 아까 소대장 시체 곁에서 담배를 나눠 피우던 때와는 달리 우악스럽게 노랑수염이 내민 나뭇가지를 후려쳐버렸다. 그러고는 젊은 여자의 손목을 끌고 굴 밖으로 나갔다.
그동안 두 차례나 인가를 찾아나섰다가 허탕을 치고 말았다. 한 번은 바우가 배낭메기와 갔었고, 한 번은 노랑수염과 갔었다. 그러나 두 번 다 삼사십 릿길을 더듬어보았으나 인가라고는 하나 볼 수가 없어 그냥 돌아오고 말았다. 그렇지만 바우는 자기가 아는, 봄철이면 소금을 바꾸러 가는 벌마을은 가르쳐주지 않았다.
한번은 그쪽 방향으로 접어들려는 걸 그쪽은 낭떠러지투성이라고 말하여 피 했다.
바우는 어머니 생각이 났다. 그동안은 산속에서 여러 사람을 만난 반가움과 신기하고도 무서운 이 사람들의 행동이 그의 마음을 붙들어놓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머니는 자기가 광우리를 지고 나왔으니 도토릿골로 온 줄은 알 것이다. 그러면 필시 자기를 기다리다 못해 도토릿골까지 찾아와 보았을 것이다.
바우는 거기 나무 위로 올라가 집 쪽을 향해 목청껏 소리를 질러보았다. 어어이. 어디선가 이 소리를 받았다. 어어이이. 이 어어이이 소리를 다시 어디서 받고 그 다음에 또 어디서 받고 하면서 멀리 꼬리를 감추어버렸다. 바우는 다시 어어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 어어이 소리를 어디서 받으면서 꼬리를 감추기도 전에,
― 이 새끼가 미쳤나, 누굴 부르는 거야? 썩 내려오지 못하겠어?
총잡이 사내가 작은 총을 빼들고 바로 나무 밑에 와있었다.
바우는 이 사내의 손에 들리운 물건이 얼마나 무서운 물건이란 걸 아는 터이므로 당장은 자기가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느끼면서 나무에서 내려오고 말았다.
한참 뒤에 총잡이가 지도를 펴놓고 있는데 배낭메기가 겁에 질린 얼굴로 달려왔다. 지금 저기 낯모를 사람이 보인다는 것이다.
― 한 놈이야?
― 얼핏 보기엔 한 놈 같은데.
― 군복을 입었어?
― 응, 군복을 입은 것 같애.
― 총은 ?
― 못 봤어.
지도를 접어 호주머니에 넣는 총잡이의 손이 떨리었다.
하여튼 저쪽의 거동을 살피기로 했다.
좀 만에 낯모를 사람 편에서 먼저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보니 같은 군대 의 사람이었다.
마찬가지로 패잔한 낙오 중대의 한 사람으로서 오늘 이 방면으로 탐색을 나왔다가 누가 여기서 고함을 치기에 와봤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중대는 여기에서 동쪽으로 한 시오 리 떨어진 산속에 있다는 거며, 대원이 어덟 명이란 것을 알려주었다.
총잡이는 이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 조금도 달갑지가 않았다. 이쪽 소대장에 관한 것을 물을까 보아 가슴이 막막했다. 누가 찌를지도 모른다는 겁도 났다. 그래서 아무도 이 중대에서 온 사람과 이야기할 틈새를 주지 않도록 애썼다. 그러다가 중대에서 온 사람과 단둘이 되자,
― 혹시 권총알 좀 없을까요?
해보았다.
실은 죽은 소대장의 허리에서 권총을 옮겨 찰 때 벌써 총알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이었다. 좀 전에 낯선 군인이 보인다는 보고를 듣고 지도를 접어 넣는 손이 떨린 것도 상대편이 적인 경우에 대비할 총알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 있을 리가 있소. 지금 거기두 중대장님의 권총 한 자루와 소총 두 자루가 있지만 총알이 부족해 큰일이오. 되레 여깃것이 있으면 좀 빌려가야 할 형편이오.
중대에서 나온 사람이 다행히 이곳 소대장에 관한 것은 묻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지시가 있기까지는 여기를 지키고 있으란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그런데 이 사내가 저만큼 가는데 무엇을 눈치 챈 듯 노랑수염이 뒤쫓아가는 것이었다.
총잡이는 등골이 싸늘했다. 소대장 이야기를 찌르러 가는구나 했다. 다음 순간 그는 노랑수염이 그런 말을 일러바지기만 하는 날이면 맨주먹으로라도 때려죽여 없애버리리라 마음먹었다.
노랑수염이 입가에 웃음을 띠우고 돌아왔다.
― 권총알두 떨이졌다면서?
― 그래. 총알이 좀 남아 있는 줄 알았드니 그게 아니야. 그때 노루 대가리 쏜 게 마지막 알이었어.
그리고 총잡이는 총알이 없어도 이걸 가지고 있는 게 좋을 거라고 권총을 노랑수염에게 건네고 나서 자작나뭇가지 세 개를 꺾어 기분 좋게 들어 보이며,
― 오늘 밤부터 제비뽐기다.
이튿날 어제 왔던 중대의 사내가 다시 왔다. 중대장님이 여기의 여군을 보내란다고 했다. 그러고는 다시 연락이 있을 때까지 여기를 지키고 있으란 말을 남기고 젊은 여자군인과 같이 돌아가버렸다.
얼마 남지 않은 알강냉이를 삶아 조반을 치르고 났을 때였다. 난데없는 폭음 소리와 함께 제트기 한 대가 쎄액 하고 지나갔다.
모두 굴속으로 허둥지둥 몸을 피했다.
바우도 얼른 나무 밑으로 몸을 피했으나,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지금 지나간 그 물건이 이 사람들까지 겁내할 만큼 그렇게 무서운 물건인가.
이날 바우는 배낭메기와 함께 인가를 찾아나섰다.
서북쪽으로 한 이십 여릿길은 실히 되게 가보았으나 인가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저 보이느니 언제와 같은 산뿐이었다. 산 중턱까지는 검푸른 전나무와 잣나무 소나무숲이 둘리고, 그 위로는 하아얀 자작나무에 엄나무 피나무 느릅나무숲,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물든 단풍, 그 단풍이 거의 막물이 되어 검붉은 빛깔로 변해 있었다. 그러한 검푸르고 하얗고 검붉은 빛깔은 멀어질수록 차차 제작기 의 빛을 잃어가다가 나중에는 뽀오얀 잿빛으로 풀려들고야 마는 것 이 었다.
양쪽이 깎아세운 듯한 절벽에 싸인 계곡에 이르렀다. 아까부터 푸른 하늘에는 솔개 한 마리가 떠서 맴을 돌고 있었다. 배낭메기는 그것이 솔개 그림자인 줄 뻔히 알면서도 머리 위를 지나칠 때마다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히곤 했다. 전쟁마당에서 귀를 먹먹하게 하는 포탄의 작렬음과 함께 바로 머리 위를 스칠 듯이 지나가며 아무런 구별 없이 마구 퍼붓던 제트기의 기총소사. 그러나 그때는 오히려 공포조차 잊어버린 순간순간에 무의식중에나마 어떤 알지 못할 의지에 의하여 움직일 수 있는 몸이었다. 그것이 지금에 와서는 온전히 의지가지 없는 혼잣몸이 됐다는 느낌이었다. 어째서 자기는 그 지긋지긋한 전쟁터를 헤매다가 급기야는 이런 곳에까지 쫓겨와야만 했던가. 지금 자기가 의탁할 곳이라곤 아무 데도 없는 것이다. 같이 패잔해 온 축들이 그렇고, 지금 눈앞에 겉어가고 있는 이 바보녀석이 그렇고, 게다가 주위의 산은 자기가 의지하기에는 너무나 벅차게 서먹서먹한 존재인 것이다.
한 삼십 릿길을 걸었다. 오늘도 종내 허탕을 치고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고 단념하려는데 저쪽 후미진 산기슭에 인가가 보였다. 두 집이었다.
굴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늦저녁때였다. 서둘러 저녁들을 먹고 길을 떠났다.
그믐 가까운 달이 좀처럼 뜨지를 않아, 검은 나무숲 사이로 별빛만이 부스러져 드러나 보였다. 그 하늘이 바로 나무숲 위인 듯 낯은 별들이었다.
얼마큼이나 걸었을까. 검은 나무숲 사이로 부스러져 쳐다보이던 별빛도 무엇 에 가려졌는지 보이지 않는다 싶자, 나무숲 꼭대기의 바람 소리와는 또 다른 바람 소리 같은 게 밑으로 향해 쏟아져 내려왔다. 비였다. 나뭇잎에 맞아 방울져 떨어지는 물방울이 목덜미에 차가웠다.
할 수 없이 나무그늘에들 웅크리고 앉아버렸다. 비에 젖은 나무줄기들이 어둠 속에 둔탁한 빛을 발했다.
거기서 밤을 새우게 되는가보다 했더니 그래도 비가 그치고 다시 검은 나무숲 사이로 별빛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또들 걸었다.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든 것만 같았다. 낮에 지나친 일이 있는 절벽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총잡이는 몇 번이고 바우더러 길잡이를 잘못했다고 욕지거리를 했다. 그러는데 바우가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모두 귀를 기울였다. 과연 바람 소리 사이로 아스란히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개 짖는 소리였다.
개 짖는 소리가 가까워지자 바우는, 총잡이 사내가 어깨에 메고 있던 총을 내려 옆구리에 끼고, 노랑수염 사내가 허리에서 작은 총을 빼드는 걸 보았다. 그리고 얼마 전 어느 곳에서 벌어졌던 것과 거의 같은 광경이 벌어진 걸 보았다.
저번과 다른 것은 총잡이 사내가 옆구리에 끼고 있는 총과 노랑수염 사내가 빼들고 있는 작은 총에서 아무런 소리도 터 져나오지 않은 점이었다. 그리고 저번에는 장정을 하나 붙들어 짐을 지워가지고 돌아왔는데, 이번 에는 처녀를 하나 끌고 돌아오게 된 것이 달랐다. 어둠 속에서 처녀의 악쓰는 소리가 귀를 찔렀다. 총잡이 사내가 잡아끌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 옘병할 년이 사람을 문다, 하는 총잡이 사내의 부르짖음과 함께 철썩 하는 소리가 들렸다. 총잡이 사내가 처녀에게 손을 물려가지고 그네의 뺨을 후려갈긴 것이다. 뒤이어 총잡이 사내의 소리로, 이 우라질년 다시 한 번만 물었단 봐라, 당장 쏴죽이구 말겠다. 그러고는 처녀의 울부짖음만이 들렸다.
이런 속에서 무엇보다도 저번과 달라진 것은 바우 자신이었다. 저번에는 온몸이 떨리고 눈앞이 어찔해서 무어가 무언지 분간을 못했었는데 이날 밤만은 누가 와서 볼때기를 쥐어박기 전에 제 손으로 강냉이며 감자 광우리를 지게에 올려놓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지게를 지고 돌아오는 길에도 이것저것 생각을 할 만한 여유까지 생긴 것이었다.
먼저 오늘 밤 총에서 그 요란하고 무서운 소리가 터져나오지 않은 것은 남았던 마지막 알을 그 덧니박이 사내 죽이는 데 써버렸으니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지금 노랑수염 사내의 허리에 매달려 있는 작은 총도 오늘 밤 아무 소리를 내지 않은 것은 그것마저 마지막 알을 다 써버린 탓이 아닐까. 그렇다면 좀 전에 처녀더러 다시 물면 쏘겠다고 한 것은 말뿐의 엄포일 것이다. 그렇기만 하다면 무서울 것이 없다. 인제는 집에 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었다.
바우는 지금 끌고 오는 처녀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다. 아직도 흐느낌을 멈추지 않고 있는 처녀의 나이가 몇 살이나 될까. 어둠 속에 눈어림으로 본 키로서는 꽤 나이가 찬 처녀 같았다.
그러자 바우는 지난날 어머니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바우가 제법 철이 들자 하룻저녁 어머니가 해준 이야기 였다. 아버지는 본시 백정의 아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아버지가 어머니를 좋아했어도 같이 살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아버지가 어머니를 업고 이 산속으로 도망해 들어왔다는 이야기.
그믐께 가까운 달이 뜰 무렵에는 처녀의 흐느낌도 멎고, 그네의 허리께까지 늘어진 검은 머리가 분간되었다. 바우의 몸에서는 아까 맞은 찬비가 김이 되어 서리어올랐다.
탄 강냉이에 감자를 썰어 넣은 밥을 지어 먹고는 모두 여기저기 드러누워 잠이 들었다. 바우도 한옆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코를 골았다. 아침 해가 퍼져 있었다.
이 중에 헛잠을 자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총잡이였다. 그는 자는 체 눈을 감고서 이것저것 궁리에 골몰해 있는 것이다. 아직까지는 자기가 소대장을 죽인 사실이 중대장에게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언제고 드러나고야 말 것이다. 지금쯤은 그 여군의 입을 통해 이미 알려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고 보면 자기가 이러고 있다는 게 어리석게만 생각되었다. 처음에 그는 마지막 판이라 자기도 할 짓을 다 해본 후 죽는 날엔 그저 죽고 말자는 생각이었었다. 그러나 그게 이제 와선 달라진 것이다. 살 길만 있다면 어떻게든 살아보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이 산을 벗어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축이 다 곯아떨어져 있는 걸 안 그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심스러이 저쪽에 혼자 얼굴을 감싸고 앉아있는 처녀에게로 갔다.
처녀는 인기척을 듣자 부은 눈을 들고 입술을 떨기 시작했다.
― 무서워할 거 없어. 난 널 좋게 해줄 사람이니까. 너두 죽지 않구 살구 싶지?
총잡이는 나지막한 말소리나 다짐 조로,
― 살구 싶으면 말이다, 나 하라는 대루 해야 한다. 알겠지?
처녀는 파랗게 질린 입술만 떨고 있었다.
― 그럼 너 지금 곧 저기 뵈는 바위 밑에 가서 숨어 있어. 그랬다가 나 하라는 대루만 해. 살려줄 테니.
총잡이는 처녀의 턱을 한 손으로 쳐들어 저쪽 나무 사이로 보이는 큰 바위를 가리키고 나서, 이어 처녀의 팔을 잡아 일으켜 그쪽으로 밀었다.
처녀가 마지못해하는 걸음으로 바위 쪽으로 가는 것을 본 총잡이는 그길로 바우가 누워있는 데로 가 조심스레 그를 흔들어 깨웠다. 그러고는 귓속말로, 할 얘기가 있으니 지게를 지고 잠깐 저리 좀 가자고 했다.
바우는 무슨 영문인지 몰랐으나 총잡이가 하자는 대로 지게를 지고 따라나섰다.
큰 바위가 있는 곳과 엇비스듬히 떨어진 곳까지 가서 총잡이는 걸음을 멈추며,
― 자네 그동안 수고 많이 했네. 이젠 집에 가구 싶지?
바우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내 집으루 돌아가게 해주지. 그리구 그동안 수고한 값으루 이 양복을 줄게 자네가 입은 그 해진 옷 벗구 이걸 갈아입구 가라구.
총잡이는 이제 바우의 옷을 바꿔 입고 지게까지 진 후 처녀를 데리고 도망을 갈 참인 것이었다.
물론 바우는 이 총잡이 사내의 속셈을 알아차릴 리가 없었다.
― 뭐 생각해 볼 것두 없어. 자네야 평생 가야 이런 양복 구경을 해보겠나? 그동안 수고한 값으루 주는 거지 아무 생각 말구 입구 가라구. 그리구 이것두 내 선물루 주지. 이 소총까지.
바우가 저도 모르게 한 번 벌씬 웃었다. 옷을 바꿔 입고 어깨에 총까지 멘 자기의 모습을 눈앞에 그려본 것이었다. 어쩐지 그러한 자기 모습이 부끄러워 고개를 돌렸다.
그것이 총잡이에게는 마다는 뜻으로 보였다. 이 새끼가 이쪽의 속을 알고 있는 것이나 아닌가. 그는 여간 마음이 초조하지가 않았다. 잠든 동료들이 깨기 전에 어떻게든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마침내 그는 마음을 놓고 서 있는 바우의 손에서 지겟작대기를 나꿔 채가지고 그의 어깻죽지를 향해 내리쳤다.
지게를 진 채 바우는 두어 발 굴러내려갔다.
총잡이가 쫓아내려가며 이번에는 골통을 겨누고 내리쳤다. 그러나 너무 다급히 쫓아내려가느라고 알맞은 거리에서 서지를 못하고 몸을 뒤틀었다.
바우가 지게를 벗고 일어났다. 그러고는 양손에 지겟다리를 잡고 마구 내둘렀다. 마른 나무와 나무가 부딪는 소리를 내며 총잡이의 잡고 있던 작대기가 저만큼 가 떨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몸뚱어리마저 퍽 하고 꼬꾸라지고 말았다.
― 사람 죽인다아!
그 소리에 노랑수염과 배낭메기가 잠이 깨어 달려내려왔다.
그러나 바우의 살기 오른 기세에 눌려 범접을 못했다.
바우는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가 눈에 드는 것도 모르고 죽어넘어진 상대편을 내려다보다가 그 두 다리를 잡아끌고 산허리를 돌아갔다.
바우가 시체를 산골짜기에 굴려 떨구어버리고 돌아오니 노랑수염이,
― 참 힘이 장살세,
하고 치켜세우는 말을 했다.
배낭메기는 오금이 지려서 아무 데나 대고 오줌을 깔겼다.
그날 밤 노랑수염은 불씨에서 관솔불을 댕겨놓고 배낭메기에게 제비를 내밀었다. 오늘 밤 처녀를 차지할 차례를 청하자는 것이었다.
누웠던 바우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낮부터 충혈된 눈이 관솔 불빛에 확 타올랐다.
― 참 자네두 있었지.
노랑수염이 나뭇가지 하나를 더 꺾어쥐고 바우 앞에 내밀었다.
그러자 바우는 제비를 내미는 노랑수염의 팔을 쳐팽개지고는 구석으로 가 처녀의 손목을 잡고 굴 밖으로 나섰다.
그 뒤로 노랑수염이 식칼을 집어 들고 쫓아나가려는 것을 배낭메기가 말리며,
― 안돼. 넓은 데서는 그 새끼를 못 당해. 바본 줄만 알았드니 여간내기가 아냐. 이따 돌아오거든 여기서 해치워야 해.
바우는 처녀의 손을 마구 잡아끌었다. 무엇이 그렇게 하는지 자기도 몰랐다.
한 곳에 이르러 바우는 주춤 걸음을 멈추었다. 처녀가 무엇을 느꼈는지 잠힌 손을 비틀어 빼려 했다. 그러자 바우는 주먹을 들어 처녀의 어깻죽지를 내리 쳤다. 그러고는 쓰러진 처녀를 끌어당겨 등에다 업었다.
(1956년 유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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