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리부인 밀애.
우리가 어릴 적 접했던 위인전 중에는 노벨상을 두 번이나 받았던 퀴리 부인이 꼭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대단한 업적을 남긴 그녀가 두 번째 노벨상을 받을 당시에 사람들로부터 칭송은커녕 비난을 받았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우리들이 잘 알지 못하는 퀴리 부인의 비하인드 스토리에 대해 들어보기로 하자.
1903년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는 사랑하는 부부이자 연구 동료로서 노벨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이들은 자신들이 진행하는 연구도 성과를 이루었고, 자식들 또한 잘 자라주어 남부러울 것 없는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의 발단은 1906년 5월 7일, 길을 가던 남편 피에르가 짐마차의 바퀴에 머리가 깔려 즉사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서른아홉의 젊은 나이였던 마리는 한동안 비통에 잠겨 있었으나, 남편이 하던 소르본 대학의 자리를 이어받으면서 마음을 다 잡아갔다. 그러나 11년간이나 함께 했던 남편의 빈자리는 너무나 큰 것이었고, 급기야 외로움에 몸을 떨던 그녀는 남편의 제자였던 폴 랑주뱅과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폴은 가정이 있는 유부남이었으나, 그를 통해 남편의 빈자리를 채우려던 마리에게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이에 마리는 폴에게 적극적이었고, 급기야 밀회 장소인 아파트를 따로 구해 밤낮으로 밀애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마리의 집착으로 인해 결국 그들의 관계를 폴의 부인이 알게 되었지만, 이때에도 마리는 몸을 사리기는커녕 폴에게 이와 같은 노골적인 내용의 편지를 보내는 대담함을 보이기도 하였다.
“폴…기다릴게요. 끝까지 기다릴게요. 그러니까 당신이 별거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요. 우리 예전처럼 당신 방에서 같이 지낼 수 있을 때까지 우리 노력해요. 당신의 결혼생활을 끝장낼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내게로 돌아와 줘요.”
이처럼 당시의 마리는 젊고 싱싱한 폴에게 푹 빠져 있어, 그가 부인과 헤어질 수만 있다면 어떤 짓이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리의 편지는 폴이 아닌 부인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고, 내용을 본 부인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일간지 ‘뢰브르’에 보내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편지를 본 기자는 큰 사건임을 감지하고는 즉시 대서특필하여 사람들에게 퀴리 부인의 불륜 사실을 널리 알렸던 것이었다. 이를 알게 된 프랑스 국민들은 두 번째 노벨상을 받기로 예정되어 있던 그녀의 수상 여부에 대해 불신하면서, 남편 제자와 바람난 화냥년이라며 퀴리부인을 소리 높여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지만, 폴은 그렇지 않았다. 마리는 폴과의 사랑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노벨상까지도 포기 할 수 있었으나, 폴은 비난어린 눈총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부인에게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었다. 이후에도 비난 여론이 사그러들지 않자, 왕립 과학 아카데미에서도 그녀의 노벨상 수상을 다시 한 번 숙고하였으나, 이제까지의 업적을 무시 할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린 아카데미측은 예정대로 식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이에 1911년 섹스 스캔들에 얼룩진 두 번째 노벨상의 씁쓸한 영광은 퀴리 부인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대단한 과학적 성과를 이룬 퀴리 부인도,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보통의 여자였을 뿐이었다. 유부남과 부정한 짓을 저지른 것은 비난 받아 마땅하지만, 남편의 빈자리가 오죽 컸으면 그의 제자를 통해 사랑을 매 꾸려 했겠는가. 퀴리 부인은 비록 부정한 사랑을 저지른 여인이었으나, 노벨상을 포기할 정도로 사랑에 솔직하고 당당하였기에 후세에 훌륭한 위인으로 기록된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