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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본여행 [J여동] 원문보기 글쓴이: 바이칼1
대마도 20 - 이즈하라에서 히타카츠에 도착해 미우다해수욕장 일러우호의 언덕에!
2024년 1월 27일 이즈하라 지온(祈園) 호텔에서 일본 가정식으로 아침을 먹고 호텔을 나와 운하(강)를 따라
걸어 항구로 가니 운하 철책에는 유리판에 통신사 행열도 그림이 수십장이 새겨져 있으니... 조선 통신사
(朝鮮通信使) 란 1607년 이후 에도 막부에 파견한 사절단으로 12차례에 걸쳐 400명 내외가 파견 되었습니다.
그러고는 우리 일행 7명은 호텔을 나와 렌터카를 타고 떠나는데.... 그간 스무차레 가까운 일본 여행에서 보면
역 근처 도요코인 호텔 같은 사무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료칸은 물론이고 일반 호텔도 주인과 종업원
이 같이 나와 몇 번씩 허리를 90도 숙여 인사하는데.... 오늘은 주인이 한국인인 탓인지 내다 보지도 않습니다?
우리 가족 3대 7명이 탄 렌터카는 이즈하라 시내를 빠져나오니 어제 우리가 들른 면세점
다이렉스 미쓰시마를 지나고..... 더 달리니 가네다성터로 가는 길을 스쳐 지나니
곧 남북섬으로 나누는 만제키운하가 보이고 붉은 다리 만제키바시(万關橋) 를 지납니다.
아소만을 뒤로 하고 더 달려서 올때는 와타즈미신사와 에보시타케 전망대를 보기 위해 둘러
왔지만 이번에는 오른쪽에 바다를 끼고 그냥 북상해 휴게소에 한번 들른후 수령이 일본
에서 가장 오래된 1,500년이라는 긴의 장수 은행나무는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쳐 버렸습니다.
그리고 삼나무 숲이 나타나는데.... 이게 바로 단풍가도 라고 불리는 숲길이니 슈시강변을 다라 7km나
이어지는 단풍길로 매년 11월 상순에는 여기서 단풍축제가 개최된다는데 오늘은 겨울철이니
어쩌랴! 그러고는 마침내 히타카츠(比田勝) 에 도착했는데, 아직 렌터카 반납 시간이 남은지라....
그냥 도시를 통과해서 북쪽으로 7~8분을 달리니.... 어제 본 미우다(三宇田) 해수욕장이 나타나는데
우리는 해수욕장으로 내려가지 않고 오른쪽 길로 해서 언덕을 올라가니 거기에 도로변
에 공터가 있어 차를 세우고는..... 저 아래 바다를 내려다 보니 참으로 해변 풍광이 환상적 입니다.
그러고는 조금 더 달려서 토히타카쓰의 동쪽 끄트머리 노사키 곶의 언덕에 오르니 여긴 엄청 큰 주차장이
보이고 바다쪽에 큰 기념비가 하나 서 있는데..... 여기 이름은 日露友好の丘(일로우호의구) 입니다.
일러우호의 언덕이란 일본해전 100주년을 기념하여 2005년에 건립한 조각상으로 러일전쟁 당시
피격된 러시아 군함이 임시 상륙을 하니 부상당한(포로) 러시아 해군 병사들을 우물가로 안내
하고 밤에는 민가에 나누어 숙박시키는등 아군, 적군 관계없이 극진히 간호해 보살폈다고 합니다.
이런식의 기념관을 전에 본 적이 있으니.... 규슈 사가현 가라쓰(唐津) 에 나고야성 (名護屋城) 은
1591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 전진기지로 삼기위해 가토 기요마사를 총
책임자로 해서 스무명이 넘는 다이묘들이 구역을 배정받아 1년도 안되는 기간에 세운 성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이 성이 무느진후 성터에 세운게 히젠 나고야성 박물관(名護屋城 博物館)
으로 자칫 잘못하면 침략전쟁을 미화, 홍보하는 박물관이 되기 쉬우니 이를 염려해 선사시대
부터 현재까지 한반도와 일본사이의 교류사를 보여주는데 평화 박물관을 지향하는지라
입구에는 제주도 돌하르방과 천하 대장군에 지하 여장군 장승이 서 있으며..... 입장료는 무료입니다.
나고야성 박물관에는 정면에 바로 보이는 것은 놀랍게도 거북선 과 이순신 장군의 영정이 맞이하는데....
한반도에서 전해진 문화와 고려 불경에 수월관음도 그리고 조선 성리학과 조선통신사등과
나고야성 지도등 자료가 전시되어 있으니 평화를 지향한다는데, 여기도 이름에 日露友好(일로우호) 라?
쓰시마 해전이란 1905년 러일전쟁 때 러시아와 일본이 벌인 해전으로 일본 함대가 쓰시마(대마도)
인근에서 러시아의 발트 함대를 격멸했으며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되어 일본이 한국을 통치하는
결과를 낳고 국제적 위상이 높아졌는데, 쓰시마 해전은 당시까지 세계 최대 규모의 해전이었습니다.
1904년 러일전쟁 발발해 군항 뤼순이 일본 해군의 기습으로 태평양 함대는 큰 타격을 받아 항구에
봉쇄된 상태였으니 러시아는 태평양 함대의 봉쇄를 타파하고 제해권을 장악하기 위해
표트르 1세에 의해 창설되어 러시아의 막강한 해상 전력으로 군림해온 발트함대를 보내게 됩니다.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1877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공훈을 세웠으며, 함포사격 시범이나 해상기동을
선보인 인물로 짜르의 눈에 들었으니 극동으로 보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뒤, 제1태평양 함대
전력과 합세해서 압도적인 해상전력을 바탕으로 일본군 함대를 격파하는 재해권을 확보하는 것이었습니다.
함대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 스웨덴 → 노르웨이 → 프랑스 → 스페인 → 포르투갈 → 모로코
→ 프랑스령 말리 → 가봉 → 독일령 나미비아 → 네덜란드령 남아프리카 →
마다가스카르 → 영국령 실론 섬 → 말레이시아 → 프랑스령 베트남 →
미국령 필리핀 → 타이완 섬 → 청나라 → 대한제국에 이르는 엄청난 대장정을 해야 했습니다.
1904년 10월 14일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출발한 제2태평양 함대가 일본으로 향하기 시작했으니
제3태평양 함대까지 합류했을 때 함대의 총 전력은 전함 7척, 순양함 7척, 보조순양함 5척,
구축함 9척등 총 28척의 전투함과 26척의 수송함에 승무원 14,000명으로 당대의 대함대 였습니다.
함대는 11월 12일 프랑스령 다카르에 도착해 보급을 받은후 12월 29일 마다가스카르 생트마리에 도착
했는데, 보급이 되지 않고 열대의 더위와 익숙하지 않은 음식, 그리고 풍토병과 맞서 싸우면서
분견대와 합류해 4월 8일에 말라카 해협에 도달했고, 4월 14일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베트남) 의
깜란항에 도착해서 석탄을 보급받았으며 5월 9일에는 제3태평양 함대와 합류해 총 38척으로 늘어납니다.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제독은 발트 함대가 무사히 블라디보스토크
에 도착하면 일본 해군이 해전에서 못 이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 지금까지
일본이 전쟁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은, 초반 기습에 의한 제해권 확보에
있었던지라 발트 함대가 온전히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다면 제해권은 단번에 무너질 것입니다.
다행히 발트 함대가 마다가스카르에 머무르고 있던 1905년 1월 뤼순 공방전의 결과로 뤼순
이 함락되고 태평양 함대의 잔존 세력이 모두 무너지면서 도고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으며 일본 함대는 대대적인 정비와 수리를 통해 최후의 일전을 시도할 수
있었으니 도고는 발트함대가 블라디보스토크에 들어가기전 격파해야 승산이 있다고 봤습니다.
총사령관 로제스트벤스키는베트남의 반퐁항을 출발하기 전에, 블라디보스토크로 가기 위한 항로를 두고
고민에 빠지면서 '수보로프' 호에 사령관과 함장을 모아 작전 회의를 열었는데 로제스트벤스키에게는
3개의 선택지가 있었고.... 도고는 방어하는 입장으로서 그 3개 중 하나를 고르고 천운에 맡겨야 했습니다.
그 3개는 각각 한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대한해협, 혼슈와 홋카이도 사이의 쓰가루 해협, 홋카이도와 사할린
사이에 있는 소야(宗谷)해협이었는데, 이 3개를 모두 틀어막기에는 일본 함대의 전력이 부족했으니
함대를 분산했다가는 각개격파 당하고 러시아 함대는 그대로 블라디보스토크에 입항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소야 해협으로 들어서자는 의견과 큐슈, 시코쿠, 혼슈 연안을 공격하며 쓰가루 해협을 통과하자는
의견도 나왔으나, 대부분의 참모진의 의견은 대한 해협 - 쓰시마 해협을 통과하는 것
이였으며, 함대가 지구 반바퀴인 2만 8천 8백km을 항해해 지쳐있어 전투력이
떨어져있던 걸 알고있던 로제스트벤스키 사령관의 선택 또한 대한 해협 - 쓰시마 해협 이었습니다.
나머지 2개 대안에 비하면 거리가 가장 짧아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장 빨리 도착할 수 있었으며 베트남의
깜라인만 출항 이후 더 이상 보급을 받을수 없는 석탄 문제도 무시할 수 없었으니 당시는 증기선
시대 였고, 러시아의 해외 식민지가 전무한 상태에서 석탄 보급은 함대의 운명이 걸린 문제 였습니다.
로제스트벤스키 생각은 소야 해협과 쓰가루 해협으로 일본열도를 빙 돌아서 가는 것은 한니발, 나폴레옹
의 알프스원정 처럼 도박이나 다름없었으니 지구 반 바퀴 도는 동안에는 동맹국인 프랑스
항구에서 석탄을 보급받았지만, 이마저도 프랑스의 다른 동맹국인 영국의 압력으로 여의치 않았습니다.
영국이 방해를 한 이유는 영일동맹을 맺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앞서의 어선 포격 사건의
보복 겸해서 방해를 한 것이고, 러시아도 자체적인 석탄 보급선을 운용하기는 했지만
역시 석탄을 지속적으로 공급받아야 했으니 로제스트벤스키는 일부 함선을 다른
곳으로 보내 상선단속 활동을 벌여 일본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기만전술을 씁니다.
일본 본부 참모진들은 발트 함대의 항선지를 사할린의 소야 해협을 예상하고 그곳을
지키기로 결정했으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생각은 달랐으니.....
그는 참모진의 결정을 뒤엎고 대한 해협(대한제국의 진해) 에 함대를 배치하였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함대가 출현하지 않자,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하고 대본영에 홋카이도 쓰가루
해협으로 이동하겠다며 허가를 요청했으나, 대본영은 좀 더 기다려보자며 도고를
달랬고, 그 직후 러시아 함대의 석탄 보급선이 상하이시에 입항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습니다.
석탄 보급선이 함대에서 떨어져 나왔다는건 러시아 함대가 최단 루트를 선택했다는 것을 의미했으니 도고
제독은 전 함대를 진해만에 집결시키고 일전을 기다렸고, 5월 17일에 베트남의 반퐁항을 출발해 대한
해협으로 향하던 제2태평양 함대는 전투를 피하기로 결정하고 5월 25일 속력도 늦추고 무전도 끊었
으며, 쓰시마 해협에 짙게 낀 안개와 야음을 틈타 모든 함정의 탐조등도 끈 채 대한해협 통과를 시도합니다.
1905년 5월 27일 새벽 2시 45분, 발트 함대의 병원선인 '오룔호' 가 짙은 안개 속에서
밝게 켠 등불을 경순양함 시나노마루(信濃丸)가 발견하고는 은밀히
관측하던 시나노마루는 4시경, 대규모 러시아 함대를 확인하고 급히 본대에 타전합니다.
러시아 함대 발견 소식을 들은 도고는 즉시 전 함대 출격명령을 내렸으니, 조심스레 러시아 함대를 추적하던
일본 해군 연합함대는 러시아 함대가 해협의 병목지역에 다다를 때까지 기다리다가 그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오후 1시 55분, 도고는 기함 미카사에 전투개시를 알리며, Z기를 게양했으니 "황국의 흥폐, 이 전투에
달려 있다. 각 대원은 한층 분발 노력하라." 일본 해군은 쓰시마 해전 당시 T자 진형을 이룹니다.
가로 방향으로 기동하는 일본 연합함대는 대부분의 군함들이 측면 방향으로 집중적인 함포 사격을 퍼부을 수
있었지만, 세로 방향으로 기동하는 러시아 발트함대는 선두의 소수 군함들만이 함포를 쏠 수 있는 불리한
조건에서 싸워야 했으니, 화력의 집중력, 규모 측면에서 일본 연합함대가 월등히 우세한 조건을 차지했습니다.
원래 도고는 어뢰정을 중심으로 하는 전법을 쓰려고 했으나 해협의 거센 풍랑으로 소형함인 어뢰정의
작전이 어려워지자 대신 도고는 그 유명한 T자 전술을 들고 나왔으니 일본 함대가 T자
진형을 취하는 동안 러시아 함대는 선제공격을 개시했으나, 거리 문제로 명중탄을 얼마 내지 못했습니다.
새벽 이후 일본 함대와의 꼬리잡기와 기동전 와중에 함대 진형이 3열로 바뀌면서 일본 함대가 진형 정비를
마치는 시간동안 충분한 화력집중을 하지 못했으며... 일본 함대는 14노트로 기동하고 있었지만 러시아
함대는 11노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고, 일본 함대가 6,000~7,300미터 까지 측정이 가능한 최신형 영국제
측거의를 장비하고 있었던 반면 러시아 함대의 측거의는 유효 측정거리 4,000미터 정도에 불과한 구형이라!
5분 만에 진형정비를 마친 일본 함대의 집중포화가 러시아 함대를 강타했으며 그 이후로는 일방적인
학살이었으니 기함 수브로프가 제일 심한 집중포화를 받았고 도고는 함대 지휘부 부터
무력화시킨다는 계획으로..... 모든 화력을 기함 수바로프와 고위급 제독들이 탄 함선에 퍼부었습니다.
사령관 로제스트벤스키가 중상을 입고 의식을 잃었으며, 사령관을 어뢰정으로 옮긴 이후에 기함 수브로프는
침몰했고 오후 7시 40분, 러시아 함대 잔존함들이 도망치고 어둠이 깔린 이후에 전투가 종결되었는데
러시아의 전함들이 쉽사리 격침당한 이유는 프랑스식 텀블홈 형식의 선체를 사용한 전함이기 때문입니다.
텀블홈 방식은 흘수선이 넓고, 위로 갈수록 피라미드 형상으로 선체가 좁아지는 형태이며, 자연스럽게 경사
장갑을 가지는 장점이 있지만, 갑판이 좁아져서 상부구조물을 높은 곳에 올려야 하므로 무게중심이 올라
가며, 조금만 침수되거나 배가 흔들리면 부력을 빠르게 상실해서 침몰을 가속화하는 부작용이 있었습니다.
러시아 전함들은 장갑을 강화했기 때문에 상비배수량에서도 설계흘수선을 1m 이상 초과하는 과적상태
였던 데다가, 해전 직전에는 원래 용적량보다 훨씬 많은 대량의 석탄을 적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흘수선이 추가로 2m 가까이 깊어지면서 현측 주장갑대는 해수면 아래로 완전히 잠기다시피 했습니다.
그로 인해 해전 당시 러시아 전함들은 피탄시 침수가 발생하면 더 빠르게 가라앉는 비극을 맞이한
것이며 이는 비슷한 수준으로 포탄을 집중적으로 얻어맞은 일본 해군의 기함 미카사가
영국식이라 안정성이 높으니 전투능력을 상실하지 않고 전투 종료 후에도 항해가 가능했습니다.
다음날인 5월 28일 추격전이 시작되었으니 로제스트벤스키가 중상이니 지휘권을 이양받은 네보가토프
제독은 무조건 항복했고, 도고는 포로들을 정당히 잘 대우해줄 것임을 약속했는데 전쟁 역사상
최고로 포로대우를 잘했으니 치료부터 식사 제공, 우편서신, 개인소지품 소유등..... 같은 날 오후,
로제스트벤스키가 타고 있던 고속정 부이니호가 일본 함대에 발각되어 최고사령관마저 포로가 됩니다.
추격을 뿌리치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함정은 순양함 1척과 어뢰정 2척뿐이었으며, 오스카 엔크비스트
제독이 지휘하는 순양함 3척은 항로를 아예 반대편으로 돌려 중립국이던 미국령 필리핀의 마닐라항에
입항하였고.... 엔크비스트 제독과 장교들 또한 함대를 온존시킨 것을 인정받아 황제로부터 면책되었습니다.
보조선박들이 중국의 상하이 등지로 도주했는데, 도망치는데 성공한 배 중 특히 유명한 것은 석탄 수송선
이였던 아나디르인데, 이 배는 쓰시마 해협에서 함대 보급용으로 실어둔 석탄을 써가며 무려
남아프리카에 위치한 프랑스령 마다가스카르까지 도망친 이후에 본국에 보고했으니 다시 말해
지구 반 바퀴를 항해해서 왔다가...... 또다시 지구 반 바퀴 가량을 돌아가는 불굴의 의지를 보여줬습니다.
러시아 최강 함대로 일컬어지던 발트 함대는 총 37척 가운데 전함 6척, 순양함 3척을 합해 19척이 격침되었고,
주력 전함 2척을 포함한 7척이 항복, 나포되었으며 후방에 순양함 3척과 기타 선박들이 도주하였으며
블라디보스토크 까지 운좋게 도착한 러시아 함정은 3척뿐으로 사실상 함대 전멸의 괴멸적 피해를 입었습니다.
기존의 태평양 함대가 여순에서 입은 피해까지 생각하면 러시아 해군은 사실상 소멸한 것이니
이제 러시아에 해군이라고 할만한 것은 흑해 함대가 유일했고 인명피해도 커서
장교, 사병을 합쳐 전사자도 5,380명에 달하고 중상자도 많았으며 포로도 6천여명에 달했습니다.
일본은 어뢰정 3척을 잃고 117명이 전사했을 뿐이니 세계 해전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압승이었고
이 전투로 인해 러일전쟁의 승기가 일본으로 완전히 넘어갔으며 일본 전역은 전승 분위기에 휩싸입니다.
일본군은 쓰시마 해전에서 나포한 러시아 함선들을 수리하고 영국식으로 개수하는 과정을 거쳐서
1907년경 부터 자국군 선적에 편입시켰는데, 쓰시마 해전에서 유일하게 부족했던게
대형 군함인 전함이었으니 아직 일본 해군이 미국이나 영국의 수준을 따라가기
부족한 상황에서 공짜로 얻어낸 러시아 전함 4척은 일본군에게 매우 귀중한 전력이 되었습니다.
“강대국의 흥망”으로 유명한 폴 케네디에 따르면 러시아는 일시적으로 강대국 체제에서 이탈했는데, 최강
의 발트함대가 괴멸하자 전투수행능력을 상실한 것이었고, 니콜라이 2세조차 사할린이 점령당하기
직전 종전조약을 맺으라고 각 관료들에게 재촉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피해가 막심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러시아는 프랑스와 독일에 차관받은 재원도 전비로 모조리 소모하였고, 사실상 만주는 일본
의 소유권으로 넘어갔으며 기존의 주요 전략인 시베리아 철도로 물자를 수송하려는
계획은 일본의 간헐적인 게릴라로 인해 수포로 돌아간지 오래였으며
패색이 짙어지자.... 민중소요가 일어나 내부통제조차 안 되니 니콜라이 2세는 패배를 시인합니다.
일본 역시 전쟁을 더 지속하는 것은 원치 않았으니 신흥국으로서 무리한 전쟁 준비를 하여 일본 경제는 파산
직전이었기 때문에 전투에서 압승을 거뒀음에도 일본은 전쟁을 계속할 여력이 없었는데, 쓰시마 해전의
승리로 수송로는 지킬 수 있었지만 그 이전에 병력이 죄다 소모된 상태였으며 공장은 파산 직전 이었습니다.
일본은 쓰시마 해전에서 승리하자 친일파를 자처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미국 대통령에게 중재를 요청했고
러시아와 포츠머스 조약이 타결되었는데, 러시아는 전쟁 배상금을 무는 상황은 피했지만, 동북아시아
에서 이권을 일본에게 양보해야 했으며 남사할린도 할양했고 일본이 대한제국을 지배하려는 것도 양해합니다.
발트 함대를 잃어버린 러시아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발트해를 독일 해군에 철저하게 봉쇄당해야
했고, 해군력 소멸은 러시아를 승계한 소련도 마찬가지여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허약한
독일 크릭스마리네에게 소련 해군은 제대로 된 교전을 시도해보지 못하고.... 잠수함에 의지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소련 수상함대 전력은 1950년대에 가서야 회복되었으며, 반면 일본은 동북아에서
세력을 확대했고 국제적인 위상 역시 일신하게 되니 전쟁 이후에는 서구 열강에
맞먹는 군사력을 지닌 신흥 열강으로 대접받기 시작하며 국제적인 발언력 역시 강해집니다.
일본은 해군력의 중요성을 실감했으며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져 유럽이 주춤하는 동안 일본은
해군력 증강에 노력해 상당한 성과를 보았고, 이후 유럽 열강은 1921년부터 맺어진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 일본을 포함시켜 일본의 해군력도 견제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는 상황까지 펼쳐집니다.
한편 영국 해군의 제1 해군경 존 피셔는 쓰시마 해전의 승리 요인을 전투함의 빠른 속도
와 거포의 화력과 사거리에 있다고 보았고, 이것에 주안점을 둔 새로운 함정을
요구하니, 영국 해군은 1905년부터 HMS Dreadnought 을 건조해 1906년에 취역
시켰으니, 드레드노트급이라는 새로운 전함들을 탄생시켜 기존의 전함들을 도태시킵니다.
쓰시마 해전의 압승은 이후 40년간 일본 지도부를 사로잡은 신화를 창조했으니 어느 영국 제독은
“배를 건조하는데는 3년이 걸리지만, 군사적 전통을 형성하려면 300년이 걸린다.
일본은 쓰시마 해전 승리를 통해 이 과업을 단 몇년만에 완수했다고 믿게 되었다” 라고 말햇습니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쉬웠다. 세계 열강 중 하나를 상대로 도고가 거둔 승리를 관찰한 일부 일본
군인들은 더 크고 더 좋은 배를 더 많이 건조하여 태평양에서도 비슷한 승리를 거둘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그 어느 열강도, 심지어 영국과 미국도 일본 해군에 맞설 수는 없을 터였다.
한 번의 해전으로 전쟁 전체의 승기를 가져온 경험을 가지게 됨으로써 이후 함대의 단기 결전에 집중
하는 함대결전사상에 푹 빠져 일본 해군의 다른 병폐도 이 때부터 시작됐으니 도고
헤이하치로가 기함 미카사에 탑승해 선두에서 일선 지휘를 맡은 것이 신화처럼 자리잡아,
연합함대 사령장관과 같은 최고 사령관도 기함에 탑승해 지휘를 맡아야 한다는 전통이 자리잡습니다.
국제신호기 Z(줄루) 깃발이 일본에서 승리를 기원하는 상징처럼 된 것도 이 해전의 영향인데, 해군은 물론
민간에서도 경쟁에 앞서 승리를 각오하는 의미로 사용하게 되었으며 2차대전 패전 후에도 스포츠 경기나
중요한 경쟁, 대학시험 등에서 Z기를 모토로 하는 부적이나 상품이 판매되는 등 승리의 상징처럼 쓰이게 됩니다.
일본 후쿠오카현 무나가타(宗像) 시에 있는 무나카타 타이샤(宗像大社) 에서는 쓰시마 해협에 있는
오키노시마(沖ノ島) 라는 작은 섬에 10일 간격으로 신관 한 명을 파견하는데 오키노시마가
일본서기에도 등장하는, 타고리히메(田心姬) 여신의 신체(御神体) 라고 하기 때문에 늘
이렇게 신관을 보내는데, 쓰시마 해전때 오키노시마에 파견된 신관이 해전을 실시간으로 목격했습니다.
무나카타 타이샤에서는 일본이 해전에서 승리한 것이 타고리히메 여신이 가호한 덕이라고 쓰시마해전이
일어난 5월 27일에 200명이 섬에 찾아가 작은 축제를 거행하는데.... 평상시에는 섬 자체가 신체이며
또한 천연기념물이기 때문에, 신관과 항만 관리자를 제외하고는 보통은 섬에 발을 디딜 수 없다고 합니다.
울릉도에서 자침한 블라디미르 모노마흐급 장갑 순양함인 드미트리 돈스코이함에 러시아군의 군자금
인 금화가 잔뜩 실려 있었다는 소문이 있으니, 2018년 7월 모 투자회사가 침몰한 돈스코이함
의 선체를 해저에서 발견했다며 대규모 투자 사기를 쳤는데.... 증거 자료나 화면은 모두
타이타닉 같은 영화의 장면을 교모히 짜집기한 것에 불과 했습니다. 나의홈 : cafe.daum.net/baik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