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C, 백강전투(白江戰鬪)
■13C, 여몽연합군, 2차에 걸쳐 가마쿠라 막부 칩입, 그리고 실패
■역사소설, 풍도(風濤,이노우에 야스시)
■7세기, 백강전투(白江戰鬪, 중국어: 白江口之战, 일본어: 白村江の戦い)
▪︎663년 8월에 신라의 백강(현재의 금강 하구 부근)에서 벌어진 <백제-왜>의 연합군과 <당-신라>의 연합군이 벌인 전투'다. 당·신라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중국의 통일왕조 당이 등장하여 동- 아시아의 세력 판도가 새롭게 바뀌며 일어났던 전쟁이며, 왜국의 참패로 인해 덴무 일본천황의 임신의 난을 다루고 있는 누카타 여왕의 왜국의 국방·정치 제제의 변혁이 일어난 원인이 되었다. 또한 백제 부흥운동이 실패, 신라의 삼국통일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백제 멸망과 왜의 백제 부흥군 지원, 백제 유민들의 왜국 망명이 있었다.
■풍도(風濤)
▪︎이노우에 야스시의 소설은 한국에도 많이 번역되어 있고, 그의 소설 가운데 한국의 역사를 소재로 한 유일한 작품이 풍도(風濤)이다. '검푸른 해협'이라는 제목으로도 번역된 이 소설은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을 소재로 하면서도 한반도의 고려를 무대로 고려인인 충렬왕과 김방경을 주인공으로 해서 일본 원정에 따른 고려 백성들의 고난과 투쟁기를 그리고 있다.
▪︎역사소설가 & 시인, 이노우에 야스시(井上靖)는 ‘원구(元寇)’ 혹은 ‘몽고 내습(蒙古來襲)’으로 불리던 일본 정벌을 고려의 입장에서 쓴 소설 <풍도(風濤)>를 1963년 발표했다. (최준우)
▪︎고려 원종 7년(1266년), 원 세조 쿠빌라이는 고려에 조서를 보낸다. 일본과 통교하고자 하니 그 안내역을 고려가 맡으라는 것이다. 고려로서는 난감하기 이를 데 없는 요구였다.
“이 일의 책임은 오로지 경이 알아서 지도록 하라. 풍도 험난을 이유로 삼지 말며,
일찍이 한 번도 통호(通好)한 적이 없다는 것을 구실로 삼아 변명하지 말라.”
여기에서 ‘경’은 원종을 지칭하는 것이고, 바람과 물결이 험하다고 핑계 대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은 것이다.
한국사에 대해서는 몽골의 압제에 놓인 고려의 두 차례에 걸친 일본 원정을 배경으로 한 「풍도」(風濤)가 유명하며, 집필 당시인 1963년 4월 취재를 위해 한국을 방문하여 강화도, 마산, 울산, 부산, 경주, 합천, 판문점 등지를 답사하였다. 출간된 「풍도」의 단행본을 취재 과정에서 도움을 받은 한국의 역사학자들에게 보냈는데, 그 가운데 한 명이었던 대표적인 식민사학자 이병도'는 「풍도」를 두고 "체계는 안 섰어도 사료 수집은 충분히 한 훌륭한 역사소설"이라고 평가하였다. 또한 1976년 6월에 이노우에 야스시는 다시 한 번 한국을 방문하였다.
▪︎일본에 보내는 첨부조서에는 ‘인사를 나누고 우호를 맺어 친목하기를 바란다’는 희망사항에 ‘군대를 움직이기에 이름을 그 어느 누가 즐겨할 것인 가’ 라는 협조강요가 덧붙어 있었다.
일본은 이에 순순히 응하지 않았고 마침내 김방경을 대장으로 한 여몽연 합군은 두 차례 일본원정에 나섰다. 그러나 때마침 닥친 태풍으로 병사의 8할 이상이 수장되어 원정은 실패로 끝난다. 인류역사상 최강제국의 칼날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일본은 이 태풍 을 신풍(神風, 가미카제)이라 불렀다.
▪︎지칠대로 지치고 무너질대로 무너진 고려의 명맥을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노재상 김방경이 89세로 죽고, 몽고의 공주와 결혼하고 변발등 몽고풍습을 자발적으로 행하면서 사직을 지켜내려 했던 충렬왕이 향년 일흔셋에 눈을 감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강대국 주변의 작은 나라가 겪는 서글픔과 조국을 지키려는 우국지사의 고뇌가 여운으로 오래 남았던 작품이었다.
▪︎이노우에 야스시가 《풍도》를 쓰면서, 또 저자 본인이 생전 “고려도 역시 몽골에 정벌당해 시키는대로 할 수 밖에 없었을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일본의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표했고, 한일 간 이해의 폭이 다소나마 넓어지게 했다는 후문이다.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해 일본 사람들이 한국에 갖고 있던 은근 한 묵은 감정을 어느 정도 해소해 주는 효과를 가져왔다.
▪︎본래는 몽골 제국 치하의 고려에, 미군정하의 일본의 현실을 빗대어 냉전시기 미국의 군사기지화된 일본의 상황을 비판하려 했던 작품이었음에도 한국에 번역되었을 때는 한국인의 민족감정을 자극해 인지도를 얻었고, 고려가 일본 원정을 달갑게 주도한 것도 결코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훗날에 벌어진, 임진왜란이나 일본 식민지배가 결코 정당화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