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Pdtjx6qun7k
본문은 드디어 예루살렘을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미 전에도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몇 번이나 방문하신 적이 있었습니다만 그때는 개인적인 방문이었지만 오늘 방문은 공식적인 방문이라는 것이 차이점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왕되심을 선포하는 방문이요 그래서 ‘방문’이라 하지 않고 보통 ‘입성’이라 표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왕의 입성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우선 5절의 말씀처럼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스가랴 9장 9절의 말씀의 성취입니다.
■슥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입성이라 부르는 또 한가지 이유는 9절의 말씀처럼 백성들이 예수님을 구원자요 왕된 분으로 찬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예수님의 입성에 대해 호산나 라고 하면서 환호성을 지르는 것은 과거 유대인의 역사 가운데 마카비라는 영웅적인 인물을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한때 헬라제국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이때 유다지파의 마카비라는 자가 무장봉기를 일으켜서 헬라군대를 다 쫓아내고 로마에 멸망하기 전까지 100년 동안 자치왕국을 이룬 적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이 본문으로부터 약 200년전의 일이었습니다. 그때 그 성공적인 혁명이 또 일어나는가 보다 하는 기대감과 소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현재 이스라엘은 로마와 헤롯의 이중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헬라의 지배를 받을 때보다 더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상황이었으니 그 갈망은 더욱 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 이방군대를 다 내쫓고 이스라엘의 자치왕국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하늘을 찌를 듯 했던 상황입니다. 예수님을 그야말로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메시야로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기대와는 어울리지 않게 주님이 타신 짐승은 나귀새끼였습니다. 2절에 보시면 예수님은 타고 갈 가축을 가지고 오라고 하시면서 나귀도 있는데 굳이 나귀새끼를 가지고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7절에는 제자들이 가지고 온 짐승이 나귀와 나귀새끼 둘로 나오지만 다른 성경에는 분명히 나귀새끼, 어린나귀를 탔다고 기록돼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는 주님의 의도가 담긴 행동이요 이런 행동을 통해 메시지를 던지기 위함이라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환호성을 지르고 호산나 외치던 백성들도 외치기는 외치지만 뭔가 이상하고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 함성과 열기와 맞추기 위해서라면 적어도 멋진 말을 타고 입성하셔야 하는데 나귀, 그것도 어린나귀를 타고 들어오시는데 예수님의 체격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지만 성인이시니까 참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19장의 부자청년 이야기부터 세배대 두 아들의 어머니 이야기를 거쳐 이미 시작된 주제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먼저된 자, 높아지려고 하는 자,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자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낮아진 자, 자기를 비우는 자,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자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퍼포먼스라 할 수 있습니다.
말을 아니라 나귀를 타신 것은 두 짐승이 상징하는 의미가 매우 비교되기 때문입니다. 말은 높아지는 자, 가지려는 자, 그래서 남의 것을 뺏고 심지어 죽이는데 쓰이는 동물이지만 나귀는 일만 하다 결국에는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는 의미가 담긴 동물입니다. 말은 생명을 뺏지만 나귀는 생명을 살리는 짐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적인 왕이 되기 위함이 아니라 겸손과 사랑과 평화와 섬김의 왕으로 오셨다는 것을 보이시는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제자들이 주님의 이러한 행위를 이해한 것은 나중에 성령이 임했을 때에야 비로소 가능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본문의 입성에 담긴 영성과 정신이 기독교 역사속에 변함없이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철학자 니체가 모두가 다 웃고 있지만 웃지 못하는 존재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마귀였다 라는 말을 남긴 적이 있습니다.
■요일 3:8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마귀가 두려워하는 것은 세상적인 힘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도 전쟁을 상징하는 말을 타기 보다는 섬김과 평화를 상징하는 나귀를 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야 합니다. 십자가의 사랑, 십자가의 정신으로 승리하시는 복된 날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사랑의 주님,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입성하실 때 겸손한 왕이심을 온 우주에 선포하시기 위해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셨음을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입성하신 주님이 지금 온 세상을 사랑과 은혜로 통치하시고 다스리시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초림 예수님은 겸손의 왕으로 오셨지만 재림예수님은 만왕의 왕으로 오실 것을 믿습니다. 재림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 오늘도 십자가의 사랑을 우리의 삶속에서 이루어드리는 믿음의 백성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루어주실 줄로 믿사옵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