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자주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18~19)
여기서 '원수'로 번역된 '엑트루스'(echthrus)의 원형 '엑트로스'(echthros)는 '적','대항자'라는 뜻으로 쓰인다.
'십자가'의 정신은 자아를 부정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며,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 탐욕의 정신으로 사는 자들과 자기식의 의(義)로 똘돌 뭉쳐져 그것을 내세우는 자들은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가 되어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 여러 가지 견해가 있는데 그것을 살펴본다.
먼저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왜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지 살펴본다.
그들은 자신의 율법적 의(義)라는 철옹성에 갇혀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을 통해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내려주시는 은총을 반대한다.
복음 그 자체이며, 복음의 내용에 대한 완전한 진술인 십자가의 메시지, 즉 죄인들이 하느님께 죄사함의 은총으로 용서를 받도록 하기 위해 메시야가 되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셔야만 했다는 사실이 바로 유대율법주의자에게는 꺼려지는 것이기 때문이다(1코린1,23).
그들에게 이러한 복음은 불쾌하고 어리석은 것이기에, 그들은 사도 바오로가 전하는 복음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짓누르려고 하는 것이다(사도17,5.13; 18,6;19,9).
'그들의 끝이 멸망'이라는 것은 율법을 통해 의롭게 되려 함으로써,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유일한 희망으로부터 스스로 소외시키기 때문에(갈라5,4) 그들의 끝은 멸망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의 하느님이 배'라는 것은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구별함으로써, 그들의 배(stomach) 를 신(神)으로 삼는다는 의미로 이해한다.
즉 그들은 먹는 문제 있어서 자유롭지 못하는 것이다. 무언가에 얽매어 있다면, 그 얽매는 것이 곧 하느님과 같은 신(神)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영광이 수치에 있다'는 것은, 곧 그들이 영광으로 생각하고 자부심을 느꼈던 할례를 행할 때 육체적으로 벌거벗는 상태가 되는데, 그것은 곧 수치를 드러내는 행동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 것만 생각한다'는 것은 그들의 신앙이 그리스도를 통해 폐기물이 되어 땅에 버려진 규정들과 의식들 위에 터를 잡고 있다는 뜻이다.
한편, '십자가의 원수'를 이교인들의 정욕적인 반도덕주의적 성향으로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그들이 왜 '십자가의 원수'인가?를 알아본다.
십자가의 정신은 자아 부정이며, 자아가 죽음으로써 하느님을 향해 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자아를 부정하지 않고 자신의 정욕대로 살아가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은 자유를 남용하여 정욕을 충족시키는 방종을 일삼는 소위 도덕 폐기론자들이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부르심의 이정표를 향해 끊임없이 정진해야 할 교회에 악영향을 주게된다.
이들은 육체는 본질적으로 악하며 아무 가치가 없기 때문에 육체의 거룩한 정결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사도 바오로는 당시 반도덕적 성향이 강한 초기 영지주의 사상이 희랍 세계에 퍼져 있었기 때문에, 희랍 문화의 강한 영향권 아래 있었던 필리피 교인들에게도 이들에 대한 경계의 권면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필리피서 3장 19절에 진술되어 있는 특징들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를 살펴 보아야 한다.
첫째로, '그들의 끝이 멸망'이라는 것은, 그들이 도덕 폐기론자들로서 이미 영혼이 구원을 받았다면, 육체적 행위는 관계가 없다는 잘못된 생각에서 거룩한 정결과 거리가 먼 삶을 살기 때문에, 그들은 필연적으로 멸망을 받게 된다는 것으로 이해한다.
즉 그들은 은총의 진리를 육체의 방종의 기회로 삼는 자들인 것이다(갈라5,13).
둘째로, '그들의 하느님이 배'라는 것은 그들의 무절제하고 통제받지 않는 욕구와 욕망들이 그들의 삶의 유일한 기쁨이요 희망이라는 뜻으로 이해한다.
셋째로, '그 영광이 자기네 수치'에 있다는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부도덕한 행위들을 자랑스러운듯이 내세우지만, 하느님 대전에 그것은 수치임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한다.
네번째로, 그들이 '이 세상 것만 생각한다'는 것은 그들이 세상에 있는 것들, 즉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과 탐욕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콜로3,5)이라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상과 같이 사도 바오로가 염두에 두고 있는 '십자가의 원수'는 율법주의자들로도 볼 수 있고, 또한 정욕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반도덕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영지주의자들로도 볼 수 있다.
이 두 견해가 나름대로 모두 설득력이 있지만, 필리서 3장 1~11절은 율법주의자들을 염두에 둔 반면에, 필리피서 3장 18절과 19절은 반도덕주의적인 영지주의자들을 염두에 둔 권고라고 보는 것이 보다 일반적인 견해이다.
앞서 율법주의자들에 대한 경계의 권고를 준 사도 바오로는 이제 필리피서 3장 18절과 19절에서 당시 희랍 세계에 널리 유포되어 있던 초기 영지주의 사상을 염두에 두고, 희랍 문화권 한 복판에 있던 필리피 교회를 향해 이것을 경계하라는 권고를 준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다.
<피앗사랑 rigel 글 참조> |
첫댓글 헬레나 김님 응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
감사합니다^^